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886화 (886/1,329)

10화. 제자리와 한발 앞 Ⅱ (1)

연거푸 전화가 걸려 왔다. 흐릿하게 처리하면 두고두고 귀찮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껄끄럽다고 무작정 거절하기보다 스카우트 제의와 더불어 깔끔하게 정리하는 편이 최선이었다.

“무슨 얘기를 꺼내든 확실하게 말하고, 정리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전화 계속 올 것 같다.”

신현수가 빈 의자를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불편한 관계다. 서로 입장 곤란하지 않으려면 단독보다는 함께 보는 편이 그나마 편할 것이다.

“할 말이 있으시면 우리 연구실로 올라오십시오. 말씀하신 것처럼 10분 정도밖에 시간을 낼 수 없습니다. 신현수 선생도 같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올라가겠습니다.)

신현수가 함께 있다는 말에 딴소리 한마디쯤 할 줄 알았는데 별다른 말이 없었다. 선입견이 너무 강한 탓인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진충기가 모습을 보였다.

반갑게 인사하며 안부까지 물을 관계가 아니었다. 진충기 역시 김지훈의 다소 냉랭하고 불편해하는 기색을 보고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진충기가 눈가를 굳혔다.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란 것을 잘 압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소송 중인 오창도 선생이 지원했다는데 사실입니까?”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결국 오창도 선생님 문제였어? 여기까지 온 걸 보니까 소송 때문에 많이 곤란해진 모양이네. 우리 병원에 근무하게 되면 불리해지나?’

헛다리 짚었나 보다.

이 정도로 뻔뻔할지 몰랐다.

대학 병원 일반외과를 이끄는 의사로서의 면모를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인간적인 면에서 더 이상 실망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만저만 실망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속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지원 문제는 김지훈이 관여할 일도 아니었다.

신현수가 갑갑한 얼굴로 대답했다.

“오창도 선생님 문제는 제가 대답하겠습니다. 맞습니다. 지원 의사를 밝히셨고, H 병원에서 추천서 내지는 근무 평가서를 발급해 주지 않아 지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군요.”

진충기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소송 당사자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은 알고 계시죠? 대개 그런 상황이면 일반 병원에서도 함부로 뽑지 않습니다. 하물며 대학 병원이고, 교수를 선발하는 일입니다. 이혁민 선생님도 지원해도 된다는 의사를 전하신 것 같은데, 이유가 따로 있으십니까?”

방해하러 온 것일까?

아니면 항의나 억지라도 부리러 온 것일까?

점점 기분이 나빠졌고, 신현수 역시 입을 열지 못했다. 솔직히 황당한 정도가 아니었다.

조용히 진충기를 보던 김지훈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유가 있다면 오랫동안 함께 근무한 선생님이나 H 병원이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야 당연히 추천서나 근무 평가서를 요청할 수밖에 없고요. 객관적으로 써 주시면 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한다고? 당연한 말인데 왜 이렇게 어색하지?’

진충기가 콧등을 찡그리며 눈가를 비볐다.

그동안 실적과 최고의 써전이라는 목표에만 관심을 두었다. 오창도의 능력과 품성을 객관적으로 본 적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다른 후배 의사들에게도 별반 다르지 않은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 전공의에게 시연 기회를 준 S 병원 의사들 면면까지 떠올랐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변할지 모른다는 기대를 한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더 이상 할 말 없으면 일어나 주시죠.”

자리 자체가 불쾌하다는 말이었다. 익히 알고 있는 진충기라면 단박에 자리를 박차야 했다. 그런데 나직한 숨을 길게 내쉬며 아직도 할 말이 남은 것처럼 김지훈을 응시했다.

어딘지 모르게 당혹스러운 눈길이었다.

진충기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죄송합니다. 한 가지 더 여쭤볼 수 있을까요? 간 전 절제술을 성공할 수 있었던 힘이 무엇입니까?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오창도에서 시연으로 널뛰기?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었다.

스스로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일 수도 있고, 반대로 수긍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특별한 이유를 찾았기에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자신감, 자부심이 넘쳤던 사람일수록 물어보기 힘든 내용이었다.

한도 끝도 없이 시간을 써 가며 이유를 대야 설명할 수 있는 문제였지만 이미 시연 행사를 통해 보여 주었다. 그 속에서 무엇을 찾을지는 온전히 개인의 몫이었다. 화제가 바뀌었다고 불편함이 사라질 리도 없었다.

진충기의 눈빛이 변해 있었다. 물러날 태세가 아니었다.

김지훈이 입술에 침을 발랐다.

‘이 인간이 왜 이러지?’

“짧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개인적으로 운이 많이 따랐다는 점도 인정합니다만, 시연 때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이 성공의 열쇠였다고 생각합니다.”

“허경발 선생님의 말씀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핵심이고, 평생 잊지 말아야 할 말씀입니다. 그 말씀에 숨은 뜻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겁니다.”

진충기가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환자와 동료와 자신을 위하라고 하셨나?’

“죄송하지만 최인호 선생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건 또 뭐야? 언질도 없이 나한테만 말한 거야? 그렇다고 해도 내게 물어볼 이유가 없잖아?’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

어쨌든 부센터장 자리까지 나왔다.

속사정이 무엇이든 스승과 제자로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솔직하게 말하기에 난처한 일이었지만, 한편으로 확실하게 의사를 전할 기회였다.

“작년에 하셨던 말씀을 반복하셨고, 거절했습니다. 혹시 또 말이 나오면 선생님께서 제 뜻을 확실하게 전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추호도 옮길 생각이 없습니다.”

“전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가 정말 원하는 조건은 없더군요.”

‘결국 내 자리까지 주신다고 제안하셨네. 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이겠지. 그런 조건을 받고도 정말 원하는 조건이 없다고? 난 거절할 수 있을까?’

“정말 원하시는 조건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내친김이었다.

“우리는 허경발 선생님을 큰 스승님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큰 스승님의 말씀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그 속에 제가 원하는 조건이 있습니다.”

진충기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시연 막판에 갑자기 찾아온 뒤엉킴이 이젠 번민이 되고 있었다. 일반외과 전문의가 된 시점, 아니 의사가 된 시점부터 가져온 목표마저 흔들리고 있었다.

허경발 교수의 한마디 말?

이준영 교수가 제자들에게 보인 신뢰?

김지훈의 경이적인 실력과 믿을 수 없는 성공?

S 병원이 보여 준 비교하기 힘든 힘?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최인호 교수의 제안?

아니면 자신의 지난 세월과 행동 때문일까?

머릿속이 뒤죽박죽이 된 진충기의 눈빛이 흐릿해졌다.

‘최고의 써전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김지훈을 앞서야 한다. 내가 놓친 것이 무엇일까? 김지훈과 S 병원의 힘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수단, 방법, 과정 중 어느 하나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었다. 어쩌면 모든 것이 틀렸을 수도 있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목표였다.

어지러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으려면 꽉 잡고 있어야 한다. 이내 매서운 눈매를 찾은 진충기가 얼굴을 굳히며 일어났다.

“시간 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신현수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추천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잠시 멈칫거렸지만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다.

김지훈과 신현수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진충기의 태도가 이상했지만 돌이켜 보면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에 불과했다. 왜 왔는지, 질문의 요지가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분명한 점은 딱 하나였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진충기와는 뭔가 다른 것 같다.’

동시에 스친 생각이었다.

김지훈이 중얼거렸다.

“미친 척하고 대리 수술 여부도 물어볼 걸 그랬나?”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니지. 두고 보자.”

신현수의 눈빛이 도리어 매서워졌다.

제자리에 있을지, 한발 앞으로 나올지 두고 볼 일이었다. 인생이 걸린 일이라면 올바른 선택을 할 것이다.

퇴근 시간 다 됐다.

잠깐 병동에 들러 특별한 일이 없는지 확인하고, 원주로 출발해야 할 시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별일이네.”

무덤덤한 말을 던진 김지훈이 일과를 끝냈다.

“경아 씨, 지금 출발해요.”

(조심해서 와요. 가져와야 할 짐 잘 챙겼죠?)

“그럼요. 기다리고 있어요.”

응애! 응애!

가냘픈 울음소리가 들렸다.

뭘 해 달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왠지 순하게 들려 엄마 고생 덜 시킬 것 같았다.

진충기가 멀리 사라지며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렸다.

룰루랄라!

원주로 가는 길이 즐겁기만 했다. 휴가로 꽉 막힌 고속도로를 보기 전까지 말이다.

딸과 고경아가 기다리는데 울고 싶다.

고생 끝에 처갓집에 들어서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멍하니 딸을 바라보며 ‘우리 아이가 변했어요.’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이제 갓 열흘 됐을 뿐이었다.

빨간 얼굴에 쭈글쭈글 주름져 엄마, 아빠 눈에만 예뻐 보였던 딸이 완벽한 공주로 변신했다. 포동포동 살이 오른 뽀얀 뺨과 까만 눈망울, 오뚝 솟은 코는 가히 신생아 사이에서 전설이 될 만했다.

절대 아빠 눈이 아니다.

‘역시 내 딸이야.’

엄마 많이 닮았다는 불길한 생각이 스쳤지만 아직 확언하기 일렀다. 열심히 닮은 구석이 없는지 구석구석 뜯어보았다. 왠지 점점 더 불안해졌다.

“희연아, 아빠 닮아야 예뻐진다. 아빠 닮아야 한다, 아빠.”

딸의 귀에 대고 수없이 주문을 걸었다.

응애! 응애!

알았다고 대답까지 하는 딸이다.

주말 내내 평온했다.

딸 옆에서 히죽히죽, 미역국 먹는 고경아 옆에서 물끄러미, 밥 차려 주는 장모님 앞에서 허둥지둥, 혼자 있을 때면 뒹굴뒹굴 거의 할 일이 없었다.

분유 탈 때, 기저귀 갈 때, 조심조심 목욕시킬 때 기웃기웃 곁눈질을 하며 열심히 배웠다. 함부로 안지도 못하게 했지만, 조그만 주먹을 꼭 쥔 채 새근새근 자는 딸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물론 아빠 입장일 뿐이었다.

엄마는 피곤을 피하지 못했다.

먹고, 자고, 싸고, 울고를 반복하는 딸!

시도 때도 없이 손이 필요한 딸을 보며 고경아와 장모님에게 미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한밤중에도 수시로 깨야 했다.

하루 종일 놀고먹은 사람도 눈을 뜨기 힘든데, 고경아가 얼마나 힘들지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몸조리가 될까?’

조곤조곤 말한다고 알아들을 딸이 아니다.

배고프다고, 똥 쌌다고 울 때는 그나마 도와줄 수 있지만, 울음을 그치지 않을 때는 아빠의 영역이 아니었다. 잠들 때까지 품에 안고 달래는 고경아가 안쓰러웠다. 엄마 힘든지 모르는 딸이 밉기도 했다.

“잠투정이 심한 건가?”

“6개월 지나면 바뀐대요.”

“정말 바뀔까요?”

어느새 월요일 새벽이 다가왔다.

저녁 일찍 자리에 누웠는데 당직 선 것처럼 머리가 멍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딸의 울음소리에 꽤 여러 번 눈뜬 결과였다.

‘우리 딸, 엄마 고생시키지 말자.’

혼자 가려니 아쉽고, 고경아 혼자 딸을 봐야 한다는 사실이 미안하기만 했다.

초보 아빠의 곤란함을 안고 서울로 향했다.

살짝 부은 고경아의 얼굴과 포동포동한 딸의 얼굴이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힘들고 피곤해도 모든 생각과 감정의 종착점은 결국 사랑이자 기쁨이자 행복이었다.

***

8월 마지막 꽁지 잘린 주다.

시연 때문에 뒤늦게 가게 된 휴가 일정을 짜느라 모두들 눈을 부릅떴다. 3년 차 치프를 뽑아야 하지만 역시 휴가 일정에 미룰 수밖에 없었다.

4년 차들이 곧 손을 놓아 9월 한 달 동안은 일이 확확 늘 것이다. 휴가 다녀온 후가 걱정되지만 해마다 겪는 일이고,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지훈아, 넌 언제 갈 거야?”

“나? 맨 마지막에 갈게. 3주 후면 와이프 출산휴가 끝나는데 도와줘야지. 휴가 연장할 방법 없나?”

막바지 더위 크게 먹을 판이었지만 김지훈에겐 도리어 가장 적절한 시기였다. 어차피 일복 터진 지 오랜데 큰 영향은 없을 것이라 여겼다.

오판이었다.

8월 말일부로 4년 차들이 손을 놓았다.

불과 하루도 안 돼 손 부족이 단박에 피부로 와닿았다. 여유를 잃은 전공의들의 발이 보이질 않았다. 곧 다가올 휴가를 기대하며 불평 없이 땀을 뻘뻘 흘렸다.

“고생한다. 예전보다 인원이 줄긴 했어도 우리도 다 겪은 일이니까 너무 힘들어하지 말자.”

‘휴가에, 4년 차들까지 손을 놓으니까 환자가 비슷해도 상당히 힘드네. 진우하고 병옥이가 스케줄 잘 조절해 줘야 하는데. 그나저나 누굴 치프로 추천하지?’

환자가 조금씩 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환자가 전보다 많아졌다는 사실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휴가 전과 똑같이 일해도 어차피 힘들 수밖에 없는 시기였다.

첫 주는 예상대로 굴러갔다.

입에서 단내 팍팍 풍겼다. 휴가 기간인 한 달만 견디면 그래도 나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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