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제자리와 한발 앞 Ⅰ (2)
동기 놀려 먹는 재미 무척 쏠쏠하다.
어차피 결론은 났지만 이미 병원 경영에 발을 담근 것 같은 신현수의 반응이 궁금하기도 했다.
아무렇지도 않게 툭 한마디 던졌다.
물론 거만한 표정과 몸짓도 잊지 않았다.
“올해도 어김없이 스카우트가 들어오네. 일석이 말대로 이놈의 인기는 식을 줄 몰라요. 조건이 너무 좋아서 은근히 마음이 쏠리네.”
예상대로 이경석이 살짝 놀랐다.
“누구한테 온 거야?”
“비밀입니다.”
“자식! 간 절제 성공이 불을 붙인 모양이구나. 에휴! 나한테는 그 흔한 전화 한 통 안 오네. 후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한숨 소리가 깊었다.
‘괜히 장난쳤나?’
슬그머니 신현수의 눈치를 살폈다. 눈동자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최인호 교수님이지? 최고를 추구하는 H 병원 입장에서 보면 발등의 불일 수 있지만 무리한 시도야.”
“조건도 모르면서 무리하긴 뭐가 무리해?”
“H 병원 맞네. 비밀 참 오래간다.”
아차 싶었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소 표정은 변해야 한다.
“막말로 진충기 밀어내고 내가 그 자리 차지하면 되는 거 아냐? 야! 복강경 센터! 생각만 해도 그럴듯해.”
피식 어이없다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김지훈이? 어떤 강적한테도 밀려나지 않지만, 이득 보려고 남을 밀어내는 건 죽어도 못할 거다. 어차피 계약한 게 있어서 당장 가지도 못하는데, 조건이 아무리 좋으면 뭐 해? 계약 기간 끝날 때까지 꼼짝할 생각도 하지 마. 아니다. 넌 평생 내 얼굴 보고 살아야 돼.”
칭찬인 듯, 구속인 듯, 속마음인 듯.
기분 좋은 말이지만 애초의 의도와는 다르게 흘렀다. 냉정하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신현수에게 반박해야 했다.
‘자식이 언제 이렇게 말을 잘했지? 이건 아니야. 당황하는 모습이라도 봐야 해.’
머리를 쥐어짜며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노예 계약도 아니고, 가려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거 아니야? 위약금이 얼만데?”
“노예 계약? 너 간 절제 끝나고 애들 앞에서 대놓고 스승님이라고 했다며? 동기, 후배 다 버리고 자기 혼자 잘 먹고 잘살고 싶다는 제자를 보면 이준영 선생님이 퍽이나 좋아하시겠다. 큰 스승님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순간 맥이 탁 풀렸다.
약점 제대로 찔렸다.
그때 이경석이 의외의 응원을 보냈다.
“솔직히 잘 먹고 잘살려고 의사 하는 건데 나쁠 것도 없지. 지훈아, 혹시 너하고 같이 가면 나도 대우 좀 받지 않을까? 애들이 크니까 먹여 살리기도 힘들다.”
“당연히…….”
“송재덕 선생님하고 박승준 선생님도 만나 봐야겠네. 경석이 형, 기쁜 마음으로 박수 쳐 주시겠죠?”
책상 한 번 탁 치고, 코웃음 제대로 날린 신현수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문을 열었다.
“갑자기 어디 가?”
“외래. 퇴근하시기 전에 말씀드려야지.”
너무 진지한 표정이었다.
학교 다닐 때부터 지금까지 무려 14년을 봤는데, 이럴 때는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말로 끝나지 않았다. 정말 외래로 향하고 있었다.
“현수야, 왜 이래? 농담이야, 농담.”
도리어 당황한 김지훈이 소리치자 이경석이 씨익 웃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까지 내쉬었다.
“딸까지 낳은 놈이 참 어리숙하네. 재주도 없으면서 먼저 왜 던져? 고난이도 농담은 세련된 기술이 있어야 통하는 법이야. 자신 없으면 나처럼 애초에 꺼내질 마.”
‘애초에?’
“형, 그게 무슨 말이에요? 형도 연락받았어요?”
“이 자식이 손바닥 마주쳐 줬더니 나를 아주 졸로 보네. 나도 무지하게 좋은 조건을 받았어요. 누구하고는 다르게 의리, 의리 때문에 확실하게 거절했지.”
이경석이 홱 째려보며 일어났다.
외래로 향하는 신현수와 돌아서는 이경석이 뿌듯한 가슴을 감추지 못했다. 귓가를 아른거리는 한마디 말이 떠나질 않았다.
‘있어야 할 병원, 정말 있고 싶은 병원이라고?’
멍한 표정을 짓던 김지훈의 입가에도 즐거운 미소가 감돌았다. 어떤 경우든 동기 모두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은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우리 정말 잘하고 있구나.’
진정으로 가슴 뿌듯한 순간이었다.
일이 있어 병동에 올라갔다 이준영 교수와 송재덕 교수를 만났다. 크게 동네 아저씨 웃음을 터트리며 유난히 반갑게 다가왔다.
“지훈아, 교수야, 스카우트 제의 받았다며? 조건이 좋아서 갈 수도 있다고? 그래. 세상은 말이야, 유리한 대로 사는 거야. 유리한 대로.”
헉! 진짜 말했다.
“원장님, 그게 아니라…….”
“그래. 내가 원장이지, 원장. 딸도 낳았는데 돈이 많이 필요할 거야. 가야지. 갈 놈은 가야지. 그럼 대장은 누가 하나. 누가? 어이구! 허리야. 삭신은 쑤시는데 웃을 일이 없어요, 웃을 일이. 지훈아, 교수야, 즐거운 일 없니? 정말 없니? 이 교수, 가자. 우리는 우리 갈 길을 가자.”
이준영 교수가 쓰윽 눈길을 주었다.
농담일 뿐이었는데, 신현수가 어떻게 말했을지 빤히 짐작이 가는데 식은땀이 쭉 흘렀다.
“어디서든 열심히 하면 된다.”
으윽!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오만상을 지으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김지훈을 뒤로한 송재덕 교수가 입을 삐죽였다.
“이 교수, 지훈이 저놈은 이 교수만 있으면 애가 돼. 애가. 비법이 뭐야? 나도 경석이 애 좀 만들어 보자. 요새 틈만 나면 덤벼. 틈만.”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웃음만 보일 뿐이었다.
있어야 할 병원, 정말 있고 싶은 병원.
교수들의 가슴까지 파고든 말이었다.
***
고경아와 딸을 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특별한 일이 있어 더욱 보고 싶었다.
이준민이 퇴원하는 날이다.
수술한 지 나흘 만에 방귀를 뀌어 코 줄을 뺐다. 다음 날 먹은 것도 없는데 황금색 변을 보았다.
신중하게 물부터 시작해 분유 농도를 올려 가며 상태를 지켜보았다.
6주 된 작은 아이의 볼에 혈색이 진해졌다.
울음소리는 점점 우렁차게 변했다.
마침내 하루에도 몇 번씩 황금색 변을 보았고, 다른 아이들처럼 정상적인 수유까지 가능해졌다.
그렇게 마지막 이틀 동안 퇴원해도 좋다는 신호를 지속적으로 받았다.
“어머니,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선생님, 너무 고맙습니다. 우리 준민이 잘 키울게요.”
“말씀드린 것처럼 수술로 인한 합병증 말고는 걱정하실 일이 없습니다. 그래도 소아과에서 정기적으로 검진받아야 합니다.”
응애! 응애!
헤어지기 싫다는 것처럼 준민이가 울어 댔다.
착각이다.
똥 쌌다고, 엉덩이 기분 나쁘다는 울음이었다.
기저귀를 푸는 순간 누군가는 참기 힘들지만 엄마에게는 향기로울지도 모르는 냄새에 서둘러 병실을 나왔다.
엄마의 웃음소리가 따라붙었다.
엄마나 김지훈이나 이준민이 건강해져 집으로 갈 수 있는 덕에 부릴 수 있는 여유였다.
‘자식! 냄새 한번 끝내주네. 우리 딸 냄새도 그럴까?’
딸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곰곰이 챙겨야 할 것들을 헤아리며 미소를 머금던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웬 전화가 이렇게 와.’
휴대폰을 확인하다 말고 입맛을 다셨다. 눈가까지 잔뜩 찌푸렸다.
최인호 교수보다 더 갑갑한 진충기였다.
통화가 끝난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좋은 관계라면 이해라도 하겠지만 짜증부터 솟구쳤다. 얼굴에 철판을 깔지 않고서는 전화할 상황이 아니었다.
받아 봐야 기분만 망칠 것이다.
‘대단한 사람들이네. 헛소문 퍼트린 거야 그렇다고 쳐도, 자기 동료였던 오창도 선생님은 아예 안중에도 없나?’
진동이 너무 거슬렸다. 고경아에게 전화가 올지 몰라 끌 수는 없었다. 벨 소리로 바꾸고 최대한 음량을 낮춰 아예 무음으로 처리했다.
신경이 가긴 했지만 조용한 게 참 좋았다.
다시금 찾아온 고요에 몸을 맡기고, 고경아와 딸 생각에 집중했다.
마음이 편안해지며 서서히 평화가 찾아왔다. 받고 싶지 않은 전화도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능력을 인정한다는 말이니까 기분 나쁘게만 받아들일 이유가 없지. 진충기랑 붙으면 코를 납작하게 만들 자신도 있는데, 신경 쓸 일이 아니네.’
오늘도 잠시도 편히 쉴 날이 아닌 모양이었다.
덜컥!
“지훈아.”
신현수가 힘차게 문을 열며 옆에 털썩 앉았다. 강하게 전해지는 진동에 눈이 쫙 찢어졌다.
“무슨 일인데? 이준영 선생님이 무슨 말씀이라도 하셨어? 송재덕 선생님은?”
“너 의외로 뒤끝 있다. 자식! 다른 일 때문이니까 불안해하지 마. 오창도 선생님한테 전화 왔어.”
드디어 정식 지원을 한 걸까?
김지훈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그래? 뭐라고 하셔?”
“시간을 달라고 하네. 자세하게 말은 안 하는데, 근무 평가서를 받는 데 시간이 필요한가 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누구야? 설마 주임교수가 대놓고 그럴 수는 없을 테고. 진충기야? 소송 문제도 책임이 더 큰데 참 속 좁다.”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다른 통로로 알아봤는데 오창도 선생님 평판이 상당히 좋더라. 실력 부분에 있어서도 인정하는 분위기였어.”
“환자하고 오셨을 때부터 딱 그렇게 보였잖아. 누가 순순히 의료 과실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려고 하겠어? 아무리 책임감이 강해도 어려운 일이다.”
“맞는 말이야. 소송 문제 잘 해결하고 함께 일했으면 진충기에게 유리한 점이 많았을 텐데, H 병원도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헛발질을 하는 것 같아.”
씁쓸한 일이었다.
함께 근무한 동료도 돌아서면 남으로 취급하는 최인호 교수와 진충기의 인간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것 같아 기분까지 나빠졌다.
“대리 수술 건은 알아낸 거 없어?”
“H 병원 관계자 반응으로 봐선 분명히 있긴 있는데 쉽게 말할 일이 아니잖아. 일반외과 의사 아니면 확실하게 알 위치도 아니고. 어쨌든 눈치 못 채게 여기저기 조심스럽게 알아보고 있으니까 결과가 나오겠지.”
“사필귀정! 언젠가는 뿌린 만큼 돌려받을 거야.”
신현수가 답답한 한숨을 내뱉었다.
“의사 윤리가 꼭 환자에게만 적용되는 문제가 아닐 텐데 왜 그럴까? 대리 수술 자체가 동료는 안중에도 없다는 말이잖아. 서로 존중하고 대우하는 일 역시 직업윤리라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끄덕이던 김지훈이 힐끗 신현수를 보았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신현수 역시 김지훈을 보고 있었다.
‘다른 통로로 알아봤다고 했지? 자식이 학회에, 다른 병원에, 훈철이 형하고도 친하고 완전히 마당발이네. 일석이가 아니라 네가 진정한 하오문주다. 생각까지 정말 깊어지고 다재다능한 놈이야.’
‘학교 다닐 때, 인턴 때, 전공의 때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다 화끈거려. 지훈이 네 덕에 나도 많이 변할 수 있었어. 그 점만은 인정한다. 고맙다.’
같은 듯 다른 눈빛을 보내던 김지훈이 힐끗 시계를 보며 기지개를 폈다. 회진도 이미 다 돌았는데 퇴근 시간까지 아직 30분이나 남았다.
원주 갈 생각에 급해서 그런지 초침마저 느릿느릿하게 보였다. 고경아도 언제 도착할지 궁금할 것이다. 전화 한 통 미리 해 주는 것이 예의였다.
휴대폰을 꺼냈다. 흠칫 놀라고 말았다. 부재중 전화가 4통이나 왔다.
모두 동일 인물이 걸어왔다.
진충기였다.
최인호 교수와의 통화만이 아니라 오창도 문제로 기분까지 잡칠 지경인 탓에 짜증이 확 솟구쳤다.
‘한두 번 안 받으면 하질 말아야지. 눈치도 없나?’
투덜투덜 전화기 볼륨을 키우며 고경아에게 전화를 하려던 순간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다섯 번째 전화였다.
짜증을 넘어 화가 치밀었다.
“에이! 근무 평가서나 제대로 써 주든지.”
받을 때까지 전화할 태세였다. 아내와 딸을 보는 즐거운 날을 전화 하나로 망칠 수는 없었다. 버럭 소리라도 지를 생각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목소리를 높이던 김지훈이 살짝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말았다. 약간은 오만해 다른 사람을 깔보는 것 같은 진충기의 평소 목소리가 아니었다.
(김지훈 선생님, 쉬어야 할 시간에 전화해서 죄송합니다. 혹시 잠깐 만나서 얘기할 수 있을까요?)
힘이 빠진 것 같았고, 말투까지 변했지만 사람 인상 쉽게 바뀌지 않는다. 찜찜함이 가득한데 얼굴까지 보며 말할 일은 더더욱 없었다.
“최인호 선생님과 같은 말씀을 하시는 거라면 거절하겠습니다.”
(최인호 선생님과 통화하셨습니까?)
답답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전화한 줄 모르고 있었나?’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통화를 하셨는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병원 앞입니다. 10분 정도만 시간을 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통화한 사실조차 모른다니 의아한 일이었다.
하긴 주임교수가 교수 선발이나 스카우트를 두고 그때그때 아래 교수와 상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직 일과가 끝날 시간이 아니었다. H 병원과의 관계와 물리적 거리까지 생각하면 작정하고 왔다는 말이었다. 왠지 간절함까지 느껴졌다.
최고의 써전이 목표라며 자신만만했던 진충기였는데 무슨 일인지 모를 일이었다. 시연 때 받은 자극 때문이라면 전화가 아니라 이를 악물고 있어야 하는 것이 맞았다.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느낌이 이상하네. 정말 얼굴 보고 싶지 않지만 만나 봐야 하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휴대폰을 막고 신현수를 보았다.
“현수야, 진충기가 왔어. 할 말이 있대. 만나 볼까?”
“진충기? 이 시간에 찾아왔으면 일반적인 일은 아닐 텐데, 혹시 오창도 선생님 때문인 것 같진 않아?”
“그것까진 모르겠어. 큰 고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목소리에 힘도 없고, 특유의 자신만만함도 사라진 것 같아. 뭔가 느낌이 이상해.”
재빨리 통화 내용과 느낌을 말하자 신현수도 고민스러운 눈치였다.
진충기는 마주하는 것조차 부담스럽고, 꺼릴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