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884화 (884/1,329)

9화. 제자리와 한발 앞 Ⅰ (1)

김지훈이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물었다.

“아버님, 혹시 딸이 아니라 아들로 알려 주신 거 아닙니까? 아니면 엉뚱한 작명가에게…….”

“이 사람이! 손주가 딸인지 아들인지도 모르고 전화했다는 거야? 똑똑히 정확하게 알려 줬어.”

“그럼 작명가라는 분이 유명하다는 건 맞나요?”

“이름 하나 짓는 데 기십만 원이야. 돌팔이 같으면 어디서 그런 돈을 주겠어?”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빠, 엄마가 입도 못 열자 고경순이 나섰다.

“아빠, 학교는 고사하고 유치원 갔을 때 애들이 놀릴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봤어요? 아무리 뜻이 좋아도 그렇지, 애가 받을 상처가 얼마나 클지 모르고 그걸 넙죽 받아요? 요새 애들이 얼마나 민감한데. 평생 원망 듣고 싶으세요?”

‘처형! 파이팅! 조금만 더!’

“남자 이름 같긴 해도 이렇게 이름을 지어야 건강하고, 나중에 크게 된다는데 어떻게 안 받아.”

장인어른의 마음이 이해될 것 같긴!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경목아! 아빠다! 까꿍!’

상상만 해도 어색하다 못해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장인어른이 아무리 신경 써 지어 온 이름이라고 해도 온몸으로 거부해야 했다. 일반외과 대선배라는 사실은 하등 고려할 이유가 없었다.

고성문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넌지시 물어 왔다. 한마디라도 괜찮으니 좋은 소리 해 달라는 눈빛이었다.

“김 서방, 자네는 어때? 처음에는 어색한 것 같아도 시간 지나면 입에 딱 붙을 거야.”

왜 고집을 부릴까?

설마 이미 지불한 이름값이 아까운 걸까?

그럴 리 없었다.

딴청을 부릴 정도로 무안함과 미안함 때문일 것이다. 혹시 의외의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는 헛된 기대 때문일 수도 있었다.

김지훈이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님, 경목이는 아닙니다. 이 이름은 생각할 이유도 없습니다. 다시 지어 주시든지, 아니면 경아 씨하고 상의해서 우리가 짓겠습니다.”

헛기침 소리만 들렸다.

최문옥 여사는 더 단호했다.

“김 서방, 자네가 경아하고 상의해서 지어. 작명가한테 다시 지어 봐야 좋은 이름 나오겠어? 부르기 쉽고, 듣기 좋으면 그게 좋은 이름이야. 경아야, 생각해 놓은 이름 있다고 하지 않았어?”

“엄마, 우리는 희연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희연이? 김희연?”

평범한 이름이나 개성 있는 이름이나 차이는 없다. 어른들이 사주팔자 무시 못하고, 자식의 장래가 무지갯빛이길 바라는 부모 마음을 고려하면 한자 정도는 작명소에서 지어도 좋을 것이다.

경목이라는 이름이 준 충격 때문인지 다들 희연이라는 이름이 너무 좋다며 웃었다. 고성문도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어떤 한자가 좋은지 알아볼까?”

찌릿찌릿!

최문옥 여사가 눈가에 힘을 주었다.

“다음 주에 내가 여러 곳 들러 볼 거니까 당신은 절대 나서지 말아요. 손녀한테 경목이라는 이름 받아 온 사람을 어떻게 믿고 맡겨요?”

꿀 먹은 벙어리다.

김지훈과 고경아가 최문옥 여사를 향해 강한 응원의 마음을 날렸다. 식구들 역시 고성문의 역할은 이미 끝났다는 눈빛을 보냈다.

가히 사면초가다.

“알았어. 그렇게 해.”

고성문도 결국 꼬리를 말고 말았다.

김지훈이 긴 숨을 내쉬었다.

작명가의 앞뒤 안 가린 사주팔자와 고성문의 당황스러운 믿음 탓에 벌어진 해프닝이다.

하지만 혈혈단신, 고경아도 마찬가지 처지였다면 절대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감사한 일임에는 틀림없었다.

‘아버님, 어머님, 감사합니다.’

하늘에 있는 부모와 눈앞에 있는 부모는 다르지 않았다. 돈 주고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받은 것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타박하는 것도 가족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장인, 장모의 자식 사랑, 가족이 보내는 사랑이 유난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점수 딸 기회기도 했다.

“아버님, 이름이야 어쨌든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희연이도 아버님 많이 따를 겁니다.”

은근슬쩍 희연이로 못을 박았다.

“험험! 내가 신경을 쓰긴 했지.”

의기소침했던 고성문이 이제야 웃었다.

태어난 지 이틀 만에 돈 주고 받은 이름이 김경목이라니, 아빠 엄마 입장에서 황당한 일이긴 했다.

말괄량이라고 해서 나쁠 일은 없지만 혹시 지나칠 수 있다는 징조일까?

어쨌든 여러 위기 잘 넘겼다.

한마디 할 줄 알았던 손일석이 구석에 앉아 열심히 인사만 하고 있었다. 어제 이경석과 제대로 달린 모양이었다. 고경희의 사나운 눈빛을 어찌 감당할지 모를 일이었다.

‘네가 떨어져 산다고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하긴 언제 이렇게 마시겠냐. 솔직히 부럽다.’

병원에 있는 김에 슬며시 회진을 돌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송진우가 달려왔다.

찰랑이는 단발머리와 함께.

간 절제 환자와 준민이를 꼼꼼히 살폈다.

기대 이상으로 순조로운 회복을 보였다. 어린아이의 생명력 덕분이자 복강경 수술이 가진 이점 때문일 것이다. 어렵고 힘든 수술을 한 덕인지 보람도 두 배로 다가왔다.

“어머! 너무 예뻐요.”

이 대사는 준민이가 아니라 딸을 향한 말이다.

“흠흠! 그렇긴 하지? 이름이 희연이야.”

“어머! 이름도 너무 예뻐요.”

아부성 발언인지, 송진우의 얼굴이 왜 벌개졌는지 몰라도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리고, 어깨는 쩍쩍 벌어졌다.

아빠란, 부모란 다 그럴 것이다.

느지막한 오후, 가족 모두 자신의 둥지로 향했다. 장인, 장모는 김지훈과 고경아의 둥지로, 손일석은 파르라니 빛나는 손톱에 비명을 지르며.

그렇게 시연이 있었던 주 마지막 날이 지났다.

***

새로운 한 주다.

시연이 준 흥분과 감격을 뒤로하고 일상에 집중할 때였다. 아침부터 바삐 움직여 아내와 딸을 원주로 보냈다.

주말을 기약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속이 허해져 점심시간 내내 한숨만 내쉬었다.

시연 때문에 밀린 수술이 아니었다면 일과가 끝날 때까지 맥을 못 추었을 것이다. 오후 회진 때 준민이를 보자 딸 생각이 간절할 정도였다.

처음 하루 이틀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구애받지 않고 아무 때나 집에 들어가도 된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

은근슬쩍 이런 생활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친구만 있으면 마음 편하게 마실 수 있다는 기대까지 생겼다.

‘의외로 편한 구석도 있네.’

해방된 유부남의 마음이 이럴까?

오판이었다.

신혼도 아닌데 불과 삼사 일 만에 고경아의 빈자리가 크게 다가왔다. 곁에 있을 때는 혼자 잘도 끼니를 때웠건만 식사를 해결하는 것도 문제였다.

‘후우! 저녁마다 후배들과 밥 먹기도 그렇고, 현수나 경석이 형을 붙들 수도 없고 죽겠네. 집은 또 왜 이렇게 썰렁해?’

매일 저녁 통화하며 서로의 일상과 안부를 전했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딸의 울음소리에 보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강해졌다.

밤마다 할 일이 없어 당직이 반가울 지경이었다. 고경아의 눈빛 없이 자진해 청소까지 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주말이 빨리 오기만을 바랐다. 이럴 땐 일에 집중하는 것이 최고라는 말이 새삼스러웠다.

어느새 한 주가 다 지났다.

주말 집담회를 뜨겁게 보냈다.

땀이 식기도 전에 이제 근무가 일주일도 안 남은 4년 차 치프들과 어떤 자리를 가질지 상의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혁원, 나종진.

지난 3년 반 동안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남은 시간을 충실히 보내면 전문의 합격 보장은 물론 일반외과 의사로서 자부심을 가져도 좋았다.

“천안, 구미 4년 차들까지 모두 서울에 모여서 시험 준비하니까, 다들 올라오면 식사 자리 마련하자.”

매년 있는 일이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아쉬움은 항상 그대로였다. 전문의 시험 후 군대 3년이란 기간이 기다리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혁원이도 곧 전문의가 되네.’

선배와 후배, 스승인 이준영 교수의 제자이며, 서로 가르치고 배운 사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교수로서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다.

이혁원도 비슷한 마음인지 힐끗 시선을 주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남다른 감회가 다가왔다.

“남은 시간 방심하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 이혁원, 나종진, 정말 고맙다.”

“감사합니다.”

이혁원과 나종진이 꾸벅 인사를 하고 연구실을 나갔다. 매일 숱하게 본 모습인데 오늘따라 남다르게 다가왔다.

그간 당연하게 여겼던 일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매일 매 순간이 특별했는지도 몰랐다.

‘아침마다 얼굴 보며 인사할 날도 며칠 안 남았네.’

나직한 한숨을 내쉬던 김지훈이 급히 주머니를 뒤졌다.

드르르르! 드르르르!

휴대폰이 떨고 있었다.

화면에 뜬 이름을 확인한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최인호 교수였다.

생각지도 못한 전화였지만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순간 나가서 받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모든 일을 상의할 수 있는 동기들 앞인데 그럴 이유가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갑자기 무슨 일로 전화하셨습니까?”

(김지훈 선생, 오전 일과 다 끝났지? 다른 건 아니고, 혹시 오늘 시간 있으면 얼굴 좀 봤으면 해서 말이야.)

“오늘이요?”

(시간이 안 되나? 시연 때 아주 인상 깊었어. 작년에 우리 병원으로 와 달라는 제의까지 했는데, 정작 김지훈 선생을 제대로 못 봤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어서 그래. 조금 더 진지한 대화를 나눴으면 해.)

또 스카우트 제의를?

H 병원의 실상을 웬만큼 알고 있다.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아무리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고 해도 갈 마음이 없었다.

최인호 교수가 어떤 생각으로 또 전화를 했는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개인적인 욕심은 누구나 부릴 수 있지만, 병원과 우리 과의 발전을 얼마나 생각한 말일까? 전화할 시간이 있으면 오창도 선생님 문제부터 앞장서서 해결해야 하는 거 아닌가?’

굳이 피하거나 핑계 댈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안 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제가 원주를 가야 해서 시간을 내기 어렵습니다.”

(원주? 그러면 다음 주는 어떨까? 평일도 괜찮아.)

작년과 똑같은 상황의 반복이었다.

“죄송합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인호 교수의 말이 들려왔다.

(죄송할 건 없어. 작년 조건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근무할 수 있는 방안이 보여서 전화한 거야. 병원 측에서도 간 절제 얘기를 듣고 깜짝 놀라더라고. S 병원도 신경 많이 쓰겠지만, 이번에는 나만이 아니라 재단까지 적극적이니까 고민 좀 해 봐.)

노골적이다.

조건이 더 좋아졌다면 어느 누구라도 혹할 수 있다. 하지만 돈이나 지위 등의 조건만이 기준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도 간과하고 있었다.

길게 통화할 일이 아니었다.

주저리주저리 말해 봐야 핵심은 비껴 나간 채 쓸데없는 말만 나눌 것이다. H 병원 일반외과의 핵심적 문제는 오창도 건으로 대표할 수 있고, 김지훈의 핵심은 옮길 마음이 추호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돌려 말하면 도리어 곤란한 일만 생긴다.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지금으로서는 만나 뵐 이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왜? 계약 기간이 남아서? 그런 문제는 얼마든지 해결해 줄 수 있어. 내년에 당장 조교수로 임용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는 마당이야.)

선의로 다가왔다면 얼마나 좋을까?

악의가 아니라고 해도 스카우트 근간은 최인호 교수의 사적 욕심일 것이다. 허경발 교수, 이준영 교수와 이어진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를 보고도 이런 말을 할 정도라면 욕심의 크기를 짐작하고도 남았다.

발 잘못 들이면 수렁에 빠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 통화 길게 하는 것만으로도 빌미를 줄 수 있었다. 공적인 일이 아니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마땅했다.

스승과 연배가 비슷한 대선배라고 해도 정확한 생각을 전해야 할 때였다. 없는 자리에서 예의 없다고 욕을 먹을지라도 말이다.

“죄송합니다. 더 이상 이런 일 때문에 통화하고 싶진 않습니다. 전 이미 제가 있어야 할 병원, 정말 있고 싶은 병원에 있습니다.”

딱 부러진 말에 최인호 교수가 당황했는지 잠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진충기와 관련된 오창도 건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김지훈 선생,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몰라도…….)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일이 있어서 이만 끊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드립니다.”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다시없는 기회야. 절대 불리할 일 없으니까 찬찬히 고민해 봐. 복강경 센터 부센터장 자리까지 생각하고 있어.)

전화를 끊었다.

복강경 센터 부센터장?

진충기의 자리가 의미하는 바는 무척 컸다.

‘도대체 어디까지 갈 생각이지? 부센터장 자리까지 말하면서 진충기와 함께하면 좋은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마지막 말을 곱씹던 김지훈이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손가락 하나라도 걸치면 한시도 편할 날이 없을 것이다. 도리어 확실하게 말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현수와 이경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시연 뒤끝인 데다 병원 소리까지 나왔으니 어느 정도 눈치챘겠지만 이제 8월 말이다. 스카우트 문제가 나오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무슨 전화야?”

솔직하게 말하려던 김지훈이 돌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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