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시연이 가져온 여파 Ⅲ (2)
그런 말 나올 줄 알았다는 눈빛이었다.
“하여간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고, 우리가 전공의였을 때 생각해 봐. 교수님들과 같이 먹으면 웃기는 해도 어딘가 불편했잖아. 쟤들이라고 다르겠어? 얼굴은 못 이기는 척, 마음은 쌍수를 들고 환영. 이게 정답이다.”
“그렇겠지? 그럼 PD님 모시고 가자.”
다들 느꼈고, 공감하는 바다.
고개를 끄덕인 신현수가 나종진을 불렀다.
“종진아, 우리까리 할 얘기가 있어서 이만 가야겠다. 부족하면 더 시켜 먹고, 2차는 의국비로 해결해.”
“우리끼리만 먹으라고요?”
“미안하다.”
예측 틀리지 않았다.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교수와 전공의 관계다. 솔직히 전공의들만 모이는 것이 훨씬 편할 것이다. 게다가 돈 걱정까지 덜었다.
아쉬워하는 나종진의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걸렸다. 전공의 모두 꾸벅 허리를 숙이며 빨리 가라고 재촉했다. 이혁원의 눈빛이 의미심장할 정도였다.
‘자식! 오늘 같은 날은 꼭 만나야겠지.’
어디로 갈까?
심각한 대화가 오갈 수 있기에 도리어 마음 편한 장소가 필요했다. 그동안 뜸했던 골뱅이집 이모가 딱 떠올랐다. 마침 구석진 공간도 있어 금상첨화였다.
“에이구! 이게 얼마 만이야. 교수 됐다고 다들 너무하는 거 아니야? 김 교수, 얼굴 잊어 먹겠어.”
한동안 주인아주머니의 호들갑스러운 핀잔과 타박에 연신 고개를 숙인 후 골뱅이를 앞에 두고 앉았다.
소주 한 잔 걸치며 정훈철까지 자연스럽게 자리에 녹아들었다.
“신현수 선생, 무슨 일인데 오늘 같은 날 후배들과 자리도 마다한 거야? 혹시 아까 본 선생님과 관련이 있는 일인가?”
“일정 부분 그렇습니다. 시연 취재 때문에 오셨지만 평소 의료계 쪽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 자리를 따로 마련했습니다.”
정훈철이 힐끗 김지훈을 보았다.
‘지훈이 아니었으면 관심도 별로 없었겠지.’
새삼 딸 때문에 이어진 인연이 떠올랐다. 신현수의 표정을 봐서는 상당히 진지한 얘기가 분명했다. 본능적으로 기삿감이라는 생각이 든 정훈철이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미리 언질을 받은 손일석까지 전임들 모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얼마 전에 H 병원에서 수술받은 환자가 지훈이에게 재수술을 받았습니다.”
그간 있었던 일을 간단하면서도 명확하게 설명했다.
정훈철이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정도로 귀에 쏙쏙 들어왔다. 말주변은 손일석이지만 조리 있는 말은 역시 신현수였다.
“실적을 부풀리기 위한 대리 수술이란 말이지? 어쩌다 있는 일이 아닐 수도 있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맞아?”
“예. 확언하긴 어렵지만 정황이 그렇습니다.”
“정황이라!”
특종은 아닐지 몰라도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질 만한 기사거리임은 틀림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정훈철이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원하지 않아도 방송에 나와 그렇지, 이해관계가 달린 사안을 기사화시키는 것은 결코 쉽게 결정되는 일이 아니었다.
“사실이라면 큰 파장을 일으킬 테지만 몇 가지 문제가 있어. 본격적인 취재에 들어가려면 H 병원에서 근무하며 직접 경험한 사람이 반드시 제보에 응해 줘야 돼.”
신분마저 불안정해진 오창도가 응할까?
“신현수 선생 말을 나는 믿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제삼자에 불과해. H 병원에서 격하게 반응하면 경우에 따라서 경쟁 병원의 음해로 끝날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H 병원이 아니라 도리어 S 병원 문제가 되겠지?”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신현수도 콧등을 찡그리며 입을 열지 못했다.
“사실이든 아니든, 대리 수술 의심을 받은 병원이 받는 타격이 상당할 거야. 정황만으로 보도했다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나면 법적 분쟁까지 일어날 수 있어. 허위 보도로 판명나면 내 목도 간당간당해지는 거지.”
손일석이 중얼거렸다.
“이것도 일종의 내부 고발이라 그런가? 누군가 목을 걸지 않으면 해결이 안 될 수도 있겠네요.”
정훈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든 마찬가지야. 매장당할 각오까지 하지 않으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지. 아무리 익명 처리해도 누군지 빤히 알 수 있는데 가만 놔둘까? 동종 업계에는 발 못 붙인다고 봐야 해.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데가 없을 텐데,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내부 고발자를 누가 받아 주겠어? 신현수 선생이 이사장님 아들이라고 해서 오창도 선생은 다를까?”
일파만파다.
중대한 사안을 너무 쉽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잘잘못만 가리면 된다며 단순하게 여겼던 일이 여간 복잡한 게 아니었다.
직접적 관련이 없는 정훈철까지 피해를 보는 일은 절대 없어야 했다.
왠지 술이 소태처럼 썼다.
기분 좋은 날, 갑작스럽게 꺼낸 말로 분위기를 망쳤다고 생각했는지 신현수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오창도를 함께 만나며 상황을 보다 쉽게 전하려 했던 일마저 짧은 생각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다들 그런 줄 알았다.
“여러 문제가 있는데 제가 너무 성급했습니다. H 병원 상황만이 아니라 우리 병원 내에도 문제 될 일이 없는지 정확하게 확인한 후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내부 고발로 인한 피해가 생기지 않도록 철저히 주의하겠습니다.”
정훈철의 눈이 반짝였다.
‘의사치고는 상당히 예리하네.’
“신현수 선생이 내 말 제대로 알아들었네. 절대 방송 못한다는 말이 아니야. 당연히 해야지. 다만 억울한 사람이 나오지 않도록, 애먼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주변을 잘 살피는 것 역시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걸 잊지 말자는 취지였어. 다시 말하면 오창도 선생이 예가 될 수도 있겠지?”
“생각지도 못한 면을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일이 또 있으면 안 되겠지만, 다음에는 보다 신중하게 생각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정훈철이 크게 웃었다.
“아니야. 방송이라는 게 원래 그런 면이 있을 수밖에 없어. 우리가 검사는 아니지만 의심되면 일단 파고드니까 그런 일 있으면 언제든 얘기해 줘. 나야 소스 하나 더 생기는 건데 고맙지. 세상 일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몰라. 자자! 한잔합시다.”
동전의 양면, 양날의 검이었다.
방송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살짝 입만 댄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생각해 보니까 잘된 일일지도 모르겠어.”
“어렵다는데 뭐가 잘된 일이야?”
“형님 말씀대로 세상 일 모르는 것처럼 사람도 모르잖아. 진충기가 어떻게 변할지 누가 알아? 큰 스승님 말씀도 들었고, 시연 보면서 혹시 생각이 바뀔 수도 있잖아.”
손일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사람 마음 갈대라는 말,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게 바뀔 수 있다는 말, 그거 다 유리할 때 일이다. 꼭 손해 보지 않아도 득 될 일 없으면 바뀌기 쉽지 않아. H 병원 꽉 잡고 있는데 진충기가 아쉬울 게 있겠어?”
“최고의 써전이 되고 싶다는 목표를 갖고 있잖아. 한 사람을 밀어주는 방식으로 불가능하다면 방식은 물론 생각까지 변해야 하지 않겠어?”
솔직히 기대가 없진 않았다.
큰 스승님과 스승님의 영향력은 전임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동안 보인 행적을 생각하면 따끔한 벌을 받아야 마땅했지만, 진충기 역시 실력을 갖춘 촉망받는 써전이다. 개인적인 감정을 떠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진정한 의사가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지금도 기회는 있을 것이다.
이경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 다행인데, 만일 진충기가 개과천선하면 대리 수술 건은 묻어야 하나? 아니면 끝까지? PD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럴 때가 정말 딜레마죠. 때론 어떻게 살아왔는지, 스스로 인정하고 얼마나 반성하는지가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용서받지 못할 나쁜 짓 많이 했으면 주변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테고, 반대라면 솔직히 머리 아프겠죠.”
개과천선한 진충기?
상상하기 어렵지만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일반외과 동료라는 사실이 은근슬쩍 뒷덜미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자 손일석이 투덜거렸다.
“어후! 진충기 정말 도움 안 되는 인간이네. 골치 아픈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오늘 우리가 모인 목적에 충실하게 전념합시다. 술자리 본분을 지키지 않으면 나도 갈대처럼 흔들릴 수 있습니다. 자자! 다들 한잔하시죠.”
맞다. 술자리의 연장이다.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반성 못하고 지금처럼 살면 깔끔하게 해결하고, 반성하면?”
“김 교수님, 그때 가서 결정되겠죠. 우리에겐 훈철 형님만이 아니라 정호 형님도 계시지 않습니까? 하오문주 타이틀 괜히 달고 사는 거 아닙니다. 연락만 주세요.”
손일석이 서정호 검사까지 들먹였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과 하나를 폭파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일까지 벌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든든한 우군이 한 명 더 있기 때문일까?
슬슬 발동이 걸렸다.
술 몇 잔이 오가며 분위기가 확 달아올랐다.
시연을 주제로 방송을 기획한다는 말에 다들 어색해하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리저리 흘러가던 말끝에 진충기가 툭툭 튀어나왔고, 그때마다 손일석이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좋은 얘기 많은데 진충기는 왜 자꾸 나와? 안주 삼을 거면 처음부터 끝까지 가든지. 형님, 혹시 기획 방송에 제 얼굴도 나오나요?”
“참석한 일 말고는 한 게 없잖아? 난 개인적인 친분에 휘둘리지 않는다.”
“친분도 친분 나름인데. 의사 중에 잘생긴 사람도 있다는 걸 만방에 알려야 하는데.”
웃고 즐기는 사이 어느새 10시가 가까워졌다.
김지훈이 헛기침을 했다. 양해를 구하고 먼저 일어났다.
다들 군말 없이 손만 흔들었다.
손일석이 약간 불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붙은 엉덩이와 손에 들린 잔을 떼지 않았다.
후폭풍이 걱정됐지만 부부가 알아서 할 일이다.
병원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손바닥 안에 숨을 불며 술 냄새가 나는지 수시로 확인했다. 다행히 별 냄새가 나지 않았지만, 술 먹은 놈 판단이다.
입 안 열심히 헹구고 입원실로 들어갔다. 딸 보러 갈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고경아가 곤한 잠에 빠져 있었다.
아무도 없어서 그런지 까닭 모를 한숨이 나왔다.
칼로 재단하듯 세상일을 판단할 수 없지만, 대리 수술이나 실적 몰아주기는 반드시 없어져야 할 병폐였다.
물론 애매모호한 부분이 있다. 법의 판단을 구하기 전에 원칙을 따르는 것이 가장 좋은 방안일지도 몰랐다.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시연이 가져온 흥분과 설렘만큼 강렬하지는 않았다. 실실 웃으며 잠에 빠졌고, 그간 쌓인 긴장과 피로 때문인지 아침까지 내처 잤다.
말도 안 나오는 일이 기다리는 줄도 모르고.
일요일 아침이 밝았다.
고경아의 퇴원이 하루 앞이다.
몸조리가 끝나려면 아직 멀었지만 이젠 병원 생활이 더 불편하고, 부담스러울 시간이 됐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어여쁜 딸도 엄마 품에 안겨야 무럭무럭 잘 자랄 것이다.
시간 되는 가족들 모두 입원실에 모였다.
원주, 몸조리, 주말 부부 등등 김지훈으로서는 미안하기만 한 말들이 오갔다.
원주로 가져갈 짐도 제법 많은데, 장인어른과 장모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도 부담이었다.
주말이 와야 고경아와 딸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서운하고 아쉽기만 했다.
두런두런 오가는 말을 들으며 딸 생각에 빠져 있던 김지훈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정신없이 이어진 시간에 매우 중요한 것을 하나 빼트렸다.
딸의 이름이다.
김지훈이 급히 끼어들었다.
“아버님, 우리 딸 이름 지어 주신다고 하셨는데 혹시 아직 못 지으셨습니까?”
고경순이 삐죽거렸다.
“제부, 애들 이름 짓는 게 간단한 일이 아니에요. 태어난 시와 날을 다 계산해서 지어야 하니까 원주 가서나 지을 수 있을 거예요.”
전통? 문화? 관습?
무엇이라 부르든 아이 이름을 지을 때 한문이라면 뜻만이 아니라 획수까지도 고려한다. 순수 한글 이름이 아닌 이상 자식 잘되기만 바라는 부모 입장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가요? 아버님께서 말씀하신 것 같은데, 정신을 어디에 팔고 사는지 모르겠네요.”
고성문이 헛기침을 했다.
“경순아, 김 서방, 내가 이름을 짓긴 했어.”
“아빠, 어떻게 벌써 지었어요?”
“너 때도 사흘도 안 돼서 바로 지었잖아?”
“그랬나?”
고경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인 일인지 최문옥 여사까지 궁금한 얼굴이었다.
가족들의 기대 속에 봉투 하나를 꺼냈다. 왠지 딴청을 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드디어 외할아버지가 지어 준 손녀의 이름이 개봉되기 직전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봉투를 열었다.
‘얼마나 예쁜 이름을 지어 주셨을까?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딸하고 딱 어울리는 이름이겠지?’
하얀 종이 위에 까만 글씨가 쓰여 있었다.
가족들 눈길이 일제히 종이 위로 쏠렸다.
돌연 침묵이 흘렀다.
김지훈은 마른침을 삼켰고, 고경아는 눈만 껌벅거리며 이름과 고성문을 번갈아 보았다.
가장 당황한 사람은 장모였다.
“여보, 이게 우리 손녀 이름이에요?”
“원주에서 제일 유명한 작명가한테 돈 많이 주고 지은 거야. 사람이 얼마나 밀렸는지 간신히 통화해서 시하고 날 알려 주고 어렵게 받았어.”
“그러니까 나한테 알려 주지도 않고, 전화 통화까지 해서 받은 이름이라고요?”
“할아버지가 그 정도는 해야지.”
“여보!”
최문옥 여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얼마나 소리가 컸던지 고성문이 화들짝 놀라며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이름에만 눈이 가 있었다.
한자는 보이지도, 볼 마음도 없었다. 그저 눈물이 앞을 가릴 뿐이었다.
고경아는 거의 울상이었다.
고경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우리 아들 때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었다.
고경희는 눈만 껌벅거렸다. 손일석은 두려움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우리 애는 장인어른이 아니라 아버님이 지어 주시겠지? 후우! 정말 다행이다. 혹시 고집부리시면 어떻게 하지?’
김지훈이 떨리는 손으로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다.
잘못 보았을 리 없었다.
김경목!
이것이 과연 딸의 이름이란 말인가?
자식 가진 부모는 다 이해할 것이다.
‘아버님! 제게 왜 이러십니까?’
시연이 준 감동, 대리 수술 문제가 가져온 심각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직 딸의 이름만이 눈에 들어왔고,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