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882화 (882/1,329)

8화. 시연이 가져온 여파 Ⅲ (1)

어떤 상황인지 잘 알고 있는 신현수였다.

이미 대안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추천서는 아무래도 어려우시겠죠? 구비 서류 중 하나라도 빠지면 잡음이 나올 겁니다. 최소한 근무 평가서라도 받으셔야 합니다.”

“근무 평가서요? 그걸로 될까요?”

“어떤 내용이 담길지 모르지만, 저희가 상황을 아니까 교수님들도 어느 정도 양해해 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시연을 준비하는 와중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신현수의 능력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일과 가정을 병행하기도 어려운데, 행정적인 일까지 확실하게 처리했네. 대단해. 이 자식이 수술과 환자에게만 신경 썼으면 무시무시했겠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사장 아들이 아니라 신현수, 자신이 가진 능력만으로도 훗날 병원 경영을 훌륭하게 해낼 것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다른 어떤 점보다 능력 부분이 제일 중요할 텐데, 그 부분을 근무 평가서만으로 대체할 수 있을까요?”

“그 문제는 교수님들께서 결정하실 겁니다. 제가 말씀드릴 문제가 아닙니다.”

딱 부러진 말이었다.

제안을 주고받을 때는 감정이 개입할 여지가 있지만, 지원과 동시에 결정 날 때까지는 냉정하고 객관적이어야 한다.

당연한 대처이자 태도였다.

“알겠습니다. 준비되는 대로 바로 지원하겠습니다. 연락은 어느 분께 하면 될까요?”

“제게 하십시오. 함께 과장님을 뵙는 것이 좋겠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오창도가 일어났다.

H 병원을 떠올리는지 단단히 각오한 얼굴이었다. 추천서는 차치하고 근무 평가서마저 받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래와 자신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자리로 돌아가려던 김지훈이 슬며시 오창도에게 다가갔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지만 지원하신다니 기분 좋습니다. 잘되실 겁니다. 정식으로 임명받으시면 저희보다 위에 있으실 텐데 잘 부탁드립니다.”

“말씀만으로도 고맙습니다.”

김지훈이 기분 좋은 얼굴로 뛰어갔다.

오창도가 한동안 발을 떼지 못했다.

‘오늘 간 절제술을 보지 못했다면 지원할 엄두도 내지 못했겠지. 따지고 보면 김지훈 선생 덕인데, 내가 윗사람이 될지 모르니까 잘 부탁한다고? 최인호 선생님과 진충기는 오늘 수술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진충기의 악에 받친 말이 마음에 걸렸지만 근무 평가서만이라도 객관적으로 써 주길 바랐다. 의료 과실로 인한 소송과도 관련이 있어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꾸벅 인사하는 김지훈을 보는 순간 한결 편해졌다. 사람 사는 세상이 주는 맛을 오래간만에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신현수는 왜 정훈철까지 보자고 했을까?

이혁민 교수가 자리를 정리했다.

“이상으로 시연 행사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뜨거운 성원 감사드리며, 이런 행사가 또 기획되기를 바랍니다. 그때는 저희에게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짝짝짝짝짝짝!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막을 내렸다.

각자의 집과 직장으로 돌아가던 참석자들이 김지훈과 다시 한 번 시선을 마주쳤다. 감탄과 찬사를 아끼지 않으며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고 있었다.

“김지훈 선생, 학회 때 봅시다. 올해는 더 이상 놀랄 일이 없겠지? 간 절제술 정말 대단했어.”

“전임 첫해지? 조교수 될 자격이 차고도 넘치는데, 내년에 바로 조교수 되는 거 아니야? 그래야 자네 같은 인재를 잡을 수 있을 테니 병원도 생각이 있겠지.”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하나둘 빠져나가며 한산해졌다.

최인호 교수와 진충기는 어느새 먼저 일어났는지 볼 수 없었다. 오창도의 지원 의사와 맞물리며 이젠 개인적인 감정에 휘말리지 않기를 바랐다.

“우리도 가자. 가자. 3일 내내 힘들었지만 열심히 해 줘서 기분이 너무 좋다. 좋아. 지훈아, 교수야, 전임들아, 오늘 뭐 하니? 술 먹니? 밥 먹니? 술이지?”

저녁 식사라도 해야 할 상황이었지만 이혁민 교수가 미리 언질을 주었다.

‘사모님도 연세가 많으시다. 우리만 가서 모시는 것이 좋겠다. 나중에 자리 만드마.’

큰 스승님을 찾아뵙는다는 말에 절로 몸이 반응했지만 아쉽게도 교수 몇몇만 가기로 했다.

“저희도 쉬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래. 피곤하다. 피곤해. 주말 잘 쉬고 월요일에 보자. 그때까지 흥분 가라앉히지 못하면 안 된다. 이 과장, 나 차 없어. 같이 가자. 같이.”

교수들이 홀가분한 표정으로 병원을 나섰다.

전임들의 눈이 스르르 한데 모였다.

이런 날은 다신 없을 것이다.

참새가 방앗간 외면하지 못하듯 사람도 그런 날이 있기 마련이다.

흥분과 감격과 아쉬움을, 시원하고 달달하고 알싸한 뭔가로 풀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

더 큰 의미가 담긴 한 가지만 빼면 말이다.

손일석이 술 마시는 흉내를 내며 혀 꺾는 소리를 냈다. 병뚜껑 열리는 청량한 소리가 강렬하게 뇌를 자극했다. 김지훈도 꿀꺽 침을 삼키고 말았다.

술 마시는 것도 쉬는 방법 중 하나다. 특히 써전들에겐 간간이 보충해 주어야 할 보약이다. 그런 걸 언제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써전 아닌 사람 단 한 명도 없다.

신현수가 앞장섰다.

“그럼 회진 돌고 정리한 후에 만납시다. 7시쯤이 딱 좋겠다. 혁원아, 종진아, 오늘 오프 한 명도 빠짐없이 다 모여.”

“예. 당직은 어떻게 할까요?”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먹으라고 해. 마취과하고 간호사들에게도 연락해서 시켜 줘. 내가 계산한다.”

완전히 붕 뜬 모양이다.

김지훈이 좋다고 웃으면서도 주저했다.

성공리에 시연을 마쳤으니 당연히 축하하는 자리를 가져야 한다. 교수들이 모두 빠져 젊은 피들만 모인다. 이렇게 의미가 많은 자리 다신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아침부터 지금까지 고경아와 딸 얼굴도 보지 못했다. 게다가 정훈철까지 있어 입장이 애매모호했다. 어느 한쪽도 무시하거나 배제할 수 없었다.

“지훈아, 넌 얼굴이 왜 그래?”

“형, 지훈이가 지금 사면초가에 빠진 거죠. 처형하고 딸 눈에 밟히지. 우리 훈철 형님도 계시지. 챙겨야 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잖아요. 오늘 멋지게 시연 마무리했다지만 눈치 보여서 우리랑 술 먹을 수 있겠어요?”

“그렇지. 출산한 와이프 두고 술 마시러 나가면 평생 그 소리에서 못 벗어난다. PD님이야 같이 가셔도 되는데 제수씨가 문제네. 어떻게 하지? 이번 시연에 수훈갑인데 빼고 먹어야 하나?”

손일석의 입가가 슬며시 말려 올라갔다.

“방법이야 찾으면 있죠. 형하고 현수가 직접 우리 처형 만나서 정중하게 한 시간만 빌리자고 하면 되지 않겠어요?”

“한 시간? 고기 굽다가 가겠다.”

“일단 말이 그렇다는 거죠. 처형도 직장인이고, 우리 지훈이는 평범한 대한민국 남편인데 한 시간을 곧이곧대로 믿겠어요? 알면서 서로 속아 주는 거죠. 좋은 세상입니다.”

이경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졸지에 카드에 총대까지 메게 된 신현수가 콧등을 찡그렸다. 시연이 끝난 날에 김지훈이 기념비적인 수술을 했다지만 출산한 지 이틀밖에 안 된 산모다.

뭔가 그럴듯했지만 당사자가 아니기에 도리어 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고민스러운 찰나, 문득 손일석이 빠져나갔다는 사실이 뇌리를 스쳤다.

“손일석, 넌?”

“나? 나는 가족이야. 이럴 때는 속아 주는 입장이 될 수밖에 없어. 그게 순리다. 너도 알면서 왜 이래? 대신 네가 말하기 좋도록 사전 작업은 많이 해 놓을게. 내 전문이잖아. 그럼 회진들 도셔.”

김지훈으로서는 찜찜한 일이었지만 상황에 맞게 처신하는 수밖에 없었다. 고경아 곁에 있고 싶고, 딸도 보고 싶고, 서로를 축하하며 술도 먹고 싶고 여러모로 무척 난감한 상황이었다.

회진부터 돌았다.

간 절제술을 받은 환자가 상당히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의식은 명료했고, 드레인도 빨간색이 감도는 정도에 불과했다. 수술을 받은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았지만 이대로 가면 순조롭게 회복될 것이다.

고마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준민이 더 큰 선물을 주었다. 장 소리가 아침보다 훨씬 강하게 들린 것이다.

‘좋았어. 곧 똥도 싸겠다. 빨리 싸라.’

건강해지는 아이, 건강한 아이는 기쁨이었다.

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기분이 붕 떴다. 어째 이틀 만에 얼굴 살이 오르며 포동포동해진 것 같았다. 초유의 힘인지, 원래 그럴 시간이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쑥쑥 자라라, 우리 딸. 예쁘다, 예뻐.’

한없는 즐거움을 안고 입원실로 올라갔다.

고경아의 얼굴을 보자마자 웃음이 터져 나왔지만, 이내 갑갑한 기운이 스르르 몰려들었다.

손일석은 고경희와 노닥거리고 있었다. 사전 작업을 한 건지, 안 한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정훈철이 다정다감하게 말을 건네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수술 잘 끝냈다면서요? 제부 말 들으니까 반응이 엄청났다고 하던데 정말 기뻐요.”

부스스한 얼굴로 웃는 모습이 그렇게 예쁘고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아내이자 엄마의 미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더 저녁 식사 자리를 꺼내기 힘들었다.

“몸은 어때요?”

“많이 좋아졌어요.”

뭔가 어색한 기운이 감돌았다.

생각해 보니 남의 말을 빌리는 것은 차라리 안 하니만 못한 것 같았다. 솔직하게 말하고 허락을 구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모두들 나가 달라는 눈짓을 보냈다. 대뜸 눈치챈 손일석이 서둘러 나갔다.

단둘이 남아 어렵게 말을 꺼냈다.

고경아가 마구 웃었다.

“오늘 같은 날은 당연히 같이 식사해야죠. 너무 늦지 않게만 들어와요. 술 조금만 마시고요.”

“정말 괜찮겠어요?”

“내가 지훈 씨보다 병원 생활 더 많이 했다는 거 잊었어요? 국내 최초로 간 절제술을 한 남편 잡고 있을 정도로 속 좁은 여자 아니에요.”

고맙고 또 고마웠다.

이경석과 신현수가 올 필요가 없어졌다.

어느 틈엔가 들어온 손일석이 고경아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마무리를 했다.

“처형! 대단하십니다. 이렇게 바다처럼 넓은 마음씨는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경희야, 잘 보고 배워. 이게 바로 진정한 내조 아니겠어?”

“제부, 외조도 내조만큼 중요해요.”

“그럼요. 외조 잘해야죠. 많이 해야죠. 지훈이, 아니 형님이 점수를 어마어마하게 따셨네.”

내조를 어마어마하게 받았지, 외조는 병아리 오줌만큼도 못했다. 하오문주 공력 많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굳이 진실을 밝힐 이유가 없었다. 김지훈이 얼렁뚱땅 손일석과 정훈철을 잡아끌었다.

7시 다 됐다.

토요일을 맞아 삼겹살집이 바글바글 손님으로 들끓었다. 장사 잘되는 집이 맛있는 법이다. 시끌벅적함 속에 노릇노릇 익어 가는 삼겹살이 식욕을 자극했다.

일단 먹자.

술도 한 잔 곁들이자.

시연 행사, 참석자들의 반응, 자신들의 수술을 반찬 삼아, 안주 삼아 먹고 마셨다.

이혁원과 나종진의 목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즐거운 자리다.

거의 입가심 수준으로 맥주를 비우는 김지훈이 표적이 되긴 했다.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한마디 말을 던지면 다들 조용히 물러났다.

“우리 와이프 딸 낳은 지 이틀 됐다.”

“참새가 방앗간을 다 지나치고, 역시 와이프하고 자식이 무섭긴 무섭네. 지훈아, 술 벌레 아우성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데 괜찮아?”

“손일석, 너도 머지않았어, 인마.”

슬슬 술기운이 올랐다.

어색함을 금치 못하던 정훈철의 눈가도 발개졌다. 그 와중에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는 사람은 딱 둘이었다. 김지훈은 그렇다 쳐도 신현수는 다소 의외였다.

8시 정각.

정확하게 한 시간 지났다.

속고 속는다는 말이 무색하게 신현수가 먼저 김지훈과 정훈철을 보며 눈짓을 했다.

“일어나자고? 나야 상관없는데, 너는 조금 더 있지.”

“PD님 계실 때 할 얘기가 있어.”

“무슨 말인데? 꼭 오늘 같은 날 해야 돼?”

신현수가 스윽 주변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더욱 낮췄다.

“H 병원 문제야. 오창도 선생님 말을 생각해 보면 대리 수술을 꽤 하는 것 같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지나갈 일이 아니야.”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심증은 가지만 증거가 없잖아. 오창도 선생님 케이스도 수술 한 건에 불과해.”

“그래서 더 PD님이 아셔야 할 것 같지 않아? 아니라면 다행이지만, 사실이고 빈번하기까지 하면 절대 지나칠 일이 아니야. 환자만이 아니라 우리도 고민해야 할 문제야. 논문 표절이나 다름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의료계의 고질적인 병폐는 절대 아니다. 상황이 어떻든 간에, 몇몇 병원에서 드물게 벌어지는 일이라고 해도 반드시 고쳐야 할 문제였다.

십분 동의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의료의 특성과 속성을 잘 알기에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법으로 재단할 수 없는 전공의 집도가 대표적인 예였다.

‘그래서 아까 오창도 선생님 볼 때 형님도 불렀구나. 냉철한 놈. 법은 잘 모르니까 제쳐 놓고, 공론화시켜서 자체적으로 개선하는 방법도 괜찮겠지.’

“우리나 PD님이나 다 바쁜데, 다음에 자리를 만들자고 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야.”

정훈철까지 3명만 달랑 빠져나갈 상황이 아니었다. 이경석은 물론 곧 펠로우 지원할 손일석도 알아 두어야 할 일이었다. 심각한 말이긴 하지만, 날이 날인지라 술 한잔하며 대화를 나눈다는 조건하에 동의했다.

“후배들이 마음에 걸린다.”

손일석이 손가락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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