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시연의 여파 Ⅱ (2)
다과 자리 겸 일종의 간담회였다.
주관을 책임진 이혁민 교수를 비롯해 모든 교수들이 자리를 옮겨 가며 참석자들을 손님으로서 대접했다.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며 웃고 떠드는 소리로 떠들썩해졌다.
3일간의 시연 동안 쌓은 안면에 곁들여진 가벼운 주류가 분위기를 북돋았다.
점점 열기가 고조되며 참석자들도 이리저리 옮겨 다니기 시작했다.
친한 사람, 관심이 가는 사람을 찾기 마련이다.
모두들 주인공은 단연코 이준영 교수와 김지훈이라 여겼다. 그럴 자격이 충분했기 때문에 S 병원 역시 그렇게 유도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크나큰 오산이었다.
특별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전공의를 비롯해 시연에 참가한 수술 팀은 물론 함께 준비한 교수들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선후배들과 안면을 트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물론 차이가 있긴 했다.
이준영 교수는 한자리에 앉아 꼼짝도 하지 못했다.
끊임없이 찾아오는 의사들과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기 바빴다. 서로 성공적인 시연을 축하하며 궁금했던 점을 묻고 답했다.
무표정은 여전했지만 무뚝뚝함은 사라졌다.
강한 열정까지 내보이며 복강경 수술의 발전과 일반외과의 미래를 두고 열띤 토론까지 벌였다.
“라파로가 대세이긴 하지만 그럴수록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말씀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개복 수술의 토대를 어느 정도 쌓은 후에야 전공의들에게도 라파로를 줄 수 있을 텐데, 기준이 참 애매모호합니다.”
“동료분들과 상의하신다면 기준을 잡는 일은 어렵지 않다고 봅니다. 구체적인 부분은 저희 병원 수련을 전적으로 맡고 있는 이혁민 선생과 상의하시는 것이 훨씬 유익하실 겁니다.”
역시 대가였다.
비장 절제술은 지엽적인 문제에 불과했다. 보다 큰 문제가 대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시연의 목적 중 하나에도 부합하기에 의미가 적지 않았다.
전임들은 완전히 반대였다. 한자리에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후배들을 옆에 꼭 끼고 있었다. 김지훈은 이혁원과 송진우를, 신현수는 강병옥을, 이경석은 나종진과 마치 지금도 한 팀인 것처럼 함께 움직였다.
“신현수 선생, 수술 아주 잘 봤어. 비만 환자 수술 기준이 어떻게 돼? 그리고 위 절제할 때 주의할 점이 뭐가 있나?”
“기준은 주관적인 면이 많습니다만…….”
“김지훈 선생, 어디 가?”
“죄송합니다. 먼저 뵐 분이 있어서요. 말씀 듣고 바로 오겠습니다. 이혁원 선생, 송진우 선생, 가자.”
“이경석 선생님, 빨리 좀 오세요. 조기 대장암에 대해 물어볼 게 많은데, 이러다 내가 암 걸리겠어요.”
“미안해요. 선생님도 많이 하신다고 들었는데 너무 엄살 부리시는 거 아닙니까? 나종진 선생도 선생님에 대해 들은 적 있지?”
저마다 세부 전공을 따라 전임들을 불러 대기 바빴다. 시연 중 본 실력도 실력이지만 항상 전공의들과 함께하는 모습에 보는 눈빛마저 달라진 것 같았다.
특히 김지훈에게 집중적인 관심을 보이며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덕분에 시연한 이혁원은 물론 송진우까지 눈도장 단단히 찍었다.
좌측 간 전 절제술의 위력은 대단했다.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감탄은 물론 충격을 받은 기색까지 엿보였다.
선배라는 위치나 세부 전공을 가리지 않고 복강경 전반에 대해 의견을 물어 왔다.
김지훈의 호흡이 살짝 빨라졌다.
‘의견 교환이 아니라 내 의견을 구하시네.’
참석자들 중 자신보다 연배가 아래인 사람은 없다고 보아도 좋았다. 그만큼 경험이 많고 연륜이 쌓인 선배들의 태도는 당혹스러울 지경이었다.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더니, 간 절제술을 하고도 참 겸손하네. 아는 척하지 않고 솔직하게 말하는 태도까지 흠잡을 데가 없어.’
‘어떤 식으로 키웠기에 전임 세 명이 모두 나무랄 데가 없지? 우리 교육 방식에 무엇을 추가해야 하는 거지? 지금도 전공의들과 함께하기 때문일까?’
풀리고, 풀리지 않는 많은 의문 속에 또 하나의 의문이 잔잔한 반향을 일으켰다.
“김지훈 선생, 원래 첫날, 첫 시연이었지? 갑자기 시연이 취소된 이유가 뭐야?”
특별하다면 특별하지만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굳이 숨길 이유가 없었다.
“6주 된 아이가 담도 폐쇄로 왔습니다.”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 사람들의 표정이 묘해졌다. 여러 생각이 교차했고, 은근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카사이(Kasai) 수술을 했다고? 라파로와는 무관하고, 개복 경험이 많다고 해도 쉽지 않았을 텐데 간담도 쪽은 확실하다는 말이네.’
‘이준영 교수의 신뢰가 도대체 어디까지야?’
‘그래도 그렇지. 첫 시연을 포기해? 간 절제술도 막판에 결정된 것 같던데, 잡지 못했으면 지금과 완전히 다른 반응이 나왔을 게 빤하잖아.’
“김지훈 선생, 상황은 알겠는데 수술을 넘길 수도 있고, 최소한 첫 시연은 할 수 있었잖아? 그것도 영예라면 영예인데 후회되지 않아?”
왜 그랬을까?
“아이와 아이 어머니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시연 행사를 하는 목적도 환자와 치료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절대 후회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잔잔한 반향이 꽤 큰 파도를 일으켰다. 그만큼 환자에게 최선을 다한다는 말이었다. 이제 전임이 된 김지훈이 좌측 간 전 절제술을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허경발 교수-이준영 교수-김지훈.
단순히 모두 간담도를 전공했고, 기술이나 지식만을 물려주고 물려받는 관계가 아니었다. 같은 의사로서, 한 사람으로서 가야 할 방향을 끊임없이 공유하는지도 몰랐다.
진정한 스승과 제자의 모습 중 하나일 것이다.
오가는 말만큼이나 많은 의미가 담긴 시연 마지막 날이었다. 열기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예정된 시간이 거의 다 지났지만 빈자리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시연에 담고자 했던 의미를 십분 살렸고, 목표했던 수술 모두 정확하고 안전하게 시행했다. 참석한 의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까지 얻었다.
이보다 더 기쁜 일은 없었다. 벅찬 가슴을 진정시킬 길이 없었다.
송진우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전임들의 얼굴이 벌게졌다. 수술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 차상수와 오하석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오늘 같은 날 외치지 않을 수 없다.
카르페 디엠!
굴지의 복강경 센터를 책임지고 있는 최인호 교수도 여러 사람과 마주했다. 애써 웃으며 대화를 이어 나갔지만 힐끗힐끗 이준영 교수를 보기 바빴다.
‘이준영이 저렇게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나? 명예와 명성 앞에서는 이준영도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네.’
견제 심리였다.
시연이 주는 특성상 관심이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좀처럼 수긍하지 못했다. 불안감, 찝찝함, 거북함 따위의 좋지 않은 감정에 휘말리고 있었다.
‘이번 시연으로 입은 타격이 너무 커. 만회할 방법을 찾아야 해.’
구석에 앉아 맥주만 홀짝거리는 진충기가 보였다.
눈빛이 흐렸다. 적대감에 휩싸인 것처럼 누군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감을 동반한 승부욕으로 여기며 기꺼워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못마땅했다.
문득 자신의 변화를 느낀 최인호 교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진충기만으로는 이 상황을 극복하기 힘들어. 어떻게든 김지훈을 끌어와야 돼. 기존 조건에 조교수 임용과 부센터장 자리까지 보장하면 흔들리지 않을 수 없겠지. 진충기를 어떻게 설득해야 하지? 부교수 승진이면 될까?’
현 부센터장은 진충기다.
심혈을 기울여 키운 제자를 자리에서 밀어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엄청난 저항과 부작용이 뒤따를 것이다.
그러나 김지훈과 진충기를 동시에 잡을 수만 있다면 단숨에 상황을 역전시킬 수도 있었다.
유일한 방안이자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그 때문인지 얼굴을 구기고 있는 진충기가 더욱 못마땅했다. 더구나 방송국 카메라까지 돌고 있었다. 얼굴이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지만 표정 관리가 필요한 때였다.
손짓해 진충기를 불렀다.
H 병원의 주역 두 명이 한자리에 앉았건만 시간이 갈수록 찾는 사람이 적어졌다. 시연 전에 접대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대접했던 사람들조차 많은 수가 찾지 않았다.
최인호 교수의 눈살이 푸들푸들 떨렸다. 진충기는 입을 꾹 다문 채 책상만 노려보았다.
세상인심이 이런 것일까?
아니다.
그들 모두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헛소문을 들었던 사람들이었다. 반신반의했건, 믿기 힘들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감추지 못했든 결코 뱉지 말았어야 할 말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확인한 것이다.
입으로 뿌린 허물을 되돌려 받을 뿐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S 병원의 분위기, 시연의 목적과 의미, 허경발 교수의 말 중 단 하나만이라도 가슴 깊이 받아들인다면 지난날의 과실과 허물을 만회할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단숨에 따라잡으려 하면 체한다.
하나하나 진심으로 고쳐 갈 때 비로소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진충기가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허경발 교수에게 열심히 하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란 말을 들었다. 대가임을 입증한 이준영 교수는 간간이 눈이 마주칠 때마다 다른 사람과 똑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보았다.
김지훈은?
겸손하면서도 당당했다.
자신을 내세우기는커녕 후배와 동기를 챙기기 바빴다. 그런 태도가 당연하다는 듯 S 병원 교수 누구도 특별하게 대하지 않았다.
뭔가 뒤엉키고 있었다.
‘최고의 써전이 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어. 그런데 결과는 내가 아닌 김지훈이 한발 앞섰다. 이유가 뭘까? 난 첫 시연을 포기할 수 있었을까?’
좌측 간 전 절제술을 되새겼다.
무기력함이 다시 다가왔다.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해 왔다. 간간이 불미스러운 일이 터졌지만, H 병원 의사 중 이를 부인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인간성과 실력 간에 별 상관관계가 없다는 사실은 굳이 떠올릴 일이 아니었다.
지금도 김지훈은 후배들과 함께 고개를 깊숙이 숙이고 있었다. 칭찬이 나올 때마다 얼굴을 붉히며 멋쩍어했다. 자신의 시각으로는 최고 난이도의 수술을 성공한 써전이 보일 자신감과 자부심이 아니었다.
‘김지훈과 나의 차이는 무엇일까?’
불현듯 숨을 쉬기도 어려울 정도로 가슴이 답답해졌다. 웃고 떠드는 모든 사람이 헛소문을 퍼트리고 다녔다고 비난하는 것 같았다.
“진충기, 자세 똑바로 해. 이럴 때일수록 평소와 똑같이 행동해야 무시당하지 않는 법이야.”
더욱 갑갑해지는 마음에 얼굴을 펴지 못했다.
신현수의 날카로운 눈빛이 따라붙었다.
‘시연을 보고 느낀 것이 있을까? 아니면 아직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표정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일이었다.
슬슬 정리할 시간이 다가왔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쉴 틈이 없었지만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이제야 여유를 찾은 김지훈이 신현수의 눈짓을 받고 슬쩍 자리를 빠져나왔다.
‘무슨 일이지?’
촬영을 끝낸 정훈철과 얘기 한마디 제대로 못하면 그도 예의가 아니었다. 정훈철을 찾자마자 무슨 일인지 신현수가 함께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형님까지?’
단순히 인사 차원이라고 넘겼다.
“형님! 오늘은 꽤 오래 찍으시네요.”
“국내 최초로 시도해서 성공한 수술이 한두 개가 아니잖아. 이번에는 이준영 선생님하고 교수님들까지 싹 묶어서 특집으로 꾸며 볼까 해.”
얼굴 벌게질 일이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려는 순간 신현수가 곁에 앉았다. 정훈철과 상당한 친분이 있는 사람처럼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누구 발이 넓은 건지 알 길이 없었다.
“현수야, 거의 다 끝나 가지?”
“이혁민 선생님께서 정리하시는 중이야.”
“근데 형님은 왜 불렀어?”
별 대답 없이 자꾸 시계만 보았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뜻밖에 오창도였다.
한 식구도 아니고, 소송 때문에 만나자고 했다면 골치 아플 수도 있는데 이상하게 반가웠다.
“바쁘실 텐데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두 분 시연 정말 잘 봤습니다. 눈이 뜨이는 느낌까지 받았습니다.”
과분한 칭찬이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김지훈 선생과 절 찾으셨습니까?”
오창도가 둘 다 찾았다?
김지훈이 솔깃해 바짝 귀를 기울였다.
“다름이 아니라 전에 하신 말씀 때문에 뵙자고 했습니다. 병원을 옮기는 게 아니라 새로 취직하는 형태라 많이 주저했습니다. 게다가 대학병원이라 솔직히 포기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긴장했는지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이번 시연을 보면서 기회라도, 아니 시도라도 해 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아직도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 사라지지 않은 모양입니다. 어쩌면 선생님들처럼 실력 있는 써전이 되고 싶다는 욕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반외과 교수 지원을 하고 싶다는 말이 분명했다. 과하게 들리는 말도 잘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온 소리로 들렸다. 사실 전임에게 그럴 이유도 없었다.
정훈철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이번 시연에 참석할 정도면 꽤 실력 있는 의사라고 들었는데, 병원을 옮기고 싶다고? 지훈이나 신현수 선생 수술을 보고 얼마나 감명을 받았으면 이런 생각까지 할까?’
살짝 놀란 김지훈이 신현수를 보았다.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지만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당장 교수로서 자격이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할 일이었다.
자격이 충분하다고 해도 병원은 물론 교수들의 허락과 동의가 있어야 한다.
전임들이 결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반 절차나 과 분위기를 전하며 상의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권한 자체가 없었다. 상당히 진지해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신현수가 준비하고 있던 것처럼 곧바로 입을 열었다.
“선생님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지 않았지만, 과장님과 절차에 대해 상의는 했습니다. 시기를 특정할 때가 아니라는 말씀을 하셨으니까 바로 지원하셔도 됩니다. 일단 지원서 작성하시고, 구비 서류를 갖춰 제출해 주세요. 그리고 추천서가 있어야 하는데 가능하시겠습니까?”
추천서!
오창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김지훈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신현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치 충분하게 준비해 온 것처럼 술술 말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행정가의 면모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