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시연의 여파 Ⅱ (1)
기본과 원칙은 어떤 상황에서도 지켜야 한다고 배웠고, 오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수술 팀 누구 한 명 당황하지 않았다.
김지훈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바이탈 안정적이고, 드레인 양상도 개복 때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무사히 잘 깨어났습니다.”
“다행입니다. 오늘 수술 잘 봤어요. 라파로를 잘 모르는 내 눈에도 정말 어려워 보였습니다.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대가와 최고의 실력을 보여 준 젊은 의사의 대화였다. 단순한 질문이 아니기에 한 마디 한 마디가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말일 것이다.
회의실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무수한 이유가 떠올랐지만 결국 한마디 말로 귀결될 수 있었다. 수술 직전 큰 스승님께, 수련 때부터 지금까지 스승에게 받은 가르침이었다.
“선생님 말씀대로 수술 내내 기억해야 할 것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래요. 환자와 동료와 자신을 기억하세요. 우리는 모두 아픈 사람을 치료해야 하는 의사임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노력 없이는 성공할 수 없는 수술이었습니다. 열심히 해 줘서 고맙습니다.”
나직한 목소리가 회의실 구석까지 똑똑하게 전해졌다.
진정한 대가의 말이 참석자들의 가슴속에 깊이 스며들었다. 숙연함이 진해졌다.
이준영 교수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장년의 제자와 젊은 제자의 손을 잡았다.
“오늘 두 분 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덜컥 큰 스승님의 마음이 다가왔다. 가슴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수술을 성공했다는 사실을 또 한 번 진하게 실감했다. 이제야 우레 같은 박수로 자신보다 어린 의사의 성공을 축하해 준 선배 의사들 얼굴이 보였다.
모든 감동이 한꺼번에 느껴졌다. 너무 벅차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준영 교수도 묵묵히 스승만 바라보았다.
조용한 미소를 전하며 흐뭇함을 감추지 못하던 허경발 교수가 신현수와 이경석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그 또한 격려와 감사의 마음이었다.
S 병원만의 시간이 짧게 마무리됐다.
“더 있으면 좋겠지만 건강이 허락지 않네요. 고 원장, 미안한데 나 좀 데려다줄 수 있겠어요?”
“스승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스승이 자신을 찾았다는 사실에 고성문이 기뻐하면서도 우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젊은 시절 호랑이보다 더 무서웠던 스승의 노쇠함이 가슴 시리도록 아플 것이다.
몇 번을 만류했지만 노스승의 마음은 바뀌지 않았고, 건강 문제를 도외시할 수도 없는 나이였다.
“안녕히 가십시오.”
참석자들 모두 아쉬움을 품고 고개 숙였다.
S 병원 의사들의 서운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언제 또 이런 자리에서 스승의 얼굴을 볼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했다.
끝까지 배웅하고자 했다.
“이 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라 여러분의 자리입니다. 나오지 마세요. 예의가 아닙니다.”
제자들을 만류하는 노스승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고성문이 송재덕 교수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짓했다.
‘내가 잘 모실 테니 송 원장은 자리를 지켜.’
‘부탁드리겠습니다.’
천천히 회의실을 나서던 허경발 교수가 고성문의 어깨를 살짝 잡으며 누군가를 보았다. 많은 의미가 담긴 미소를 머금었다.
뜻밖에도 최인호 교수였다.
“최 교수, 복강경 센터를 훌륭하게 운영한다고 들었습니다. 외과 발전에 공이 커요. 다음에는 최 교수의 시연을 보고 싶습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최인호 교수가 당황했다.
이미 안면이 있고, 존경하는 의사였다. 하지만 S 병원 행사다. 이준영 교수를 비롯해 제자들이 몇인지 세기도 어려운데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다니 의아할 지경이었다.
“함께 일하는 분들도 최 교수를 닮아 의사로서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일할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 선생님들과 최 교수의 어깨에 일반외과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열심히 해 주세요.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면서도 눈가는 찡그리고 있었다. 묘한 의미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지? 혹시 이준영이 쓸데없는 말을 한 걸까? 은퇴한 지 오래됐다고 해도 허경발 선생님의 입을 무시할 수는 없어. 역시 잡음 생기지 않도록 확실하게 정리해야겠어. 그게 먼저야.’
옆에 서 있던 진충기의 어깨까지 두드렸다.
“최 교수에게 배우고 있습니까?”
“예, 선생님. 진충기입니다.”
“열심히 하세요.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진충기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일면식도 없는데, 내게 왜 이런 말씀을?’
‘허경발 선생님이 진충기를 알 수가 없잖아?’
그래서 더 의심스러운지 최인호 교수가 이준영 교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속사정을 알든 모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일을 두고 머릿속을 비틀고 있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지만, 지금은 일반외과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할 때입니다. 최 교수, 부탁건대 이 과장의 우려가 사실이 아니길 바랍니다.’
진한 아쉬움 속에 허경발 교수가 회의실을 나섰다. 마치 대가의 퇴장을 보는 것 같았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혁민 교수가 헛기침을 하며 감정을 추슬렀다.
“오늘 시연이 잘 끝났고, 끝까지 자리를 지켜 주셔서 더없이 뜻깊습니다. 이대로 시연을 끝내기에는 아쉬움이 너무 커 구내식당에 간단한 다과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시연 중 보신 수술에 대해 고견을 나눴으면 합니다.”
그제 어제 수술뿐이었다면 많은 사람이 자리를 떴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비장 절제술과 좌측 간 전 절제술을 보았다. 아직도 흥분과 긴장이 가시질 않은 상태였다.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자리를 지켰다.
“이준영 선생님과 김지훈 선생은 어디 간 거야?”
그때 부리나케 어디론가 사라졌던 김지훈과 이준영 교수가 다소 낙담한 표정으로 얼굴을 드러냈다.
‘오늘의 주인공이 자리를 비우면 쓰나. 날 정말 스승으로 생각한다면 끝까지 자리를 지켜. 그게 참석한 선생들에 대한 예의야. 이 교수, 지훈아, 마음만 받으마. 고 원장, 가세.’
허경발 교수의 카리스마 어디 가지 않았다.
말보다 눈빛에 압도당했다. 둘 다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김지훈이 가볍게 어깨를 흔들었다.
큰 스승님의 말씀대로 아직 시연 행사 끝나지 않았다. 마무리가 허술하면 빛이 바랠 것이다.
문 앞에 서서 다과 자리로 향하는 참석자들을 새롭게 맞이했다.
최인호 교수에겐 이 모든 상황이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제길!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입지를 다지겠다는 말이군. 더 이상 있어 봐야 자리만 빛내 주는 꼴이야.’
온갖 감정이 뒤섞여 제어하기 쉽지 않았다. 자칫하면 남의 잔칫상에 재 뿌린다는 손가락질이나 혀 차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었다.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가려는 순간 이혁민 교수가 다가왔다. 온 얼굴에 묻은 자부심, 뿌듯함이 눈에 팍팍 걸렸다.
“최인호 교수님, 진충기 선생과 함께 꼭 참석하셔서 자리를 빛내 주셨으면 합니다. 저희에게 해 주실 말씀이 많을 것 같습니다.”
이혁민 교수의 정중한 말투마저 고깝게 들렸다. 똑같은 태도로 사양하는 것이 최선이었지만 어디든 발목 잡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었다.
“최 교수님, 복강경 센터 운영에 관심이 많아 여쭤볼 것이 있는데 같이 가시죠.”
“그게 좋겠네요. 최 교수님 노하우라면 정말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주변에 남아 있던 사람들까지 동조하는 통에 내키지 않는 걸음을 떼야 했다.
진충기가 슬슬 눈치를 보며 빠져나가려 했지만, 최인호 교수의 엄한 눈빛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오늘 일은 다 네놈이 잘하지 못해서 일어났는데 빠져나갈 궁리만 해? 넌 끝까지 앉아서 배워. 왜 우리가 졌는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이유를 찾으란 말이야. 이준영 이기지 못하면 아무리 수술을 많이 해도 말짱 헛일이야.’
스스로 체면을 구기다 못해 자존감까지 뭉개고 있었다. 의학과 자신의 발전 때문이 아니라 남들 시선이 무서워 시연에 참석한 결과였다.
최인호 교수의 뒤를 따르던 진충기가 이를 악물었다.
“김지훈 선생, 안 가? 물어볼 게 많아.”
“김지훈 선생, 우리 테이블에 반드시 와야 돼. 신현수 선생과 이경석 선생도 같이 오면 좋겠는데, 어떻게 안 될까? 나도 묻고 싶은 게 많아.”
“김지훈 선생, 전공의 수련 문제는 누구한테 묻는 게 좋겠어? 이혁민 선생님과 말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그래.”
이름 하나가 지긋지긋하게 들렸다.
웃으려 오만 노력을 다 했지만 소태를 씹은 것 같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욕망으로 가득했던 눈빛에 질투와 분노가 마구 뒤섞였다.
‘시연만 잡았어도 저 자리는 내 차지였어. 최인호 선생님은 도대체 뭘 한 거야?’
모든 사람이 스승과 제자라고 보건만, 질책과 원망이 오갔다. 당장은 수면 아래 잠복한 문제였지만 서로의 욕심만을 앞세우는 순간 크게 터질 수도 있었다. H 병원이라는 큰 축이 흔들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사연 전부터 진충기는 요주의 인물이었다. 눈치 못 챘을 리 없다.
‘에휴! 사람 참 좁다. 나랑 철천지원수도 아니고 왜 저럴까? 최인호 선생님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오창도 선생님은 버리면서 왜 감싸고도는 걸까?’
그러건 말건 오늘부로 헛소문을 깨끗이 잠재웠다. 똑같은 소리를 나불거리면 도리어 제 얼굴에 침 뱉는 꼴이 된다. 아니, 매장을 당할지도 모른다.
머리가 한낱 목 위에 달린 장식이 아니라면, 생각이 있다면 다시는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할 것이다.
‘학회만 아니면 마주칠 일도 없는데 오늘은 신경 끊자.’
깔끔하게 지우고 회의실을 나서는 참석자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했다.
몇 사람 남지 않았을 때가 돼서야 고개를 돌린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갑자기 밝은 빛이 켜지며 사방을 밝혔다.
차르르르르!
방송국 카메라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낯익은 얼굴이 불빛 뒤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났다.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형님! 어떻게 오셨어요?”
“아우가 국내 최초의 수술을 또 한다는데 내가 와야지. 이런 일 있으면 연락하라고 말한 게 몇 번인데, 지겹게 말 안 듣네. 확 인연 끊을까 보다. 설마 제수씨 보러 이제 왔다고 일부러 연락 안 한 건 아니지?”
“형수님만 오셔도 되는데…….”
눈빛이 사나워졌다.
“일부러 안 할 리가 있나요? 성공할지, 실패할지도 모르는 수술이라서 연락드리기가 힘들었습니다.”
“변명은! 신현수 선생 아니었으면 좋은 방송거리 하나 놓칠 뻔했어. 동생이란 놈보다 훨씬 낫네.”
“현수가 연락했어요?”
“우리 와이프도 시연 행사가 있다는 걸 알고 있던데, 뭘 그렇게 놀라?”
핀잔을 던지던 정훈철이 피식 웃었다.
“어쨌든 기분 좋다. 주변에 있는 의사들이 얼마나 긴장하는지, 뭘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내가 다 긴장되더라. 지훈아, 너 이러다 이삼 년 내에 대가 소리 듣는 거 아냐?”
“형! 이제 전임입니다. 그런 말 함부로 하시면 안 돼요.”
“분위기가 딱 그래. 단 한 사람도 수술하는 거 보면서 자신 있게 얘기하는 사람이 없더라. 어쨌든 얘기는 나중에 하고, 인터뷰부터 하자.”
졸지에 또 인터뷰를 했다.
무뚝뚝한 이준영 교수까지 잡혔다.
“교수님, 얼굴 펴시고, 오늘 한 수술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셔야죠. 인터뷰 처음 하시는 거 아닌데, 왜 이렇게 긴장하세요. 김 교수 보고 배우셔야겠습니다. 자자! 긴장 푸시고 다시 갑니다.”
타박에 가까운 핀잔이 이어졌다.
이준영 교수의 표정이 묘해졌다.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밀어붙였다.
“교수님! 카메라를 보셔야죠. 지금처럼 인상 쓰시면 편집 때 다 잘립니다. 헛수고하고 싶으세요? 스마일! 가볍게 웃으셔야 통으로 안 잘리고 시청자들에게도 잘 전달됩니다.”
‘스승님 인상 쓰시면 인터뷰고 뭐고 곤란해질 수도 있는데, 너무 세게 나가시네. 원래 그런 분인데 대충 하시지.’
정훈철은 이준영 교수가 어떤 사람인지 모를까?
되로 주고 말로 받을 수 있다는 사실 잘 안다. 담대하다 못해 겁을 상실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김지훈이 돌연 멍하니 입만 벌렸다.
헉! 이준영 교수의 입가가 꿈틀꿈틀 움직였다.
“좋습니다. 조금만 더 스마일! 그래야 빨리 끝납니다. 살짝 옆으로 서 주시면 그림 좋게 나옵니다.”
카메라를 보며 자세까지 잡았다.
정훈철의 핀잔과 타박이 통했다.
우리 형님, 정훈철 만세!
무사히 짧은 인터뷰를 마치고 부랴부랴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아직도 취재가 다 끝나지 않은 모양인지 정훈철이 카메라맨과 열심히 뒤를 따랐다.
막 다과 자리에 들어서려는 순간 정훈철이 그대로 굳었다.
“정 PD, 인터뷰는 오늘이 마지막이다.”
낮게 쫙 깔리는 묵직한 목소리에 가공할 경고가 실려 있었다. 실상은 어색함이었지만 정훈철은 분명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지훈아, 혹시 화나신 거야?’
김지훈이 씨익 웃으며 정훈철을 잡아끌었다.
‘다음에 또 하셔도 돼요. 어색해서 저러시는 겁니다.’
‘그치? 조금 친해졌다 싶었는데 깜짝 놀랐네.’
모르는 사이 꽤 여러 번 만난 모양이었다.
무슨 일로 만났을까?
이유가 무척 궁금했지만 친형과도 같은 정훈철과 스승이 이런 말을 나눌 정도라는 사실이 기쁘기만 했다.
좋은 사람, 좋은 관계야말로 다다익선이다.
오늘 뒤풀이 역시 좋은 인연을 쌓을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