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진정한 실력 Ⅲ (1)
이준영 교수의 눈짓에 김지훈이 급히 허경발 교수 앞에 섰다. 큰 스승님의 관심만으로도 가슴이 두근두근 떨렸다. 전공의 때나 전임 때나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김지훈 선생, 오늘 시연한다고요?”
“예, 선생님.”
“내가 라파로는 잘 몰라도 어려운 수술이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성공 여부를 떠나 대단한 의미가 있겠죠? 최선을 다하길 바랍니다.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을 잊지 마세요.”
“명심하겠습니다.”
김지훈을 비롯해 까마득한 후배들을 보던 허경발 교수가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대부분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모두들 열심히 한다고 들었습니다. 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신현수 선생, 이경석 선생, 믿습니다.”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으며 회의실로 들어섰다.
수술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던 참석자들이 일제히 일어났다. 안면이 있든 없든, 직접적인 인연이 있든 없든 모두들 고개 숙여 존경을 표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저 기억하시죠?”
“정 교수? 왜 모르겠습니까? 잘 지내셨죠?”
넉넉한 웃음으로 화답하며 인사를 나누는 허경발 교수는 영원한 선배이자 대가였다. 자리에 앉을 때까지 모두들 극진한 예우를 갖췄다.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었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자리를 지키던 김지훈이 수술실로 향했다. 이준영 교수의 살짝 거칠어진 숨소리가 들렸다. 누구보다 무뚝뚝하건만 스승 앞에서 시연한다는 사실에 흥분을 느끼는 것 같았다.
김지훈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잠시 후, 환자 두 명이 도착했다.
곧바로 준비에 들어갔다.
통상적으로 볼 수 없는 수술과 국내 최초로 시도되는 수술을 앞뒀다. 수술 팀은 물론 마취과와 간호사들까지 바짝 긴장했다. 동시에 TV 화면이 켜지자 회의실도 점차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허경발 교수가 나직한 헛기침을 터트렸다.
‘준영아! 어려움을 딛고 열심히 해 줘서 정말 고맙구나. 지훈아! 고맙다. 오늘 수술 꼭 성공하길 바라마.’
간만에 느끼는 긴장감마저 즐거워하는 얼굴이었다.
다양한 생각이 오갔다.
당연히 초조하다 못해 다급한 사람이 있다.
최인호 교수, 진충기.
허경발 교수에게 인사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비장 절제에 간암 수술까지 모두 성공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지? 이준영은 펄펄 날 테고, 진충기만으론 이 상황을 해결할 방도가 없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조건으로 스카우트를 다시 시도해야 하나?’
‘제길! 김지훈이 개복하기만을 바라야 한다니, 이 꼴이 뭐야? 최인호 선생님 눈치가 좋지 않아. 오늘 수술도 문제지만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일 역시 시급해. 오창도의 입부터 확실하게 막아야 돼.’
고성문, 손일석, 오창도.
‘우리 사위, 하던 대로만 하자. 스승님, 기대 많이 하시는 눈치신데 깜짝 놀라실 겁니다.’
‘진충기 눈깔 봐라. 아주 독기가 철철 흘러요. 그런다고 결과가 달라지겠어? 지훈아, 납작하게 눌러 버려. 파이팅!’
‘진충기는 물론 최인호 선생님까지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좌측 간 절제를 할 수 있을까? 김지훈 선생님, 반드시 성공하셔야 합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최고만을 추구하면 도리어 최고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 줬으면 합니다.’
각기 생각과 바람은 달랐지만 누구에게나 초미의 관심사였다.
참석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간간이 웃음을 터트리는 송재덕 교수와 이혁민 교수의 눈가에도 긴장이 묻어 있었다.
“고 원장, 송 원장, 잘되겠죠?”
“그럼요, 스승님. 편안하게 보시면 됩니다.”
째깍! 째깍!
8시 30분 정각!
두 개의 수술실에서 두 개의 수술이 시작됐다.
이준영 교수의 묵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시작하겠습니다. 메스!”
4개의 커다란 TV 화면을 통해 생생한 수술 모습이 전해졌다. 피부를 절개하고, 에어 팁을 꽂은 후 트로카를 넣을 때까지 일반적인 복강경과 다를 바가 없는 과정마저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치 하나의 수술처럼 배 속 장기를 확인하는 과정이 동시에 방영됐다.
잠시 후 하나의 카메라는 비장에, 또 하나의 카메라는 간에 초점을 맞췄다.
처컥! 처컥!
삐이이이! 삐이이이!
환청처럼 기계음과 보비 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오고, 환영처럼 수술 팀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나직하게 오고 가던 말소리가 사라지며 회의실이 완벽한 침묵에 잠겼다.
검붉은 색으로 비대해진 비장이 보였다.
기능 이상 때문에 제 살을 깎아 먹는 장기로 변한 지 오래였다. 만성적인 혈소판 파괴는 출혈 위험까지 크게 높여 극도로 주의해야 할 수술이었다.
“켈리, 보비 온, 클립.”
이준영 교수가 왜 대가라고 불리는지 톡톡하게 보여 주기 시작했다. 마치 담낭 절제술을 할 때처럼 조금도 무리하게 보이지 않았다.
신현수 역시 완벽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한 손에는 카메라, 다른 손에는 기구를 잡고 비만과 조기 위암을 수술하며 쌓은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간간이 기구를 넘겨받는 나종진의 손은 조심스러우면서도 정확하게 움직였다. 전공의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떨림이 보이지 않았다.
3개의 손이 마치 한 손처럼 움직였다.
비장 동맥이 숨어 있는 연결 조직이 순차적으로 박리되고 묶였다.
화면을 갑작스럽게 물들인 시뻘건 피는 긴장 그 자체였지만 장애가 되지 않았다.
보비와 수처로 침착하고 능숙하게 해결했다.
곧 굵은 동맥이 나올 것이다.
가끔 보이는 부동맥까지 확실하게 확인되면 곧바로 비장을 제거하게 된다.
비장은 핏덩어리나 다름없다.
많은 참석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안전하게 모든 과정을 수행하는지 모든 신경을 집중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동시에 벌어지는 또 하나의 수술 역시 결코 눈을 뗄 수 없는 수술이었다.
좌측 간 절제술!
좌측 간 내 담도, 이중 혈행을 담당하는 간 동맥과 간 문맥 모두 치명적인 문제를 유발할 수 있었다. 경험이 부족하면 개복을 해도 어려운 수술이었다.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었다.
단, 두 개의 화면을 번갈아 보며 핵심을 짚어 내지 못하면 반드시 얻어야 할 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마치 시험을 앞둔 학생처럼 긴장과 집중 속에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를 정확하게 처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참석자 대부분 노련한 써전들이기에 어렵지 않았다.
진충기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등짝이 축축하게 젖어 들고 있었다.
‘비장 절제를 저렇게 쉽게 할 수 있었나? 출혈을 걱정할 필요도 없어 보일 정도야. 도대체 이준영 선생님의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심 감탄이 쏟아졌지만 답답함이나 참기 힘든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차피 최인호 교수가 신경 써야 할 경쟁자였지, 자신이 상대해야 할 라이벌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조금 지나면 손 떨려서 수술하기도 힘들어질 나인데, 굳이 견제해야 할 필요가 없지. 도리어 눈에 잘 보이면 유리할 수도 있어.’
그러나 눈에 보이는 또 하나의 수술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비장에 머물던 눈길이 서서히 간 절제로 옮겨 갔다.
김지훈의 간 절제 역시 본격적인 과정에 막 접어들고 있었다. 주먹을 꽉 쥔 사람, 마른침을 삼키는 사람, 팔짱을 낀 채 꼼짝하지 않는 사람까지 보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유발되고 있었다.
진충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수술 성패를 떠나 이런 관심과 집중을 김지훈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온 것이다.
애써 눈을 돌렸다.
좌측 간 전 절제술을 머릿속으로 그리던 진충기의 목덜미에 식은땀이 맺혔다.
어젯밤 내내 고민했지만 성공할 수 있는 자신감을 조금도 가질 수 없었다.
깊은 탄식이 터지면 라이벌의 실패를 의미한다.
과연 김지훈은 성공할 수 있을까?
최인호 교수의 얼굴은 이미 벌게진 지 오래였다.
그 역시 비장 절제술은 보지 않는 편이 편한지 김지훈의 수술에서 눈을 떼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이준영 교수의 수술은 상당히 순조로웠다.
위, 대장과 연결됐던 비장 주변 조직이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 속에 숨은 동맥을 능숙하게 찾아냈다. 은빛 클립이 동맥에 물렸다.
벌떡벌떡 뛰는 비장 동맥이 잘렸다. 어딘가 손상을 입었는지 빨간 피가 주르륵 흘렀다.
자연스럽게 수처가 이어졌다.
위험 구조물도, 연약한 지방조직도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수월하기만 했다.
서서히 기구 움직임이 느려졌다.
비장 동맥보다 훨씬 가는 부동맥을 찾고 있었다.
신중했다.
한 방울의 피도 내지 않겠다는 듯 조심스럽게 연결 조직의 한 부분을 박리했다.
하얗고 기다란 구조물이 드러났다.
흔히 알고도 놓치기 쉬운 부동맥을 너무 쉽게 찾아냈고, 당연히 쉽게 처리했다.
누군가 중얼거렸다.
“지금 이준영 선생님 얼굴이 어떤지 보고 싶네. 겁나지도 않나? 비장과 연결된 혈관을 너무 쉽게 처리하시네.”
감탄사조차 나오지 않았다.
많은 참석자들이 다양한 표정으로 오직 수술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써전들답게 기구 움직임을 따라 손을 움직였다. 손끝에 강한 긴장까지 실려 있었다.
툭! 툭! 툭!
마침내 주변 조직이 거의 다 박리됐다. 조금만 더 진행하면 가장 위험한 과정이 끝날 것이다.
그때 마지막 박리를 시도하던 손이 갑작스럽게 멈췄다. 시뻘건 피가 솟구쳤다.
양이 적지 않았다. 한눈에도 복강경 기구로는 잡기 힘든 출혈이었다. 성공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개복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최인호 교수의 몸이 들썩거렸다. 진충기는 눈가를 좁힌 채 화면만 주시했다.
좌중은 완벽한 침묵에 잠겼다.
“석션! 수처! 타이! 클립!”
눈에 보이지 않지만 기구의 움직임만으로도 당황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순차적으로 대처해 나가자 어느 틈엔가 심각한 출혈이 사라졌다.
누군가 헛기침을 터트렸다.
‘후우! 저런 출혈을 너무 쉽게 처리하네. 나로서는 추측하기도 힘든 수준이야. 분발해야겠어.’
꼼꼼히 박리 부분을 확인하고 마지막 연결 조직을 잘랐다. 커다란 비장이 좌측 복부 밑으로 가라앉았다. 남은 과정은 비장을 배 밖으로 꺼내는 것뿐이었다.
예전이었으면 상당히 곤란한 과정이었고, 대부분 복부를 작게 열고 억지로 빼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젠 기구 자체가 발전했다. 질긴 비닐 주머니가 삽입됐다.
신현수와 이리저리 손을 맞춰 커다란 비장을 주머니 속에 넣었다.
끝이 뭉뚝한 새로운 기구가 들어갔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기구 속에 숨은 모터 소리가 웅웅 울렸다.
작은 칼날이 돌았다. 비장이 잘게 부서지기 시작했다.
조직 검사를 위해 일부만 남기고 모조리 파괴해 빨아내면 끝이다.
서서히 형체를 잃어 가는 비장을 보던 참석자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과 표현이 쉬울 뿐, 실제 수술하는 의사의 긴장과 압박감이 얼마나 심한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 압력을 이겨 내고 종착점을 향해 달리는 이준영 교수와 수술 팀의 능력은 가히 경이적이었다.
오래전 시도됐지만 일반적으로 적용시키지 못했던 비장 수술의 새 지평을 열고 있었다.
이제야 진정으로 대가의 수술을 봤는지도 몰랐다. 보는 이들의 눈을 사로잡는 실력을 말이다.
“대단하시네. 정말 대단하시네.”
“대가라는 소리를 괜히 듣는 게 아니셨어.”
후배 의사들의 감탄사 속에 강인한 의지가 실려 있었다. 언젠가는 자신들도 이준영 교수의 수준에 오르고 말겠다는 결심이자 각오였다.
최인호 교수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진충기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표정을 숨겼다.
H 병원 의사들의 얼굴도 굳어 있었다.
정신적인 면에서는 더없이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써전이 되기 위해 버텨 왔다. 최인호 교수와 진충기의 자부심, 자만, 독단도 실력이 있다는 사실 하나로 감내했다.
그런데 이준영 교수의 실력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오창도의 입을 통해 S 병원의 분위기가 자신들의 병원과는 거의 백팔십도 다르다는 사실까지 들었다.
그동안 가져왔던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과연 최선의 방식이었을까?
개개인이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의문도 잠시, 아직 시연은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마무리가 끝나며 기구가 빠져나갔다.
화면에 잠깐 보였다 사라진 수술실 모습은 수술이 모두 끝났음을 알리고 있었다.
누군가 힐끗 시계를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비장 절제술을 3시간 만에 끝내다니, 완벽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네.’
그야말로 강렬한 자극이었다.
시연이라는 행사에 왜 참석해야 했는지, 어떤 방향으로 노력해야 하는지 절실하게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제 단 하나의 수술만 진행 중이다.
스승과 제자의 실력을 비교하는 것은 잠시 스쳐 간 생각일 뿐 무의미했다.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준영 교수가 남긴 강렬한 인상을 품은 채 김지훈의 수술에 모든 시선이 집중됐다.
또 한 번 최초라는 수식어가 달릴 수 있는 좌측 간 전 절제술이다. 어쩌면 비장 절제보다 더욱 많은 시선을 끌었을 수도 있었다. 최초의 좌측 간 전 절제술을 시행하는 김지훈의 실력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기회였다.
강한 기대와 긴장감이 회의실 안팎을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