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875화 (875/1,329)

4화. 진정한 실력 Ⅱ (2)

덩치가 산만 한 의사!

닮은 얼굴로 어정쩡하게 서 있는 의사!

“경아야, 고생했다. 몸조리는 원주에서 한다고?”

“네. 한 달 동안 엄마가 봐주시기로 했어요.”

“지훈이 걱정하지 말고 몸조리 잘해.”

“감사합니다.”

“시연 때문에 오늘 저녁에 준비할 게 많지만 지훈이는 최대한 빨리 보내마.”

돌아서려던 이준영 교수가 헛기침을 했다.

“좋은 사람 있으면 이놈 좀 소개시켜 줘.”

김지훈의 눈이 동그래졌다.

“예? 혁원이 말씀하시는 건가요?”

“간다.”

순식간에 스승으로 돌아왔다.

한때 부모 자식이라고 말하기도 힘들었던 관계는 평생 동안 갚아야 할 빚이었다. 자식 같은 김지훈과 고경아를 보며 마음까지 많이 약해진 모양이었다.

아니다.

무뚝뚝함 속에 깊은 사랑을 간직한 스승이었다. 그 시대의 아버지들처럼 드러내 말하지 못할 뿐 이혁원 이상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혁원에게는 상당히 어색한 상황이었다.

“선생님, 저도 가 보겠습니다.”

고이 보내 주어야 할 김지훈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의미심장한 미소가 이혁원의 이마에 딱 꽂히자 뭐에 찔린 듯 움찔거렸다.

“이혁원, 있지? 솔직히 말해.”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혁원아, 형 눈 못 속인다. 말 좀 하고 살아. 아버지는 몰라도 어머니께는 솔직하게 말해도 되잖아?”

이혁원이 머리만 벅벅 긁었다.

“오프 때 집에 안 가고 병원에서 잘 때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 나도 그랬어. 좋은 사람이면 절대 놓치지 마. 양다리 걸치지 말고.”

경험담일까?

누구든 훅 치고 들어오면 당황하기 마련이다. 특히 이성 문제라면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더구나 어머니, 아버지에 이어 가장 가깝게 느끼는 선배의 말이었다.

꾸벅 인사만 하고 병실을 나온 이혁원이 머리를 흔들었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만큼 자신에게 신경 쓰고 있다는 의미기도 해 은근히 기분 좋은 일이기는 했다.

‘그래도 그렇지. 형수님 앞에서 그러시면 안 되지. 하여튼 아버지도 어떤 때 보면 그냥 막 나가셔. 김지훈 선생님도 은근히 예리해.’

속으로 투덜투덜 불평하면서도 입가에 미소가 걸리는 것을 막지 못했다. 말뿐이 아닌 정말 친형제 같은 사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회의실에 도착했다.

문을 열려다 말고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엉뚱한 데 힘쓰지 말고.’

족발 사며 했던 말의 의미가 있었다.

순간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이혁원은 왜 땀을 흘릴까?

***

온갖 감정과 생각에 잠시 눈을 팔았던 구성원들이 다시 한 가지 목표에 집중했다. 고경아의 출산이라는 핑계 아닌 핑계로 함께 자리한 손일석이 눈가를 좁혔다.

‘간암을 라파로로 한다고? 이준영 선생님도 시도하지 못한 수술이잖아. 절대적인 신뢰일까? 아니면 혈관, 소아과에 이혁민 선생님 수술까지 다방면에 걸쳐 실력을 쌓은 것이 발판이 됐을까?’

어둠이 깊어 갈수록 치열해지는 분위기에 손일석도 팔을 걷어붙였다. 현실 탓을 할 계제가 아니었다. 군대 3년은 좋은 구실이었지만 핑계로 대기에는 동기들의 발전이 너무 눈부셨다.

신기동 교수는 결코 나태함을 용납하지 않을 스승이자 멘토다. 기회를 잡았을 때 하나라도 더 알아야 내년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자신이 집도의인 것처럼 열띤 토론을 벌이는 동기와 후배들의 모습은 강한 자극 정도가 아니라 바짝 날을 세운 비수였다.

‘어후! 전번하고 또 달라졌네. 이럴 때가 아니야. 이 자식들과 보조라도 맞추려면 남들 잘 때 난 달려야 해.’

잠잠해졌던 투지가 솟구치는 시간이었다.

꽤 어둠이 깊어지고 나서야 자리가 끝났다.

고경아, 고경희!

바늘이 있으니 실이 따라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김지훈이 손일석과 함께 입원실로 향했다.

“지훈아,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수술 멋지게 끝내. 진충기도 올 텐데 다신 헛소리 못하게 납작하게 눌러 버려. 허경발 선생님까지 오시면 정말 대단하겠어.”

‘군대 말년 길다더니 시간 정말 안 가네. 이 자식이 어디까지 갈지 몰라 더 춥다.’

하오문주답게 그새 정보를 다 빼낸 모양이었다.

“진충기 때문에 시연하는 건 아니지만, 큰 스승님도 오시는데 솔직히 실패하고 싶지 않다.”

“큰 스승님과 스승님들! 생각해 보니까 우리가 탄 라인 한번 기가 막히다. 어쨌든 경석이 형하고 한 팀이니까 실패하고 싶어도 못할 거야. 이혁원이 세컨 서고, 진지함 하면 따라갈 사람이 없는 진우가 써든데 말해야 입만 아프지.”

언제 봐도 든든하고 힘이 되는 친구였다.

친구? 장인어른이 계신데?

“일석아, 아버님도 와 계신 거 알지?”

“그럼. 오자마자 숨도 쉬지 않고 바로 인사드렸지. 하오문 원칙 중 하나가 예의범절 아니냐. 나만큼 ‘깍듯’이란 단어와 어울리는 사람도 없을 거야. 너도 맨날 형부라고 말만 하지 말고, 우리 경희 확실하게 챙겨 줘.”

“처제는 걱정하지 말고 예의범절이나 잘 지키셔.”

“무슨 말이야? 내가 방금 전에…….”

김지훈이 조용히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장인어른 번호가 딱!

순간 감 잡은 손일석이 푹 고개를 숙였다.

“예, 형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내일 수술도 무탈하게 끝내시길 앙망합니다. 만수무강하세요.”

“동서, 고마워. 오래오래 살게. 너무 서운해하지 마. 아버님 앞에서 실수하면 작살난다. 내일 아침에 보자.”

돌아서는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뒤통수에 대고 주먹감자를 날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손일석만큼 긴장을 풀어 주는 사람도 없었다.

손일석, 고경희와 함께 딸을 보러 갔다.

면회가 불가능한 시간이었지만 같은 병원 의사라는 사실을 믿고, 약간의 윤활유까지 쳤다. 덕분에 유리창 너머로나마 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음! 살 올라오면 정말 예쁘겠어. 누구 닮았으면 평생 원망하고 살았을 텐데 역시 처형이 미인인 덕을 보네. 참 다행이다. 다행이야.”

“무슨 소리야? 나 닮아서 예쁜 거야.”

“지훈아, 우리 가슴에 손 얹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저 얼굴에서 어떻게 네 얼굴이 나와? 경희야, 내 말이 맞지?”

고경희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지만 찬찬히 보니 고경아 얼굴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왠지 서운했다. 커 가면서 얼굴 바뀐다는 소리에 일말의 기대를 걸었다.

“손일석,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집에나 가.”

“예, 형님. 분부대로 물러나겠습니다. 야! 엄마 닮아서 우리 조카는 참 좋겠다. 다행이야. 천만다행이야. 하늘이 도우셨어. 조카야, 전생에 좋은 일 많이 했구나.”

‘전생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이 자식이 송재덕 선생님 닮아 가나. 왜 말은 반복하고 지랄이야.’

투덜투덜 입원실로 올라와 간신히 잠든 고경아 옆에 앉았다. 아무도 없는 밤의 적막함이 많은 생각을 불러왔다.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 열심히 일해 왔다면 앞으로는 가족 전체를 위해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남편이자 아버지에게 주어진 의무다.

고경아는 이미 그렇게 살아왔다. 어여쁘게 자랄 딸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확신하기에 즐겁고 행복한 상상이자, 달게 감수해야 할 의무였다.

‘경아 씨, 사랑해요. 우리 딸, 잘 자.’

보호자 침대가 상당히 불편했지만 힘든 아내의 곁을 지키는 것 또한 남편의 의무이자 행복이었다.

연 이틀 내리 딸 꿈을 꾸었다.

헉! 엄마를 정말 많이 닮았다.

꿈일 뿐인데 너무 생생하다.

까닭 모를 서운함과 함께 눈물이 났다.

다음 날 아침, 드디어 시연 마지막 날이 밝았다.

어느 때보다 부산한 하루가 시작됐다.

아침 일찍 소아과 병동을 찾았다.

송진우가 검사 결과를 펼쳤다.

“백혈구 수치가 약간 높지만 황달 수치는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습니다. 흉부 사진 이상 없고, 복부 사진에서 약간의 장 마비 소견이 관찰됩니다.”

“가스는 나올 때가 멀었고, 드레인은?”

“양이 많긴 하지만 깨끗합니다.”

응애! 응애!

아직도 갓 태어난 아이의 울음소리다.

준민이를 안고 달래 주느라 정신없던 엄마가 김지훈을 보자마자 물었다. 마음이 아파 어쩔 줄 모르는 눈빛과 잔뜩 피로가 쌓인 얼굴에서 진한 사랑이 느껴졌다.

“선생님, 우리 준민이 언제 먹을 수 있을까요?”

“어머니, 수술한 지 만 이틀도 안 지났습니다. 지금은 먹는 것 자체가 해가 되는 시기입니다. 안타까우시겠지만 조금만 더 참으세요.”

엄마도 쉬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어떤 사람에게도 준민이를 맡기지 않을 것이다.

“잠깐 배 좀 볼까요?”

신중하게 촉진부터 했다.

장 마비 기운으로 인해 가스가 차 다소 빵빵했지만, 소장을 자르고 다른 장기에 이어 붙였다. 수술 후 당연하게 볼 수 있는 소견이었다.

청진기를 가져간 김지훈이 모든 신경을 귀에 쏟고자 눈을 감았다. 이리저리 부위를 옮겨 가며 장 소리가 들리는지 확인했다.

꾸룩! 꾸룩!

놀라운 일이다.

1분이 넘는 시간 동안 한두 차례에 불과했지만 분명 장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 추세라면 곧 가스가 나오고, 변까지 볼 것이다.

완전한 회복까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작은 아이 속에 숨은 강인한 생명력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엄마의 사랑과 정성을 가득 머금은 덕분일 것이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어머니, 생각보다 경과가 훨씬 좋습니다. 방귀 뀌는지 잘 보세요. 확인되면 다시 진찰해 보고 코 줄을 뺄 수도 있겠습니다.”

깜짝 놀란 엄마의 숨이 약간 거칠어졌다.

자식을 고통스럽게 하는 수많은 것 중 단지 코 줄 하나 빼는 일인데, 그것만으로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잘 보시고 바로 알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살짝 흥분된 기색으로 기대감을 드러내던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불현듯 수술 과정이 떠오르며 오늘 시행할 간 절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 때문이었다.

‘어느 때보다 정교함을 요구하는 수술인데, 준민이 덕을 볼지도 모르겠다. 여러모로 인연이 깊네.’

어쩌면 첫 시연을 포기한 대가를 아직 다 받지 못했는지도 몰랐다.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기에 더욱 고마운 일이었다.

병동을 찾았다.

수술을 앞둔 환자의 초조함과 불안이 보였다.

코 줄, 소변 줄, 다량의 출혈에 대비하기 위해 우측 쇄골 부위에 삽입한 굵은 수액 줄, 수술 전 시행된 수많은 검사까지 모든 것이 불안을 유발할 요소였다.

더구나 단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수술이라는 사실에 심한 두려움까지 느낄 수 있었다.

“환자분, 마음 편히 가지셔야 합니다. 그래야 저희 의료진도 더욱 집중할 수 있습니다.”

“솔직히 수술이 잘 안 될까 봐 무섭네요.”

“복강경으로 진행하지 못한다고 해도 병변은 확실하게 제거될 겁니다. 조금 더 고생스러울 수 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만 생각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불안감은 환자만이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이준민을 생각하며 자신감을 가지려 애썼다.

역시 의사의 힘은 환자에게서 나온다. 회진을 돌며 순조롭게 회복되는 환자를 보는 순간 불안이 조금씩 희석됐다.

수술 방으로 향했다.

수술 팀 전체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종진, 강병옥과 무엇인가 긴밀한 대화를 나누던 신현수가 손짓을 했다.

“지훈아, 오늘 수술 꼭 성공해야 한다.”

큰 스승님까지 오시는 마당인데 말해 무엇 할까?

눈치가 조금은 묘했다.

“이혁민 선생님과 강당에 잠깐 들렀는데, H 병원 의사들이 많이 왔어. 오창도 선생님이 3일 내내 왔다니까, 이번 기회에 확실한 인상을 심어 주자. 진충기 한 명에게 보여 주는 것보다 효과가 훨씬 더 클 거야.”

“그래? H 병원 의사들이 많이 왔단 말이지.”

오창도가 함께 있다면 신현수 말마따나 대단한 파급효과가 있을 것이다.

운영의 문제점도 얼핏 들었다. 전공의까지 집도한 시연 방식과 함께 오늘 수술을 보며 H 병원 복강경 센터가 변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는 일이었다.

확실히 새로운 자극이었다.

수술 시작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다.

제각각 오늘 수술을 대비하면서 회의실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바짝 귀를 기울였다.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던 김지훈이 눈을 반짝였다.

오하석이 쪼르르 달려왔다.

“선생님, 허경발 선생님께서 곧 도착하신답니다.”

아무리 작은 목소리여도 놓칠 수 없는 말이었다.

“경석이 형, 오신답니다. 현수야, 가자.”

발소리를 죽이고, 우르르 달려갔다.

이미 교수들 모두 수술 방 문 앞에 도열해 있었다. 대선배이자, 스승이자, 큰 스승에 대한 예우였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이기에 도리어 긴장감이 느껴졌다.

위이이잉!

유리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송재덕 교수, 고성문과 함께 허경발 교수가 들어섰다. 하얀 머리, 마른 어깨, 꾸부정한 허리가 세월을 말해 주었지만 눈빛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다 같이 한마음을 담아 인사했다. 존경심에 절로 허리가 깊게 숙여졌다.

“안녕하십니까?”

“시연 준비해야 할 사람들이 왜 나왔습니까? 인사는 나중에 하고 준비부터 하세요. 이 교수, 기대가 큽니다.”

부드러운 말투 속에 숨은 카리스마가 확 다가왔다. 이준영 교수마저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쩔쩔매고 있었다.

“선생님, 이리로 가시죠.”

이혁민 교수가 상기된 얼굴로 직접 자리를 안내했다.

나직한 목소리가 오가는 가운데 늙은 스승과 장년이 된 제자들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막 회의실에 들어서려던 허경발 교수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눈길의 끝이 한 명의 의사에게 머물렀다.

서운할 정도로 무뚝뚝한 제자가 극찬을 아끼지 않는, 자주 보지 못해도 언제나 미소를 머금게 만드는, 가슴으로 아낄 수밖에 없는 마지막 제자가 겸손하면서도 당당한 얼굴로 서 있었다.

김지훈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