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874화 (874/1,329)

4화. 진정한 실력 Ⅱ (1)

차분한 목소리에 존경의 마음이 가득 실렸다.

“그동안 일신상의 문제로 외부 출입을 자제하셨던 허경발 선생님께서 내일 시연에 참석하십니다. 외과 초창기를 이끄시며 초석을 다진 선생님께 후배들이 이룬 성과를 보여 드릴 수 있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자리가 언제 또 있을지 모를 연세가 되셨습니다. 마지막까지 함께 자리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순 다소 소란스러웠던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모든 외과 의사의 귀감이 되는 의사!

오래전 은퇴했고 외부 활동을 금한 지 많은 시간이 흘렀건만, 거대한 존재감을 잃지 않고 있었다.

허경발이라는 이름 석 자만으로 강한 긴장감까지 전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의 뇌리에 박힐 정도로 큰 업적과 인품을 갖췄기 때문일 것이다.

대가라는 말이 부족한 거인!

이젠 전설일지도 몰랐다.

김지훈이 흠칫 놀라며 훅! 숨을 내뱉었다.

시연 준비 때 한 차례 말이 나왔었다.

참석 자체로 자리를 크게 빛내 줄 스승이었지만, 한 해 두 해 쌓여 가는 나이는 거동조차 큰 부담이었다.

제자들에게, 제자의 제자들에게 모두 가슴 아픈 일이기에 더 이상 거론하지 못했다.

‘큰 스승님께서 오신다고? 건강은 괜찮으신 건가? 후우!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떨리네.’

그간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해 기쁘기보다 죄송한 마음이 앞섰다. 어렵게 참석하는 큰 스승 앞에서 실패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시연이 주는 부담과 압박감이 덩달아 커졌다.

참석자들에겐 또 다른 기회였다.

이준영 교수는 허경발 교수가 개척한 간담도 파트를 이어받은 제자다. 자신의 스승이 있는 자리에서 일반적인 수술을 시연하진 않을 것이다. 마지막 날 시연될 두 건의 수술은 스승에게 바치는 영예일지도 몰랐다.

이혁민 교수의 말이 이어졌다.

“첫 번째는 이준영 선생님의…….”

“비장 절제술?”

기대한 바였지만 생각지도 못한 수술에 참석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렸다.

마지막 날을 장식하기에 이보다 더 의미 있고, 큰 수술은 없을 것이다.

더구나 수술 하나가 더 있다고 했다. 살짝 뜸을 들이는 것으로 봐서 간 절제술일 가능성이 높았다.

진충기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일반외과 의사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었을 허경발 교수가 참석한다. 비장 절제에 간 절제까지 더해진다면 더 이상 완벽한 시연 행사는 없을 것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최악의 경우가 아니기만을 바랐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가 무참히 깨져야 김지훈의 이름을 듣지 않을 수 있었다.

‘여기까지만, 여기까지만.’

우연인지 모르지만 이혁민 교수의 시선이 잠시 최인호 교수와 진충기에게 머물다 사라졌다. 마치 내일 꼭 와야 한다는 눈빛을 보낸 것 같았다.

“두 번째 수술은.”

참석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혁민 교수의 입에 집중됐다.

“김지훈 선생의 간 절제술입니다.”

누군가 요란하게 손뼉을 치고 말았다. 회의실이 소란스러워질 정도로 반응이 격했다.

최인호 교수는 말없이 어딘가를 응시할 뿐이었다.

‘허경발 선생님 앞에서 비장 절제와 간 절제를 시연한다고? 이준영에게 뒤통수 제대로 맞았네. 이번 시연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이혁민의 잔머리까지 더해졌겠지.’

깍지 낀 주먹 사이에 입을 묻은 진충기가 삐져나오는 신음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제길! 극적인 효과를 노리겠다는 거야? 간 절제술은 나도 성공했어. 그런다고 김지훈이 더 뜰 수 있을 것 같아?’

이혁민 교수가 참석자들을 둘러보았다. 놀라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얼굴이었다.

무엇이 더 남은 걸까?

시연 내내 겸손을 유지했는데 자부심까지 내보였다.

모든 참석자들의 시선이 모이자 서서히 입을 열었다. 이어진 말에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S 병원 의사들만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미 수술을 성공하기라도 한 것처럼.

담담한 목소리였다.

“기존에 양성 종양을 대상으로 두 차례 부분 간 절제를 시행했지만, 이번은 좌측 간에 발생한 간암 1기입니다. 부분 절제가 아니라 좌측 간 전 절제술이 되겠습니다. 두 수술 모두 시간을 요하기에 내일은 아침 8시 30분부터 시연을 시작합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좌측 간 부분 절제술과는 모든 면에서 차원이 다른 수술이었다. 더구나 1기라지만 정확하고 확실한 수술을 요하는 간암 환자다. 개복 시에도 어려움이 상당한데 복강경으로 시도한다니 충격적인 정도가 아니었다.

성공한다면 이 역시 국내 최초였다.

헛바람까지 터졌다.

아무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어떤 식으로 수술할지 생각만으로도 긴장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드문드문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각자의 의견을 교환하던 중 소란스러울 정도로 갑자기 목소리가 높아졌다.

기대 이상의 대단한 행사가 됐다.

비장 절제술과 좌측 간 전 절제술!

간간이 보고되지만 성공률이 지극히 낮은 수술과 최초로 시도되는 수술, 모두 성패를 뒤로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수술이다.

모든 과정이 살얼음판일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더 이상의 의미가 없는데 불같은 호기심까지 자극했다.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 들불처럼 퍼졌다.

허경발이라는 대가 앞에서 벌어지는 스승과 제자의 진검 승부!

절대 승부를 가리는 자리가 아니었지만 참석자들의 뇌리에 스친 생각이었다.

수술 자체가 다르다고 해도 누가 더 매끄럽고, 능숙하게 진행하는지 간접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기회였다.

시연에 이런 재미까지 곁들여질지 누구도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허경발 선생님의 제자가 이준영 선생님이고, 그 제자가 김지훈 선생이면 결국 큰 스승님 앞에서 제자들이 경연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네. 야! 이젠 김지훈 선생이 무서울 정도야. 이제 전임 된 의사를 두고 이런 생각까지 들 줄은 몰랐어.”

“난 그보다 이준영 선생님이 더 대단하게 보여. 나 같았으면 내가 간 절제를 하고, 김지훈 선생에게 비장을 주겠어. 간암이면 실패한다고 해서 절대 욕먹을 수술이 아니잖아. 시도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데, 그걸 전임에게 줘? 제자가 아니라 제자 할아비라도 난 못 준다.”

“결국 둘 다 여러모로 대단한 의사들이네.”

이미 대가 소리를 듣고 있는 이준영 교수의 새로운 면모가 수많은 의사들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김지훈이란 이름이 수없이 오르내렸다.

스승과 비교되다니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최초의 수술이라는 수식어가 부끄럽지 않은 써전이었다. 오늘 시연한 수술만으로도 이미 인정받았다는 말이었다.

진충기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간암을? 정말 라파로로 전 절제술을 시도한다고? 성공할 리가 없어. 당연히 실패할 수술이야.’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드러나고, 드러내려 하는 사람은 오히려 묻히고 있었다.

갈대처럼 흔들리는 세인들의 평판과 관심 때문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의 처신, 스승과 제자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누구도 탓할 일이 아니었다.

고성문이 무릎을 탁 치며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래서 송 원장이 내일 아침 일찍 보자고 했구나. 스승님은 몸도 불편하신데 괜찮으실지 모르겠네. 그나저나 다들 배 속에 뭘 숨겼나? 김 서방은 간암 수술이라는 걸 쏙 빼놓고, 이 과장도 시치미를 뚝 떼고 앉았네.’

괘씸하다는 표정을 짓다 말고 씨익 웃었다.

너무 좋은 일이 있으면 웬만한 일은 다 용서가 되기 마련이다. 스승 걱정까지 슬그머니 밀려났다. 내 사위가 김지훈이라는 말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눈치가 역력했다.

그냥 지나칠 송재덕 교수가 아니었다.

“마이크 드릴까요? 마이크? 아니다. 그냥 종이에 써서 온 병원에 한 부씩 돌리죠.”

“갑자기 무슨 소리야?”

“얼굴에 다 쓰여 있습니다. 나이는 어쩔 수 없네요. 그렇게 꼬장꼬장했던 양반이 왜 이렇게 변했을까? 사위 자랑도 팔불출이라고 한 말 그새 잊어 먹었어요? 큰일이네, 큰일. 부러워하는 나는 더 큰일이네, 더.”

“험험! 엉뚱한 소리는 왜 해? 송 원장도 그러는 거 아니야. 스승님 모시러 가자고 똑똑하게 얘기를 해야지, 밑도 끝도 없이 아침에 시간 내라고 하면…….”

“제가 말씀을 안 드렸나요? 분명히 스승님께서 좋아하시면서 참석한다고 했다는 말씀 드렸을 텐데 이상하네. 이상해. 손주 보시더니 마음이 붕 뜨셔서 못 들으셨군요. 맞네, 맞아. 아이쿠! 다들 가시네. 인사 좀 하고 오겠습니다.”

얼렁뚱땅 넘어간 송재덕 교수가 부리나케 이혁민 교수에게 달려갔다.

다들 참석자들에게 인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준영 교수와 김지훈이 나란히 서서 열심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성황리에 둘째 날 시연이 막을 내렸다.

병원을 나서는 참석자들의 눈에 온통 흥분과 기대가 가득했다. 시연을 한 집도의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특히 이혁원과 나종진은 부르르 몸까지 떨어 가며 자신의 감정을 활짝 드러냈다.

“종진아, 정말 탈장 준비 많이 한 게 눈에 딱 보이더라. 대단했어. 내 수술은 어땠어?”

“두말하면 잔소리지. 얼핏 들었는데 참석한 선생님들이 엄지를 쭉 올리셨다고 하더라.”

“그래? 수고했다, 딱 그 말 한마디만 하셔서 불안했는데, 다들 좋게 봐주셨다니 다행이다.”

강병옥은 부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눈만 껌벅거렸다. 송진우는 담도 폐쇄 수술을 참가한 것만으로는 부족한지 강병옥과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벌게진 얼굴로 말이다.

흥분과 즐거움은 여기까지다.

이번 시연의 하이라이트이자 핵심이 될 간 절제와 비장 절제가 남았다. 철저한 준비가 없으면 도리어 망신살이 뻗칠 수도 있었다.

최고의 수술 팀을 꾸렸다.

이준영-신현수-나종진-강병옥.

김지훈-이경석-이혁원-송진우.

모처럼 수술 인원을 꽉 채웠다. 개복을 대비하는 차원이지만 시연이라는 상황이 맞물렸다.

게다가 비장도 모자라 간암 1기다.

“오늘은 나도 같이 공부하자. 나도.”

“나종진, 내 자리도 마련해라.”

“지 교수하고 저도 참석해야 하는데 공간이 부족하겠습니다. 1층 회의실에서 준비해야 할까요?”

“그게 좋겠다.”

교수들도 모두 참석한다는 소리에 긴장이 치솟을 대로 치솟았다. 준비가 소홀하면 시연도 하기 전에 혼꾸멍날 것이다.

회진을 돈 후 재빨리 회의실로 향했다.

그때 송재덕 교수가 손을 흔들었다.

“지훈아, 교수야, 얼굴 한번 보자. 어제오늘 경황이 없어서 경아 얼굴도 못 봤다. 얼굴도. 이 교수, 자기도 갈래?”

“그러시죠.”

대답도 하기 전에 산부인과 병동으로 발길을 돌렸다.

스승에게 축하받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왠지 쑥스러운 일이었다. 얼굴이 벌게지는 찰나 난데없는 상황에 소리를 지를 뻔했다.

우아악!

이미 질렀는지도 몰랐다.

“고성문 선생님도 계신데 내도 가자.”

“김 교수, 우리도 인사는 해야겠다. 지 교수, 주스라도 사 가야 하는 거 아냐?”

“제가 사 가겠습니다.”

친한 친구라면 몰라도 아내가 출산했다고 교수들까지 우르르 몰려와 축하해 주는 경우는 한 번도 못 봤다.

더구나 다들 윗사람이다. 난처한 정도가 아니었다.

“지동훈 선생님, 먹을 거 많습니다.”

억지로 지동훈 교수의 손을 잡아끌었다.

쑥스러움이 밑도 끝도 없이 밀어닥쳤다.

교수들이 가는데 전임과 전공의가 가만히 서서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졸지에 한두 명도 아니고 대부대가 움직였다.

“지훈아, 좋겠다. 나도 늦게 낳을걸.”

이경석의 말에 얼굴이 얼마나 벌게졌는지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앞장선 이혁원과 나종진이 노크를 하는 모습에 서둘러 문을 열었다. 회진도 아니고, 축하하기 위해 온 동료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어라?

군대에 있어야 할 손일석까지?

“손일석, 니 웬일이고? 아! 니들 동서지?”

“초엉성! 근무 때문에 하루 늦었습니다. 시연도 보기 위해 겸사겸사 왔습니다.”

당황한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고성문이 벌떡 일어나 손을 저었다.

“송 교수, 이 교수, 이 과장, 어제 내 얼굴 봤으면 됐지, 왜 왔어? 자식 있으면 누구나 다 손자 보는 건데, 뭐 큰일이라고 다들 와?”

“에이! 마음에 없는 소리 하지도 마세요. 그리고 손자 보러 온 게 아니라, 김 교수 와이프하고 딸 보러 온 겁니다.”

“요샌 딸이 재산이라는 말까지 있는데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립니다. 좋으시겠습니다.”

이준영 교수의 말문까지 터졌다.

왁자지껄!

고경아도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반쯤 몸을 일으키다 말고 얼굴을 찡그렸다.

“경아야, 많이 힘들지? 푹 쉬어야 한다, 푹. 아이고! 너무 많이 와서 도리어 힘들겠다. 얼굴 봤으니 됐다. 몸조리 잘해. 다들 가자. 가자.”

안정을 요하는 산모이기에 한마디씩 간단하게 축하 인사만 하고 빠져나갔다.

사실 오래 있을 자리도 아니긴 했다.

“형수님, 벌써 손자가 둘이네요. 경순이 몸조리도 다 안 끝났을 텐데 고생하세요. 고성문 선생님, 형수님 고생시키지 마시고 알아서 밥 챙겨 드세요.”

“내가 다 알아서 하니까 쓸데없는 소리 좀 하지 마.”

“요즘은 세탁기 돌릴 줄 아세요? 전공의 때…….”

사위가 둘에 딸자식 앞이다. 그보다 가장 무서운 사람이 두 눈을 뜨고 있다.

고성문이 서둘러 송재덕 교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손일석과 어머니 같은 장모, 최문옥 여사도 인사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단 4명만 남았다. 의사 셋만으로도 병실이 꽉 찬 것처럼 느껴졌다.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던 김지훈이 좋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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