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873화 (873/1,329)

3화. 진정한 실력 Ⅰ (2)

수술 사이에 잠시 쉬고 마취하는 시간까지 있는데, 이제 12시도 되지 않았다.

신현수와 이경석의 수술이 진행 중이지만 수술실 하나를 놀릴 이유가 없었다.

점심 식사 시간을 조금만 할애하면 또 다른 관심이 집중된 수술을 진행할 수 있었다.

바로 전공의 수술이다.

김지훈이 이혁민 교수를 찾아 허락을 구했다.

거의 모든 참석자들이 각자의 병원에서 수련을 담당하고 있다. 갈수록 전공의 인원은 줄고, 펠로우는 도리어 늘어나는 추세다. 어떤 식으로 전공의를 교육해야 하는지 고민이 많은 상황이었다.

수술이 시작된다는 말에 기대감이 증폭됐다.

전공의의 수술은 어떨까?

퍼스트인 김지훈은 카메라만 잡을 뿐이었다. 얼마나 수련을 효과적으로 시켰는지 알 수 있는 기회였다.

먼저 나종진의 탈장 수술이 진행됐다.

차이는 확실했다.

드문드문 미숙한 면이 보였지만 나종진의 기본기는 의외로 탄탄했다. 특히 인공 막 수처를 진행할 때는 많은 이들이 놀라움을 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시연에 여러 의미를 담는다더니, 정말 생각이 많아지게 하네. 치프 때 저 정도 실력을 갖추려면 교육 방식을 다시 고민해야 할 것 같네.’

수술 실력이나 과정만을 보기 위한 시연이 아니었다. 어떤 면에서는 절박한 문제이기도 했다.

결국 참석자 사이에 앉아 있던 교수들이 질문 공세에 시달렸다.

“송 원장님, 4년 차 말이라고 하지만 저 정도면 꽤 해 본 것 같은데, 도대체 수련을 어떤 식으로 시키신 겁니까?”

“라파로는 이 교수하고 전임들이 맡아서 교육시키고 있습니다. 점심 식사 하시면서 천천히 물어보세요.”

“과장님, 전공의 교육 스케줄이 조금 다를 것 같은데 언제 시간 나면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언제든 말씀만 하세요.”

박승준 교수와 지동훈 교수도 대화의 문을 열고 있었다.

“박 교수, 지 교수, 병원 옮긴다고 할 때 불안했는데 선택 잘했네. 어제오늘 보니까 실력은 말할 것도 없고, 분위기가 상당히 좋아. 4년 차도 라파로를 하는데 서운하진 않아?”

“많이 안 해서 그렇지, 어려운 케이스는 저희도 같이합니다. 사실 다른 수술이 굉장히 많아서 라파로까지 할 여력도 없습니다.”

“말은 들었어. 참! 박 교수, 곧 과장 된다며?”

“예? 이혁민 선생님이 계신데 누가 그런 말을 합니까?”

“그래? 이혁민 선생한테 들었는데 잘못 들었나?”

순간 박승준 교수가 입을 꾹 다물었다.

외부인에게 내밀한 얘기를 할 정도로 신뢰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찬 모양이었다.

지동훈 교수는 자신의 일처럼 좋아했다.

째깍! 째깍!

시곗바늘이 1시를 향해 달려갔다.

신현수의 첫 번째 비만 수술이 끝났다.

점심시간이 지났지만 많은 참석자들이 이경석과 나종진의 수술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오전에 시작된 수술이 모두 끝나고 나서야 우르르 식당으로 향했다.

이제 신현수와 이혁원의 수술만 남았다.

다들 아쉬워하는 얼굴이었다.

이틀에 걸쳐 이준영 교수와 김지훈의 수술을 보며 갈증 비슷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보고 싶은 수술이 많지만 환자가 따라 주지 못하는 현실을 탓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오늘은 이걸로 끝인가? 적응증이 되는 응급 수술이라도 떴으면 좋겠는데, 아프라고 제사를 지낼 수도 없고 난처하네.”

“그나저나 내일은 무슨 수술이 남은 거지?”

다들 토요일 시연이 꽤나 궁금한 눈치였다.

“아직 발표가 안 났잖아.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같은 수술 반복되면 조금은 실망스럽겠어.”

동일한 수술의 반복!

당연히 환영하는 사람이 있다.

더 이상 새로운 수술이 없다면 최인호 교수와 진충기에게는 가장 바람직한 일이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하거나 부실했다고 판단하는 의사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입을 이용한다면 도리어 이준영 교수에게 타격을 줄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죽으라는 법은 없지. 이 정도 수준에서 시연이 마무리된다면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울 거야. 잘 이용한다면 이준영의 평판도 덩달아 나빠지겠지.’

‘김지훈 수술은 담낭 절제술과 탈장뿐인가? 이렇게 되면 도리어 잘된 일이잖아. 학회 발표는 발표에 불과해. 기회를 갖고도 보여 주지 못하면 얼마든지 역전시킬 수 있어.’

똑같이 입꼬리가 말렸다고 같은 의미는 아니다.

충분히 만족한 사람도 있다.

고성문의 입이 쫙 찢어져 있었다.

자신에게 수술을 가르칠 때와는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로 변한 김지훈의 실력에 그저 웃기만 했다.

누구보다도 먼저 수고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는데 김지훈이 보이지 않았다.

‘점심도 안 먹고 뭐 하는 거야? 딸 보러 갔나?’

일부러 천천히 식사를 했지만 점심 식사가 끝날 때까지 보이지 않았다. 선배 의사들에게 인사도 하고, 평가를 청할 만한데 이상한 일이었다.

어느새 오후 시연 시간이 다 됐다.

모두들 서둘러 자신의 자리로 향할 때, 이혁민 교수가 급히 식당으로 들어왔다. 한숨 돌렸다는 표정으로 일정 변경을 알렸다.

‘아이고! 김지훈이 하필이면 박 교수하고 오늘 당직을 바꿔서 안 올 줄 알았는데 정말 다행이네.’

박승준 교수가 그동안 꽁꽁 감추어 두었던 일복을 아주 적절한 때에 발휘했다. 이혁민 교수에게 제대로 점수 따는 순간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수술이 두 건 추가됐습니다. 준비가 끝나는 대로 김지훈 선생의 담낭농증과 이경석 선생의 충수돌기 농양 수술이 시연될 예정입니다.”

담낭농증이야말로 기대했던 수술 중 하나였다.

다들 반가워하는 기색을 보였다. 특별히 볼 수술이 없다는 사실에 토요일 일정만 확인하고 돌아가려던 의사들의 발길까지 붙잡았다.

이것으로 끝일까?

“내일 일정은 오늘 시연이 끝날 때쯤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알려 주시면 안 됩니까?”

“뒤늦게 알려 드릴 수밖에 없어 송구합니다. 확실하게 결정되지 않은 수술이 하나 있지만, 곧 우리 모두 바라는 결정이 나올 것이라 믿습니다.”

지금까지 결정되지 않았다?

모두가 바라는 결정?

참석자들의 눈이 반짝였다.

가장 기대했던 수술, 케이스가 많지 않은 데다 잡기까지 힘든 수술, 바로 간 절제술일 가능성이 높았다.

‘드디어?’

‘야! 간 절제면 바랄 것이 없겠다.’

‘제길! 정말 간 절제술을 하는 거야?’

이혁민 교수가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송재덕 교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웃었다.

‘이미 다 결정됐는데 아닌 것처럼 발표해? 오늘 온 사람들 끝까지 잡아 두려고 별 방법을 다 쓰네.’

과장으로서 부리는 욕심을 탓할 이유가 없었다. 그만큼 시연이 풍성해질 것이다.

오후 시연이 시작됐다.

내일 수술에 대한 막연한 기대 때문인지 담낭농증 수술에 더욱 큰 관심이 집중됐다.

신현수의 비만 수술도 만만치 않아 보였지만 담낭이 거의 걸레 조각처럼 너덜너덜한 상황이었다.

“자칫하면 동맥 끊어 먹기 십상인데, 저 정도면 개복해야 하는 거 아냐? 상당히 위험해 보여.”

많은 참석자들이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들려온 소리에 고성문이 침을 꿀꺽 삼켰다.

처컥! 처컥!

삐이이이! 삐이이이!

기계 소리, 보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너덜너덜해진 담낭을 박리하고, 동맥과 담낭관을 처리하는 과정 모두 손에 땀을 쥐게 했다. 담석이 원인인지 총수담관을 열고, T-tube를 삽입하는 과정까지 여간 능숙한 것이 아니었다.

트집 하나 잡을 수 없었다.

‘대단하다. 대단해. 저러니 최초로 간 절제술을 시도할 수 있었겠지. 내일 시연에 간 절제가 있으면 더할 나위가 없겠어.’

다들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팽팽한 긴장감마저 느껴질 정도로 진지한 순간, 나직하게 들려온 송재덕 교수의 말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제일 오른편에 보이는 담낭 절제술은 전공의가 하는 건데 이름이 이혁원이에요, 이혁원. 아버지가 누군지 아세요? 이준영 교수예요, 이준영 교수. 아버지하고 아들은 대개 서먹하기 마련인데 지금 수술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평소에도 입에 자물쇠 달고 사는 사람인데, 아들 기분이 어떨까요?”

“허허! 서로 자랑스러워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한데, 저도 이 교수 속을 잘 몰라서 말이에요. 아마 수술 끝나고 나면 무뚝뚝한 목소리로 ‘수고했다.’ 딱 한마디만 할 겁니다.”

목소리 흉내까지 냈다.

결국 나직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다소 딱딱했던 분위기가 스르르 풀어졌다.

그 덕에 한결 편한 마음으로 시연을 즐길 수 있었다.

모든 일에 진지함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때론 한발 뒤로 물러날 때 더 큰 것을 얻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불행히도 진충기에겐 필요한 여유가 사라졌다.

거침없으면서도 자연스럽고, 빠르면서도 정확한 손길이 물 흐르듯 이어지는 모습에 이를 악물고 있었다. 초조함을 넘어 분노하고 있었다.

‘도대체 시연까지 온 인간들이 수술도 안 하고 사나? 간 절제술이어도 냉정해야 할 사람들이 담낭농증만 보고도 감탄을 하면 어쩌자는 거야? 제길!’

더 이상 시연을 볼 수 없었다. 체면이 있으니 끝까지 앉아 있으라는 최인호 교수의 눈길도 무시하고 밖으로 나왔다.

비가 오려는지 후텁지근함이 극성을 부려 이내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불안, 초조, 분노, 불쾌함.

“시펄! 날씨까지 왜 이 모양이야?”

욕을 내뱉으며 담배 한 대 빼물던 진충기가 눈살을 찌푸렸다. 몇몇 사람이 다른 건물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중에 너무 익숙하지만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 보였다.

오창도였다.

왜 왔을까?

집도 여부로 환자와 소송이 걸려 있고, 책임 공방까지 벌이는 상황이다. 최인호 교수와 자신이 있다는 것을 빤히 알 텐데 시연을 보러 왔다면 이보다 괘씸한 일은 없었다.

혹시 소송 때문에 김지훈을 만나러?

더욱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창도가 잠시 눈가를 굳히더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다른 의사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준영, 김지훈, 신현수, 이경석, 전공의.

들려오는 이름에 치미는 화를 억제할 수 없었다. 시연을 유치했으면 온통 자신의 이름만이 들렸을 것이다. 담배를 뻑뻑 빨아 대던 진충기의 눈이 번쩍였다.

“십중팔구 내일 시연에 간 절제술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남들 앞에서 보여 줄 수 있다면 그만큼 자신 있다는 얘기겠죠? 오늘 집에 가려고 했는데 꼼짝 없이 붙들렸습니다. 오창도 선생님, 우리 중에서 라파로 경험이 제일 많으시니까 오늘 술 한잔하면서 어떻게 수술할지 예상해 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거 좋지.”

‘저 자식하고 뭘 하자고? 라파로 경험이 제일 많아? 이 정도로 허접한 놈들이 어떻게 초청장을 받았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슴을 억제하지 못했다.

김지훈과 오창도를 연상하는 순간 체면이고 나발이고 다 내팽개치고 말았다.

대화를 끝내고 맨 뒤에서 건물로 들어가던 오창도를 불러 세웠다.

“오창도.”

“왜 그러십니까?”

“너 내 눈에 한 번만 더 보이면 어떻게 될지 분명히 경고했는데, 여기가 어디라고 와?”

오창도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진충기 선생님, 여기는 시연 행사장입니다. 난 선생님을 보러 온 게 아니고요. 경고를 하든 말든 상관없고, 법정에서 뵙겠습니다.”

“법정? 끝까지 이럴 거야?”

“한 말 또 하고 싶지 않습니다. 원칙대로 각자의 과실 부분만 책임지면 되는 일입니다.”

주먹을 움찔움찔 어쩔 줄을 몰랐다.

“오창도, 더 이상은 안 되겠다. 넌 이제 끝이야. 시골구석에 처박혀서 조용히 감기 환자나 보면서 살아. 앞으로 메스 잡을 생각도 하지 마.”

협박성 발언이었다.

오창도가 눈가를 찌푸렸다.

박병두 환자의 소송 건이 아니더라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뜨거운 것이 욱하고 치밀어 올랐지만, 소리 높여 싸워 봐야 똑같은 사람이 될 뿐이었다.

‘진충기 당신과 최인호 선생님의 힘이면 내가 발붙일 병원이 없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시연을, S 병원 분위기를 봤잖아? 최고의 써전이 어떤 써전이어야 하는지 깨닫지 못하면 당신도 오래가지 못할 거야.’

“난 이제 H 병원 소속이 아닙니다. 한때 동료였던 사람들과도 인연 끊었으니까 각자 갈 길을 가죠.”

강하게 나가면 자신과 관련이 있는 동료들에게까지 피해를 줄 진충기였다. 마음이 쓰리고 아프더라도 이젠 무관한 사람이어야 했다.

‘이렇게까지 말해야 하는 이유는 당신이라는 사람 때문이야. 조금이라도 오래 버티고 싶다면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지 깨닫길 바라.’

오창도가 조용히 진충기를 바라보고는 휙 뒤돌아섰다. 마치 마음대로 해 보라는 눈빛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짜증으로 도배가 된 진충기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시연도 끝나기 전에 분노에 파묻혔다.

‘아직 안 끝났어. 설령 김지훈이 내일 간 절제를 한다고 해도 성공은 별개 문제야. 오창도 너 같은 놈은 날 쳐다보지도 못하게 돼 있어.’

부르르 주먹을 떨던 진충기가 있는 욕, 없는 욕을 해 가며 시연장으로 다시 들어갔다. 쳐다보기도 싫은 김지훈의 수술이 막 끝난 상태였다.

짝짝짝짝짝!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퍼졌다.

둘째 날 시연이 차례차례 모두 끝났다. 조금이나마 아쉬움을 달래 준 오후 시연이었다.

환자 확보가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지만, 대부분의 행사는 마지막 날 대미를 장식하기 마련이었다.

내일 시연에 대한 기대와 궁금함이 더욱 커져 아무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이혁민 교수가 참석자 앞에 섰다.

“내일 마지막 시연 일정이 확정됐습니다. 비록 두 건이지만 정말 의미가 깊은 수술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 전에 한 가지 알려 드릴 일이 있습니다.”

무척 진지한 기색이었다.

시연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도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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