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드러내지 않아 빛이 나는 사람 Ⅲ (2)
엄마, 아빠, 딸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체중, 키에서부터 건강 상태까지 자세하게 검사하기 위해 이삼 일 동안 신생아실에 있어야 한다. 모유 수유할 때를 빼고는 유리창 너머로 볼 수 있을 뿐이다.
아무리 안아 주고 싶어도 참아야 한다.
고경아가 입원실로 옮겨졌다.
온 가족이 다 모였다.
어떻게 연락받았는지 한수임까지 보였다.
축하! 축하! 축하!
흥분, 기쁨, 고마움이 가라앉지 않았지만 불행히도 입원실 자체가 직장이다. 산후 점검을 위해 들어온 간호사를 보는 순간 이준민과 시연이 떠올랐다.
‘준민이는 별일 없고, 시연은 잘 진행되고 있겠지?’
손가락 하나 까딱이기 힘들 정도로 지친 고경아가 잠에 빠졌다. 퉁퉁 부은 얼굴이 너무도 안쓰러워 자리를 지키고 싶었지만 지금은 안정이 필요한 때였다.
고경희만 남았다.
‘경아 씨, 옆에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일 빨리 마치고 돌아올게요. 그때까지 푹 자요.’
“처제, 무슨 일 있거나 언니가 날 찾으면 바로 연락해.”
신신당부하고 살그머니 빠져나왔다.
아직도 벌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병동으로 향했다.
고경아가 잘 동안 할 일이 많은데,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조그맣고 빨간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달려갈 수밖에 없었다.
바보처럼 히죽히죽 웃음만 나왔다.
‘정말 예쁘네. 누굴 닮았지? 딸은 아빠 닮아야 예쁘다고 하던데, 날 닮으면 정말 예쁠까? 경아 씨가 서운해하겠지?’
이름표도 학인하지 않고 어떻게 딸을 알아보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마도 아빠의 강렬한 본능이 정확하게 피붙이를 찾아 줄 것이다.
점심시간이 막 끝났으니 시연이 절정에 이르렀을 시간이었다. 참석자들과 함께 앉아 같은 시각으로 스승과 동료의 수술을 보고 싶었다.
‘그 전에 준민이부터.’
고경아가 깨기 전에 모든 일을 다 마칠 수 있을까?
바쁘다, 바빠!
깊은 잠에 빠진 조그만 아기의 호흡이 왠지 부드럽게 느껴졌다. 뿌듯함보다 수술 부위가 잘 아물길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이준민의 뺨을 만졌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방금 전 딸에게 느낀 감촉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수술했다. 분명 건강하게 퇴원할 것이란 확신이 다가왔다.
6주 된 아이와 딸의 얼굴이 겹쳤다.
‘준민아, 넌 반드시 건강해질 거야. 우리 딸도 건강해야 한다. 절대 아프면 안 돼.’
순간 가슴 깊숙한 곳이 울컥거렸다. 까닭 모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오늘 같은 날은 없었다.
첫 시연을 포기한 대가를 너무 과분하게 받았다. 호된 소리를 들어도 쌌을 성급한 결정에도 말 몇 마디로 지나간 이유일 것이다.
준민이 엄마가 조용히 물었다.
“선생님, 수술은 정말 잘된 거죠?”
“예. 별문제 없었습니다만, 경과를 지켜봐야 합니다. 옆구리에 있는 심지 색이 맑고, 변 색깔도 정상적으로 보여야 안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준민이가 며칠간 제대로 먹지도 못했어요. 언제 먹을 수 있죠? 코 줄은요?”
모든 것이 불안하고, 궁금할 엄마였다.
“순조롭게 회복돼도 3~4일은 금식해야 합니다. 코 줄도 방귀가 나오거나 변 상태가 좋을 때 뺄 수 있습니다. 생명줄이나 마찬가지니까 빠지지 않도록 정말 조심하셔야 합니다.”
몇 가지 주의할 사항을 반복해 강조한 후 병실을 나왔다. 시연장으로 가기 전에 꼭 봐야 할 환자가 한 명 더 있었다.
내과 병동으로 향한다고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신생아실 앞이었다.
세 번째 만남이다.
갓 태어난 아이들은 다 비슷비슷하게 보이건만, 유리창 너머 한 아이가 유독 예뻐 보였다.
한동안 발을 뗄 수 없었다. 옆에서 고개를 기웃거리는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딸이 제일 예쁘네.”
‘예쁘긴 하지만 어림없는 소리지. 어딜 봐도 우리 딸이 훨씬 더 예쁜데 무슨 소리야?’
부모는 모두 팔불출이 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은근한 신경전을 벌인 후 내과 병동으로 향했다. 갑자기 딸과 장인어른의 얼굴이 떠오르며 고대했던 일이 생각났다.
‘이름을 어떻게 지으셨을까? 일주일 빨리 나왔다고 설마 아직도 안 지으신 건 아니겠지? 경아 씨랑 상의한 희연이라는 이름도 괜찮은 것 같은데. 김희연! 어쩐지 느낌이 좋아.’
어느새 병실 앞이었다. 붕 뜬 기분이 싹 사라졌다.
환자의 눈에 걸린 두려움 때문이었다.
어떤 이유로든 더 이상 수술 결정을 미룰 수 없었다. 최대한 담담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눈 후 결정을 내렸다.
“그동안 상의드린 대로 수술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마음 편하게 먹으세요. 예정대로 수술 시작하고, 잘 끝나면 빨리 회복되실 겁니다.”
병실을 나온 김지훈이 강한 부담에 훅훅 숨을 내뱉었다. 지금까지 한 수술 중 가장 어려운 수술일 수 있었다. 기구를 다루는 실력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하기에 더욱 시연을 볼 필요와 이유가 있었다.
수술 방으로 들어선 김지훈이 슬쩍 눈치를 보았다.
분만실, 신생아실, 수술실은 한 통로로 연결돼 있다. 몇 발만 수고하면 바로 신생아실이다.
어느새 또 딸을 보고, 입원실까지 들르고 있었다. 아직도 빨갛기만 하고 아직도 퉁퉁 부은 얼굴인데, 보고 또 봐도 예쁘다는 생각만 들었다.
“지훈 씨, 지금도 시연 중이죠? 경희가 있으니까 내 걱정 하지 말고 할 일부터 해요.”
마음씨까지 곱고, 아름답다.
‘내가 장가는 정말 잘 갔네.’
바삐 움직였지만 시간이 다소 지나서야 수술 방 내 회의실에 들어설 수 있었다.
다행히 모든 시연 수술이 진행되고 있었다.
낯익은 선배 의사들이 상당히 많았다. 정중히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첫날 오겠다던 오창도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수술 방에 마련된 시연장에 앉을 수 있는 연배가 아니긴 했다.
‘오창도 선생님, 진충기와 부딪치기 싫겠지만 오셨겠죠? 지금 강당에 계실 것이라 믿습니다.’
시연 시작 전부터 관심을 받았던 김지훈이었다. 멀쩡하게 병원에 있으면서 이제야 나타난 상황에 다들 궁금함을 감추지 못했다.
“김지훈 선생, 첫날 시연인데 참가하지도 않고, 어디서 뭐 하다 이제 와? 정말 오늘 시연은 없는 거야?”
“수술이 하나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내일 참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수술실에 있었어? 무슨 수술인지 모르지만 의사가 한두 명이 아닌데 조정 좀 하지. 자네 수술 잔뜩 기대하고 왔어. 서운해.”
“사정이 그렇게 됐습니다. 죄송합니다.”
“내일은 확실하게 시연에 참가하는 거지?”
“예. 두 건 집도 예정입니다.”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예정됐던 첫 시연을 하지도 못했는데 왜 이렇게 좋아해? 분명 억지로 웃는 얼굴은 아닌데.’
누군가에게는 김지훈에게 쏟아지는 관심 자체가 탐탁지 않을 것이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입도 다물지 못하는 모습에 도리어 기분이 상했을 수도 있었다.
김지훈도 비슷한 감정이긴 했다.
반대쪽에 앉아 있는 최인호 교수와 진충기가 신경 쓰였지만 오늘 이후로 많은 것이 바뀌기를 바랐다.
스승과 동기들의 수술을 보며 느낀 점이 많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존중해야 자기 자신도 존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바랐다.
‘이번 행사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나?’
이내 화면에 집중한 김지훈이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눈가를 찡그리며 수술 과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짬짬이 시간 날 때 보는 것과 진득하니 앉아서 보는 것은 상당히 달랐다.
이미 알고 있긴 했지만 스승의 수술은 흠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에 가까웠다. 신현수와 이경석의 수술은 가슴이 섬뜩할 정도로 변해 있었다.
수술이 말미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처음부터 봤다면 어마어마한 자극과 함께 많은 도움이 됐을 것이다.
‘시연에 참가한 것보다 보는 게 더 의미 있을 줄은 몰랐네. 스승님을 따라잡으려면 일단 현수하고 경석이 형의 장점을 빼먹어야 할 텐데 방법이 있을까?’
눈은 또릿또릿.
가슴은 서늘서늘.
마음은 감탄과 동시에 불안으로 가득.
표현이 그렇지만 아내와 딸은 마약 같은 존재인가 보다. 가슴이 두근거리는가 싶더니, 수술을 봐야 한다는 생각과 동시에 당장 보고 싶다는 마음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5분만 더 보고 가자. 10분이면 끝나는데 조금만 더? 처제한테 연락이 없는 거 보면 또 자고 있는지도 몰라.’
간신히 억눌렀다.
차례차례 수술이 끝났다.
신현수와 이경석이 먼저 인사를 했고, 마지막으로 이준영 교수와 이혁민 교수가 들어서자 요란한 박수가 터졌다.
학회 발표 때 본 반응 이상이었다.
그제야 김지훈이 상황을 파악했다.
이제 와서 빠져나가긴 글렀다.
“부족한 부분이 많은데 끝까지 자리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시연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내일은 이준영 선생님의 지도 아래 김지훈 선생의 담낭 절제술과 탈장, 신현수 선생의 비만을 포함해 여러 수술이 예정돼 있습니다. 전공의 수술에도 지대한 관심 주시길 바라며 많은 참석 부탁드립니다. 이준영 선생님,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이준영 교수가 고개를 젓자 송재덕 교수가 핀잔 섞인 눈초리를 보냈다.
어차피 한두 마디겠지만 시간을 아꼈다는 생각에 김지훈이 만세를 불렀다.
참석자들도 이미 어떤 성격인지 알기에, 오늘 직접 수술을 보았기에 개의치 않았다.
시연 첫날이다.
먼 길을 달려온 의사들에겐 상당히 피곤한 하루였을 것이다. 달콤한 휴식을 취하기 위해 하나둘 자리를 빠져나갔다. 이만하면 충분히 보상받았다는 얼굴들이었다.
“신현수 선생, 이경석 선생, 생각 이상이었어. 내일 시연도 기대가 커.”
“감사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최인호 교수와 진충기가 으레 오고 가는 말을 건네며 웃었다. 스카우트 제의까지 했던 김지훈에게 한마디 할 법도 했지만 슬쩍 눈길만 주었다.
돌아서는 진충기의 눈가가 어두웠다. 깊은 주름 속에 불안과 불편함이 가득했다.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표정이 묘하네. 우리 병원을 인정한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무슨 생각을 하든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지.’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지만 남은 시간의 일상이 달라질 것이 없었다. 물론 오늘 평생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일을 겪은 한 사람은 빼야 한다.
‘이쯤에서 빠져나가자.’
이준영 교수가 슬그머니 빠져나가는 김지훈을 불렀다.
“경아하고 아이는?”
“걱정해 주신 덕분에 별 탈 없이 잘 낳았습니다.”
“중요하고 예만한 시기니까 신경 바짝 써.”
‘녀석! 좋아 죽는구나. 딸이 예쁘긴 하지.’
아직 할 말 남았다.
“수술은 잘 끝났어?”
“예. 아이 잘 깨어났고, 별다른 문제 없었습니다.”
“6주 된 아이다. 확실하게 봐. 내과 환자는?”
“예정대로 수술하기로 했습니다.”
잠시 제자의 얼굴을 본 이준영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시연했다면 가장 관심이 집중됐을 텐데 아쉬운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 모습에 대견하면서도 미안한 모양이었다.
“서운하지 않아?”
그간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는 스승이었다.
목소리까지 살짝 높아졌다.
‘오늘 왜 이러시지? 우리 딸이 태어났다고 이러시진 않을 테고, 혹시 나이가 드신 건가?’
절대 내색할 수 없는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쨌든 스승의 관심은 기분 좋은 일이었다.
“도리어 잘된 것 같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송재덕 교수가 불쑥 끼어들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뭐가 잘된 일이야? 뭐가? 지훈아, 교수야, 이럴 때는 솔직하게 말해도 돼. 서운한 건 서운한 거다. 스승이라고 말만 하면 뭐 하니? 챙겨야 할 때 챙겨야지. 딸 얻은 거 축하한다. 산후조리 잘못하면 두고두고 고생하니까 경아 잘 챙겨야 한다. 지훈아, 교수야, 아직 안 늦었다. 대장 하자, 대장.”
한때 잠결에서도 들렸던 소리가 또 들렸다. 설마 진심은 아닐 테지만 잘못 대답했다가는 두고두고 시달릴 가능성이 높았다.
못 들은 척 지나가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다.
마침 이준영 교수도 의아한 눈빛을 보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선생님과 동기들의 수술을 보면서 많이 느끼고, 배웠습니다. 시연이란 행사를 왜 기획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야! 빠져나가는 거 봐라. 지훈이 너 능구렁이 다 됐다. 다 됐어. 서로 입장 곤란하지 말자 이거지? 립서비스가 보통이 아니네. 보통이. 말만 잘해도 반은 먹고 들어가는 거야. 반은. 그런 의미에서 대장 하자, 대장.”
연이어 들린 말에 김지훈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산모와 딸 이상의 핑계는 있을 수 없다.
교수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이런 자세가 널 여기까지 이끌어 왔을 거다. 앞으로도 그 마음 잊지 말기를 바란다.’
‘허허! 참 진국이다, 진국.’
송재덕 교수가 김지훈의 등을 보며 소리쳤다.
“딸 생각만 하지 말고 내일 정신 바짝 차리고 수술해. 고성문 선생님이 이를 가셨다. 이를. 내일 시연 중에 실수하면 마누라고 딸이고 다신 못 볼 수도 있어.”
후다닥 달려가던 김지훈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설마 그럴 리가!
“진우야, 하석아, 회진 돌자.”
상당히 서둘러 환자에게 미안했지만 오늘 막 아빠가 된 사람의 심정을 이해해 주길 바랐다. 평소에 잘했으니 한 번쯤은 봐줄 것이다.
숨 가쁜 하루였다. 이제야 여유를 갖고 고경아 옆에 앉을 수 있었다.
김지훈의 눈빛이 변한 것 같았다.
아내와 남편이 한 아이의 탄생으로 인해 엄마와 아빠가 됐다. 가족이란 울타리가 넓어진 만큼 많은 부분이 변할 것이다.
엄마가 가장 먼저 변하는 모양이다.
“초유를 먹어야 더 건강해진대요.”
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하면서 직접 수유를 하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다. 자꾸만 기웃거리는 김지훈을 피해 수줍은 듯 등을 돌리고 젖을 물렸다. 열심히 엄마 젖을 빠는 딸을 보며 행복한 미소를 머금었다.
수유가 끝나자 살포시 등을 두드려 트림을 시켰다. 말로만 배웠을 텐데 제법 엄마 티가 났다.
따스한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잠든 딸은 기쁨과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 때문인지 배고프다고, 똥 쌌다고, 자리가 불편하다고, 안아 달라고 보채는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즐겁기만 했다.
딸의 손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신생아면 당연하게 보이는 본능적인 반응에 따라 손가락을 꼭 잡았다.
“역시 아빠를 알아보네. 아빠 손인지 어떻게 알고 이렇게 꼭 잡을까? 경아 씨, 우리 딸 손힘이 장난이 아니네요. 외과 의사 시킬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던 김지훈의 입이 쫙 찢어졌다. 고경아는 배 아파 낳은 딸을 보며 또 눈시울을 붉혔다.
오늘처럼 행복한 날은 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