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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866화 (866/1,329)

10화. 드러내지 않아 빛이 나는 사람 Ⅰ (1)

함께 외래로 향하던 송재덕 교수와 이혁민 교수가 큰 웃음을 터트렸다. 놀랍고도 즐거워 죽겠다는 마음이 가득 실려 있었다.

허공을 둥둥 떠다니던 말이 귓가를 울렸다.

“준영아, 지훈이 저 녀석을 어떻게 하지? 너도 당황스럽지? 너도. 이참에 대장 시키자, 대장. 나는 이보다 더한 일도 다 참을 수 있다. 다!”

“전 참아야 할 일이 없습니다.”

와우! 완벽한 반격이었다.

‘스승님, 송재덕 선생님, 이혁민 선생님, 감사합니다.’

후회와 아쉬움이 없다면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한 아이의 목숨을 구하는 수술이 시연보다 백배, 천배 중요하다. 시연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이 바로 그것이었다.

의사로서 최선의 결정을 했다는 사실에 도리어 마음이 편해졌다.

“진우야, 퍼스트 설 사람이 너밖에 없다. 일단 시연은 싹 잊고, 오늘 저녁 담도 폐쇄부터 준비하자.”

‘역시 김지훈 선생님이야.’

얼굴이 벌게진 송진우의 눈빛에 또 하나의 감정이 실렸다. 그것이 무엇이든 가슴에서 우러나온 감정이기에 김지훈은 충분히 보상받고도 남았다.

시간도 별로 없는데 일거리가 확 늘었다.

환자를 찾아 집도의가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이해를 구하느라 진땀을 뺐다.

변경할 수 없는 시연 일정 덕이지만 시간이나 날짜가 변하지 않고, 6주 된 아이 수술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해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럼 누가 제 수술을 하게 되는 겁니까?”

환자나 보호자는 의외로 눈이 매섭다. 특히 자신을 치료하는 의사 문제는 매우 민감하다.

복강경에 관한 한 신현수나 이경석이 대신 하기에는 확실히 중량감이 떨어졌다. 환자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일 의사는 단 한 명뿐이었다.

눈 딱 감고 스승의 이름을 댔다.

“아! 그분이면 저도 괜찮습니다. 선생님보다 더 유명하신 분이죠? 어린아이가 아프다는데 제 욕심 차릴 일도 아닙니다. 전 괜찮습니다.”

이준영이란 이름에 흔쾌히 동의를 했지만, 또 상의도 안 하고 일을 저질렀다. 지극히 의도적인 일이었다고 해도 스승에게 전화할 때는 목소리마저 떨렸다.

큰일 났다.

머리에 피 좀 말랐다고 이래도 되는 걸까?

미세한 표정 변화와 사소한 몸짓에 말투까지 모든 것을 종합해야 속을 알 수 있는 스승이었다. 목소리만으로는 도저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입이 바짝 말랐다.

‘시연까지 부담을 드리면 안 되는데.’

예상한 말이 나오긴 했다.

(알았다.)

간단명료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등짝이 흠뻑 젖었다. 미주알고주알 물어보고, 필요할 때 타박이라도 하면 도리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마취과도 문제였다.

생각해 보니 전공의 공력으로 상대할 수 있는 김진호 교수가 아니었다. 더구나 어려운 부탁을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동안 쌓은 친분을 최대한 이용했다.

“목요일이면 시연에 필요한 수술실만 3갠데, 하나 더 달라고? 그것도 첫 번째로?”

“선생님, 이제 6주 됐습니다.”

“그걸 몰라서 말하는 게 아니잖아. 일반외과 행사가 있다고 다른 과 수술이 없는 것도 아니고, 우리도 그만큼 신경 써야 하는데 만만한 일이 아니다.”

윤활유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한 박스!”

“쩨쩨하긴. 한 박스 받고 두 개 더.”

후배가 선배 이기기 쉽지 않다. 게다가 부탁하는 입장이다. 팽팽한 기 싸움 끝에 결국 맥주 두 박스로 합의 봤다.

김진호 교수가 좋다고 웃으며 물었다.

“김 교수가 첫 번째 시연 맡지 않았어?”

“물 건너갔죠. 스승님께서 첫 번째 테이프를 끊어야 구색이 맞춰지지 않을까요? 시간 차이를 약간 두고 현수하고 경석이 형이 조기 위암, 조기 대장암을 하면 첫날은 멋지게 진행될 겁니다.”

고개를 슬며시 흔들었다.

‘욕심 없는 건 좋지만, 너무 없어도 안 돼. 지난 수술을 생각해 보면 이준영 선생님만큼 너도 자격이 충분해. 최초라는 수식어를 이렇게 많이 차지한 의사도 없을 거다.’

“아쉽지 않아?”

“금요일도 있고, 토요일도 있잖아요. 담도 폐쇄 수술이 잘되면 힘이 나서 더욱 확실하게 시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래서 내가 김 교수를 좋아한다니까.”

넉넉한 미소에 다시금 올바른 결정이자 당연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환자를 일순위에 두는 의사야말로 인정받을 수 있는 의사라는 생각도 강해졌다.

큰 교훈까지 하나 얻었다.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일이었다. 다행히 환자와 교수들이 모두 이해해 주었지만, 과정까지 매끄럽고 좋았다는 말은 아니었다.

의사 사회도 조직 사회다.

구성원이라면 꼭 지켜야 할 절차와 규칙이 있다. 학회 임원까지 된 이상 병원 내에만 국한돼 활동해야 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최선의 길이 될 수 있도록 한 번 더 생각하고, 고민하자.’

그래야 곧 태어날 딸에게 더 자랑스러운 아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혁민 교수의 눈빛에 담겼던 의미 또한 평생 간직해야 했다.

또다시 잘근잘근 다져지기 전에.

김지훈의 결정이 강한 파장을 일으켰다.

이혁원과 나종진은 초비상이었다.

복강경 수술 실력으로만 따지면 이준영 교수에 필적하는 김지훈이다.

그런 교수가 환자를 위해 첫 시연을 포기했다. 평소 행동과 말을 볼 때 당연한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종의 충격임은 틀림없었다.

“종진아, 이런 상황에서 수술 확실하게 못하면 맞아 죽을 것 같지 않냐?”

“쫓겨나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야. 어후! 가뜩이나 걱정되는데 죽겠네. 혁원아, 기구 어디다 뒀어?”

신현수와 이경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훈이 너다운 결정이긴 하지만 정말 뜻밖이다. 외과 사상 첫 시연 행사에 첫 수술이면 의미가 대단한데, 그걸 포기해? 나 같으면 박승준 선생님께 부탁하고 시연부터 챙겼을 거야. 아쉽지 않아?”

“아쉽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죠. 6주 된 아이하고 지금도 몸조리해야 할 엄마가 눈에 밟혀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솔직히 금요일도 있는데, 시연을 못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신현수는 말이 없었다.

‘첫 번째 시연과 수술이 아니면 살 수 없는 6주 된 아이!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단순해 보이지만, 사람 마음이 그게 아닌데 그렇게 쉽게 결정했어? 후우! 경석이 형 말대로 김지훈 너답다.’

한참 만에야 입을 열었다.

“형, 우리 최선을 다해 멋지게 수술합시다. 그래야 우리도, 지훈이도 마음이 편할 겁니다.”

“그래야지. 간만에 기구 연습 좀 할까?”

동료들의 말에 공연히 얼굴이 붉어졌다. 솔직히 아쉬움이 무척 컸지만 내색할 일도 아니었다. 자꾸 뒤돌아보면 미련만 남을 테고, 담도 폐쇄 수술에 좋은 영향을 줄 리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확실하게 성공하자.’

내심 각오를 다지며 주먹에 힘을 주는 순간, 누군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의외의 얼굴에 다들 다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창도가 왜 또 찾아왔을까?

더구나 혼자였다.

설마 벌써 지원을?

시기적으로 그럴 수가 없었다.

표정이 그리 밝지 않았다.

예기치 못한 방문에 이경석은 별다른 안면도 없어 어정쩡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오창도 선생님, 어쩐 일이십니까?”

“김지훈 선생님, 잠시 시간을 내줄 수 있으십니까?”

이경석이 있어 거북해하는 눈치였지만 못할 말이 없는 관계다. 커피 한 잔 타는 동안, 신현수가 나서서 정식으로 인사시켰다.

“두 분 서로 인사하시죠. 얼굴 알아 둬서 나쁠 일은 없지 않습니까? 언제 또 볼지 모르잖아요.”

‘자식! 이번에는 우리가 스카우트하는 거냐?’

결과를 떠나 커피 탄 보람이 있었다.

“하실 말씀이 있어서 오신 거죠?”

오창도가 뜸을 들였다. 무척 난감하고 곤란한 기색이었다.

“죄송하지만 수술 소견을 정확하게 듣고 싶어서 왔습니다. 기록이 무척 세세하긴 하지만 직접 듣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미 박병두 환자의 동의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라 얼마든지 말해 줄 수 있다. 그래도 이유 정도는 알고 말해 줄 일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박병두 환자분 문제가 다소 복잡해졌습니다. 환자분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 아니라 제 개인적인 일입니다.”

구체적인 답을 요구했다.

어쩌면 H 병원 동료들보다 더 자세하게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김지훈이었다. 오창도가 말 못할 이유가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소송 때문입니다.”

신현수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소송이요? 환자분 태도를 볼 때 선생님께 소송을 걸 것 같진 않았는데요.”

“맞습니다. 환자분 때문이 아닙니다. 퇴직까지 했지만 H 병원과 서로 앙금이 남아 일이 쉽게 해결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소송 당사자는 아니지만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할 일이 생길 것 같습니다.”

김지훈과 신현수가 동시에 서로를 보았다.

혹시 진충기가?

내친김인지 술술 털어놓았다.

“며칠 전, 누가 더 큰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두고 공방을 벌였습니다. 솔직히 제 과실 이상으로 책임지고 싶지 않습니다. 의료 과실이 다신 안 벌어진다는 보장도 없는데, 이런 식으로 해결하면 동료들을 지키는 방법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처리하고 싶습니다.”

예감이 맞았다.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지만 진충기가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모자라 오창도에게 모든 책임을 미루고 있다는 느낌까지 받았다.

이 역시 틀리지 않은 예감일 것이다.

‘정말 답이 안 나오는 인간이네.’

답답한 한숨만 터졌다.

발 벗고 나서 도와주고 싶었지만 삼자에 불과했다. 도움이 되는 일은 재수술 소견을 자세하게 말해 주는 것뿐이었다.

김지훈의 설명이 모두 끝나자 오창도가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살짝 인사를 하고는 웃었다.

‘몇 번 보지도 않았고 매번 폐만 끼치는데, 여기만 오면 마음이 편해지네. 좋은 사람들이다.’

한결 얼굴이 밝아지긴 했다.

“저 때문에 심려만 끼쳤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들께서 모두 시연을 하시죠?”

“그렇습니다.”

“잘 진행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김지훈 선생님께서 첫 번째 시연을 맡았다고 들었는데, 축하드립니다. 혹시 이왕 부탁드리는 김에 초대장 하나 주실 수 없으십니까? 저도 꼭 보고 싶어서요. 3일 내내 오지는 못해도 첫날은 꼭 오겠습니다.”

한정된 인원만 참석할 수 있는 자리지만, 한 장 정도는 힘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이것도 인연이라고, 꼭 참석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문제는 초대장이 아니었다.

‘첫 번째 시연을 맡은 게 어디까지 알려진 거야? 공식 행사인데 나 때문에 문제 생기는 거 아닐까?’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김지훈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초대장은 구할 수 있는데, 저는 사정이 생겨서 첫날 참가를 못합니다.”

오창도가 깜짝 놀랐다.

“어떤 사정이 있으시기에 그런 기회를?”

“급한 수술이 하나 있어서요. 어쨌든 그건 제 문제고, 진충기 선생도 올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마주칠 수도 있잖아요.”

“진충기 선생을 보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시연을 보기 위한 자리입니다. 얼굴 붉혀야 할 일이 남았지만, 저도 의사로서 살아가야죠. 더 이상 눈치 볼 일도 아니고요.”

나쁜 일은 가급적 빨리 털고, 자신의 일에 집중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오창도는 현명함을 넘어 정면으로 맞설 요량인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현명한 일일 것이다.

왠지 단단해진 것 같은 느낌까지 받았다. 절대적으로 응원할 일이었다.

내심 파이팅을 외치던 김지훈이 시계를 보다 말고 헛기침을 했다. 나누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당장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단 1분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오창도 선생님, 제가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야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현수야, 빌리아리 때문에 논의할 게 있어서 먼저 일어난다.”

김지훈이 꾸벅 인사를 하고 급히 달려 나갔다.

신현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오창도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놀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입을 열지 못했다.

‘첫 번째 시연을 포기하고 다른 수술을 한다고? 후우! 대신 수술해 줄 교수가 한둘이 아닐 텐데, 어떻게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지? 최인호 선생님이나 진충기 선생은 아예 생각조차 못할 일이야.’

시연 포기도, 허락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지훈은 물론 S 병원 전체를 다시 보게 되는 일이었다. 진심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알았듯 언젠가 많은 의사들이 이번 일을 알면 칭찬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명예나 명성을 좇지 않기에 도리어 더 크게 얻는 모양이다.

신현수가 이것저것 물었다. 진충기를 언급할 때마다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연거푸 안경을 고쳐 썼다.

“오창도 선생님, 시연 끝나고 난 뒤 소송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연락 한번 주시겠습니까?”

“왜 그러시죠?”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길 바랍니다.”

묘한 여운이 남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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