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864화 (864/1,329)

9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1)

궤양 천공으로 인한 복막염이었다. 아뻬라고 긴장하지 않는 것은 절대 아니었지만 복막염은 교수들도 바짝 신경 쓰는 수술이었다.

눈에 힘 바짝 주고, 어깨는 힘 빼고 수술을 시작한 이혁원이 전에 없이 신중했다.

위에 난 구멍이 상당히 컸다. 위치도 좋지 않아 일차 봉합으로 해결될 상태가 아니었다. 위 절제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김지훈을 보던 이혁원이 화들짝 놀랐다.

“집도의는 너야.”

나직한 목소리에 서늘함이 풀풀 날렸다.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깊게 고민한 후 절제하기로 결정했다. 타고난 써전답게, 4년 차 치프답게 모든 과정을 수월하게 진행했다.

‘이번에는!’

아래 연차들이 귀를 활짝 열고, 무슨 말이 오가는지 주시하는 상황이었다. 이번에도 결과가 다르지 않으면 쥐구멍이라도 찾아 숨어야 할 판이었다.

한 줌 재로 변할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화르륵! 화르륵! 화르륵! 화르륵!

더도 덜도 없이 딱 두 배 더 탔다.

김지훈은 이번 역시 기본을 강조했다.

절대 이유 없는 행동을 할 선배가 아니었다. 수술하는 족족 심하게 탄 이유를 찾으려 애썼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도대체?’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개를 묻는 순간 김지훈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지금도 단호한 표정이었다.

“라파로는 응용이고, 개복은 기본이야. 기본이 확실하지 않으면 무슨 수로 응용할 수 있겠어? 정신 똑바로 차려. 수요일에 할 라파로 몇 개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문이 막히자 김지훈의 눈이 사나워졌다. 흠칫 놀란 이혁원이 수술 스케줄을 떠올리며 허겁지겁 입을 열었다.

“4개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간 되는 대로 종진이하고 번갈아 들어와. 카메라만 잡는다고 기구 연습 안 하면 알지? 아뻬라도 받으면 처음이라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이혁원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최소 기구 정도는 넘길 수 있다는 말이었다.

단 한 번뿐인 담낭 절제술 경험은 갈증만 키웠는데 가슴을 시원하게 하는 단비였다. 이제야 왜 태웠는지, 개복 때 실력의 중요성을 왜 강조했는지 알았다.

이혁원이 벌떡 일어나 김지훈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 또 수술 뜰지 모르지만, 야식 시켜 줄 테니까 빨리 먹어. 배부르다고 엉뚱한 데 힘쓰지 말고.”

엉뚱한 데? 하하하!

얼마 후, 족발을 앞에 둔 전공의들이 희희낙락 즐거움을 감추지 못했다. 한가한 틈을 타 함께 자리한 간호사가 고기 한 점 집으며 말했다.

“이혁원 선생님, 야식은 좋은데 수술이 떠야 먹을 수 있는 건 안 좋죠? 나날이 늘어나는 뱃살을 보면서도 고기는 왜 이렇게 맛있는지 몰라.”

“원래 남의 살이 제일 맛있다고 하잖아요. 살이 어디 있다고 맨날 살 타령이야. 비쩍 말라도 살쪘다고 난리 치는 건 도대체 무슨 심리야?”

“잘 가려서 그렇지 장난 아니에요. 아우! 왜 이렇게 맛있지? 너무 맛있어. 이때 먹는 족발이 얼마나 맛있는지 아무도 모를 거예요.”

상추에 고기 한 점 올리고, 취향에 따라 새우젓, 마늘, 쌈장, 고추 곁들이면 한마디로 작살이다. 한입 씹는 순간 칼로리 따위는 안녕이다.

껍질이 주는 식감은 가히 예술이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족발이 사라졌다.

먹었으니 일해야 한다.

김지훈 얼굴을 또 봐야 했다.

이혁원은 화끈한 열기에 울고 또 울었다.

“누가 족발이라도 사 먹은 거야? 오늘따라 왜 이렇게 환자가 많아? 혁원이 형, 설마 형은 아니죠?”

정형외과 전공의 말에도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겪어야 하는 아픔이기에 꾹꾹 참았다. 오늘의 고난이 내일의 희망으로 찾아올 것이다.

다음 날.

이준영 교수의 오더가 박승준 교수와 지동훈 교수에게까지 전해졌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수술실을 들어간 나종진이 날벼락을 맞았다. 이미 준엄한 메시지를 받았던 이혁원은 연타석 화염방사기에 혀를 빼물었다.

“이혁원, 나종진, 너희들 4년 차 치프다.”

심지어 그동안 조용했던 이준영 교수까지.

“우리 기본기 부족하다고 찍힌 걸까?”

“그런 것 같다. 시연 행사 치르고, 조금 있으면 손 놓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수요일에는 아예 난리가 났다.

전임 3명이 융단폭격을 해 대는 통에 휴게실에서 나올 때마다 이혁원과 나종진이 맥없이 고꾸라졌다. 헉헉 숨을 몰아쉬면서도 웃고 있었다.

“종진아, 나 오늘 받은 과정 합치면 담낭 하나 잘랐다.”

“자식이! 그 정도에 웃음이 나와? 난 비만 환자에게 기구를 써 본 사람이야.”

“뭐? 어디까지?”

“기회 되면 너도 자연스럽게 알지 않겠어?”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했다.

수련은 모든 전공의들에게 해당되는 일이다. 혈관 수술을 들어가서는 송진우를, 유방 수술을 들어가서는 강병옥을 탈탈탈 태웠다.

대가는 집도였다.

많은 응급 수술이 당직 전공의들에게 기회의 장으로 변했다. 가공할 화력에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열정 넘치는 후배.

주어진 수술에 온 정성을 다 쏟는 전임.

자신의 모든 지식을 전해 주려 애쓰는 교수.

함께 달려 나가는 의료진.

긴장과 이완 속에 모든 요소가 맞물려 나갔다.

평소와 조금도 다른 상황이 아니었지만 수술 시연이라는 커다란 목표가 더욱 강한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그 탓인지 정규 일과 중은 물론 야간까지 쉴 틈이 없다고 할 정도로 모든 시간이 바쁘게 돌아갔다.

써전이 가장 원하는 것, 바로 수술이 주어지기에 누구 한 명 불만을 터트릴 일이 아니었다. 체력적인 부담에 시달릴 법도 했지만 오프 철저히 챙기라는 이혁민 교수의 오더에 충전할 시간까지 얻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났다.

7월의 무덥고 습한 기운도 의료진의 앞을 막지 못했다. 마치 1년 차에 가해지는 것 같은 혹독한 수련을 견뎌 낸 이혁원과 나종진이 담낭 절제술과 탈장을 훌륭하게 해냈다.

다만 진충기와 오창도 사건 탓에 전에 없이 신경 써야 했다. 수술에 대한 설명 및 고지 의무와 전공의 교육 사이의 현실적 괴리는 딜레마일 수밖에 없었다.

‘후우! 사실대로 말하면 전공의들 수술이 불가능하고, 말을 안 하자니 괜히 죄 짓는 것 같네. 메스를 넘기더라도 내가 수술하는 것처럼 교육시키고, 확실하게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만은 잊지 말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긴장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바로 전임이다. 모두들 수술 하나하나를 마치 처음 하는 것처럼 최대한 집중했지만 불안감이 가시질 않았다.

뜻을 모았고, 방법은 하나였다.

“선생님, 저희들 수술을 봐주셨으면 합니다. 사소한 문제라도 알고 고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준영 교수가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랑이 코털 건드렸다. 스스로 섶을 지고 불길에 뛰어들었다.

복강경만 점검받는 것이 아니었다. 기본을 지키는 일은 전공의 때만이 아니라 평생을 갈고닦아야 할 원칙이었다. 부탁은 한 사람에게 했는데 모든 교수들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모든 수술을 주시했다.

김지훈의 손을 초라하게 만드는 화염방사기.

신현수의 차가움을 조곤조곤 다지는 칼.

이경석의 능글맞음을 한 방에 보내는 동네 아저씨 망치.

친근하게 다가와 도리어 서늘함이 느껴지는 박승준 교수와 지동훈 교수의 촌철살인.

머리부터 발끝까지 탈탈 털렸다.

이렇게 강한 자극을 받았는데 넋 놓고 있을 리 없었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환자의 파도 속에서 차근차근 시연 준비에 만반을 기했다.

일종의 운도 따랐다.

김지훈에게 또 한 번의 큰 기회가 찾아왔다.

간 종물 환자를 복강경으로 수술한 것이다. 철저한 준비 끝에 무사히 수술을 끝냈다. 무척 순조로운 회복에 자신감을 얻은 기색이 역력했다.

‘전번보다 확실히 수월하게 진행했어. 남은 시간은 2주. 그 안에 오면 시연 때 간 절제를 할 수도 있겠어. 이왕 올 거면 때 맞춰 왔으면 좋겠다.’

경험이 한 번 더 쌓였다고 해도 아직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수술이었다. 하지만 그놈의 욕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활활 태우고, 활활 타는 사이.

누가 잘 버티는지 씨름하는 사이.

수술 시연이 불과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제 지난 몇 주간 왜 장작불 삼겹살 신세가 되어야 했는지 이유를 알려 줄 때가 됐다.

집도의에 포함된다는 소리에 이혁원과 나종진이 입도 열지 못했다. 이준영 교수까지 동의를 표하자 거의 경악을 금치 못하는 눈치였다.

복강경 수술 시연인 까닭에 과장인 이혁민 교수조차 기회가 없다.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의사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는 자리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부담이었다.

“김지훈 선생님이 리틀 이준영 선생님으로 변한 이유가 이거였어. 우리가 제대로 할 수 있을까?”

감히 자식이 아버지 존함을 이런 식으로?

그런 말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난 탈장인데 큰일 났다. 김지훈 선생님한테 말씀드리면 한두 번은 더 해 볼 수 있겠지?”

“종진아, 나하고 같이 부탁드리자.”

용기를 내 입을 연다는 것이 치명적 실수를 하고 말았다.

“선생님, 우리가 잘할 수 있을까요? 경험이 거의 없어서 그런지 자신이 서질 않습니다.”

‘자신이 없어? 이 자식들이 해 보기도 전에 무슨 소리야?’

돌아온 소리는 냉정했다.

“언제든 취소할 수 있으니까 정 자신 없으면 말해. 과장님도 흔쾌히 취소하실 거야. 그래도 되겠어? 아니다. 너희들 얼굴 보니까 지금 전화하는 게 좋겠다. 할까?”

속마음이 한 가지일 리 없었다.

일반외과 의사로서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행사이자 기회이기에 마땅히 욕심 부려야 할 일이었다.

이혁원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고, 나종진은 사태를 수습하느라 진땀을 뺐다.

“그게 아니라,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김지훈이 쓰윽 노려보고는 인상을 썼다.

“열심히 하자.”

“예, 선생님.”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이 정도 일에 떨거나, 확실하게 준비하지 못하면 내 후배 아니라는 눈빛까지 보냈다.

“금요일 수술 철저하게 준비하고, 환자분과의 관계에 문제없도록 바짝 신경 써. 교육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지만, 4년 차라고 해도 전공의에게 수술받길 원하는 환자는 한 명도 없다는 사실 잊지 말고.”

집도 기회를 또 준다는 말이었다.

급격하게 화색이 돌았지만 이어진 말에 치솟는 긴장을 피하지 못했다.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교수의 최종 결정이 남았다는 사실에 소름까지 돋고 말았다.

“단, 목요일에 이준영 선생님 수술 들어가서 확인받아. 통과 못하면 단칼에 취소라는 거 알지?”

하! 하! 하!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니었다.

‘교수님들과 우리 모두 믿고 있으니까 자신을 가져도 돼. 시연이든 아니든 수술에 임하는 태도와 자세가 달라질 것도 없어.’

어깨 한 번 세게 두드려 주고 집으로 향했다.

곧 딸을 볼 수 있다는 즐거움에 시연이 주는 중압감을 뒤로하고 최대한 일찍 퇴근했다. 가는 내내 행복 가득한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

방문을 연 김지훈의 입이 쩍 벌어졌다.

지난 며칠간 처갓집 식구들이 부지런히 오갔다.

고경아와 함께 출산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 부족한 것이 너무 많다고 했다. 까짓 얼마나 되겠냐는 생각에 무심코 흘려들었다.

역시 아이는 어른의 축소판이 아니었다. 초보 아빠와 엄마의 한계를 오늘에야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배냇저고리, 우주복, 내의, 손수건, 한여름인데 손발을 쌀 싸개, 요, 이불, 젖병, 세척기와 세척제, 유모차, 아기용 비누를 포함한 목욕 용품, 조그만 목욕통, 분유, 기저귀 등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정리만으로도 피곤한지 고경아는 눈도 뜨지 못했다. 출산보다 더 힘든 일이 육아라는 말이 생각나 겁이 덜컥 났다. 엄마가 고생을 덜하려면 아빠의 힘과 도움이 절대적인데, 시간을 낼 수 있을지조차 장담할 수 없었다.

‘다행히 시연 다음 주가 출산 예정일이네. 우리 딸이 나오면 상황도 조금은 달라지겠지?’

하! 하! 하!

역시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니다.

식은땀이 흐르는 밤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주말이 훌쩍 지났다.

드디어 목, 금, 토 3일간 수술 시연이 벌어지는 주의 첫날이 밝았다.

최선을 다해 수술하고, 이혁원과 나종진을 살벌하게 가르치는 사이 일과가 거의 끝나 갔다.

김지훈이 조용히 시연 일정을 확인했다.

목, 금 이틀간 담낭 절제술과 탈장을 한 건씩 맡았다. 중간에 아뻬 등 응급 수술이 뜬다고 해도 적절하게 시간 배정을 받을 것이다.

매일 하는 수술일 뿐인데 은근히 떨렸다. 긴장 속에서도 간 절제 환자가 없다는 사실은 큰 아쉬움으로 다가왔다. 인력으로 되는 일이 아니기에 깔끔하게 접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다.

‘도합 4건에 혁원이하고 종진이 수술 퍼스트까지 6건이면 시간상 조금도 무리가 없네. 수술에 제반 준비까지 맡은 현수가 제일 고생이구나.’

미안함에 쩝쩝 입맛을 다시던 김지훈이 나직한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회진 시간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고, 혈관 수술도 없는 날이었다.

“진우야, 무슨 일 있어?”

“컨설트 두 개 왔습니다.”

“무슨 환잔데 보기도 전에 얼굴이 벌게졌어?”

온갖 일로 얼굴이 붉어지는 송진우였지만 중요하다 싶으면, 급하다 싶으면 감이 딱 올 정도로 증상이 더욱 심했다.

“선천성 빌리아리 아트레지아가 있습니다.”

Biliary Atresia(담도 폐쇄증).

김지훈이 눈을 크게 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