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뿌린 대로 거둘 뿐이다 (2)
우르르 몰려 나갔다. 발걸음에 활기가 팍팍 실렸다.
“박 교수가 당직이지? 굼벵이도 쓸 데가 있다더니, 일복 없는 게 이럴 때 좋네. 잘됐다. 잘됐어.”
“원장님, 저도 환자 있습니다.”
“원장님? 백날 얘기하면 뭐 해? 그래서 박 교수 네가 안 되는 거야. 그래서.”
“선생님, 오늘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래, 그래. 경석이 너밖에 없다. 가자. 박 교수, 넌 멀리 떨어져 앉아라. 멀리.”
툭 건드리기만 해도 웃음이 터지는 날이었다.
낙엽이 굴러다니는 것도 아니고.
여고생도 아니면서.
다 큰 어른들이 서로의 얼굴만 보고도 웃었다.
S 병원 의사들과 학회 임원들까지 모두 사라진 회의실에 H 병원 의사들만 남았다.
최인호 교수가 깍지를 낀 채 꼼짝도 하지 않는 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충기, 내가 그렇게 밀어줬는데 S 병원 하나 못 이겨서 이런 수모를 당하게 해? 딱 한 번만 더 기회를 줄 테니까 무조건 잡아. 우리 병원을 최고로 만들란 말이야.’
“진충기.”
얼굴을 찌푸리고 있던 진충기가 급히 달려왔다.
“예, 선생님.”
살벌한 눈초리가 꽂혔다. 진충기의 고개가 푹 떨어졌다.
“한 번 남았다. 이따위 일이 또 벌어지면 옷 벗어야 할 거야. 수술 시연에 전원 다 참석해.”
“예? 시연에요?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최인호 교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견딜 수 없는 분노를 참느라 얼굴까지 시뻘게졌다.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진충기! 똥오줌 못 가릴래? 가고 싶지 않아도 가야 하고, 웃고 싶지 않아도 웃어야 그나마 우리 체면이 서는 거야. 네 두 눈으로 S 병원이 어떻게 수술하는지 똑바로 보고 확실하게 눌러 버리란 말이야. 이준영이고, 김지훈이고 뭐건 간에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게 만들어. 알았어?”
“예, 알겠습니다.”
“너한테 쏟아붓는 정성이면 여기 있는 사람 다 너처럼 될 수 있어. 명심해. 남은 기회는 한 번뿐이야.”
최인호 교수가 찬바람을 휭휭 날리며 회의실에서 나갔다. 힐끗 노려보는 것만으로도 다들 움찔거렸다.
오늘 일로 가장 타격을 받은 사람이 누군지 분명했다. 한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던 진충기가 소속 의사들을 노려보았다.
“똑똑히 들었지? 내가 옷 벗으면 너희들도 다 옷 벗을 줄 알아. 아니, 똑바로 못하는 놈은 내일이라도 잘라 버릴 테니까 정신 차려. 알았어? 한 교수.”
“예, 선생님.”
“단속 철저히 해. 이따위로 하면 네가 제일 먼저 옷 벗게 될 거야. 입단속까지 제대로 하란 말이야. 정찬원, 넌 당직 안 서고 여기 왜 있어? 빨리 안 들어가?”
정찬원이 눈가를 찌푸리며 급히 뛰어나갔다.
못마땅한 눈빛으로 소속 의사들을 노려보던 진충기가 씩씩거리며 회의실을 나갔다.
‘도대체 우리가 진 이유가 뭐야? 밥이며 술이며 처먹을 건 다 처먹고 뒤통수를 쳐? 제길! S 병원 놈들이 어떤 수작을 부린 거지?’
이해할 수 없는 결정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다. 게다가 스카우트를 했다면 자신 밑에서 빌빌거렸을 김지훈에게 한 방 제대로 먹었다.
‘뉴스에 날 만한 일이라고? 도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거야? 박병두와 오창도는 왜 들먹이고 지랄이야. 건방진 놈. 평범한 수술로 시연을 넘긴다면 개망신당할 줄 알아. 이번 일로 변할 건 아무것도 없어. 최고의 써전은 나야.’
자신보다 경력이 짧은 의사에게 추월당했다는 느낌은 참을 수 없는 분노였다. 김지훈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시선조차 견딜 수 없었다.
이기지 못하면 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무의식중 라이벌로 자리 잡은 김지훈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답답함을 넘어 닥치는 대로 무언가를 부숴 버리고 싶은 욕구마저 치솟았다.
헉! 헉! 헉!
생각만으로도 호흡이 거칠어지는 순간.
띠리리리리! 띠리리리리!
“에이! 이 판국에 웬 전화야? 여보세요?”
(진충기 선생님, 총무과입니다. 박병두 환자 때문에 골치 아프게 생겼습니다.)
‘뭐가 뛰면 뭐도 뛴다더니.’
“그 환자가 왜요?”
신경질이 팍팍 묻어났다.
(선생님과 진료 담당했던 선생님을 고소했습니다.)
“고소? 오창도와 거의 다 합의됐을 텐데 무슨 명목으로? 난 왜 걸고 들어가?”
(의무 기록지 집도의란에 선생님 이름도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빨리 합의 봐야 한다고…….)
‘오창도 이 새끼 봐라. 알아듣게 얘기했는데 끝까지 날 물고 늘어져? 이번 기회에 동조한 놈들까지 모조리 날려 버려?’
“오창도도 같이 걸렸을 텐데 뭐라고 해요?”
“그게 이상합니다. 오늘 정식으로 사표를 냈고, 환자 말로는 오창도 선생님에게 소송을 걸지 않았다고 합니다.”
진충기가 말을 잃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런 날은 없었다. 나쁜 일이란 일은 모두 벌어지는 것 같았다.
김지훈과 오창도의 얼굴이 떠오르는 순간 마지막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이런 썅! 오창도 이 개새끼!”
따닥! 퍽! 빠지직!
뭐든 부수고 싶다는 욕구가 실현됐다.
휴대폰이 박살이 났다.
‘병원 시스템도 모르는 환자가 그걸 알아봤다고? 날 엿 먹이려고 작정을 했다 이거지? 오창도, 너 어디에도 발 못 붙일 줄 알아. 시골구석에 박혀 사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
바드득! 이를 가는 순간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복도 끝에 걸린 TV였다.
『이미 정정 보도를 냈지만 국내 최초란 말이 갖는 의미가 무척 큽니다. 일반적인 사안이 아니라 국민의 건강과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다시 한 번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복강경을 이용한 간 절제는 S 병원에서 처음 성공했고, 집도의는 김지훈 선생님임을 알려 드립니다.』
진충기의 얼굴이 격렬하게 떨렸다.
김지훈이란 이름이 여기저기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자신의 책임을 남에게 미루며 회피한 탓에 굴곡 담낭을 놓쳤다는 사실 자체를 잊었다.
가장 기본적인 수술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사실에 명성만 걱정했다. 이 모든 일이 오창도가 마무리조차 제대로 못했기 때문이란 생각만 들었다.
‘김지훈 너! 오창도 너!’
결국 터지고 말았다.
부들부들 떨던 진충기가 괴성을 질렀다.
“으아아아!”
누구 탓도 아니었다. 뿌린 대로 거두고 있을 뿐이었다.
악에 받친 소리에 회의실을 나오던 H 병원 의사들이 우르르 다시 몰려 들어갔다. 이럴 때 얼굴 보여야 화풀이 대상만 될 것이 뻔했다.
한 교수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태반 이상이 불만 가득한 얼굴이었다.
‘후우! 이젠 감정 조절도 안 되는 걸까? 이런 식으로 가야만 되는 일일까? 오 교수 말대로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는지도 모르겠다.’
“시연이 목숨 걸 일이라도 되나? 어이가 없네. 옷을 벗긴다고? 더러워서라도 내가 먼저 나가는 게 속 편하겠어.”
누군가 중얼거렸다.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미세하게 벌어졌던 틈이 커다란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미약하게 남아 있는 희망마저 사라지는 날, 가슴속 깊이 묻어 두었던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 최인호 교수와 진충기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바로 그들의 말, 행동, 생각이 원인이기 때문이었다.
국내 최고의 시설,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H 병원의 주역을 자처하던 일반외과에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
시연이 아무리 중요한 행사라고 해도 일상은 변할 것이 없었다. 들뜬 마음을 다잡으려고 해도 잔잔하게 남은 흥분이 사라지질 않았다.
일주일 중 가장 바쁜 월요일 일과를 마친 김지훈이 훅 숨을 내쉬며 두툼하게 쌓인 서류를 펼쳤다.
어제저녁 회식 도중, 시연에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지 철저하게 확인하라는 이준영 교수의 오더가 떨어졌다.
한시라도 빨리 이행해야 할 일이었다.
‘시설과 진행 쪽은 지동훈 선생님과 현수가 맡았으니까, 난 수술 쪽에만 신경 쓰면 되겠지?’
지난 한 달간 벌어진 수술부터 확인했다.
이준영 교수.
화요일, 목요일 이틀만 수술하는데 무려 30건이 넘었다. 수술 건수가 결코 적지 않았고, 퍼스트의 이름도 정말 다양했다. 이혁원과 나종진이 주로 섰지만 신현수와 이경석도 간간이 보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이름은 송진우와 강병옥이었다.
‘자식들! 제대로 신경 쓰지도 못했는데 스승님께 인정을 받았다니 대단하네. 3년 차부터 라파로 트레이닝이 필요하다는 말씀이겠지?’
잠시 수련 방식에 대해 생각에 빠졌던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며 다음 장을 넘겼다. 가장 강력한 라이벌들의 수술이 쫙 펼쳐졌다.
신현수.
조기 위암 3건, 비만 5건.
이경석.
조기 대장암 3건.
암이라는 질환과 조기에 국한된 제한적 적용을 생각할 때 절대 적은 수가 아니었다. 개복 수술은 말할 것도 없이 많이 시행했다.
‘라파로가 일주일에 한 건 이상은 되니까, 일정을 조금만 조정하면 시연 때도 환자 확보는 문제가 없겠어. 그렇다면 내가 제일 문제라는 말인데.’
담낭 절제술과 탈장은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 응급 수술은 상황에 따른 일이었지만, 사흘 동안 이어지는 일정을 생각하면 기회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문제는 개인적인 욕심이었다. 최인호 교수와 진충기가 시연에 참석한다는 사실에 더욱 강하게 다가왔다. 헛소문을 한 방에 잠재우고, 진충기의 콧대를 확 누를 수 있는 수술이 필요했다.
바로 간 절제다.
‘시연 전에 한두 번이라도 더 할 수 있다면 최상이긴 한데, 정작 시연 때 환자가 있을까?’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노력한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가장 치명적이지만 상대적으로 환자가 적은 분야가 간담도였다. 그런 특성 때문에 좌측 간만 절제해야 하는 환자를 접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반드시 복강경으로 받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갑갑하면서도 안타깝기만 했다.
‘욕심 부리면 안 된다. 이러다 사고 친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김지훈이 요란한 전화벨 소리에 어깨를 흠칫거렸다.
‘당직도 아닌데, 이 시간에 무슨 전화야?’
“여보세요?”
(나다.)
“예, 스승님.”
벌떡 일어나 전화를 받던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말까지 더듬었다.
“혁원이하고 종진이도 시연에 참가시킨다고요?”
(시연의 의미도 살리고, 좋은 경험이자 발전을 위한 큰 자극이 될 거야.)
“어떤 수술을 주실 생각입니까?”
(담낭 절제술과 탈장이 적당하겠지.)
스승의 오더다.
아들이라고 해서, 특별히 아낀다고 해서 특혜를 줄 스승도 아니었다. 시연의 의미를 살린다는 말 역시 십분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준비하겠습니다.”
(능력이 안 되면 바로 취소해도 되니까 잘 판단해. 개복이 기본이니까 기초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생각으로 철저하게 확인해.)
“제가 결정하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럼 누가 결정해?)
깔끔하게 결정 났다.
(환자분 동의가 절대적인 일이다. 동의는 내가 받을 테니까 넌 자격이 되는지만 판단해.)
4년 차 치프의 복강경 시연이라니 생각만 해도 흥분되는 일이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운 환자 동의를 스승이 맡는다고 했기에 무엇보다 신중하게 판단해야 할 일이었다.
전화를 끊은 후 잠시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의 눈이 으스스하게 빛났다. 어떤 결정이 나든 그 순간까지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미리 알려 준다고 들뜰 놈들은 아니지만 영향을 안 받을 수는 없지. 도리어 수술을 주기가 어려워질 수도 있어. 일단 둘 다 각오해.’
잠시 구석에 치워 두었던 화염방사기를 다시 장착했다.
마침 오늘이 당직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방아쇠를 당겨야 효과를 극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지금이다.
아뻬다.
이혁원이 의아한 눈으로 집도의 자리에 섰다.
강병옥과 차상수도 있는데 새삼 왜 자신에게 수술을 줬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어쨌든 수술 경험이야말로 다다익선이다.
최선을 다해 수술에 임했다.
깨끗하고 깔끔하게 수술을 끝냈다. 수술 팀 모두 4년 차 치프답다는 눈빛을 보냈다. 설마 아뻬 때문에 탈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화르륵! 화르륵!
비 오듯 떨어진 땀이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불길을 뒤집어쓴 이유도 입 밖으로 내질 못해서 그렇지, 누가 들으면 가관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을 것이다.
“이혁원, 4년 차 됐다고 기본을 무시해도 돼? 피부 절개부터 마지막 수처까지 확실하게 하자.”
‘갑자기 왜 이러시지? 피부 절개부터라니, 정말 내가 기본을 무시하고 있었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아무리 존경하는 선배 말이라고 해도 무조건 납득해야 할 상황이 아니었다.
강병옥과 심각하게 오늘 왜 이런 일이 있었는지 대화를 나누었다.
“절대 이유 없이 태울 분이 아닌데, 왜 그러시는 것 같아요? 선생님이 보기에도 문제가 많았나요?”
“저는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끙끙’ 소리만 내고 있을 때 두 번째 응급 수술이 떴다.
부리나케 준비를 하고 수술실에 서는 순간 김지훈이 또 이혁원을 보았다.
“메스 잡아.”
마치 잡아먹을 것처럼 눈이 번쩍번쩍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