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뿌린 대로 거둘 뿐이다 (1)
문이 다시 열리는 순간 희비가 교차할 것이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을 지키며 회의실 내 동정에 촉각을 곤두세울 뿐이었다.
김지훈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조용히 눌렀다.
알아듣기 힘든 나직한 목소리.
때론 살짝 높아진 목소리까지.
격론이 벌어지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5 대 5라고 했지? 학술 임원들은 시연의 의미를 어디에 둘까? 병원을 대표하는 써전의 손이 중요할까? 아니면 병원을 구성하는 써전 한 명 한 명의 손이 중요할까?’
아무리 유리할지라도 진충기의 잘못된 행동 덕을 보고 싶지 않았다. 모두 함께 고민해 도출해 낸 의미를 인정받고 싶었다.
숨 막히는 정적만이 흘렀다.
‘현수가 말한 작업이 무얼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로비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을 했단 말이지? 박병두 환자의 의료 기록을 이용했을까?’
초조한 탓인지 온갖 생각이 스쳤다.
은근히 다가오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주무르는 순간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들 들어오세요.”
드디어 최종 결론이 났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한 채 조용히 회의실로 들어갔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모든 행동을 조심했다. 그럴수록 긴장감은 더욱 높아졌다.
외과 학회장이 연단에 섰다.
이준영 교수와 최인호 교수에게 힐끗 눈길을 주었다. 어떤 결정을 발표하든 겸허히 수용하고, 협조해 달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외과 학회 최초로 시연 행사를 기획했고, S 병원과 H 병원의 제안에 많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만큼 어려운 결정이었고, 고민 끝에 합의를 했습니다.”
좌중의 이목이 학회장에게 집중됐다.
어떤 말이 나오는지에 따라 누군가는 기뻐하고, 누군가는 실망감에 몸을 떨 것이다.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이 은근한 땀으로 축축해졌다.
“시설이나 규모 등의 면에 관해서는 확실히 H 병원의 손을 드는 분이 많았습니다. 점차 어려워지는 의료 환경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투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습니다. 차후 병원 전체가 어떤 시스템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좋은 예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H 병원에 유리한 발언이었다.
최인호 교수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진충기는 눈을 빛내며 주먹에 힘을 주고 있었다.
공과 사를 구별하라지만 좋아하는 기색이 역력해 입이 상당히 썼다. 그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힘이 빠지려는 순간 분위기가 살짝 반전됐다.
“시연은 시설이나 기계가 아니라 사람, 즉 일반외과 의사와 의료진이 주축입니다. 또한 참석하시는 분들의 요구에 얼마나 부응하는지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 점을 두고 임원분들과 깊은 내용의 토론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결과를 도출해 냈습니다.”
잠시 말을 멈춘 학회장이 양 병원 의사들에게 일일이 눈길을 주었다. 유리한 듯, 불리한 듯 지금까지의 말만으로는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솔직히 불리함에 가까웠다. 교수들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결과를 듣지 못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긴장이 느껴졌다.
“결과를 발표하기 전에 한 가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절대 어느 한 병원이 우월하다는 판단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여기 계신 분들이 훌륭하고, 능력 있는 의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객관적으로 수량화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임원 개개인의 주관적 판단이 일정 정도 작용했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학회 임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고민과 고심이 느껴졌다. 양 병원의 자존심과 명예가 달린 일임을 잘 아니 결정을 전적으로 수용해 달라는 부탁이기도 했다.
“그럼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쿵! 쿵! 쿵! 쿵!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입안이 말라 왔다.
학회장의 눈길이 서서히 한 곳으로 향했다.
어느 병원이 선정됐을까?
한마디 말이 참을 수 없는 정적을 깼다.
“시연을 주관할 병원은 S 병원으로 결정됐습니다.”
교수들 모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우워워워워!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고 말았다. 이경석과 신현수가 손바닥을 짝 소리가 나도록 세게 부딪쳤다.
양 병원 의사들의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 소리 없는 환호성과 강렬한 흥분 너머로 푹 숙인 고개와 처진 어깨에 실린 실망감이 보였다.
절대 미안한 일이 아니었다. 스스로 축하하고, 축하받아야 마땅한 일이었다.
“과장님, 이준영 선생님, 고생하셨습니다.”
“잘했다. 잘했어. 노력한 결과를 얻게 돼서 정말 좋다. 다들 수고했다. 수고했어.”
이혁민 교수가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이준영 교수를 보았다. 승자와 패자를 가릴 일이 아니었지만 분명 기쁨과 실망이 교차하는 일이었다.
“선생님, 함께 가시죠.”
“그래야지.”
최인호 교수의 얼굴이 완전히 굳어 있었다. 진충기를 비롯해 소속 의사들은 마치 자신들의 잘못인 것처럼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최인호 선생님, 죄송하게 됐습니다. 학회장님 말씀대로 어느 병원이 우수하다는 말이 아니라는 점 명심하겠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많이 도와주십시오.”
“예, 그래야죠. 허허! 축하드립니다.”
웃는 게 웃는 것이 아니었다. 얼굴이 거의 일그러지기 직전이었다.
이준영 교수가 손을 내밀었다.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이 교수님도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시연 때 반드시 오실 것으로 믿습니다. 김지훈 선생의 수술 보시고 고언 부탁드리겠습니다. 물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지훈이란 이름이 강렬하게 귓가를 자극했다. 마치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냈으니 반드시 참석해 직접 눈으로 확인하라는 말처럼 들렸다.
최인호 교수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감추기 위해 꽉 쥔 두 주먹이 허옇게 변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치욕, 이준영 교수의 입가에 살짝 걸린 미소가 주는 수치감으로 뒤범벅된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최인호 교수에게 이준영 교수는 반드시 넘어야 할 라이벌이었다. 우위에 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만을 노려 왔고, 이준영 교수도 모를 리 없었다.
솔직히 김지훈을 스카우트하고자 했던 일도 그런 이유에서 비롯됐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게다가 평소 거의 말이 없었던 사람이 시연을 두고 목소리까지 높였었다. 그만큼 중요하게 여긴다는 의미였다.
결국 시연은 절호의 기회이자 절대 뺏길 수 없는 행사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자신과 김지훈의 수술을 보러 오라는 말을 평소와 똑같은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했지만, H 병원 일반 외과를 책임지고 대표하는 의사였다. 얼굴을 붉혀 봐야 속만 들키고, 손가락질은 덤일 것이다.
최인호 교수가 급히 표정을 바꾸었다.
“당연히 가야죠. 우리 병원이 준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성대하고, 알찬 시연을 기대하겠습니다.”
넉넉한 웃음 너머로 차가운 눈빛이 보였다.
어색한 악수가 오고 갈 때, 김지훈도 진충기를 찾았다.
헛소문의 진원지라는 생각과 함께 불현듯 오창도와 박병두 환자까지 떠올랐다. 시연 병원으로 결정됐다고 얌전히 두고 보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었다.
‘당신 눈으로 직접 내가 어떻게 수술하는지 봐야 돼. 우리 수술 팀이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반드시 확인하고 인정해. 그게 이 상황을 확실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야.’
눈길이 마주치자마자 손을 내밀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것도 아니고.’
“축하드립니다.”
미소를 머금었지만 내키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맞잡은 손이 무색해질 순간이었지만 김지훈은 도리어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이 순간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조금도 감추지 않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했다.
같은 병원 식구였다면 어떻게든 붙잡고 앉아 고치려 애썼을 테지만 다른 병원 의사다. 스카우트와 헛소문, 오창도 문제까지 겹쳐 정나미까지 다 떨어졌다.
대놓고 쏴야 할 때는 쏴야 한다. 다시는 헛소리를 하지 못하게 해야 했다.
“시연 때 꼭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항간에 이상한 소문이 돌아서 가급적 많은 분들께 제가 수술하는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선생님 같은 분들이 오셔서 확인해 주셔야 확실하게 입을 막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진충기의 얼굴이 붉어졌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지만, 소문은 말 그대로 소문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어디서 발뺌을!
오창도의 입에 자물쇠라도 달렸는지 아는 모양이었다.
할 말 아직 남았다. 슬그머니 손을 빼려는 느낌에 김지훈이 더욱 힘차게 손을 꽉 잡았다.
“저는 선생님처럼 대범하지 못해서 이런 일을 그냥 지나치기 힘듭니다. 어떤 놈인지 몰라도 잡히는 대로 개망신을 줘야 속이 후련할 것 같습니다.”
딴청을 부리며 헛기침만 했다.
“관계도 없는 분께 쓸데없는 말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참! 라파로로 간 절제를 하셨다는 소문 들었습니다. 첫 시도가 주는 중압감이 대단한데 무사히 끝내셨다니 축하드립니다. 뉴스에 날 만한 일이죠.”
소문, 뉴스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했다.
‘이 자식이 지금 대놓고 나를 놀리는 건가?’
점점 얼굴이 벌게지던 진충기가 애써 웃었다.
“방송국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도…….”
“오해는요? 기자들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짧게 나오긴 했지만 정정 보도까지 봤습니다.”
“정정 보도요?”
어젯밤 뉴스 말미에 국내 최초란 말이 틀렸다는 정정 보도가 나왔다. 정훈철이 어떤 힘을 썼는지 모르지만, 국내 최초는 S 병원이라는 멘트까지 나왔다.
못 본 모양인지, 못 본 척을 하는지 몰라도 그게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다. 아니면 울화통이 터져 이 자리에 앉아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못 보신 모양입니다. 어쨌든 중요한 일은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직도 악수 중이다. 땀이 찰 지경이지만 손을 놓을 때가 아니었다.
“혹시 굴곡 담낭 환자분에 대해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수술 잘 끝냈고, 무사히 퇴원하셨습니다. 노련해도 놓치기 쉬운 질환인 데다 수술 후 일 처리까지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굴곡 담낭? 내가 수술했다는 사실을 안 거야? 도대체 어느 놈 입이지? 오창도 너야?’
노골적인 말에 진충기의 눈가가 바들바들 떨렸다.
창피함이 아니라 견제와 질시의 눈빛이었다. 아무리 입단속을 해도 지킬 수 없는 비밀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그럼 시연 때 뵙겠습니다. 굉장히 바쁘시다는 거 잘 알지만, 꼭 와 주실 것이라 믿고 있겠습니다.”
이제야 손을 놓았다. 진충기의 손이 허옇게 변해 있었다.
예의를 갖춰 인사한 김지훈이 돌아섰다.
진충기의 표정이 어떨지 궁금하다 못해 몸살이 날 지경이었지만 여기까지다. 한 발 더 나가면 진충기와 비슷한 사람이 될 뿐이었다.
진충기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런 짓 안 하려고 했는데 속이 너무 후련하네. 지금이라도 입단속 잘하고, 오창도 선생님과 박병두 환자분 일도 성심성의껏 잘 처리해야 할 겁니다. 그게 당신을 위한 길이라는 걸 잊지 말아요.’
치졸한 짓이라고 해도 좋았다. 지금까지 누구 앞에서도 자기 자신에게 도취돼 자랑하거나, 남을 깎아내리려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굳이 기억해 내고 싶지 않았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그렇게 시키는 것을 어쩌란 말인가?
자리로 돌아오자 신현수와 이경석이 꽤나 궁금한 얼굴이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시치미 뚝 떼며 딴청을 부리던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선정된 이유가 뭘까?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S 병원에서 제시한 계획서에 담긴 목적과 의미겠지만 어딘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회 임원들이 헛소문의 진위나 근원지가 H 병원이라는 사실을 알아 감점을 주었다고 보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정정 보도가 가져온 여파?
TV를 봤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그렇다면 작업의 효과?
“현수야, 혹시 박병두 환자 의료 기록…….”
“그걸 이용했냐고?”
피식 웃으며 서류 하나를 툭 내밀었다.
“쓸 일도 없었고, 보일 이유도 없었어.”
“그럼 뭐 하러 복사까지 했어?”
“순간의 유혹이라고나 할까? 시연 후에도 명백한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면 다시 유혹에 빠질 수도 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다.”
별스럽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왠지 마음이 푹 놓이며 푸근해졌다.
“팽팽하다고 했는데, 결국 현수 네가 작업을 열심히 해서 우리가 선정됐나?”
“도움이 됐을 가능성은 있지. 작업 정말 열심히 했다.”
이경석의 귀가 활짝 열렸다.
“통상 생각하는 로비가 아니라며? 어떻게 했다는 말이야?”
“지훈이, 형, 후배들, 교수님들 마음을 전달하려 애썼어요. 그것이 우리가 시연에 담고 싶어 했던 의미와 목적이잖아요. 식사 한번 대접하지 않았는데 학회 임원 선생님들이 도리어 그 점을 인정하신 것 같아요. 고마운 분들입니다.”
갑자기 말문이 턱 막혔다.
결국 S 병원의 마음과 뜻이 선정의 결정적인 요인이라는 말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할 쾌거 중의 쾌거였다.
신현수와 라이벌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이경석과 동시에 엄지를 치켜들 수밖에 없었고, 신현수는 평소와 다름없이 냉철한 눈빛으로 화답했다.
기쁘고 즐거운 날이다. 이런 날 회식하지 않으면 언제 할까?
“가자, 가자. 오늘은 우리가 쏜다, 우리가.”
송재덕 교수의 목소리가 허공을 둥둥 떠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