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수술 시연은 어디로? Ⅲ (2)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충기 선생님이 주요 과정을 담당했고, 제가 초반 수술과 마무리를 했습니다.”
교수에게 초반과 마무리를 맡겼다는 점이 의아했지만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단, 수술 전 환자에게 진충기 자신이 집도의라고 말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이런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말하지 않은 걸까?
“초반과 마무리요?”
“말 그대로 수술 준비까지 제가 한 후, 진충기 선생님은 담낭만 절제했습니다. 클립을 잡은 후 나머지 과정을 제가 맡았습니다. 그 부분에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고요.”
신현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결국 집도의는 오창도가 아니라 진충기라는 말이었다. 의료 기록에 두 사람을 모두 집도의로 올린 것 역시 의아한 일이었다.
“그러면 선생님이 집도의라고 말하기 힘들지 않습니까?”
“환자분을 최종적으로 진료하고 수술 날짜까지 제가 잡았습니다. 수술에 안 들어간 것도 아니니까 당연히 집도의가 맞는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학회가 끝난 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생겼습니다.”
진충기의 욕심과 요구가 용인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다. 이전에도 종종 난이도 있는 수술을 아래 의사들에게 맡긴 후 말미에 손만 거들고는 자신의 실적으로 삼곤 했다.
바쁘다는 핑계와 관행이라는 이유를 댔지만, 항의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다들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실제로 오창도를 분원에 발령시킬 정도로 막강한 힘과 영향력을 가진 진충기였다.
‘그 정도면 대리 수술이나 다름없잖아? 이렇게 되면 학회 발표도 거짓일 가능성이 높은 거 아냐?’
다른 의사가 거의 다 한 수술을 자신의 수술로 둔갑시켜 실적을 부풀리다니, 듣고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김지훈이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그래서요?”
“갑자기 기본적인 수술 실적에도 욕심을 냈습니다. 환자분 수술처럼 담낭만 제거하거나, 심한 경우 극히 일부분만 손을 대고 자신의 수술로 올리라는 오더가 떨어졌습니다. 실적에 눈이 먼 것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점입가경이었다.
오창도처럼 침착한 성격을 가진 의사가 실수하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박병두 환자의 경우, 정상적으로 진행했다면 충분히 막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었다.
확신하기 전에 한 가지 의문을 해결해야 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마무리를 직접 하셨으면 담낭이 남았다는 것을 아실 수도 있었을 텐데요.”
“솔직히 화가 너무 났고, 자신을 집도의로 올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의욕까지 잃었습니다. 클립까지 잡았고, 가장 실력이 뛰어난 의사가 했는데 무슨 문제가 있을까 싶은 생각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창도의 어깨가 축 처졌다.
“환자분, 제 잘못이 가장 큽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했어야 했는데 집도의의 의무를 방기했습니다. 화가 많이 나시겠지만 병원 측과 얘기해 원만하게 해결하겠습니다.”
박병두 환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따지고 보면 선생님이 수술한 게 아닌데, 왜 책임을 자처하십니까? 진충기라는 사람을 감싸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지금도 아무 상관 없는 사람처럼 발뺌하고 있어요. 나 같으면 당장 달려가서 책임지라고 소리쳤을 겁니다.”
재수술을 한 것 말고는 관련이 없는 김지훈의 마음도 다르지 않았다. 생각만으로도 부글부글 가슴이 끓어오를 지경인데, 정녕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화도 안 나나? 왜 저렇게 담담하지?’
말 못할 약점이라도 잡힌 걸까?
H 병원과 진충기에게 미련이 남은 걸까?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오창도가 고개를 숙인 채 남모를 괴로움을 호소하고 있었다. 박병두 환자가 재수술받은 사실이 H 병원에 알려진 후 받은 압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회유와 협박까지 따라왔다.
앞으로도 일반외과 의사로서 살고 싶다면 적절한 선에서 마무리 지어라. 어차피 너도 집도의고, 지금 역시 H 병원 소속이니 네 책임이 가장 크다. 이번 일이 무난하게 끝나면 곧 센터로 복귀시켜 주겠다.
이미 마음이 떠난 이상 한 귀로 흘릴 말이었다. 솔직히 당장 터트려 책임을 분산시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협박이 있었다.
‘오창도, 너와 나만 문제 되는 게 아니다. 진료한 사람부터 너하고 뜻을 같이한 사람까지 모조리 영향을 받을 거야. 네 선택에 따라 동료들이 심각한 피해를 볼 수 있어. 우리 센터에 들어오려고 줄 서 있는 거 알지? 잘 생각해. 적당히 사과하고, 결국 돈이면 해결될 일인데 키울 이유가 없잖아? 과실, 소송, 그런 거 좋아하는 사람 없다.’
‘자신에게 해가 된다면 그렇게 하고도 남을 사람이야. 명성, 명예, 그까짓 게 뭐라고. 최인호 교수님까지 옹호하는 이상 내 선에서 끝내야 동료들을 지켜 줄 수 있어.’
오창도가 독백하듯 입을 열었다. 나직한 목소리에 걱정과 염려가 가득했다.
“김지훈 선생님, 제가 사고 쳤다고 했죠? 위에서 볼 때는 혼자 친 게 아닙니다. 이 상태로 가다간 H 병원의 미래만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절 믿고 따르는 후배들, 제가 신뢰하는 동료들을 대표해 강력하게 항의했습니다.”
단순한 말다툼이 아니었다.
“결과는 분원 발령이더군요. 짐작하셨겠지만 나가라는 소리지요. 제 선에서 끝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퇴직을 결심했습니다. 이번 일이 커지면 제 후배, 제 동료들까지 다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밖에서 보는 사람은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압박감을 느끼는 존재가 내부 사람입니다. 다들 꿈을 갖고 일합니다. 스스로 퇴직을 결정한다면 모를까, 걸림돌이 될 수는 없습니다. 매일매일 마주쳐야 하는데 진충기 선생님의 머릿속에 제가 떠오르는 한 버티지 못할 겁니다.”
목소리에 답답함이 가득했다.
“복강경 센터는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의지가 있는 사람이 남아 있어야 개선을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이번 일이 제 선에서 마무리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직도 선생님이라며 존대를 했다.
수련 때부터 몸에 밴 말투와 행동일 테지만, H 병원 상황이 어떤지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었다.
“환자분, 무리한 일인 줄 알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다른 병원, 다른 의사 문제인데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아마도 금경태가 있을 당시의 경험이 본능적으로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했지만 착한 사람인지, 바보인지 모르겠다. 오창도 선생님 같은 의사가 있어 희망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묻을 일이 아닌데.’
오창도의 말을 이해하지만 반드시 올바르게 해결돼야 할 일이었다. 뭔가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에 몰두하는 순간 박병두 환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확실하게 책임을 물을 겁니다. 의료 쪽은 잘 모릅니다만, 세상 돌아가는 이치는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거짓말로 책임을 회피하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역시 당사자의 판단이 가장 강력했다.
“그것이 선생님의 후배와 동료들을 위한 길일 겁니다. 김지훈 선생님, 혹시 의료 과실이 면허와 관계가 있습니까?”
이런 면은 신현수가 더 잘 안다. 김지훈의 눈짓에 냉철하게 대답했다.
“고의가 아닌 이상 조금도 영향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의도하지 않은 과실이죠. 오창도 선생님이 집도의라는 사실 역시 기록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주장입니다.”
박병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정말 웃기는 일이군요. 오창도 선생님 말씀을 들어 보니까 진충기가 원하는 것이 명예 같은데, 그런 면에는 문제가 생기겠죠?”
“소송이 걸린다고 해도 워낙 애매모호한 경우가 많고, 도리어 환자가 오해를 하거나 브로커의 농간에 넘어가는 일도 많아 큰 영향은 없을 겁니다.”
“제 경우도요?”
“굴곡 담낭이 원인이라고 들었습니다. 교과서에도 놓치는 경우가 있다고 쓰여 있기 때문에 민사로 끝날 일인 것 같습니다. 원만한 합의가 최선으로 보입니다.”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결국 합의가 되든 안 되든 별 타격이 없다는 소리였다. 모든 환자가 실력이 뛰어난 의사를 바라지만, 한편으로 인품까지 갖춘 의사를 바라기 때문에 더욱 허탈할 것이다.
진실을 알았다고 해도 개입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박병두 환자, 진충기, 오창도, 수술 후 진료한 의사까지 4명이 만나 해결할 일이었다. H 병원과 진충기의 위세를 생각하면 결론은 이미 난 것으로 보였다.
‘너무 화나고, 찝찝하네.’
이대로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걸까?
그때 신현수가 의외의 말을 했다.
“죄송합니다만, 혹시 H 병원 의료 기록을 복사해도 되겠습니까? 환자분의 동의가 필요한 일입니다.”
“이게 왜 필요하십니까?”
“제가 드린 말씀은 환자분 입장에서 본 현실입니다. 다른 생각 하지 마시고 가장 유리한 방향으로 해결하시면 좋겠습니다. 반면 진충기라는 의사 입장, 의료계 전체적인 시각에서 보면 이 자료의 의미가 많이 다를 겁니다. 반드시 고쳐야 하는 일이지 않습니까?”
신현수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이미 명명백백하게 잘잘못이 가려진 일이었다. 더구나 관행이란 미명하에 일개 병원, 혹은 의사 개인의 일탈로 치부할 일도 아니었다.
무슨 의미인지 눈치챈 박병두 환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서둘러 복사를 했다.
‘현수야, 어떤 생각을 하는지 모르지만 무조건 난 동의다. 미꾸라지 한 마리 때문에 진흙탕을 만들 수는 없어.’
무언가 가슴속에서 꿈틀거렸다.
오창도가 조용히 일어났다.
“환자분, 확인할 건 다 확인하셨으니까 가시죠. 김지훈 선생님, 폐만 끼쳤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딘가 눈빛이 달라진 것 같았다.
“아닙니다. 잘 해결하시길 바랍니다.”
“오창도 선생님, 의사분들이 최선을 다한다면 고마워하지 않는 환자는 단 한 명도 없을 겁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믿음이 깨지지 않길 바랍니다.”
박병두의 마지막 말이 귓가를 울렸다.
딸깍! 문 닫히는 소리가 울렸다.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 가슴을 콱 찍어 눌렀다.
그 순간 신현수가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한참 만에 돌아와 혼자 피식 웃었다.
“난 심각하기만 한데, 갑자기 뛰쳐나가더니 왜 웃어?”
“오창도 선생님 상당히 괜찮은 사람 같지 않아? H 병원에서 일했으니까 실력은 기본일 테고, 경력도 꽤 쌓았겠지?”
“그래서?”
“내년에 펠로우 뽑으니까 생각 있으면 지원하시면 좋겠다고 했어. 동료를 저 정도로 생각한다면 어떤 일이든 손발 잘 맞을 것 같다.”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현수, 척 보면 펠로우 마친 선생님이란 생각 안 들어? 우리 병원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할 텐데 뭐가 좋다고 거꾸로 지원하겠어. 오지 말라는 소리랑 뭐가 달라?”
“완전히 다르지. 교수로 선발되는 일은 자신의 능력에 달린 문제 아니겠어? 박승준 선생님하고 지동훈 선생님을 보면 알 수 있잖아. 만에 하나라도 지원한다면 교수님들께서 어떤 자리를 주어야 할지 정확하게 판단하실 거야.”
“이 자식이! 펠로우가 아니라 교수라고 말했으면서 엉뚱한 소리 하기는. 너 혹시 내가 얼마나 어리숙한 놈인지 떠보는 거야?”
“좋을 대로 생각해. 틀린 말도 아니네.”
냉철한 놈이 능글맞음까지 갖춰 가고 있었다.
혀를 차던 김지훈이 신현수의 손에 들린 의료 기록에 눈을 돌렸다. 어떤 방법을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당사자가 아닌 이상 하등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건 왜 복사했어?”
“이거? 작업 때문에.”
“너 설마 그걸 학회 임원들에게 보여 주려고? 진충기는 보고 싶지 않지만 이런 식으로 해결할 일 아니다.”
“밥 사고 술 사면서 로비하는데, 뭐가 오갈지 어떻게 알아? 이건 돈하고 상관도 없고, 무엇보다 객관적인 자료야. 진충기가 정신 바짝 차리게 혼내 줄 수도 있고.”
김지훈이 입술만 오물거렸다.
지금도 때론 냉철하다 못해 차갑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객관적이고, 곁눈질은 생각도 하지 않는 신현수였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최선의 길을 찾아갈 것이다.
‘나 같으면 어떻게 할까? 진충기 그 인간은 머릿속에 뭐가 들었기에 그따위로 행동하지? 나쁜 놈은 벌받아 마땅해. 오창도 선생님, 파이팅! 박병두 환자분, 확실하게 처리하세요.’
창피함을 넘어 같은 의사라는 사실이 수치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도 잠시, 신현수 말대로 훌륭한 의사 한 명을 봤다는 생각에 기분이 다소 나아졌다.
하나를 잃으면 다른 하나를 얻는 모양이다. 어딘가에 그런 의사들이 수없이 존재할 것이란 사실에 이유 모를 뿌듯함까지 느껴졌다.
‘나도 열심히 살고, 열심히 배우자.’
열심히 잘 살려면 출산휴가를 받아 하루 종일 집에서 머물고 있는 고경아부터 챙기는 것이 마땅했다. 부리나케 집으로 향하는 김지훈의 어깨가 축 처졌다.
‘너무 많이 샀나?’
양손이 보통 무거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곤히 잠든 고경아가 깰세라 숨소리를 죽인 김지훈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똑바로 눕지도 못하고 모로 누워 자는 모습이 안쓰럽고 미안했다. 10킬로그램이 넘게 늘은 체중은 배 속의 아이를 잘 키웠다는 의미지만 엄마에게는 결국 무리가 될 것이다.
‘경아 씨, 조금만 더 고생해요. 우리 딸, 곧 보자. 아빠가 많이 보고 싶다.’
한 명의 어엿한 의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만큼 한 사람의 남편으로서, 곧 세상 빛을 볼 한 아이의 아빠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왜 이렇게 훈철이 형 생각이 나지?’
이래저래 미안한 밤이었다.
초조한 하루가 지나가고, 또 하루가 지났다.
드디어 시연 병원을 결정하는 날이 왔다.
저녁 8시, 속속 학회 임원들이 도착했다.
양 병원의 주요 구성원들이 또 한 번 마주 앉았다. 박승준 교수와 진충기가 마지막 보충 설명을 하는 동안 팽팽한 긴장만이 감돌았다.
김지훈과 신현수가 눈가를 좁힌 채 두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설명이 끝난 후에도 진충기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는지 전과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아직 진행이 안 된 걸까? 아니면 얼굴에 철판을 깐 걸까? 오창도 선생님 같은 사람을 못 알아보고 쫓아낸 당신도 참 불쌍한 인생이다.’
학회장의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최종 설명 잘 들었습니다. 그럼 이해 관계자를 제외한 분들만 회의실로 들어와 주시기 바랍니다. 심도 있는 논의를 거친 후 투표를 통해 최선의 결정을 할 것입니다.”
쿵!
회의실 문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