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860화 (860/1,329)

7화. 수술 시연은 어디로? Ⅲ (1)

과도한 긴장에 갑갑함을 참지 못한 이경석이 귓가에 손을 가져왔다.

“지훈아, 어떨 것 같아?”

“솔직히 만만치 않네요.”

“시설이야 당장 바꿀 수 없는 일이니까 열외라고 쳐도, 시연 방식이 임원들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지 않아? 난 불안하네.”

신현수가 스윽 고개를 들이밀었다.

“경석이 형, 결정은 임원이 하지만 의미는 우리가 부여하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최선을 다해 준비했으니까 어떤 결정이 나든 후회하지 말죠.”

김지훈이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야! 갈수록 멋져지네. 이젠 수술 실력만이 아니라 다른 능력까지 따라잡기가 힘들어. 내가 그래서 널 항상 노려볼 수밖에 없어.”

“나도 마찬가지다. 경석이 형까지 견제하느라 너무 힘들어. 조기 대장암 수술할 때 보면 겁이 날 정도야.”

“자식들! 긴장해라. 근데 현수야, 작업 들어간다더니 그건 능력이 딸리나 보다. 송재덕 선생님까지 침묵을 지키시는 이 어색한 분위기 어쩔 거야?”

“작업, 성심성의껏 했습니다. 분위기가 걱정이시면 형이 앞에 나가서 노래라도 한 곡 하시죠. 뽕짝이 좋을 것 같은데, 어때요?”

이 판국에 농담까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도 웃음이 나왔다.

소리가 삐져 나간 모양이었다.

“뭐니? 뭐야? 분위기도 갑갑한데 나도 좀 듣자. 경석아, 무슨 얘기 했어?”

“별말 아닙니다.”

“근데 왜 웃어? 왜? 너 지금 얼마나 중요한 순간인지 몰라? 요놈들이 아주 이제 나만 쏙 빼놓고 지들끼리만 속닥거려요. 나 은퇴하면 쳐다보지도 않을 거지? 그치?”

“어휴! 선생님, 은퇴하실 날 멀었습니다. 왜 자꾸 은퇴한다는 소리를 하세요.”

“경석이 너 때문이야. 경석이 너. 그 소리 듣기 싫으면 빨리 왜 웃었는지 말해 봐. 응? 뭐야? 뭐?”

박승준 교수와 지동훈 교수도 슬며시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주 중요한 순간인 데다 엄숙할 정도로 조용한 H 병원 의사들 앞에서 소리 내 웃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어떤 결정이 나오든, 나름 열심히 준비했으니까 후회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에이! 난 또 뭐라고. 하여튼 이놈들도 가만히 보면 허당기가 있어. 새삼스럽게 당연한 소리를 뭐 하러 해? 에이! 목 탄다, 목 타.”

헉! 이럴 수가!

박승준 교수가 어느새 공손하게 커피 한 잔을 들고 서 있었다. 완전히 송재덕 교수 라인이 됐다.

맛있게 마시는 모습을 보던 이경석이 투덜거렸다.

“선생님 때문에 매일 저만 혼나잖아요.”

“왜 내 탓을 하시나. 혼나기 싫으면 말씀 끝나자마자 빠릿빠릿하게 움직여. 선생님, 커피 맛이 어떠십니까?”

“이런 건 애들 시키자, 애들. 경석이 저놈도 애야, 애.”

마치 시연 병원 결정은 어떻게 되든 좋다는 듯 또 웃음이 터졌다. 과도한 긴장이 풀리며 평소 모습을 되찾았다. 이것이야말로 S 병원의 숨은 힘이었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빛을 발하는 방식일 것이다.

H 병원 의사 몇몇이 부러운 눈빛을 보냈다. 아직도 얼굴이 일그러진 진충기 앞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자신들의 모습을 자책하는지도 몰랐다.

‘세상 끝나는 것도 아니고, 환자 보는 일만도 힘들어 죽겠는데 참 힘들게 사네. 웃읍시다. 시연 병원으로 결정되면 축하하고, 다음을 기약하면 되는 일입니다.’

그동안 죽을 동 살 동 매달려 왔건만, 왜 이렇게 한가한 생각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슬며시 미소까지 머금던 김지훈도 이내 똑같이 얼굴을 굳혀야 했다. 회의를 마치고 나온 교수들의 표정이 밝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과장, 무슨 말 나왔어?”

“의견 일치가 안 되네요. 거의 반반이라서 다음 주 결정만 쳐다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시연 방식이야 우리 측 제안이 훨씬 의미가 있는데, 이유가 뭐야? 설마 시설 문제야?”

이혁민 교수가 헛기침을 했다.

“이준영 선생님이 기본적 수술만 담당하신다는 게 도리어 마음에 안 드는 모양입니다. 지금도 격식과 체면을 가장 중시하는 분들이 적지 않네요.”

“그래? 하긴 사람도 그렇고 세상 한순간에 안 바뀐다. 근데 최인호 교수는 왜 안 나와?”

“시연 이외의 문제로 따로 할 말이 더 있답니다.”

“뭐? 이 사람이 큰일 날 사람이네. 무슨 말을 할지 알고 나와? 로비는 못할망정 당하지는 말아야지. 소문을 누가 냈는지 듣고도 느껴지는 게 없어? 내가 지금 웃는 것처럼 보여도 웃고 있는 게 아니야. 에이! 시연이고 뭐고 내 자식이었으면 열 번도 더 혼냈을 거야. 열 번도 더.”

입맛 다시는 소리만 들렸다. 그제야 이준영 교수가 입을 열었다.

“언젠가는 피눈물을 흘리며 후회할 겁니다. 그만하고 가시죠. 잘될 겁니다.”

슬쩍 김지훈을 보았다.

‘악성 소문에도 불구하고 항상 제자리를 지켜 줘서 고맙구나. 스승이라고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

“박 교수, 지 교수, 김지훈, 신현수, 이경석, 수고했다. 너희들이 제안한 의미를 평생 잊지 않으마. 고맙다.”

‘헉’ 소리가 나는 정도가 아니었다. 칭찬이라는 말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제자들과 이젠 신임이라 말할 수 없는 교수들을 믿고 많은 것을 맡겨 온 이준영 교수였다. 어느 틈엔가 그 수준을 넘어 당당한 한 명의 써전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내도 고맙다.”

“야야! 깜빡이도 안 켜고 갑자기 이렇게 넘어가면 여적 웃고 떠든 내가 뭐가 되니? 내가. 하여간 좋은 건 자기들이 다 해요. 나만 우스운 놈이지, 나만.”

“선생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매일 배우고 있습니다. 제가 모실 테니 가시죠.”

이경석이 박승준 교수보다 반 박자 빠르게 움직였다. 허리를 꾸벅 숙이며 회의실까지 열자 송재덕 교수가 못 이긴 척 헛기침을 하며 뒤따랐다.

온 얼굴을 뒤덮은 미소가 물결처럼 퍼져 나갔다.

이준영 교수마저 눈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최선을 다한 것으로 충분해. 어쩌면 우린 시연보다 더욱 값진 것을 얻었고, 더욱 큰 의미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시연 준비 과정을 떠올린 김지훈이 환하게 웃었다.

H 병원 의사들만 남았다.

‘놀러 온 것도 아니고 뭐 하는 짓들이야? 저 와중에 간 절제를 또 했어? 임원들에게 미칠 영향을 막을 방법은 없을까?’

진충기의 침묵을 따라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잠시 후, 최인호 교수가 웃음을 보이며 나오고 나서야 조금은 긴장이 풀렸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 임원들과의 식사 자리가 마련됐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했지만 몇몇은 마지못한 기색이 역력했다.

“제 성의입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마음껏 드셨으면 좋겠습니다. 진 선생, 뭐 해? 술 한 잔씩 따라 드려. 학술 임원이 됐으면 인사 정도는 해야지.”

“예. 죄송합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진충기가 재빨리 무릎을 꿇고 술을 따랐다.

무척 정중하고, 격식을 갖춘 태도에 만족스러운 웃음소리가 터졌다.

술기운이 흐르며 나직한 대화가 오고 갔지만 근사한 일식집의 고요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를 면치 못한 의사들부터 임원까지 흡족한 얼굴, 떨떠름한 얼굴, 마지못한 얼굴까지 수많은 표정이 교차했다.

식사가 끝난 후, 진충기가 한 교수를 불렀다.

“섣불리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분위기 봤지? 아주 중요한 때야. 사소한 일도 영향을 줄 수 있으니까, 박병두 환자 문제 커지지 않도록 환자하고 오창도 입단속 잘해.”

“선생님도 지속적으로 만나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가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제길! 하필이면 그 많은 병원 놔두고 김지훈한테 수술을 받을 게 뭐야? 재수 없으면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내가 딱 그 꼴이네.”

신경질과 짜증이 가득했다.

최인호 교수와 학술 임원들이 나오자 표정을 싹 바꾸며 재빨리 뛰어갔다. 택시 잡아 주는 것도 모자라 H 병원 의사들에게 운전까지 시켰다.

내심 못마땅한 얼굴이 한둘이 아니었다.

‘진심이 아니면 결국 문제가 될 텐데.’

한 교수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병원도 직장이기에 서열과 상하를 무시할 수 없다. 동료로서 존중받고, 지시를 내리는 사람을 진심으로 존경한다면 기꺼이 감수하겠지만, H 병원 복강경 센터는 그렇지 못했다.

여기저기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오창도의 분원 발령에 고개를 저었고, 그만둔다는 소리에 한숨까지 터져 나왔다.

그동안 잘나갔고, 지금도 다른 병원이 부러워할 정도로 잘나가는데 무엇이 문제인지 모를 일이었다. 아니, 다들 원인을 알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

일상으로 돌아왔다.

은근히 다가오는 조급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양 병원의 시스템이 고스란히 반영된 시연 중 누구 손을 들어 줄지 예측하기 힘들었다.

학회 임원들의 논의 결과를 알 수 있는 이준영 교수나 이혁민 교수도 별말이 없었다. 부지런히 임원들과 접촉하는 신현수가 유일한 소식 통로였다.

“어떤 말이 나와?”

“우리 쪽 지지와 H 병원 지지가 대략 30퍼센트야. 중간 입장에 있는 분들이 관건인데, H 병원 로비가 만만치 않아.”

“이런 일도 로비를 해?”

“병원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밀고 있는 것 같아. 명성과 명예가 달린 일이잖아. 최인호 교수나 진충기도 임원들과 자주 접촉하고 있어.”

한 번 미워진 놈은 계속 밉기 마련이다.

‘로비까지 하면서 수술은 언제 하나?’

어쨌든 로비에 관한 문제는 의사보다 더 강력한 사람이 있다. 환자를 치료하는 일만큼 행정적인 일도 병원 경영에 지대한 영향을 받기 때문이었다.

김지훈이 은근한 눈치를 보냈다. 신현수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식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라는 거 잘 알잖아? 이사장님께 잘못 말했다가는 윤 이사님한테까지 벼락을 맞을 거야. 그쪽은 안 돼. 그건 그렇고 지훈아, 진충기가 간 절제를 한 건 더 한 모양이야.”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또? 후유! 환자가 정말 많은가 봐.”

“방송을 탄 영향이겠지. 정훈철 PD님은 별말 없으셨어? 정정 보도라도 나와야 할 것 같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네 노력은 알겠는데 부탁하기가 보통 갑갑한 게 아니야. 같은 방송국이면 몰라도 다른 방송국이잖아.”

“그렇긴 해. 어쨌든 계속 작업하면 우리 측 제안에 동조하는 분이 절반은 될 테니까 끝까지 포기하지 말자. 골치 아프다. 이틀 후면 결정 나는데 갑갑하네.”

그놈의 작업은 도대체 뭘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시연을 따내려는 H 병원의 행태를 두고 봐야 한다니 답답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똑같이 행동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사방이 꽉 막힌 상황이었지만 세상을 믿고 싶었다. 원칙을 중시한다면 올바른 방법으로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의 손을 들어 줄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 방식이 올바르고, 제안은 더 의미가 있어.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만은 분명해.’

자신을 가질 일이었다.

그때,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도 못한 얼굴이 보였다. 박병두 환자와 보호자였다. 그 뒤에 오창도가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김지훈이 반가워하면서도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일이 잘못된 것일까?

“환자분, 오창도 선생님, 무슨 일이십니까?”

“잠깐만 시간을 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되실까요?”

“예? 일단 앉으시죠.”

시뻘게진 얼굴로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H 병원 진료 기록이었다.

“선생님, 여기 좀 잘 봐주세요.”

수술 기록지 한 부분을 가리켰다.

<집도의:진충기 교수/오창도 교수>

“지금까지 오창도 선생님께 수술받았는지 알았는데, 이렇게 쓰여 있으면 진충기라는 의사한테 받았다는 거죠? H 병원에서는 형식상 그런 거라고 하지만, 선생님이 주신 기록지에는 선생님 이름만 쓰여 있는데 어느 쪽이 맞는 거죠? 우리가 그동안 엉뚱한 분한테 항의를 한 거 아닙니까?”

전공의가 집도했을 때 작성 방식이었다.

수련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환자의 이해를 구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그 탓에 말하지 못하고 기록으로만 남길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하지만 오창도는 엄연히 교수인데 의아한 일이었다.

박병두의 숨소리가 무척 거칠었다.

“일단 진정하세요. 오창도 선생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H 병원은 원래 주임 교수 이름을 함께 기록합니까?”

답답한 한숨이 터졌다.

“이런 일로 또 찾아와 정말 죄송합니다. 두 분이 너무 흥분하셔서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환자분, 진충기 선생님도, 저도 집도의가 맞습니다.”

“두 명이 수술했다는 말이에요? 첫 진료는 진충기 선생님한테 받았지만 수술 결정은 분명히 선생님과 했잖아요. 그런데 왜 다른 사람이 수술을 한 거예요?”

“여보! 잠깐만 참아. 오창도 선생님, 저 사업하는 사람이고 이젠 남부럽지 않게 삽니다. 결코 돈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닙니다. 수술이 잘못됐다면, 실수가 있었다면 수술한 의사가 책임져야 하는 것이 맞는 소리 아닙니까?”

“예. 맞는 말씀입니다.”

“그럼 수술한 분이 왜 두 명이죠?”

진충기가 수술했다고 해도 기록으로 보면 대리 수술은 아니었다. 오창도도 자신의 입으로 집도의임을 밝혔는데 의아한 일이었다.

“왜 말씀을 못하십니까? 수술 후에 진료한 의사도 초음파에서 안 보였다는 말로 적당히 합의하자고 발뺌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 모든 책임을 물어도 됩니까?”

언성까지 높아졌다.

김지훈이 서둘러 둘 사이를 막았다.

“환자분, 진정하세요. 여기서 목소리를 높이실 일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답답해서 그럽니다. 제가 처자식 굶기면서까지 정직 하나로 버텨 온 놈입니다. 누가 잘못한 건지 명명백백하게 밝혀져야 합의를 해도 떳떳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오창도 선생님, 어떻게 된 일인지 말씀해 주세요. 재수술한 입장에서 어떻게 된 일인지 저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오창도가 긴 숨을 내쉬었다.

‘한 교수, 이 교수, 정 교수, 이번 일이 빌미가 돼 피해 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쩔 수가 없네. 미안하다.’

동료를 위해 피하고자 했지만 의료 기록은 명백한 증거였다. 일이 어디까지 커질지 모르지만 결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리어 H 병원을 진정으로 위한 일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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