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수술 시연은 어디로? Ⅱ (2)
보호자도 흠칫 놀라며 허겁지겁 딴청을 피웠다. 마치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꺼낸 것 같았다.
의아한 눈빛을 보내자 박병두 환자가 얼버무렸다.
“합의에 관계된 일이라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는 말을 들어서요. 이왕이면 확실하게 마무리 짓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별일 아니니까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웃음기를 보였지만 안색이 다소 어두웠다.
수술과 진료라는 말에 언뜻 스치는 생각이 있었지만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여겼다.
시연 계획을 발표하는 날이기에 할 일도 많아 더 이상 시간을 끌 상황이 아니었다.
당장 오늘 저녁 진충기의 얼굴을 봐야 한다.
어떤 계획서를 들고 올지 모르지만, 시연에 임하는 자세와 마음까지 정확하게 전달해 반드시 시연 병원으로 선정되고 싶었다.
“아무쪼록 잘 해결하시길 바랍니다. 안녕히 가세요.”
“고맙습니다. 애초에 선생님께 수술받았으면 이런 일도 없고 얼마나 좋았을까? 당신도 앞으로 내 말 잘 들어요. H 병원에 갔을 때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든다고 했잖아요.”
“당신이 언제 그랬어?”
“어머머! 이 양반이 정말.”
티격태격 말싸움이 벌어졌다.
어느 부부나 똑같은 모양이다.
싸울 힘이 있는 걸 보니 도리어 흐뭇했다. 환자는 무사히 회복됐고, 이제는 평범한 부부의 일상으로 돌아갔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 참! 죄송한데, 의료 기록을 가져갈 수 있을까요? 오창도 선생님이 계시지만 H 병원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불안합니다. 만일을 대비해 갖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알겠습니다. 조치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여보! 아까 한 말…….”
보호자의 잔소리 같은 말을 뒤로했다.
왠지 고경아가 생각나며 웃음이 났다.
아내의 잔소리를 들을 수 있는 때가 행복한 때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이 말만 명심하면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누구한테 들었지?
일과 중 시간 나는 대로 박승준 교수, 이경석과 마지막 점검을 했다. 신현수도 지동훈 교수와 시연할 장소인 수술 방과 참석자들이 머물 공간을 오가며 열심히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슬슬 가슴이 떨려 오는 가운데 일과가 끝났다.
이제 학회로 갈 시간이었다.
송재덕 교수, 이혁민 교수, 이준영 교수, 박승준 교수, 지동훈 교수, 김지훈, 신현수, 이경석.
단 한 명도 빠짐없이 학회로 향했다.
가히 총력을 기울이는 일이었다.
학회에 도착하자 때마침 H 병원 의사들도 회의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최인호 교수와 진충기를 포함해 10명에 가까운 규모였다.
‘이번 일이 아니었으면 오창도 선생님도 저 중에 한 명이었겠지? 인연이라는 게 참 묘하면서도 웃기네.’
서로를 보며 인사를 나누었지만 오가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김지훈 역시 진충기를 보는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감정이 안 좋은 탓인지 총력을 넘어 사활이 걸린 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커피 한잔하는 동안에도 거의 대화가 오고 가지 않았다. 가장 무난한 성격의 송재덕 교수도 진충기와 최인호 교수를 보며 입맛만 다셨다.
팽팽한 견제 속에 회의가 시작됐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아시다시피 수술 시연 병원 결정 때문입니다. 양 병원의 계획을 듣고 잠시 논의 시간을 가진 후 다음 주에 결정하겠습니다. 결과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이해 당사자가 되는 임원들은 투표할 수 없다는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의 없으시죠.”
“없습니다.”
이혁민 교수와 최인호 교수의 동의 아래 계획서 발표가 시작됐다. 학회 발표 이상으로 긴장감이 흘렀다.
“먼저 H 병원 계획부터 듣겠습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간결하게 말씀해 주세요. 누가 설명하실 거죠?”
최인호 교수의 눈빛을 받은 진충기가 앞으로 나왔다.
김지훈이 정면으로 눈을 마주쳤다.
막상 얼굴을 보자 화가 나기는커녕 감정 자체가 싹 사라졌다. 주관보다 객관이, 흥분이 아닌 냉철함이 필요한 시간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참석자 전체가 양 병원의 계획서를 받아 들었다.
“아시다시피 본 병원의 시설이나 규모는 국내 최대입니다. 정규 수술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도 수술실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고, 그날 오시는 선생님들을 모실 공간도 넉넉합니다. 수술 이외에 요구되는 제반 문제는 조금도 불편한 점이 없도록 진행될 것입니다.”
시설과 규모의 우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수한 능력의 의료진, 최신 설비를 갖춘 수술실, 시연에 필요한 방송 장비까지 이미 완벽하게 준비돼 있습니다. 다른 병원 선생님들께 앞으로 어떤 설비를 갖춰야 경쟁력을 키울 수 있는지 훌륭한 지표가 될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이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다소 오래된 건물과 일부 노후화된 시설은 S 병원의 약점이기도 했다. 소속 의사와 의료진의 능력 말고는 대등한 면이 없었다.
“잘 들었습니다. 그럼 S 병원의 준비 상황을 들어 볼까요? 누가 보고하실 겁니까?”
“S 병원 지동훈입니다.”
곧바로 마이크를 잡은 지동훈 교수가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신현수가 보충 설명을 통해 병원의 전폭적인 지원 약속을 거론했지만 객관적으로 대비되는 현실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시설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지. 어쨌든 임원들에게 강한 인상을 줘야 하니까 평가 항목에 넣길 아주 잘했어. 무척 유리한 일이야. 신현수, 이사장님 아들이라는 사실은 도움이 안 돼.’
최인호 교수가 득의의 미소를 머금었다.
진충기도 슬며시 고개를 저었다. 시설만 봐도 시연에 부적절하다는 표정이었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릴 보면서도 목소리 하나 떨리지 않아? 나 같으면 얼굴이 벌게져서 티가 팍팍 났을 텐데 정말 뻔뻔하네. 우리가 하는 일이 승부를 내는 일이 아니지만 진충기, 당신은 예외로 둔다. 각오해야 할 거야.’
투지가 활활 치솟았다.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시설을 보기 위해 시연을 하는 것이 아니다. 본질은 수술이다.
어떤 수술을 누가 어떻게 하는지가 핵심이다.
진충기의 말이 이어졌다.
“본 병원은 복강경 센터를 전문적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이는 시설만이 아니라 소속 의사들의 수준을 높이는 데 아주 유리한 환경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많은 선생님들께서 인정한 사실이기도 하고요.”
일부 학회 임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센터 운영이 본궤도에 오른 지 오래돼 다양한 환자 확보가 가능합니다. 담낭염, 탈장, 조기 위암, 조기 대장암, 비만은 물론 응급으로 오는 환자가 적지 않아 아뻬, 담낭농증 등까지 시연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객관성을 위해 그동안 응급으로 수술한 환자의 내원 상황까지 작성한 상태였다. 상당히 치밀한 준비였지만 김지훈을 비롯해 모두들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 부분은 우리도 마찬가지지.’
구체적인 수술 방안이 남았다.
“그럼 마지막으로 집도 문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난이도 수술이라 할 수 있는 조기 대장암과 함께 탈장, 담낭염 등은 최인호 교수님께서 직접 집도하실 예정입니다. 조기 위암과 비만 및 응급 수술은 제가 집도하게 됩니다.”
“흐음! 두 분이 주도하신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시연이니만큼 최고의 실력과 능력을 가진 써전이 집도해야 수술 방법과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구성하는 수술 팀 또한 검증된 써전으로만 구성되기에 한 치의 부족함도 없을 것입니다.”
H 병원의 시스템이 그대로 나타나는 방법이었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김지훈으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누구도 넘보지 못할 한두 명의 고수도 필요하지만, 의료 특성상 전체 의사의 집도 역량만큼 중요한 요소는 없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에 상당히 충격적인 말이 나왔다.
“혹시 방송을 보신 선생님들은 이미 아시겠지만 일전에 우리 병원에서도 간 절제를 성공했습니다. 현재 다양한 문의 및 진료가 이어지고 있어, 시연 기간 중에 간 절제 케이스까지 확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방송의 효과는 김지훈만 보는 것이 아니었다.
나직하지만 힘이 들어간 목소리에 간 절제를 안전하고도 확실하게 시행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실려 있었다.
그 탓인지 국내 최초라는 말이 나온 경위를 묻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아서라! 직접 한 소리도 아니고, 아나운서가 한 말인데 발뺌하면 우리만 우스워진다. 저런 말을 할 정도로 간담도 쪽 환자가 많을까?’
진충기의 발표가 끝나자 학술 임원 몇몇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상당히 호의적인 내용이 분명했다.
간 절제 케이스까지 확보할 수 있다는 말에 반신반의했지만 불리한 요소임은 틀림없었다.
박승준 교수가 약간은 긴장된 얼굴로 인사를 하며 마이크를 잡았다.
“저희 병원 시연은 다음과 같이 계획했습니다.”
담낭 절제술, 탈장-이준영 교수, 김지훈.
조기 위암 및 비만-신현수.
조기 대장암-이경석.
복강경 적용 가능 응급 수술-김지훈.
학회 임원은 물론 H 병원 의사들까지 다소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 명을 빼고는 모두 전임에 불과했다. 특히 이준영 교수가 기본적인 수술 이외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말에 일부 의사는 상당한 의아함을 보였다.
“H 병원과 달리 네 분이 집도를 진행하는군요. 외람된 말이지만, 이준영 교수님 역할이 미미해 보입니다.”
“저희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만, 기본이 되는 수술만큼 중요한 수술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런 이유로 이준영 선생님께 부탁을 드렸고, 흔쾌히 수락하셨습니다.”
“다른 수술에는 관여하지 않는 것이 확실합니까? 기대하는 분들이 많을 텐데요.”
우려했던 질문이었다.
시연을 보러 오는 의사들에겐 최고의 써전, 혹은 자신의 분야에서 경지에 오른 의사의 실력을 보고자 하는 목적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준영 교수처럼 대가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면 상당한 관심이 집중되기 마련이었다.
진충기가 눈가를 좁혔다.
‘방향을 잘못 잡은 거 아냐? 누가 전임들 수술을 보러 오겠어? 그런 식으로 시연을 하면 호응도가 많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 확실하게 승기를 잡은 것 같네.’
박승준 교수가 이준영 교수를 보았다.
“모두 다 우리가 신뢰하는 써전입니다.”
딱 한마디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진행하라는 의미였다.
나직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에 좌중이 조용해졌다.
김지훈이 입을 쩍 벌렸다.
‘스승님의 카리스마는 정말 부럽다.’
“수술 팀은 평소와 다름없이 구성해 4년 차 치프가 퍼스트를 담당하게 할 생각입니다. 또한 3포트 수술이 가능한 경우 간호사까지 세 명으로 수술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여기저기에서 수군거렸다.
전국에 산재한 의사들이 모이는 행사다.
복강경에 관심이 많은 의사만이 아니라 명망 있는 의사까지 참석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원한다고 다 참석할 수 있는 행사가 아니었다. 제한된 인원만이 참석할 수 있는데 평소와 똑같이 진행한다니,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시연의 성격 규정에 따라 부족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수술 시연만이 아니라 교육 및 수련 과정까지 함께 고민하는 자리가 됐으면 합니다. 그것이 본 병원의 목표이자 이번 행사에 부여한 중요한 의미입니다.”
몇몇 임원이 떨떠름한 표정을 보였다.
흔히 생각하는 격식과 예의를 무시할 수 없기에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이 S 병원의 제안에 십분 동의할 것이라 믿었다.
“잘 알겠습니다. 학회 발표가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혹시 S 병원도 간 절제 환자를 확보할 수 있습니까? 이준영 교수님, 어떻습니까?”
“간 절제술은 김지훈 선생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김지훈 선생, 가능할까?”
학회 발표가 있긴 했지만 간담도의 대가라고 불리는 이준영 교수다. 더구나 시연 전체를 책임져야 할 의사가 전임에게 전적으로 맡기다니 의외의 연속이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이미 생각한 바가 있었다. 약간은 불리할 것 같은 분위기를 전환시킬 필요도 있었다. 스승이 의도한 바도 알 것 같았다.
김지훈이 진충기를 보며 입을 열었다.
“라파로를 이용한 간 절제는 한 케이스, 부분 절제와 봉합은 두 케이스를 시행했습니다.”
나직한 헛바람 소리가 들렸다.
오창도가 수술에 관해 말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하긴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로 진충기에게 쫓겨나는 마당인데, 얼굴 마주치는 것조차 싫었을 것이다.
“적정한 환자가 온다면 언제든 시행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다만 학회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혹은 환자의 안전을 최대한 담보할 수 없다면 무리할 생각은 없습니다.”
“흐음! 모두 세 케이스네요? 결국 전보다 자신 있게 수술을 할 수 있다는 말이죠?”
확신에 찬 목소리가 울렸다.
“그렇습니다.”
진충기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제길! 박병두 환자 입은 잘 막은 것 같은데, 부분 간 절제는 또 뭐야?’
막판에 제대로 한 방 먹였다.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지만 적어도 H 병원 이상으로 수술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었다.
한쪽으로 기우는 것 같았던 임원들의 표정이 고민스럽게 변했다.
기존 임원들만 참석한 자리가 이어졌다.
결론을 내리는 자리가 아닌 데다 추가 질문이 나올 수도 있었다. 이준영 교수, 이혁민 교수와 최인호 교수까지 모두 참석했다.
한 사람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진충기의 초조한 얼굴을 보던 김지훈이 혀를 찼다.
‘함께 간다는 생각을 하면 짐을 나눌 수 있지만, 개인적인 욕심을 앞세우면 결국 모든 걸 혼자 짊어져야 해. 당신은 초조한 게 아니라 두려운 거야. 시연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이야. 지금이라도 오창도 선생님을 챙겨.’
경쟁 관계에 선 병원 소속인 탓에 의사 개개인도 강한 라이벌 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임원들 간에 어떤 논의가 있을지부터 상대 병원의 계획에 대한 평가까지 나직한 대화가 오고 갔다.
은근히 갑갑하고 초조한 시간이었다.
열쇠를 쥔 임원들은 어느 병원 제안에 긍정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