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수술 시연은 어디로? Ⅱ (1)
산부인과 교수가 피식 웃었다.
“검진 다 끝났는데 뭐 해? 주말 당직 아니면 가까운 곳에 같이 가서 바람이나 쐬고 와. 한동안은 가고 싶어도 못 가.”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 전에 말씀하신 거…….”
“아들인지, 딸인지 알려 주면 나 면허증 반납할 수도 있어. 불법인 거 잘 알잖아?”
뿌리 깊은 아들 선호 사상이 만들어 낸 어처구니없는 법이 시행 중이다. 언젠가 정상적으로 돌아가겠지만 당장은 면허증까지 걸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건 낙태 때문이잖아요. 다음 달에 애 낳는데 낙태하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아빠로서 갖는 순수한 궁금함을 넘어 딸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너무 강했다. 아들 딸 구별하지 말라지만, 자매간 정이 흘러넘치는 처갓집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들이었으면 좋겠어?”
“와이프는 아들이기를 바라는데, 전 이상하게 딸이었으면 하네요. 딸만 둘 정도 낳았으면 좋겠습니다.”
“제사는 누가 지내고?”
“우리가 죽을 때쯤 되면 제사 지내겠습니까? 키울 때 예쁜 게 장땡이죠.”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호호호! 그렇긴 해. 고 간호사, 김 교수 수술 중이면 못 나올 테니까 진통 오면 바로 와서 나부터 찾아요. 일복 터진 사람이 남편인 걸 어쩌겠어.”
알려 주기는커녕 김지훈의 약점 아닌 약점을 통렬하게 지적하고는 그대로 일어났다.
고경아의 뾰족한 눈초리가 느껴지는 순간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지? 아니야. 우리 딸은 아빠 사정을 알고 분명히 시간 맞춰 나올 거야. 에이! 알려 달라는 건 안 알려 주시고 엉뚱한 소리를 하셔.’
아무래도 한 달 후에나 알 수 있는 모양이었다.
쩝쩝 입맛을 다신 김지훈이 고경아를 부축하며 일으키는 순간 한마디 더 들렸다.
“안 보여. 됐지?”
‘안 보인다고? 그러면?’
김지훈이 주먹을 불끈 쥐며 부르르 떨었다.
꿈은 이루어진다!
고경아는 왠지 새침한 표정이었다.
아들 하나 얻으려고 딸 셋 내리 낳은 엄마가 생각난 모양이었다. 혈혈단신인 남편의 간절한 바람인데 별게 다 걱정이다.
“지훈 씨, 나중에 다른 말 하지 말아요.”
“다른 말은 무슨! 고경아! 파이팅!”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강렬한 예감이 다가왔다.
몸 무거운 마님을 수술 방까지 모셔다 주고 연구실로 향했다. 다음 주부터는 배부른 몸으로 힘든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발걸음이 이렇게 가볍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룰루랄라! 카르페 디엠!
‘우리 딸,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게 키워 줄게.’
개인적인 행복과 기쁨은 잠시 뒤로하고 다시 현실이라는 전투 속으로 뛰어 들어갈 때였다.
연구실에 들어서니 이미 마지막 수정까지 다 끝났다.
“죄송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아직 여운이 진하게 남은 모양이었다.
쭉 찢어진 입으로 싱글벙글 계획서를 읽는 모습에 이경석이 씨익 웃었다.
“노래를 부르더니 딸이구나?”
“내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데 두말하면 잔소리죠. 둘째는 아들로 만들까?”
“뭐도 풍년이라더니, 네가 삼신할미냐?”
“형, 내가 그 할머니하고 꽤 친해요. 형도 뒤늦게 원하는 바가 있으면 확실하게 전해 줄 테니까 말만 하세요.”
“나는 됐으니까 현수나 챙기셔.”
“현수야, 세상에 공짜는 없다.”
“계약대로 안 되면 배상금이 얼마인지는 알지?”
크게 터진 웃음도 잠시, 이내 진지함을 되찾았다.
이준영 교수와 이혁민 교수 앞에서 설명해야 할 시간이 코앞이었다. 허술했다가는 막말로 시연 자체를 때려치울 수도 있는 교수들이었다.
정각 12시, 교수들이 모두 모였다.
전임들이 제출한 계획서를 한 장 한 장 신중하게 검토했다. 논의가 시작되자 시안을 최종 결정한 박승준 교수가 대뜸 김지훈에게 질문을 했다. 형식이 웃기긴 했지만 제안자에 대한 배려일지도 몰랐다.
“김지훈 선생, 수술에 따라 집도의를 정한 것은 당연한데 이렇게 배정하면 무게감이라고 할까? 균형감이 떨어지는 것 같은데 괜찮을까?”
“그런 점이 있습니다만, 시연은 단순히 수술만 보여 주는 행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도리어 우리 병원 시스템의 장점을 알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 면이 있겠네. 송재덕 선생님, 어떠십니까?”
“나는 괜찮다. 다 좋다. 좋아. 박 교수, 지 교수가 좋다면 난 좋다. 좋아.”
이젠 더 이상 얻을 신뢰가 없을 정도로 박승준 교수와 지동훈 교수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다. 그 덕에 지난 시간, 전임들도 자신의 일에 더욱 충실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중한 논의가 이어졌다.
별다른 이의 없이 모두 동의했다.
이혁민 교수가 최종 결정을 내렸다. 모두들 귀를 쫑긋 세웠다.
“이 안이 학회 임원들을 통과해야 시연 병원으로 결정된다. 행정적인 문제와 시연 진행을 위한 제반 준비는 지 교수가 신현수와 함께 보고해라.”
“알겠습니다.”
“시연할 수술에 관한 사항은 박 교수가 이경석, 김지훈하고 상의해서 보고하면 되겠다. 어느 쪽도 소홀할 수 없으니까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 다음 주 목요일에 보고하면 일주일 내에 결정을 내릴 거다.”
불과 열흘 후면 시연 병원이 결정된다.
중차대한 일일수록 공정성이 생명이다.
학술 임원들의 객관성을 믿지만 학연, 지연, 개인적인 인연은 물론 헛소문에 결정이 좌우되는 일은 막아야 했다. 국내 최초라고 한 간 절제술 방송도 은근히 신경 쓰였다.
신현수의 눈빛을 받은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가 또 남았나? 해 봐라.”
“혹시 우리 병원에 관한 소문을 들으셨습니까?”
“니들 소문 말이가? 들었다. 그게 왜?”
어렵게 말을 꺼냈는데 이준영 교수까지 태연하기만 했다. 내심 그동안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는 사실에 서운했지만, 헛소문에 불과하기에 개의치 않았다는 의미가 진했다.
한결 말하기 편해졌다.
“다름 아니라 며칠 전 H 병원에서 라파로로 담낭 절제술을 받았던 환자 한 명을 재수술했습니다.”
대학 병원은 하급 병원에서 치료하기 어려운 환자를 많이 받는다. H 병원이 아니었다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교수들이 생각했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환자에 대해 듣긴 했다만, 의아한 일이긴 하지. 다른 일이 또 있었나?”
이준영 교수마저 자리를 당겨 앉았다.
있는 사실 그대로 말했다.
헛소문의 근원지가 진충기라는 사실에 누군가는 고개를 흔들었고, 누군가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일반외과 의사는 소속을 떠나 모두 선후배다. 자타가 공인하는 실력 뛰어난 의사기에 실망감이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허어! 허어! 사람 욕심 끝도 없다더니, 이게 무슨 일이니? 하던 대로만 하면 저절로 다 따라올 텐데 왜 그럴까? 왜? 이 과장, 최 교수도 알까? 모르겠지? 설마 제 새끼 망치는 일인데 알면서도 그냥 보고 있는 건 아니겠지?”
“우리 병원 소속도 아닌데 어쩌겠습니까? 저도 진충기일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니들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특별한 뜻이 있는 건 아닙니다. 알고 계셔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말씀도 듣고 싶었고요.”
“생각보다 어려운 문제다. 어려운 문제. 내 새끼 단속하는 것도 힘든데 남의 자식 단속이 쉽겠니? 혼꾸멍내서라도 머릿속을 뜯어고쳐야 할 일인데 큰일 났다, 큰일.”
교수라고 해서 뾰족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답답한 한숨과 혀 차는 소리 사이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스스로 책임질 수 있다는 말이겠죠. 우리가 신경 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이 교수, 그걸 누가 몰라? 사람이 아까워서 그렇지. 사람이. 우리 새끼들이 단단하다고 다 그런 거 아니다. 박 교수, H 병원에 아는 사람 없어? 넌지시 말해 주는 것도 괜찮아. 가만 놔두면 종기 된다, 종기. 그런 짓 안 해도 출중한데 그걸 왜 모를까? 왜?”
“아는 사람이 있긴 합니다. 시연 결정된 후 기회 되면 말은 해 보겠습니다.”
송재덕 교수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결정 난 후에? 시연할 자격은 실력만이 아니다. 일단 정직해야 돼. 이왕이면 전 아니니? 전?”
“타이밍이 좋지 않네요.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준영 선생님께서 전에 하신 말씀대로 능력과 실력으로 승부하고 싶습니다.”
송재덕 교수가 동네 아저씨 웃음을 터트렸다.
“야! 우리 박 교수, 정말 멋지다. 어디에서 이런 멋짐이 나오는 거지? 어디니? 어디야?”
정말 멋을 찾는 것처럼 가운 여기저기를 뒤적뒤적 건드렸다. 박승준 교수가 화들짝 놀라며 자리를 옮겼다.
“원장님, 왜 이러세요?”
특유의 타박이 날아들었다.
“어디 가? 어디? 내 손 깨끗해. 하여간 날 원장님이라고 부르는 놈들은 조심해야 돼. 친한 척하면 뭐 해? 만지지도 못하게 하는데. 박 교수, 너 과장 되는지 두고 볼 거야. 나 눈 시퍼렇게 뜨고 있다. 시력도 좋아, 시력도.”
요즘 뜸해서 그렇지, 송재덕 교수의 반어법 모르면 확실한 간첩이다. 은연중 속마음을 드러냈고, 교수들 모두 미소만 머금었다.
“선생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 정말 하고 싶습니다.”
“아주 이젠 대놓고 욕심을 부리는구나. 그런 일이 맨입으로 되니? 맨입으로. TV 좀 봐라. 자리 하나 얻으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못 봤어? 바리바리 싸들고 매달리잖아.”
“제가 삼겹살 한번 쏘겠습니다.”
“두 번 쏴, 두 번. 내 입만 입이 아니다.”
결국 큰 웃음이 터졌다.
과장 정하는 자리도 아니고, 욕심을 부리는 박승준 교수도 아니었다. 농담 속에 숨은 진의를 알고 즐기면 그뿐이었다.
잠깐 옆으로 샜던 대화가 이혁민 교수의 말로 정리됐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고, 진실은 바뀌지 않는다. 다들 그런 말에 개의치 말고 자신의 일에 최선만 다하면 된다. 진충기는 박 교수 말대로 시연 병원이 결정된 후 내 직접 만나서 해결하마.”
간결하고 명쾌한 답과 유머가 섞인 말이 뒤섞이며 무거운 마음을 훌훌 털어 주었다. 진충기와 직접적으로 볼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 때문인지, 어렵고 화나는 문제가 아주 지엽적인 일로 느껴졌다.
삶의 지혜에서 비롯된 해결 방식일 것이다.
배워야 할 일이었다.
물론 전의와 투지까지 사라질 일은 없었다.
이준영 교수까지 불을 질렀다.
“헛소문에 좌우될 정도로 허술한 학회 사람은 없어. 시연 병원으로 지정되지 못한다면 방송이나 진충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능력이 부족하다는 의미야.”
당연히 능력 있는 병원이 선정될 것이다. 시연 병원이 정해지는 날까지, 시연해야 하는 순간까지 절대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진충기에게만은 지고 싶지 않다.’
다른 놈은 다 돼도 너한테만은 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 그것이 라이벌 의식 속에 숨은 폐해다.
그러나 솔직한 마음이었다. 헛소문이나 과장된 홍보에 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가재는 게 편인가 보다.
박병두 환자를 볼 때마다 오창도가 생각났다. 수술 중 벌어진 과실은 누구 탓도 할 수 없지만, 그 이후 문제는 억울한 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진충기가 나서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까? 그럴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분원으로 발령을 내지도 않았겠지.’
공연히 진정된 환자와 보호자를 자극할까 두려워 궁금함을 꾹꾹 눌러 참았다.
오창도가 매일 저녁 찾아와 함께 걱정하고, 상의하는 모습에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다.
그 덕인지 환자 표정이 크게 나쁘지 않았지만, H 병원 관계자는 누구도 볼 수 없었다. 회진 때 보호자가 보이지 않는 날 접촉하는 것으로 짐작됐다.
치료 이외의 관심은 이것으로 족했다.
가장 중요한 존재는 환자고, 다행히 무사하게 회복됐다. 배에 자신보다 구멍 자국이 많은 사람 본 적 있냐는 농담을 할 정도로 안정적인 모습까지 보였다.
“배꼽 속하고 옆구리까지 여덟 개야, 여덟 개.”
어느새 퇴원할 날이 왔다.
일주일 만이다.
재수술에 부분적 간 절제까지 생각하면 상당히 빠른 회복이었다. 짐을 싸는 보호자의 어깨가 무척 홀가분해 보였다.
‘덕분이란 말이 그렇지만 소중한 경험을 했습니다. 다른 환자 치료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잘 회복되셔서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애초에 선생님께 받았으면 아무 문제 없었을 텐데, 저 때문에 고생하셨습니다.”
“별말씀을요. 혹시 잘 해결되셨나요?”
박병두 환자가 입을 열기도 전에 아내가 침을 튀겼다.
“오창도 선생님하고는 말 잘됐는데, 중간에 진료한 사람과는 아직 얘기 중이에요. 생각만 해도 속상해서 잠도 오지 않지만 원만하게 해결하려고 했는데, 병원 태도가 너무 마음에 안 드네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수술 전에 만난 의사가 한둘이 아닌데, 다른 의사는 코빼기만 봤어요. 행정 직원이 나와서 죄송하다고 하지만 그렇게 들리질 않아요. 최소한 관계된 의사들이 나와서 성의 있는 답을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대답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치료비 문제도 남편이 잘 회복돼서 웬만하면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병원이 일부 책임지고, 나머지는 당사자끼리 해결해야 한다는 말만 반복하네요. 종합 병원이 원래 그런 곳인가요?”
곤란한 물음이었다.
아주 오래전 모 의사가 배 속에 거즈를 남기고 나온 사건이 있었다. 수술은 구경하지도 못한 송재덕 교수가 직접 나서서 환자에게 사과했고, 금전적인 부분은 병원에서 전적으로 책임졌다.
돈에 관한 처리 방식이 원칙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개인과 병원의 몫일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아랫사람의 과실을 함께 고민하고,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 윗사람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무리한 발령 때문에 일이 커졌으니까 진충기도 도의적인 책임은 있을 텐데 만나 보지도 않았나? 하긴 헛소문이나 내고 다니니 같은 수술 팀이면 뭐 해?’
은근히 입맛이 썼다.
아직도 보호자는 답을 원하고 있었다.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문제는 제가 잘 모릅니다. 무사히 회복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앞으로는 의사 볼 일이 아예 없기를 바랍니다.”
“아유! 선생님 말씀대로 돼야죠.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 여쭤봐도 될까요?”
“말씀하세요.”
“수술하는 의사하고 진료하는 의사…….”
“어허! 여보! 그만해.”
박병두 환자가 급히 말을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