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856화 (856/1,329)

5화. 수술 시연은 어디로? Ⅰ (1)

오창도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혈관종 발표를 하시면서 수술 팀에게 감사해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최인호 교수님과 진충기 선생님의 모습과 겹치더군요.”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좋게 말하면 카리스마지만, 나쁘게 말하면 독단과 전횡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워낙 실력이 뛰어난 분들이라 많이 배울 수 있다고 해도 우리 역시 써전이 아닙니까? 그런데…….”

감정이 북받쳤는지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은 제 얼굴에 침 뱉는 일에 불과했다.

시기만 다를 뿐 사람은 누구나 한 단계 한 단계 발전한다. 의사 역시 학생, 인턴, 전공의를 거쳐 펠로우, 전임으로 이어지며 능력을 쌓고, 그만한 책임을 안게 된다.

써전의 기본 능력은 수술 실력이다.

아뻬처럼 기본이 되는 수술부터 시작해 종국에는 가장 난이도가 어려운 수술까지 하게 된다. 그 과정에 선배들의 끝없는 가르침과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문제는 가르치는 의사나 배우는 의사나 모두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김지훈도 혹독하게 수련받았고, 혹독하게 가르쳐 왔다. 환자와 관련된 업무에 국한할 뿐 일상에서는 서로를 깊게 믿고 의지하기 때문에 탈이 없을 뿐이었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것이 현실이었다. 아랫사람이 문제라면 그나마 해결책이 보이지만, 윗사람이 문제라면 답이 없는 경우가 더 많은 법이다. 위계질서가 강하고, 도제식 교육을 하는 의사 사회는 같은 경우라도 병폐가 더 심각할 수밖에 없다.

최인호 교수와 진충기가 그랬다.

불만이 있다고 해도 복강경 센터를 자신들의 손에 꽉 잡고 운영하는 것까지는 함부로 항의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이 있다.

바로 소속된 모든 의료진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다. 각자 자신들의 직능에 맞게 행동하고, 서로를 대우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일이다.

특히 수술 팀에게 가장 많은 것을 요구하는 만큼 더 신경 써야 한다.

의사에 국한하면 스스로 모든 수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실력 있는 써전을 양성하는 것이 마땅했다. 언젠가는 자신의 자리를 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진충기는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기본적인 수술 말고는 집도 기회를 주지 않았다. 심한 경우 대리 수술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경우까지 발생했다. 눈 밖에 벗어나면 메스 잡을 생각조차 포기해야 할 정도였다. 자신은 병원 발전을 위한 일이라고 항변했지만, 뛰어난 실력에 절대 붙지 말아야 할 개인적 욕심에 불과했다.

최인호 교수 역시 최고의 써전을 키운다는 명목하에 암묵적 동의를 표했다. 한 단계 더 발전하고자 복강경 센터에 들어간 의사들에게 치명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자세하게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최소한 우리 역시 써전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 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대화가 잘 안 통해 목소리가 높아졌고, 무례한 행동까지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지 분원으로 발령을 내시더군요.”

“그런 이유로요?”

황당한 일이었다.

“분원은 라파로를 하기에 다소 여건이 부족한 병원입니다. 어쨌든 그 병원에서 봐야 할 환자가 있어 정작 수술한 환자를 볼 시간도, 기회도 없었습니다.”

탄식이 절로 터질 일이었다.

‘목소리 좀 높였다고 발령을 내? 결국 마음에 안 든다고 쫓아냈다는 말이네. 그래서 진충기 선생이 아니라 내게 수술을 부탁했구나. 마음고생이 심했겠네.’

순간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섰다.

‘어후! 이거 하마터면 남의 일이 아닐 뻔했잖아? 스카우트 받아들였으면 멱살 잡고 싸웠을지도 모르겠다.’

좋지 않은 기억을 들출 이유가 없었다.

“수술 후 환자를 본 선생님은 왜 이런 실수를 하셨을까요? 검사만 충실히 했어도 바로 발견했을 텐데요.”

“환자를 제대로 볼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윗사람의 사적인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겼을 테니까요. 후우! 제가 쓸데없는 말을 했습니다.”

윗사람이 누군지 빤했다.

‘야! 직위가 높아질수록 인격이 따라와야 하는데 정반대라니, 정말 가지가지 한다. 우린 정말 행운아야.’

“아닙니다. 저도 많은 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진충기가 어떻게 행동하든 다른 병원 의사가 관여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술 후 진료를 담당한 의사가 눈앞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환자에게 피해가 발생했다니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더 이상 나눌 얘기도 없고, 억지로 말을 이어야 다른 사람 욕하는 자리밖에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이쯤에서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김지훈이 주춤거렸다.

경우에 어긋난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한 가지 사실을 꼭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을 주체할 수 없었다. 사람인 이상 자신이 관련된 일에 무관심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바로 헛소문이다. 진원지가 H 병원이기에 누구 입인지 알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묻는 것 자체가 그렇지만, 혹시 저에 대한 소문 들으셨습니까?”

오창도가 흠칫 놀랐다. 상당히 난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좋지 않은 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혼자 수술 못한다는 소문 말입니다.”

“듣긴 했습니다.”

“어디에서 흘러나온 말인지 짐작하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누가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오해라면 풀고, 아니라면 항의를 해서라도 다신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곤란하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창도의 입이 아니더라도 동료의 입이기에 치부에 가까운 일이었다. 내심 대답해 주기를 원하면서도 큰 기대를 하진 않았는데 뜻밖의 말이 들렸다.

“의심하는 사람이라도 있으십니까?”

근원지가 확실하다는 말이었다.

“아무래도 아래보다는 위에서 나오지 않았을까요?”

나직한 한숨이 흘렀다.

소문 따위로 치부하고, 함부로 발설할 일이 아니었다. 어떤 여파가 생길지 모르는 일이기도 했다. 특히 오창도가 처한 상황 때문에 심각한 피해를 입을 수도 있는 문제였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한마디 말만 나와도 진충기가 신경을 곤두세우는 김지훈이기 때문이었다.

오창도가 콧등을 찡그렸다.

이미 많은 말이 오갔다. 두루뭉술하게 알려 주나, 구체적으로 알려 주나 어차피 매한가지 결과가 초래될 상황이었다. 내부에서 왜 스카우트를 하려고 했는지 모르겠다는 말이 돌 정도로 공공연한 비밀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을 평가할 수 있지만 비판과 비난은 엄연히 다르다. 학회 발표와 방금 전에 본 수술로 떠도는 말이, 누군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맞는지, 틀린지 확인했다.

“짐작하는 사람이 맞을 겁니다. 자신 외에 제대로 된 써전이 단 한 명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말입니다.”

차마 실명을 말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에둘러 말했지만 진충기가 분명했다.

가슴이 턱 막혀 왔다.

무수히 의심하고 짐작했던 일이 사실로 확인됐다. 머리가 멍할 지경이었다. 무엇이 부족해서 후배의 신뢰를 잃을 정도로 행동하고, 남을 깎아내리려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더구나 적극적으로 스카우트 제의까지 했던 사람이다.

할 말이 많았지만 오창도의 말로 족했다. 이 이상 시간을 끌어 봐야 서로의 입장만 난처해질 뿐이었다.

마침 응급실에서 콜이 와 인사를 하고 자리를 파했다. 박병두 환자의 병실로 향하는 오창도의 어깨가 무척 무거워 보였다.

‘피하는 것보다 잘잘못에 대해 솔직하게 환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훨씬 나을 겁니다. 오창도 선생님은 그렇게 행동하실 분 같군요. 불가피한 면이 있었습니다. 힘내세요.’

“잘 해결하시길 바랍니다.”

‘제 과실은 감당하기 힘든 일이지만, 병원을 비롯해 진충기 선생님까지 여럿이 나눌 수밖에 없는 짐입니다. 그렇다고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수술 잘해 주시고, 진심으로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보호자와 한 번 보았을 뿐인데 오창도의 목소리가 의외로 담담했다. 긴 시간 동안 나눈 대화도 환자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다.

‘보기보다 훨씬 침착한 사람인가 보네.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기 때문일까?’

의아함도 잠시, 돌아서던 김지훈이 진충기를 떠올리다 말고 돌연 코웃음을 쳤다.

긍정의 힘이 필요할 때였다.

진충기와 헛소문 때문에 영향을 받는다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죽일 놈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샘이 날 정도로 잘해 왔다는 의미였다.

최고의 써전을 꿈꾸는 의사의 견제라!

‘진충기! 내가 무섭구나. 지금도 학술 임원과 시연을 앞두고 엉뚱한 말을 퍼트리고 다닌단 말이지? 날 경쟁자로 생각하는 건 좋지만 그냥 지나갈 수는 없지. 어떻게 하면 입을 콱 닫아 버릴 수 있을까?’

응급실에 도착해 보니 다행히 수술할 환자는 아니었다. 안도의 미소를 보이는 간호사를 뒤로하고 곧바로 퇴근했다. 집으로 향하는 내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긍정적인 마인드도 한계가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스카우트를 제시한 사람이란 생각에 이르자 부글부글 가슴이 끓어올랐다.

얼마든지 좋은 인연을 만들 수 있는데 오히려 악연이 좋은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금경태, 하윤호도 모자라 외부 사람인 진충기까지?’

주먹으로 해결하면 간단할까?

똑같이 입으로 해결해야 할 일일까?

거의 집에 도착했을 무렵,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설마 응급실?’

투덜거리며 전화를 받던 김지훈이 그대로 굳었다.

이준영 교수였다.

“스승님, 이 시간에 웬일이십니까? 무슨 일 있으십니까?”

(별일 아니다. 오늘 회의에서 학술 임원에 선출됐으니까, 다음 주에 나하고 학회 들어가자.)

별일이 아니라니?

“예? 제가요?”

귀가 번쩍 뜨일 말이었다.

결국 헛소문에 현혹되지 않고, 그간의 성과와 학회 발표를 모두 인정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면 시연 병원 선정도 가시권에 들어왔다는 말이었다. 더 이상 진충기를 볼 일도, 신경 쓸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래.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운 놈.’

주먹을 불끈 쥐던 김지훈이 인상을 썼다.

(진충기도 임원으로 같이 뽑혔다. 수술 시연 계획서 만들어야 한다. 그걸 보고 최종 결정을 하게 될 거야.)

좋다 말았다. 이대로 끝날 싸움이 아니었다. 얼굴을 더 자주 보게 됐다는 부작용까지 따라온 학회 결정이었다.

게다가 오늘따라 왠지 스승의 목소리가 더욱 나직했다. 아무래도 학회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짐작컨대 H 병원 때문일 것이다.

이럴 때는 이유를 묻기보다 군말 없이 대답하는 것이 스승에 대한 예의다.

“예. 이경석 선생, 신현수 선생과 함께 상의해서 작성하겠습니다. 언제까지 만들까요?”

(토요일에 보자.)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김지훈이 눈을 부릅떴다.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은 진충기와 수술 시연을 두고 직접적으로 맞붙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를 만났는데 절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성질내고 끝낼 일이 아니었네. 혈관종으로 한발 앞섰으니까 이번에도 확실하게 밟아 주마. 연타를 맞으면 찍소리 못하겠지. 오늘 환자도 우연히 온 게 아닌 것 같아. 진충기 덕분에 귀중한 경험을 한 번 더 했으니까 즐겁게 긴장 타자.’

너무 긴장 탔나?

김지훈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좋은 조건에 혹해 H 병원으로 갔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여전히 칼바람을 날렸을 수도 있다. 반대로 녹슬어 가는 칼을 바라보며 한탄과 탄식만 거듭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오창도의 말에서 유추해 볼 때 후자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설령 칼바람을 날린다고 해도 최인호 교수나 진충기의 눈치를 보며 입맛을 맞춰 줘야 했을 것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이면 몰라도 개인적 이득을 위해 그럴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건 천운이야, 천운. 행운아 정도가 아니었네.’

새삼 교수들, 동기, 후배들에게까지 고마움을 금할 수 없었다. 특히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생각하라는 조언을 아끼지 않은 스승님에게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불현듯 두 번째 행운이 떠올랐다.

박병두 환자나 오창도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복강경을 이용한 간 절제는 결코 쉽게 접할 수 없는 기회였다. 누구나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수술도 아니었다.

그런 경험을 또 한 번 했으니 대단한 행운이었다. 수술 과정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고, 다음번에는 더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까지 붙었다.

‘이런 식으로 해 나가면 간 절제도 언젠가는 자신 있게 할 수 있을 거야. 오늘 참 운 좋은 날이네. 진충기, 고맙다.’

어느새 집 앞이었다.

피식 웃음을 흘리며 문을 열려던 김지훈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과일 사 오라는 마님의 지엄한 분부를 잊었다.

얼마 후 다시 모습을 보인 김지훈이 거의 쓰러지듯 집으로 들어갔다.

“경아 씨! 과일……. 헉헉헉!”

이제나저제나 남편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고경아가 말없이 과일을 받았다. 늦었다고 삐친 모양이다.

하긴 수술 방에 깔린 정보망이면 언제 수술이 끝났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때론 적이 아군이 된다.

“진충기요? 스카우트한다고 연락했던 사람 맞죠?”

“맞아요. 전화도 몇 번이나 했잖아요.”

“뭐 그런 사람이 다 있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지훈 씨, 당장 옷 입어요. 내가 찾아가서 얼굴에 오선지를 그냥.”

열 개의 손톱이 파르라니 빛났다. 발개진 얼굴로 뜨거운 콧김을 쏟아 냈다.

지나친 흥분은 몸에 해롭다.

‘마님!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옥체를 보중하셔야 합니다.’

간신히 구슬려 화를 풀어 준 후 꼭 안고 잤다.

아내의 분노가 왜 이렇게 행복한 걸까?

세 번째 느낀 행운이야말로 평생 절절이 간직하며 살아야 할 가장 소중한 행복이자 행운이었다.

전생에 얼마나 좋은 일을 했다고 무슨 복을 이렇게 많이 타고났을까?

구국의 일념으로 나라라도 구한 모양이다.

카르페 디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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