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쌓여야 경험이다 (2)
어색함과 답답함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김지훈 선생님, 염치없지만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제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하지만, 상황이 더 나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욕심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복강경으로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복강경 센터에서 근무하는 의사다. 재수술이 얼마나 어려운 수술인지 누구보다 잘 알 오창도였다.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지만 결코 자신할 수 없는 수술이었다.
“잘 아시겠지만 쉽지 않습니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무리한 부탁을 드린 것 같네요. 이번 달을 끝으로 병원을 그만둘지도 모르는 마당이라, 하지 말아야 할 부탁을 했네요.)
6월 말이다. 새로운 교수나 펠로우를 뽑을 시기가 아니다. 결국 중도에 포기한단 말인데,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해결책이 아니었고, 될 수도 없다.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르지만, 문제가 상당히 커질 수도 있습니다. 선생님을 위해서라도 환자분을 직접 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 지금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제가 지금 서울이 아니라서 수술이 시작되고 나서야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환자분, 보호자분을 뵙고 사죄드리겠습니다. 책임져야 할 부분은 모두 책임지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통화를 끝낸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실수를 인정한다고 해도 최대한 숨겨 주길 바라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몇 년을 시달려야 할지도 모르는 일인데, 환자에게 잘 말해 달라는 부탁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 같았다. 순순히 인정하는 말투에서 뭔가 기운이 쭉 빠져 있는 상태라는 인상까지 받았다.
‘가만! 진충기 선생에게 부탁하는 것이 훨씬 유리할 텐데 왜 내게 부탁하지? 이건 더 이상한 일인데?’
감정적인 문제를 떠나 체계가 잘 잡혀 있는 H 병원이다. 혹시 있을지 모를 의료 과실이나 사고에 대비해 어떤 병원보다 적절한 방안을 갖추고 있을 것이다.
진충기도 그렇다. 그간의 말과 행동으로 볼 때 복강경 센터의 실수를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이번 일과 같은 경우는 자신을 위해서라도 기를 쓰고 해결할 사람이었다.
본인이 근무하는 병원으로 전원을 요구하지 않은 오창도의 말과 행동을 더욱 이해하기 힘들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보호자가 기다린다는 나종진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설명을 시작하기도 전에 언성이 높아지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선생님, 이거 의료 과실 아니에요? 우리 남편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몰라요. 어쩜 의사라는 사람들이 그럴 수가 있죠? 수술 전에 떼거리로 몰려와서 설명만 하면 뭐 해? 수술을 제대로 해야지. 설마 같은 의사라고 감싸진 않으시겠죠?”
“일단 진정하시고, 설명부터 들으십시오. 수술하신 선생님께서 곧 오신다니까 따로 말씀하실 시간이 있을 겁니다.”
“그 사람들을 왜 봐요?”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이해는 되지만 보호자까지 목소리를 높이자 솔직히 황당했다. 같은 의사라는 이유로 화풀이 상대가 된 것 같기도 했다.
보호자가 집도의 한 사람이 아니라, 싸잡아 여럿에게 원망과 화를 분출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내가 수술한 것도 아닌데 왜들 이래?’
은근히 부아가 솟았지만 이런 일로 흥분하면 수술에까지 영향을 끼치지 마련이었다. 한 소리 하려다 꾹꾹 눌러 참고 수술 방침을 설명했다.
“지금 말씀드린 대로 수술해야 하는데, 환자분이 복강경으로 받길 원하십니다. 일단 시도는 해 보지만 배를 열어야 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는 점과 수술 후 합병증 발생률이 높다는 점을 알고 동의해 주십시오.”
출혈부터 유착으로 인한 주변 장기 손상까지 온갖 합병증에 덜컥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 덕에 환자에게 모든 관심이 쏠리며 진정이 되긴 했다.
“저도 모르게 너무 흥분했네요. 죄송합니다. 우리 남편 평생 힘들게 일해 오다 이제야 숨통이 좀 트였어요. 어떤 고생이든 그만했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 선생님, 수술 잘 부탁드립니다.”
태도가 급변했다. 나직한 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모든 환자가 약자는 아니다. 경우에 따라 강자일 수도 있다. 구미에서 본 양아치처럼 행동해도 무력한 것이 현실이었다. 하지만 수술을 앞둔 환자와 보호자는 확실히 약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수술이 결정됐다.
‘꼭 라파로로 해내야 할 수술이네.’
각오를 다지던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불현듯 복잡한 생각이 다가왔다.
다른 병원에서 만든 문제라고 해도, 아무리 설명을 했어도 또 다른 합병증이 발생한다면 원망을 피할 길이 없다. 자칫 독박을 쓸 수도 있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오창도 역시 복강경 센터 소속 의사기에 자신을 감싸 줄 진충기에게 환자를 보내는 것이 가장 속 편한 일이었다. 그러나 환자와 첫 수술을 한 의사 모두 김지훈이라는 의사를 선택했다.
강한 부담이 느껴졌다.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기면 보통 복잡한 일이 아닌데, 그땐 어떻게 하지? 지금이라도 진충기에게 보낼까?’
치료 이외의 일로 갑갑했지만 이미 동의서까지 다 받았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두고 고민할 때도 아니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최선을 다할 일이었다.
다시 한 번 복부 CT를 확인하며 수술 계획을 짜던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복강경을 이용한 재수술이라는 면과 함께 장기와의 유착이 유난히 마음에 걸렸다.
어떤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나종진만으로는 원활하게 수술을 진행하기 힘들다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종진아, 상황도 좋지 않은데 수술 부위가 험악해 보이고, 라파로로는 경험이 없어서 퍼스트 부탁을 해야겠다.”
근 4년 동안 함께 일했다. 척 하면 착이다.
“선생님, 그런 말씀을 왜 제게 하세요? 저는 이런 수술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4년 차 치프 때는 욕심이 많이 나는데 미안하다.’
적임자는 단둘뿐이었다.
급히 호출했다.
신현수는 협회 일로 부재중이었다.
얼마 전 나온 말대로 작업 중인 모양이었다. 이리저리 H 병원과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는 상황에 마음속으로 힘차게 응원하고, 이경석을 찾았다.
“경석이 형, 죄송한데 수술 하나 같이합시다. 나중에 술 한잔 살 테니까 퍼스트 서 줘요.”
(뭐? 이 밤에? 무슨 수술인데?)
상황을 들은 이경석이 흔쾌히 응했다.
(H 병원에서 수술받은 환자가 너한테 수술받고 싶어 한다고? 야! 이거 웃긴 일이 벌어졌네. 진충기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오케이! 바로 수술 방으로 올라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환자가 아주 급한 상태는 아니지?)
“여유가 있으니까 급하게 서두르지 마세요.”
이경석의 말을 듣는 순간 김지훈도 같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부심을 넘어 자만으로 보일 정도로 대단한 자존감을 가진 진충기였다.
자신이 수술하지 않았다고 해도 복강경 센터 소속 의사의 실수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S 병원 김지훈이 집도의다.
‘나도 얼굴이 궁금해지네. 누구 입이든 깔끔하게 수술해서 확 막아 버려야겠다.’
엉뚱한 이유가 김지훈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잠시 후, 수술 방으로 환자가 옮겨졌다.
나종진은 물론 그동안 복강경 수술을 거의 들어오지 못했던 오하석까지 자청해 수술을 들어왔다.
정규 수술 때도 보지 못한 광경이 벌어졌다.
곧 도착할 이경석까지 포함하면 무려 4명이 수술 팀을 이룬다. 워낙 오래전에 보았던 모습이기에 낯설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야! 간만에 네 명을 꽉 채웠네. 종진아, 하석아, 오늘 수술 꼭 라파로로 끝내 보자. 재수술이라고 해도 얼마나 어렵겠어? 간 절제보다는 쉽겠지?”
목을 휘휘 돌리며 여유롭게 말을 꺼낸 김지훈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역시 가장 강한 긴장감은 집도의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재수술 경험이 적지 않았기에 어떤 어려움이 따를지 모를 수가 없었다. 수많은 난관이 머릿속을 스쳤다. 더구나 개복이 아닌 복강경으로 시작한다.
‘에어를 주입할 때부터 조심해야 하는데.’
마취가 시작될 즈음 이경석이 도착했다. 잠시 양해를 구하고 CT를 보며 수술 계획을 설명했다.
이경석 역시 상당히 심각한 얼굴이었다. 몇 가지 복잡한 과정을 상의하고 수술대에 섰다.
“마취과,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예. 시작하셔도 됩니다.”
“시작하겠습니다. 메스!”
수술 창이 작다고 해서 장기가 들러붙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기존 절개 창이 있는 배꼽 속을 피해 새로운 절개 창을 냈다.
조심스럽게 에어 팁을 꽂았다.
처컥! 처컥!
복강 내 압력을 가리키는 바늘을 유심히 보던 김지훈이 에어 주입을 중단시켰다. 평소처럼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주입했다가는 복막과의 유착으로 인해 어딘가 손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 트로카를 꽂고 카메라를 넣었다. 대망과 장간막 일부가 기존에 절개된 복막과 붙어 있었다. 압력을 높이지 않길 잘했다. 평소대로 공기를 주입했으면 어딘가 찢어졌을 것이다.
“전부 다 새로 뚫어야겠죠?”
“위치를 다 바꿔야 안전하게 조작할 공간이 나오겠어.”
“유착이 심해서 간 절제 때 사용했던 기구를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 간호사, 기구 다 바꿉시다.”
준비가 되자마자 새로운 절개 창을 내고, 기구 3개를 더 넣었다.
조심스럽게 복막에 들러붙은 조직을 떼어 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기존 절개 창이 1센티미터도 안 돼, 들러붙은 구조물이 적은 덕을 톡톡히 봤다. 이 또한 복강경이 주는 큰 이점 중 하나였다.
수술해야 할 부위가 화면에 잡혔다.
다들 갑갑한 한숨을 내쉬었다.
지속적인 담즙 유출이 생각보다 훨씬 심한 유착을 초래했다. 담낭이 있던 자리에 대장과 대망이 한 덩어리가 돼 들러붙어 있었다. 그나마 간에 붙지 않아 다행이었다.
‘좋지 않네.’
수술 후 유착은 상당한 경험이 쌓인 수술이었다. 이번에도 결국 기구 사용이 문제였지만 시도도 해 보기 전에 배를 열 수는 없었다.
김지훈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재수술인데 이 정도면 양반이지. 시작합시다.”
모스키토로 유착된 대망과 대장을 차근차근 떼어 냈다.
3주는 길고도 짧은 시간이다. 어느 부분은 단단하게, 또 다른 부분은 성기게 붙어 있었다.
도리어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단단한 부분을 성긴 부분으로 여기고 과감하게 박리하다가는 쭉 찢어 먹기 십상이었다.
그나마 대망은 처리하기 쉽지만 대장 손상은 개복과 직결될 문제였다.
대망부터 분리해 냈다.
환히 드러난 부위의 박리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이제 담낭을 제거한 부위에 들러붙은 대장을 떼어 내야 한다. 대장을 젖히지 않으면 수술 부위를 볼 수 없는 데다 부종까지 심해 이경석의 역할이 무척 중요했다.
“대장 당겨 주세요.”
조기 대장암을 전적으로 수술하는 이경석이다. 능숙하게 대장을 잡아당겨 박리할 부분을 노출시켰다. 그럼에도 아슬아슬했다.
신중하게 박리를 시작했다.
모스키토가 지나간 자리에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내 조직을 타고 흐르며 대장을 벌겋게 물들였다.
기존 수술 부위와 대장과의 경계가 불명확해지면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보비! 이쪽 기구는 석션으로 바꿔 주세요. 이리게이션!”
식염수로 깨끗이 씻어 가며 시야를 유지시켰다.
많은 경험을 가진 써전들답게 조금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능숙하게 수술을 진행시켰다.
서서히 대장이 떨어져 나왔다.
기존 수술 부위에 가까워질수록 대장 조직이 약해졌다. 부종이 상당히 심한 것으로 보아 새어 나온 담즙과 직접적으로 접촉된 부분이 분명했다.
조금이라도 힘이 과하면 쭉 찢어질 것이다. 과도한 압력이 가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카메라를 잡은 이경석이 박리하기 쉽도록 적절하게 대장을 노출시켰다. 왼손에 들린 단 하나의 기구가 상당히 유효적절하게 움직였다.
엄청난 도움이었다.
편안한 마음은 곧 자신감이다.
삐이이이! 삐이이이!
철컥! 철컥!
말없이 화면과 손의 감각에만 집중했다.
부어오른 대장에 기구 자국이 날 때마다 가슴이 서늘해졌지만 순조로운 진행이 이어졌다.
수준이 아무리 높아도 장기 손상은 순간의 실수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다.
“석션 들어오고, 보비 준비해요.”
삐이이이! 삐이이이!
끈질기게 붙어 있던 대장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으며 서서히 담낭을 떼어 낸 자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대장이 완전히 떨어져 나왔다.
염증 조직으로 박리된 부분이 지저분했지만 어떤 손상도 입히지 않았다.
대장을 가장 많이 다뤄 본 이경석도 만족한 눈매였다.
‘역시 지훈이 손은 알아줄 수밖에 없네.’
‘경석이 형이 퍼스트를 서 준 덕에 여기까지는 할 만했지만 지금부터가 문제야.’
기존 수술 부위가 환하게 드러났다.
담낭을 제거한 자리 하부가 다소 불룩한 것처럼 보였다. 담즙이 고여 종물처럼 덩어리를 형성한 것이다. 그대로 놔두면 감염과 복막염의 근원이 된다.
“담즙 제거합니다. 석션 준비하세요. 보비!”
삐이이이! 삐이이이!
담즙을 감싸고 있던 얇은 막이 터졌다.
찌이이익! 찌이이익!
까맣게 변한 담즙이 석션 팁을 따라 사라졌다.
“이리게이션! 거즈!”
담즙이 더 이상 거즈에 묻어 나오지 않을 때까지 깨끗하게 씻어 냈다. 깔끔하게 해결된 부위를 본 김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반적으로 어렵긴 하지만 예상외로 수월하네. 경석이 형하고 함께해서 그런가? 역시 경석이 형이야.’
생각보다 훨씬 쉽게 진행돼 오히려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재수 없는 생각 하면 옴 붙는다. 재빨리 불안감을 떨치고 수술 부위에 집중했다.
담낭 끝에 물려 있는 클립 중 하나가 헐거워 보였다. 담즙이 샌 부분일 것이다. 다행히 총수담관은 건드린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집도의가 조금만 더 집중했다면, 수술 팀 중 한 명이라도 조언을 했다면 말끔하게 끝났을 수술이었다. 아쉬움 속에 누구든 실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담았다.
이제 핵심적인 과정이 남았다. 가늘고 길게 남아 있는 담낭을 제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