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성공도 실패도 값진 일이다 Ⅲ (2)
끝난 지 꽤 시간이 지나서야 한데 모였다.
가장 화려하고 대단한 발표를 했다.
떠들썩해야 마땅하건만 김지훈의 말 때문인지 도리어 분위기가 살짝 가라앉은 상태였다.
다들 눈치만 보고 있을 때 이준영 교수가 불쑥 한마디를 던졌다.
“고성문 선생님, 이왕 사실 거면 우리 식구들 다 사 주시죠. 기분 좋은 날입니다.”
“야! 이 교수가 이럴 때도 있네. 하긴 경석이, 현수, 지훈이가 오늘의 주인공인데 이 교수가 제일 기쁘겠지. 이러다 라파로 못하는 의사는 명함도 못 내밀겠다. 큰일 났다. 큰일 났어. 고성문 선생님, 준영이가 옛날부터 은근히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는 성격인 거 아시죠? 지금도 그래요, 지금도. 그러려니 하고 가면 됩니다. 등심 좋습니다. 지훈아, 교수야, 등심이다. 등심.”
“이 사람아, 나도 라파로 많이 해.”
“허어! 전임들 앞에서 그런 소리 하시면 번데기 앞에서 주름 잡는 겁니다. 그러고 싶으세요?”
이혁민 교수가 한술 더 떴다.
“그래서 전 브레스트와 갑상선으로 방향 돌렸습니다. 아이고! 라파로를 못해서 그런지 심하게 배고프네. 고성문 선생님, 잘 먹겠습니다. 송재덕 선생님, 앞장서시죠.”
분위기 확 달아올라 갔다.
절대, 결코 등심 때문이 아니었다.
마음속에 있던 말을 풀어낸 김지훈이 본래의 식욕을 되찾았다. 누가 후배 아니랄까 봐 이혁원, 나종진은 물론 강병옥과 송진우까지 걸신들린 것처럼 등심을 해치웠다.
고성문이 지갑을 탈탈 털면서도 웃었다.
‘이런 날은 얼마든지 사도 좋네.’
“김 서방, 고맙다.”
장인어른의 한마디는 가슴을 들뜨게 했다.
“김지훈, 신현수, 이경석, 잘했다.”
스승의 칭찬은 전임들을 춤추게 했다.
슬며시 커피 한 잔 대령하는 것으로 감사한 마음을 대신했다. 때 이르지만 시연을 어떻게 준비할지 대화를 나누는 일도 기쁘고 즐겁기 짝이 없었다.
늦은 밤, 김지훈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진충기의 발표에 간 절제는 없었다. 결국 국내 첫 시도를 성공했다는 말이었다.
가장 중요한 이정애 환자 역시 눈에 띄게 좋아졌다. 드레인이 깨끗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왜 욕심이 없고, 왜 기쁘지 않을까?
“경아 씨!”
활기찬 목소리에 고경아가 무거운 몸을 일으켜 김지훈을 꼬옥 안아 주었다.
“우리 남편 고생했어요.”
엄마처럼 등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남편이 기뻐하는 이유를 잘 알기 때문이었다.
카르페 디엠!
이런 날은 수백 번 외쳐도 좋았다.
부부가 동시에 외치면 더 좋다.
***
6월이다.
더위에 약한 사람은 슬슬 혀를 빼물기 시작할 계절이 왔다. 김지훈도 그쪽 부류다. 때 이른 더위까지 찾아와 회진이 끝나면 와이셔츠가 축축해졌고, 가장 냉방이 잘되는 수술실이 편하게 느껴졌다.
피로가 가중될 법도 했지만 여유 부릴 틈이 많지 않았다. 학술 임원 선출이나 시연은 협회가 결정할 일이지만 철저히 준비해야 했다. 전공의 텀까지 바뀌어 긴장을 풀 수 없기도 했다.
수술 하나하나에 새로운 목표가 실렸다. 시연 병원이 이미 결정됐다는 각오로 임했다.
‘시연하다 삐끗하면 개망신이다.’
신현수와 이경석은 독기까지 품었다. 진충기에게 받은 자극이 상당히 아픈 탓이었다. 끊임없이 고민하며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논문을 뒤지기 일쑤였다.
‘한 사람이 다 하는 수술을 나눠 하면서 뒤처진다는 건 말이 안 돼. 내 분야에서만큼은 최고의 써전이 돼야 해.’
시연 병원으로 결정되면 총괄은 과장인 이혁민 교수가 하고, 세세한 부분은 결국 이준영 교수가 맡아야 한다. 제자들 앞에서 대놓고 부렸던 욕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김지훈, 신현수, 이경석, 똑바로 하자.”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위아래로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았다.
“이 과장, 시연을 꼭 우리 병원에서 해야 될까? 이러다 전임들 눈빛에 맞아 죽겠다. 죽겠어. 나는 수술 방 들어갈 때마다 가슴이 떨린다. 현수, 경석이, 저놈들 눈빛이 너무 살벌해. 너무.”
“지훈이는 안 그런가요?”
“그놈 얼굴은 보기도 힘들어. 누구 탓인지 알지? 몰라? 혈관까지 맡아 힘들어 죽을 판인데 그만 좀 부려 먹어. 간담도가 아니라 유방인 줄 알겠어, 유방.”
“좁고 깊은 것도 좋지만, 다소 깊이가 얕더라도 넓은 시야를 갖는 써전이 꼭 필요한 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써전이 최고의 써전이 아닐까요?”
“그걸 누가 몰라? 그래서 내가 가만히 있는 거야. 가만히.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엉뚱한 놈이 번다더니, 내가 딱 그 짝이네. 지훈이는 내가 다 키웠잖아. 내가. 쯧! 어쨌든 쉴 틈은 주면서 가르쳐. 이러다 우리 자식들 다 죽는다.”
오가는 대화가 단적으로 말해 주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흘렀다.
노심초사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던 이정애 환자가 무사히 퇴원했다. 외래에 두고 간 과일 한 상자가 유난히 향기를 뿌렸다. 뿌듯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만, 사달이 날 조짐일 줄은 몰랐다.
복강경으로 간을 절제한 병원!
최고의 의료진을 갖춘 병원!
김지훈과 이준영 교수는 물론 신현수와 이경석까지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환자는 몰려들고, 하늘이 두 쪽 나도 몸은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지훈이 저 자식은 환자 끌어당기는 자석이야. 뭘 해도 환자와 연관이 돼. 덕분에 칼바람 날린다만 와이프 눈초리가 심상치 않아. 이러다 이혼당하겠어.”
“같은 의사인 우리 와이프도 그런데 힘드시겠네요. 주말 오프 때 형수님하고 바람이라도 자주 쐬세요.”
“현수야, 애가 많으면 나들이도 힘들다. 언제 크나!”
너무 잘나가도 문제였다.
복강경으로 불가능한 수술을 도맡아 하던 박승준 교수와 지동훈 교수마저 정신이 없었다. 전공의들은 아예 죽어 나가기 직전이었다.
사방으로 퍼진 여파가 적지 않았다.
일반외과 실적표를 받아 든 신동철 이사장이 좋아 죽었다. 아버지로서 아들의 능력이 어떤지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신현수의 수술 실적을 보며 이사장실이 떠나갈 정도로 크게 웃었다.
‘내 자식이지만 정말 잘하고 있네. 하여튼 김지훈이 복덩이야. 벌써부터 다음 계약에 신경이 쓰이면 안 되는데, 어떻게 무엇을 해 줘야 하나.’
반면, 얼마 전 이혁민 과장에게 펠로우 건과 전공의 처우 문제를 받아 든 윤재철은 예산 문제로 골머리를 썩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일하는데 돈 없다는 소리를 할 수도 없고, 예산은 한정돼 있고 죽겠군.’
‘끙끙’ 소리를 낼 정도로 곤란한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다. 다름 아닌 김지훈이었다. 혈관종 절제가 소문났는지 잊을 만하면 환자가 문을 두드렸다.
“환자분, 섣불리 시도할 수 없는 수술입니다.”
“환자분, 좌측 간은 몰라도 우측 간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개복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수술이 주는 두려움, 간을 절제해야 하는 환자의 공포가 눈에 보였지만 스스로 결심한 것이 있었다. 환자의 안전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사실이었다.
대부분 적응조차 되지 않았지만 일일이 이해시키고,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기 위해 매 수술에 최선을 다하는 일 역시 소홀히 하지 않았다.
대신 고경아의 눈매에 걸린 살벌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내일도 오늘처럼 늦으면 알죠?”
석 달 열흘은 굶은 고양이 앞의 쥐다.
바쁘면서도 무섭고 즐거운 나날이었다.
뚝딱 3주가 지났다.
그사이 별일 아니지만 웃긴 일이 있긴 했다.
어느 날 아침, 나종진과 함께 부리나케 수술 방으로 향하던 이혁원이 갑자기 눈을 부릅떴다. 고경철이 자료를 들고 터벅터벅 복도를 걷고 있었다.
“야! 고경철, 넌 인턴이라는 놈이 이렇게 한가하게 걸어도 돼? 이 자식 이거 어떻게 하려고 이러지?”
“예? 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누가 쉬지 말래? 일할 땐 열심히 해야 할 거 아냐? 너 어느 과 지원할 거야?”
나종진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옆구리를 쳤다.
“종진아, 넌 왜 이래? 김지훈 선생님을 봐서라도 지나치면 안 되는 상황이잖아. 따끔하게…….”
“혁원아, 진정하고 상황 파악 좀 해.”
“어라? 정말 너까지 왜 이래? 아무리 우리 과 인기가 없어도 할 말은 해야지. 고경철, 너 수술 끝나고 휴게실에서 보자.”
급기야 어깨를 잡으며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쏟아지는 말에 고경철은 입을 열 틈조차 없었다.
결국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얼마나 어이가 없는지 나종진의 발음까지 흔들렸다.
“횩원아! 경철이 PK(임상 실습생)야.”
“그러니까 더……. 어? 얘 지금 실습 도는 거야?”
이제야 가운에 걸린 이름표를 보았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직전인데 벌써 더위 먹은 모양이었다. 이혁원이 멋쩍은 얼굴로 헛기침을 하며 휘리릭 사라졌다.
예전에 보였던 살벌한 눈초리까지 모두 오해의 산물이었다. 고경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나종진이 어깨를 탁 잡으며 말했다.
“경철아, 내 눈엔 인턴이나 실습생이나 똑같다. 우리 똑바로, 열심히 하자. 시간 금방 간다.”
홀로 남은 고경철이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일반외과 해야 되나?’
온몸에 돋는 소름에 부르르 떨고 말았다.
아무리 바빠도 쉴 시간은 나온다.
간만에 연구실에 모인 전임 셋이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모처럼 다가온 한가로움에 몸을 맡긴 채 이러저런 말을 나누었다.
“이게 얼마 만이냐? 현수야, 요샌 별말 없지?”
“무슨 말이요?”
“소문 말이야. 학회 때 혈관종 수술 발표하니까 진충기가 입을 쩍 벌린 채 말을 못하는데, 내가 다 속이 시원하더라. 우리도 충분히 보여 줬잖아.”
신현수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안경을 고쳐 썼다.
고민스러울 때나 갑갑할 때마다 보이는 습관인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직도 헛소문이 떠돌아?”
“그런 것 같아요. 누구 입인지 잡고 싶을 정도예요.”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어디든 그런 사람이 있잖아. 신경 쓰지 마. 그 많은 수술을 혼자 다 한 진충기 선생은 더한 소문에 시달리겠다. 한 사람만 거쳐도 서로 아는 사람일 텐데, 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몰라.”
또 안경을 고쳐 썼다.
“소문이 나고도 남을 텐데 아니야?”
“나라고 다 들을 수 없지만 들리는 말이 없어. 학회 때 발표를 보고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도리어 더 의심스러워. 지금도 H 병원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건 사실이거든.”
귀가 번쩍 뜨일 말이었다.
정말 진충기가 근원지일까?
“정말 답답하네. H 병원에 사람이 한두 명도 아니겠지만 집안 단속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냐? 같은 병원에서 자리다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얻는 게 뭐야?”
신현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학술 임원 선출과 수술 시연 병원 결정이 계속 늦어지고 있잖아. 혈관종으로 쐐기를 박았다고 생각했는데, 최인호 선생님이 케이스 리포트에 불과하다며 반대하고 있어. 우리가 떨어지면 누가 이득을 얻을지 빤하지 않아?”
최인호 교수까지?
새로운 국면이다.
내부에 적이 사라지니 더 강력한 적이 외부에 나타난 꼴이었다. 신현수의 말이 사실이라면 당장 해결 방안을 찾아야 했지만, 추측에 불과하고 명확한 증거도 없었다.
답답한 신음이 절로 터졌다.
“현수야, 과장님도 아시지?”
“협회 일을 하시는데 모를 수가 없죠. 이준영 선생님도 의심하고 계시는 눈치예요.”
김지훈과 이경석이 동시에 깜짝 놀랐다.
“이준영 선생님까지? 그러면 이거 거의 확실하다는 말인데, 혹시 어떻게 하신다는 말씀 없으셨어?”
“그런 말씀을 하실 분들이 아니잖아요. 결과를 봐야 알 수 있겠지만 물러날 기색이 없다는 말이 들려요. 이건 정말 비밀인데…….”
신현수의 목소리가 나직해졌다. 연구실에 도청 장치라도 있는 것처럼 주변을 살폈다.
김지훈과 이경석이 자연스럽게 머리를 모으며 귀를 활짝 열었다.
“이준영 선생님이 최인호 선생님과 얼굴까지 붉혔다는 말이 있어요.”
“뭐? 말도 없으신 분이 무슨 일로?”
“정확히는 모르지만 혈관종 발표를 두고 격론을 벌이다 최인호 선생님이 말실수를 하셨다는 것 같아요.”
무뚝뚝함과 담대함의 대명사, 이준영 교수가 격론을 벌이고, 얼굴까지 붉혔다니 무시무시한 일이었다.
심각하게 듣고 있던 김지훈의 뺨이 갑자기 시뻘게졌다.
‘혈관종이라면 결국 나도 관련된 일이잖아. 혹시 나 때문에 스승님이 화를 내신 건가? 그것도 다른 병원 의사한테?’
머릿속이 멍해졌다.
스승의 마음을 헤아릴 길이 없었다. 자신 때문에 사달이 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제자 된 도리로 스승에게 심려를 끼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불타는 분노와 투지가 솟구쳤다.
“H 병원은 확실하지?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보면 우리 같은 전임 수준의 입이 아니야. 좋아. 누군지 몰라도 받아 준다. 경석이 형, 현수야, 실력으로 꾹 눌러 주자고.”
“안 그래도 나 자극받은 지 오래다.”
“난 시연 병원 선정부터 신경 쓸게. 그동안 친분을 쌓은 분들이 꽤 있으니까 작업 들어가면 저쪽에서 무슨 짓을 하든 승산이 있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다들 진료 이외의 일에 별 관심이 없어 몰랐지만 의사로서의 능력만큼 행정적인 면도 탁월한 신현수였다. 실력만으로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현수야, 설마 우리도 헛소문을 퍼트린다든지, 뭐…….”
“형, 비겁한 수보다 정당한 수가 힘이 더 세다는 정도는 나도 잘 알고 있어요. 우리 병원에 해가 될 일은 절대 할 수 없죠. 걱정하지 마세요.”
“야! 신현수, 든든하다.”
때 아닌 불길이 치솟았다.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학회 발표로도 못 믿는다면 직접 보여 주는 수밖에 없다.
방법은 오직 하나, 시연 병원으로 선정되는 것뿐이었다.
신현수의 어깨에 누구도 대신하지 못할 짐이 얹어졌다. 비슷한 또래를 상대하는 것도 아니고, 머리가 허연 대선배들과 접촉해야 하는 일이었다.
김지훈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쳤다.
“신현수! 파이팅!”
연구실이 쩌렁쩌렁 울리는 순간!
따르르릉! 따르르르릉!
요란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힐끗 달력을 본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