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경험은 힘이자 자신감이다 (2)
지방 덩어리 사이로 빨간 피가 비쳤다. 워낙 약한 조직이기에 아무리 조심해도 간간이 발생하는 출혈을 완벽하게 막을 방법이 없었다.
처리 경험은 충분했다. 신속하게 출혈 부위를 찾고 봉합하면 문제없이 멈췄다.
이번에도 다를 바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종진아, 피난다. 카메라 들어와.”
카메라 각도가 바뀌었다.
이미 잘린 위를 지나 위와 연결된 부분을 비쳤다. 노란 지방 덩어리 위로 한 줄기 피가 주르륵 흘렀다.
신현수가 능숙하게 지방을 제치며 출혈 부위를 찾았다.
양이 적지 않았다.
“석션! 거즈!”
거즈가 시뻘겋게 물들었고, 석션을 해도 어디선가 피가 계속 흘러나왔다. 지방 부위를 샅샅이 확인했지만 손상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부위를 여는 순간, 신현수의 눈가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나종진은 입을 벌린 채 당황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출혈 부위가 간이었다.
드물다 못해 케이스 보고감이었다. 빤히 보면서도 믿기 힘들었다. 수술 전 보호자와 환자에게 설명했던 위험 중 하나가 정말 벌어질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원인은 단 하나였다. 위를 자르기 위해 여러 방향으로 잡아당기는 동안 간과 연결된 조직에 과도한 압력이 가해진 것이다. 대개 비장 쪽 손상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간 쪽은 신경 쓰지 않았던 탓일 수도 있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출혈부터 잡아야 한다.
“카메라 접근시켜. 석션!”
심상치 않았다.
간을 싸고 있는 투명하고 질긴 막만 찢어진 것이 아니었다. 간 조직까지 손상받았다. 거칠게 갈라진 틈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왔다.
주르륵! 주르륵!
보비는 의미도, 효과도 없었다. 봉합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수처 주세요.”
바늘을 가져가기도 전에 지방 덩어리가 밀려오며 시야를 가렸다.
나종진이 애를 썼지만 물렁물렁한 지방조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째깍! 째깍!
빠른 해결은커녕 시야 확보조차 어려운 상황이 이어졌다. 바이탈이 흔들릴 정도의 출혈은 아니라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분명히 문제를 일으킨다.
신현수의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문제는 시야만이 아니었다.
위와 장을 봉합한 경험이 간에도 통할지 의문이었다. 정확하게 바늘을 통과시키고, 확실하게 지혈되도록 타이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기구를 통해 전해지는 감각이 익숙하지 못하면 헐렁하게, 혹은 너무 강하게 봉합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쪽이든 결국 손상만 가중시키게 된다.
째깍! 째깍!
시계 침이 넘어갔다.
여전히 거즈가 벌겋게 물들 정도로 피가 흐르고 있다.
집도의가 최종 책임을 진다는 말이 끝까지 수술을 한다는 의미만은 아니었다.
수술 팀은 눈앞에만 있지 않다.
‘지훈이는 어떤 선택을 할까? 위가 손상받았다면 내게, 대장이 손상받았다면 경석이 형에게 도움을 요청했겠지? 이건 자존심 문제가 아니야. 가장 확실하게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순간이다.’
더구나 퍼스트의 정확한 어시스트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점이었다.
신현수, 나종진의 조합과 신현수, 김지훈, 혹은 이경석과의 조합은 천양지차였다.
신현수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마취과, 김지훈 선생 빨리 불러 줘요. 수술 중이면 이경석 선생님을 찾아요.”
간호사가 다급하게 달려 나갔다.
잠시 후, 수술을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던 김지훈이 허겁지겁 들어왔다.
간호사가 전한 말과 화면에 보이는 양상만으로도 상황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비상이다.
“현수야, 거즈로 누르고 있어. 종진아, 내가 들어오는 대로 빠져나와. 간호사, 거즈가 많이 들어가야 하니까 카운트 철저하게 해요.”
재빨리 손을 씻던 김지훈이 갑자기 인상을 쓰며 이를 악물었다.
해결 방안을 생각하는 순간 누구도 복강경 기구로 간을 봉합한 경험이 없다는 사실이 떠오른 것이다.
간담도 분야를 맡고 있기에, 자신을 신뢰하기에 찾았을 것이다. 경험이 부족한 나종진과 해결하기 힘들어 불렀을 수도 있었다.
후자일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불현듯 혈관종이 생각나며 욕심이 났지만 신현수가 집도의다. 퍼스트로서 역할을 확실하게 할 때였다.
김지훈이 수술실로 들어가다 말고 흠칫 놀랐다. 신현수가 당연하다는 듯 세컨 자리로 옮겨 서고 있었다. 출혈 부위를 압박하기 위해 애쓰며 빨리 들어오라는 눈짓을 했다.
김지훈이 눈가를 굳히며 집도의 자리에 섰다. 강한 긴장이 다가왔다.
‘후우! 나까지 긴장하면 안 돼.’
“석션! 거즈! 수처 주세요.”
김지훈과 신현수가 힘을 합치자 순식간에 시야가 확보됐다. 압박을 했는데도 출혈량이 많았다. 확실하게 누르지 못한 탓이었다.
정확한 출혈 위치를 확인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찡그렸다.
무려 3센티미터나 찢어졌다. 해부학적 구조상 찢어질 수밖에 없는 부위가 손상받았지만 하필이면 좌측 간 하부였다. 간을 들어 올리지 않으면 출혈 부위를 확인하는 일조차 힘든 부분이었다. 압박 효과가 미미한 이유이기도 했다.
간을 들어 올렸다. 석션을 하며 확인한 결과, 열상 부위 깊이가 예상보다 깊었다.
개복 시 이용하는 간 봉합용 바늘은 크기 때문이라도 사용할 수 없었다.
복강경 수술 때 일반적으로 쓰는 바늘을 이용해야 했다. 3센티미터에 가까운 길이에 바늘 크기가 작아 최소 5바늘 이상 봉합해야 했다.
“현수야, 전체 시야 유지해 주고, 지방조직 확실하게 밀어내 줘. 간 하부라 잘 안 보이니까 필요할 때마다 간을 올려 줘야 돼. 수처 시작하자.”
좌측 간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신현수가 밀려 들어오는 지방 덩어리를 처리하며 시야를 확실하게 유지시켰다.
나종진이 꿀꺽 침을 삼켰다. 경험과 실력 차이가 얼마나 큰지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열상 부위를 확인한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수처일 뿐이다. 긴장하지 말고 침착하게 진행하자.’
첫 바늘이 들어갔다.
최대한 넓고 깊게 떠야 한다.
단단한 듯, 무른 듯 간 특유의 감촉이 전해졌다. 혈관이나 담도 손상에 유의하며 반대쪽으로 바늘을 밀었다.
작은 바늘이 완전히 간 속으로 들어갔다. 간당간당 끝만 보이는 바늘을 간신히 잡아 빼냈다.
바늘구멍으로 피가 흘러나왔다.
이제 타이를 해야 한다.
확실한 시야 확보가 가능할 정도로 간을 들어 올리면 손상 부위를 벌어지게 하는 힘이 더욱 강해진다. 이 상태로 타이하면 결과적으로 느슨하게 조여지게 된다.
“현수야, 살짝 내려 줘.”
간이 스르륵 떨어졌다. 지방 덩어리는 여전히 밀려들고 있었다. 타이할 부분은커녕 기구 끝 부분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직 기구로 전해지는 감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매듭을 만들었다.
실과 바늘을 반대 방향으로 당겼다.
매듭이 간 하부로 들어가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내 다가온 저항을 느끼며 조금씩 힘을 가했다.
매듭이 느슨해도 안 되지만 너무 강하면 간을 깊게 파고들 수 있었다.
길게 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등짝이 은근히 축축해지고 있었다.
‘후우! 긴장하지 말자. 손 대신 기구일 뿐이다.’
팽팽한 압력이 느껴졌다. 개복 수술에서 쌓은 수많은 경험을 통해 지금이 바로 손을 뺄 순간이라는 확신이 다가왔다.
동일한 힘으로 삼중 매듭을 지었다.
간을 들어 올렸다.
신현수가 재빨리 타이 부분을 비쳤다.
수술 팀 전체의 눈이 한 곳으로 쏠렸다.
긴장된 순간이었다.
매듭은 단단하게 묶였다. 실을 따라 간 조직이 살짝 움푹하게 파였다.
결코 과도한 힘이 아니었다. 싸고 있는 막이 간 조직을 보호해 줄 것이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신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뢰할 수 있는 써전의 동의였다. 이미 확신하고 있었건만 안도의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수술 팀 전체 능력이 왜 중요한지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바늘이다.
역시 간 하부로 매듭이 사라지는 순간 시야에서 사라졌고, 기구를 통해 전해지는 감각만 남았다.
신중하고 침착하게 두 번째 타이를 끝냈다.
다시 확인이다.
안도의 한숨이 터졌지만 긴장은 사라지지 않았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모든 신경과 정신을 집중한 끝에 수처와 타이를 완벽하게 끝냈다.
불과 다섯 바늘을 꿰맸을 뿐인데 어깨까지 뻐근했다. 이 과정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떠올리지도 못했다.
오직 출혈이 잡혔기만을 바랐다.
김지훈이 목을 돌렸다. 힘들고, 긴장한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봉합 부위를 거즈로 닦았다. 살짝살짝 피가 묻었다.
시간이 지나도 양이 늘면 안 된다.
수술이 끝나기 직전 다시 확인해야 하지만 비만 수술은 신현수의 전문 영역이다.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하고, 무엇을 확인해야 할지 더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김지훈이 시선을 교환한 후 세컨 자리에 섰다.
신현수와 나종진이 마무리를 시작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동안 얼마나 노력해 왔는지 짐작도 하기 힘들었다. 오늘 벌어진 일은 아주 예외적이면서도 비만 수술의 불가피한 면이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건드리기만 해도 찢어질 것 같은 조직을 너무 손쉽게 다루네. 신현수! 역시 무서운 놈이야.’
어느새 깔끔하게 정리됐다.
마지막으로 간 열상 부위를 확인했다.
단단하게 묶인 실 사이로 미량의 피만 묻어났다. 건강한 성인이라면 문제없이 멈출 것이다.
잘 끝났다는 생각, 최선을 다했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런데 한 부분이 눈에 걸렸다.
“현수야, 가운데 부분이 불안해 보이지 않아?”
어딘가 헐렁해 보였다. 스멀스멀 끊임없이 피가 새어 나왔다.
확대돼 보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이대로 끝내도 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추가 조치가 필요해 보였다.
‘제길! 역시 만만한 장기가 아니야.’
“현수야, 보강하는 게 좋겠지?”
“그럼 더 큰 바늘을 써야 하는데, 내부 혈관이나 담도 손상을 피할 수 있을까?”
개복 때와는 많은 조건이 달라 누구나 우려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이대로 닫고 기다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능한 한 수술 중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원칙이다.
김지훈이 입을 꽉 다물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여기서 끝내면 잠 못 잔다. 지금 해결해야 돼.”
재차 수처가 시행됐다. 보다 굵고 큰 바늘로 간을 떴다.
어디서 손상을 일으킬지 알 수 없었다. 기구를 타고 손끝으로 전해지는 느낌에 모든 정신을 집중시켰다. 단 한 바늘을 뜨고 타이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
째깍! 째깍!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현수야, 끝내도 되겠지?”
신현수의 눈가에 걸렸던 긴장이 사라졌다.
“오케이! 잘 멈췄네. 다행이다.”
위기를 넘기자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수술 중 기구를 넘겼다는 사실만으로도 속이 상하는 법이다. 동기 사랑은 나라 사랑이다. 불행히도 나종진은 김지훈과 신현수에게 배워야 할 후배다.
“후우! 다행히 잘 멈췄네. 나종진, 시야 확보만 제대로 했으면 내가 들어올 일이 없었잖아? 너 이래 가지고 다음 텀에 수술 받을 수 있겠어? 열심히 하자.”
“예?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종진이 얼떨결에 고개까지 숙였다.
“어이쿠! 늦었다. 현수야, 다음 수술 때문에 먼저 나간다.”
김지훈이 휘리릭 사라졌다.
상황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자신의 입장을 고려하는 동기의 마음일 것이다.
신현수가 피식 웃고 말았다.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저렇게 어색해하는 거야? 덕분에 큰일 피했어. 고맙다. 종진이 너도 침착하게 대처해 줘서 고맙다.’
“나종진, 넌 아주 잘했어. 다음 텀에 지훈이한테 라파로 수술 빨리 받아. 혁원이하고 비만도 한번 해 봐야지.”
나종진의 입이 쫙 찢어졌다. 엉뚱한 놈이 의외의 대가를 받았다.
방금 전 어떤 상황이었는지조차 잊었다.
신현수는 환자가 무사한 것으로 족했다. 김지훈도 분명 그럴 것이다.
모든 수술이 끝나고, 한 시간 후 벌어지는 혈관 수술만 남았다. 내리 3개를 해야 하고, 손일석의 마지막 집도 날이다. 주말까지 며칠이 남았지만 환자 치료는 수술만이 아니기에 더 이상의 집도는 불가했다.
‘시간 난 김에 혈관종 수술이나 고민해 볼까?’
자료를 가지러 외래로 향하던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새삼 복강경 기구로 간 봉합을 했다는 사실이 진하게 다가왔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떨릴 정도였다.
‘느낌을 잊으면 안 돼.’
마치 간을 봉합하는 것처럼 손을 놀렸다.
겉면 손상이었기에 절제 시와는 다르겠지만 다시 경험하기 힘든 과정이었다. 바늘이 전하는 느낌, 실이 전하는 압력을 세세하게 되새겼다.
그럼 뭐 할까?
확실히 운때라는 것이 있는 모양이다.
며칠만 빨리 간 봉합을 경험했다면 판단이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간 겉면과 절제면 봉합의 난이도가 같을 수 없다고 해도 자신감 정도는 가졌을 것이다.
물론 혈관이나 담도 손상 문제가 있지만 결국 숙련도에 달린 일이기도 했다.
‘아쉽다.’
오늘 느낀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열심히 손을 놀리며 외래 문을 열던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눈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