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843화 (843/1,329)

8화. 평소처럼 달리면 된다 (2)

난리 났다.

“흐읍! 흐읍! 서정호! 너, 너 때문이야. 이리 와.”

“여보! 많이 아파? 조금만 참아.”

“흐읍! 흐읍! 아아악! 서정호, 너…….”

고경순의 분만 진통이 상당히 심했다.

초산은 대개 9시간 이상 진통을 겪는다. 임신한 여자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일이지만 가족이라 그런지 걱정이 앞서며 눈치까지 보였다.

일 핑계로 정기적인 산전 검사를 받았을 고경순을 한 번도 챙기지 못했다. 일반외과 의사라도 산부인과 의사와 선후배 관계로 엮여 있는데 말이다.

딸자식의 비명 소리에 안절부절못하던 최문옥 여사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고성문, 김지훈, 손일석까지 가족 중 의사만 3명이다. 학생이라고 해도 고경철 역시 의학도다. 책으로나마 배웠을 것이다.

“그럼 뭐 해? 나보다 못하네.”

아무리 과가 다르다고 해도 의사다. 그런데 3명이나 되는 전문의가 산부인과 치프 말에 똑같이 귀를 기울일 뿐 도움 하나 되지 않았다.

“자궁 경부가 5센티미터 정도 열렸습니다. 즉시 분만실로 옮겨서 분만을 유도하겠습니다. 교수님 대기 중이시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김지훈과 손일석 때문인지 전공의 말투가 사근사근해 그나마 눈치를 덜었다.

“잘 부탁해.”

잠시 진통이 사라졌는지 힘없이 축 늘어진 고경순이 분만실로 옮겨졌다.

지금부터 본격적인 기다림의 시작이다. 부모, 남편, 형제들과 제부의 입장은 다를 수밖에 없다.

딱히 할 일도 없었다. 행여 갑작스러운 일이 생길지 걱정도 되고, 내심 첫 조카라는 사실에 기대가 되면서도 뭔가 어색했다.

‘왜 이렇게 담담하지? 우리 애 낳을 때는 안 그러겠지?’

얼마 안 있으면 똑같은 고통을 겪어야 할 고경아를 빤히 보면서도, 서슬 퍼런 장인어른의 눈빛을 맞으면서도, 걱정이 태산인 장모님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랬다.

어디나 틈은 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닥만 바라보던 손일석이 틈을 찾아냈다. 부모는 자식 못 이긴다는 만고의 법칙을 이용했다.

“처남, 배 안 고파?”

고경철이 힐끗 김지훈을 보았다.

‘눈치 볼 일 아니다.’

“엄마, 나 배고파요.”

“어이구! 우리 아들 아침 못 먹었구나? 김 서방, 손 서방, 자네들도 못 먹었지? 배고프겠네. 경아야, 넌 몸도 힘들 텐데 빨리 먹고 집에 가 있어. 경희야, 언니하고 같이 가. 전화할게.”

어머니, 아버지, 남편만 남았다.

못 이기는 척 병원을 나섰다.

출산의 고통을 본 고경아는 식욕을 잃었는지 집에서 쉬고 싶다고 했다. 몇 번 함께 밥 먹자는 소리를 했지만 고개만 저었다.

“형부, 언니는 제가 챙길 테니까 오빠하고 식사하세요.”

정말 예쁜 처제다.

배부른 마님이 움직일 때는 남편이 있어야 한다. 다 함께 집에 바래다주고 병원 앞 식당으로 향했다.

조카 얼굴 볼 시간 엄청나게 남았다.

일반외과 의사답지 않게 천천히 식사를 했다. 느릿느릿한 대화와 함께.

“경철아, 너 우리 과 실습 언제 돌아?”

“다음 달에 돌아요.”

밥 한술 확실하게 씹고.

“외과 공부 열심히 해라. 이혁원 선생 알지? 실습생들 제대로 대답 못하면 거의 죽일 태세더라.”

고경철의 얼굴이 누렇게 떴다.

“매형, 안 그래도 지난주에 우연히 마주쳤는데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어요. 찍으신 것 같아요. 내가 뭐 잘못했나요?”

손일석이 씨익 웃었다.

“혁원이도 둘째 매형 과다. 무슨 말인지는 실습 돌면서 처절하게 깨달으면 돼. 지훈아, 아직 어리니까 살살 다뤄. 본과 애들이 무슨 죄가 있니?”

“의대 다니는 게 죄지. 난 혁원이 못 이겨.”

누렇게 뜬 얼굴이 허옇게 변했다.

고경철을 가운데 두고 한참 놀려 먹었다. 그래도 시간 참 느리게 흘렀다. 장인어른과 서정호가 마음에 걸렸지만 사람 많다고 진통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밥그릇을 박박 긁을 무렵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선생님, 30세 남자 환잔데요.)

우아악! 응급실 환자가 반갑다.

“경철아, 환자 있어서 가 봐야 하니까 아버님께 우리 응급실 갔다고 말씀드려.”

수술 환자가 아닌 화상 환자다.

전공의들의 치료가 끝날 때까지 응급실을 떠나지 않았다. 물론 분만실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아보긴 했다. 아직 분만까지는 시간이 걸린다는 말만 들었다.

한동안 연구실에서 버티다 결국 분만실 앞에 앉았다. 번갈아 교대를 하며 출산의 고통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어깨가 뻐근해지고 허리가 아플 무렵, 고경순이 고통에서 해방됐다.

“응애! 응애!”

늦은 밤, 드디어 힘찬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들이다.

온 가족이 모여 첫 손자이자, 첫 자식이자, 첫 조카의 탄생을 축하했다. 열 달 동안 배 속에 있던 아이와 온기를 나눈 고경순이 눈가를 훔쳤다. 아빠가 된 서정호는 입만 벙긋벙긋,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었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막상 아이를 보자 가슴이 찡했다.

‘자식! 참 잘생겼네. 우리 아이는 얼마나 예쁠까? 경아 씨는 아프지 말아야 하는데, 차라리 제왕절개를 해 달라고 할까?’

온갖 생각이 스치며 왠지 고경아가 안쓰럽기만 했다.

안 아프고 낳을 방법은 없을까?

하루 종일 안절부절 초조해하던 장인, 장모가 이제야 큰 웃음을 터트렸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겹경사다. 다음 주 손일석과 고경희의 결혼식까지 겹쳐 어느새 시끌벅적 떠들썩해졌다.

밤늦도록 화기애애한 자리가 이어졌다.

당직은 빼고.

환자는 의사의 가정사 고려하지 않는다.

살벌하게 바쁜 나날이 지났다.

논문과 케이스 리포트, 이혁원의 두 번째 복강경 수술, 이번 주로 근무를 마치는 손일석과 오만석의 마지막 주 수술 문제, 고경순의 퇴원까지 신경 써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딱 한 가지만 빼고.

초미의 관심사인 간 절제 논의가 진행될수록 위험성과 어려움만 대두됐다.

전임들 모두 머리를 맞댔고, 불타는 투지도 여전했건만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머리와 의욕만으로 치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자신감마저 바닥에 닿기 직전이었다. 넘을 수 없는 벽을 마주한 것처럼 막막할 지경이었다. 학술 임원과 시연이란 문제와 맞물린 탓인지도 몰랐다.

어느 때보다 스승의 정확한 판단이 필요했다.

‘어떤 판단을 내리실까?’

혈관종 환자를 진료하기 전날, 모두 모여 이준영 교수와 자리를 가졌다.

차트와 검사, 수술에 필요한 새로운 기구를 보며 김지훈의 설명을 듣다 말고 뜻 모를 소리를 내뱉었다.

살짝 고개가 흔들렸다.

‘혁원이에게 얘기 들었다만 언제나 날 놀라게 하는구나. 간 절제가 함부로 시도할 수 있는 수술이 아니지. 자신감을 잃은 거야? 아니면 라파로의 한계를 절감한 거야?’

“선생님, 힘들까요?”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가져온 거 아니었어?”

“솔직히 말씀드리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 많이 나왔습니다.”

“집도의로서의 판단은?”

“저도 동감합니다. 제어하기 힘든 출혈이 발생하면 즉시 개복으로 전환한다고 해도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환자에게 끼치는 영향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끈적끈적한 미련이 보였다.

이준영 교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래도 시도는 해 보겠다?”

김지훈이 입을 열지 못했다.

판단을 흐리게 하는 요소가 하나 더 있었다.

소문을 듣지 못했다면 오직 환자에게만 집중했을 것이다. 높아지는 실패 가능성과 함께 시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질수록 욕심이 아닌지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와 다를 바가 없다고 여겼지만 왠지 찜찜함이 가시질 않았다.

“환자는?”

“내일 오전에 진료가 예약돼 있습니다.”

“뭐라고 할 거야?”

“가급적 솔직하게 말할 생각입니다.”

“가급적? 집도해야 하는 의사가 갈피를 못 잡는데 환자에게 득이 되겠어?”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다.

환자와 상의하고 동의를 구하는 일 이전에 의사로서 치료 방법을 제시할 수 있어야 했다.

이 방법, 저 방법 나열하며 환자에게 선택을 맡길 질환도 아니었다.

“환자에 대한 욕심이야? 아니면 네 자신과 시연에 대한 욕심이야? 선후가 바뀌면 피해는 환자가 입는다.”

스승의 한마디가 가슴을 후벼 팠다.

전임들 모두 고개를 푹 숙였다.

“어려울수록 원칙을 상기해.”

의사로서 판단을 내리기 어려울 때는 환자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 또한 좋은 방법이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던 머릿속이 차츰 개운해졌다. 절대 환자의 안전을 담보로 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원칙을 잊다니 욕심을 내긴 낸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이경석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간 절제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커녕 조언조차 없었다. 도대체 뭘 알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준영 교수는 할 말 다 했다는 듯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김지훈이 꾸벅 인사를 하고 일어섰다.

“조금 있으면 근 십 년을 보는데 아직도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네. 지훈아, 도대체 시도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경석이 형, 솔직히 자신 없죠?”

“어휴! 파이팅 할 때까지는 좋았는데 지금은 불안하기만 하다. 개복으로 전환하면 된다지만 환자에게 큰 무리가 따르는 일이잖아. 여는 시간 동안 출혈이 지속되면 저혈량성 쇼크에 빠질 수도 있어.”

“현수야, 너는 어때? 네가 집도의라면 시도하겠어?”

신현수가 눈가를 찡그렸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준영 교수의 말은 명확했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 수술 팀의 자신감과 확신이 없다면 결코 시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사실 시연이라는 행사에 욕심을 냈다. 그 탓에 전과 달리 무리한 면을 알면서도 지나쳤는지 몰랐다. 어쩌면 김지훈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이유도 수술 팀이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었다.

“고민할 시간만이 아니라 수술 경험이 더 필요해. 욕심내지 말자. 시연도 결국 환자 때문에 하는 거잖아.”

수술 팀의 의견은 비관적이었다.

환자가 원하는 수술을 능력이 부족해 포기해야 한다니 씁쓸했다. 하지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환자의 안전이자 확실한 치료다.

“오케이!”

김지훈이 손을 흔들며 사라졌다. 말과는 달리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복강경 시도를 포기한 때문인지, 무리한 욕심을 냈다는 사실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현수야, 우리도 퇴근하자. 에이! 기분이 왜 이래?”

“형, 욕심내지 말자고 했지만 포기해야 하는 수술일까요? 우리가 너무 겁을 내는 건 아닐까요?”

“현수야! 간 절제다.”

그 말 한마디에 신현수도 남은 미련을 버렸다. 힐끗 김지훈의 뒷모습을 좇긴 했지만 결론이 거의 났다고 생각했다. 미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다.

김지훈이 누군가?

지금까지 일말의 가능성만 있어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스스로 무리라고 여기는 수술은 절대 시도하지 않았다. 스승에게 배운 대로 환자라는 큰 명제와 함께 자만이 아닌 자신감을 항상 기억했기 때문이다.

‘끝까지 고민해 보자. 이 수술은 개복으로 전환하는 순간 더 큰 문제를 만든다. 환자 얼굴을 볼 때도 성공할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그때 깨끗하게 포기하자.’

마음을 정리하고 고민에 빠졌다.

밥 먹으며, 설거지하며, 곤히 잠든 고경아의 곁을 지키면서도 머릿속은 수술로 꽉 찼다. 강호승이 가져온 기구를 연상하며 손을 멈추지 않았다.

밤이 깊었다. 그 덕에 고경희를 볼 수 있었다.

“처제, 지금 몇 신데 이제 들어와?”

“형부, 나 성인이에요. 결혼할 때 생각 안 나세요? 준비할 게 얼마나 많은데. 이번 주말에 저 결혼하는 건 아시죠?”

“그걸 말이라고 하시나.”

“오빠한테 일 좀 적당히 주세요. 낮에도 준비하느라 시간 없어서 잠도 제대로 못 잔단 말이에요.”

이건 아니다.

“그게 왜 나 때문이야? 일석이가…….”

“형부! 형부는 교수잖아요.”

눈초리와 목소리가 상당히 살벌했다.

으음! 손일석이 뭐라고 한 걸까?

어쨌든 가정의 평화는 마님만 위한다고 이뤄지는 일이 아니다. 볼 날도 며칠 안 남았고, 처제 역시 가족이기에 충실해야 한다. 더구나 갈수록 동생처럼 예뻐지는 처제였다.

“일석이는 복을 타고났어. 어디서 우리 처제 같은 사람을 만나겠어?”

“그죠. 오빠는 왜 모를까요?”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다시 고민에 빠졌다. 고경순의 출산과 손일석과 고경희의 결혼까지 좋은 일이 연이어지는데, 환자와 수술은 난관 중의 난관이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정말 어려운 문제였다. 절대적 조건인 환자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었다.

다음 날, 간 혈관종 환자와 마주했다.

41세 여자 환자, 이정애.

지금도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동안 통증은 없으셨습니까?”

“꼭 커다란 돌 하나 박힌 것처럼 묵직하고 갑갑한 통증은 여전해요. 가끔 찢어지는 것 같은 느낌도 들어요.”

간은 침묵의 장기라고 불린다.

질환으로 인해 통증이 유발되려면 종양 크기가 무척 크거나 어떤 질환이든 상당히 진행돼야 한다. 예외적이면서도 희한한 일이지만 검사에서 관찰되지 않는 미세한 출혈을 간과할 수 없었다.

“크기로는 적응증이 안 되지만 통증이 계속 유발되기 때문에 수술하는 것이 맞습니다. 검사로도 보이지 않는 출혈이 발행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선생님들마다 다 같은 말씀을 하셨어요.”

“원칙은 개복해서 좌측 간 일부만 제거하는 겁니다. 간을 절제하기에 위험도가 감소하는 것은 아니지만 복강경보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최선의 방법입니다. 문제는 복강경으로 수술받길 원하시는 데 있습니다.”

“불가능한가요?”

김지훈이 헛기침을 했다.

‘라파로를 절실하게 원하는 이유가 뭘까?’

“그 전에 한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반드시 복강경으로 수술받고자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41살이라고 젊은 여자하고 다르지 않아요. 배에 큰 흉터가 남는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요? 배를 크게 연다는 것이 겁나기도 하고요.”

남들 눈에는 사소해 보여도 당사자는 다르다. 이유가 무엇이든 환자에겐 절실할 것이다.

‘일단 시도해 볼까? 수술 팀의 능력이 따라갈까?’

복잡하게 얽히는 여러 생각에 난감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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