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평소처럼 달리면 된다 (1)
김지훈이 틈을 파고들었다.
“과장님, 이왕이면 전공의 월급도 올려 주는 방향으로 건의했으면 합니다. 돈이 다는 아니지만 일하는 시간과 업무량에 비해 보수가 너무 적습니다. 전공의 당직 수당도 현실화했으면 좋겠습니다.”
“당직 수당이 아직도 그대론가?”
“작년에 2만 원 올라서 월 5만 원입니다.”
“너무 적긴 하네. 김지훈이 니가 월급 문제까지 내 어깨를 짓누르는구나. 내도 힘들다.”
이혁민 교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죄송합니다.”
“어째 말로만 죄송한 것 같다.”
“이 과장, 얘들 전임이야, 전임. 우리가 먼저 대우해야 돼. 경석이 저놈 눈빛 좀 봐. 말 잘못하면 당장 쫓겨나겠다. 무섭다, 무서워.”
“에이! 원장님, 또 왜 저한테 이러십니까?”
“저것 봐, 저거. 마음에 안 들면 이젠 대놓고 원장이라고 불러요. 대놓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어디가 덧나니? 정감 있고 얼마나 좋아. 이 과장, 어쩔 수 없다. 일곱 명으로 가자. 일곱 명. 럭키 세븐!”
심각한 분위를 깨는 웃음이 터졌다.
웃음에 담긴 의미는 컸다.
이준영 교수에 이어 송재덕 교수까지 확고한 지지를 표명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묘한 긴장감이 사라지며 긍정적인 감정이 은은하게 퍼졌다.
잠시 후, 이혁민 교수가 결론을 내렸다.
“그럼 펠로우 일곱 명 확충과 급여 및 당직 수당 현실화를 요구하겠습니다. 단, 전임들은 이삼 년에 걸친 일일 수밖에 없다는 걸 명심해라. 성에 안 찬다고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당장 교수실도 없잖아.”
“가운 벗으면 혼난다. 혼나. 도대체 어느 놈이 그런 생각을 했지? 이 과장, 이 꼴 저 꼴 볼 거 없이 말한 놈부터 동조한 놈들까지 이참에 싹 옷 벗길까?”
여러 명이 흠칫 놀랐다.
낮에는 새가 듣고 밤에는 쥐가 듣는다고 했는데, 입을 연 사람은 누굴까?
크게 놀라며 송재덕 교수에게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이 한 명 있긴 했다.
이제는 한 식구로서 전임들도 믿고 따를 수 있는 교수였다. 교수들에게 확 터놓고 말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무거운 짐 하나 덜었다. 예상외로 쉽게 결론이 나 마음까지 후련했다.
그 탓에 애초에 무엇 때문에 모였는지조차 까먹었다. 교수들이 한목소리를 내며 너무 쉽게 해결됐다는 사실에 어떤 말이 나올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혁민 교수가 조용히 전임들을 보았다.
홀짝 남은 커피를 마신 송재덕 교수의 웃음이 미묘했다. 박승준 교수와 지동훈 교수의 딴청을 부리는 것 같은 모습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다가왔다.
여느 때처럼 나직한 목소리였다.
“논문들 잘 쓰고 있나?”
“예. 거의 다 썼습니다.”
“학회까지 얼마 안 남았지만 보강해야겠다. 박 교수, 지 교수, 2저자이긴 하지만 내 논문이다 하고 철저하게 검토해서 완벽하게 작성되도록 신경 써야 한다. 알았나?”
“예, 알겠습니다.”
복강경을 이용한 조기 위암과 조기 대장암에 관한 논문이니 당연히 해당 파트 교수들이 머리를 맞댔다. 전임들이 1저자라고 해도 누구 한 명 등한시할 교수가 아니었다.
“김지훈, 니는 혁원이하고 쓰고 있지?”
“예. 저희도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전공의하고 쓴다는 거 잊지 말고 단디 써라.”
사투리까지 나오다니 무슨 일일까?
“김지훈, 신현수, 이경석.”
어쩐 일인지 일일이 이름까지 불렀다.
“이번 학회 발표에 따라 외과 협회 학술 임원으로 선임된다. 이왕이면 너희들 중 한 명이 됐으면 한다.”
“학술 임원이요?”
“이준영 선생님이 근 2년 가까이 맡아서 잘 이끌어 오셨는데,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나? 경쟁해야 할 사람들이 모두 대단하니까 박사 논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신현수가 고개를 내밀었다.
“선생님, 저는 이미 협회 일을 하고 있는데요.”
“행정이 아니라 학술이다. 의사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잊었나? 둘 다 하면 더 좋다.”
상당히 강한 압박이었지만 논문 문제 때문에 회의까지 할 이유는 없었다. 뭔가 또 있을 것이다.
“이게 다가 아니다.”
역시 예상이 맞았다.
“학회 발표에서 확실하게 인정받으면 8월 달에 외과 최초로 시연을 하게 된다. 라파로가 주된 관심이지만 필요하면 다른 수술까지 주제가 될 수 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알겠지?”
수술 시연이라니!
“라파로는 너희들이 주축이니까 조기 위암, 조기 대장암, 비만 수술만이 아니라 간담도도 준비해야 한다. 이준영 선생님과 이미 다 결론 낸 일이니까 다른 말 마라.”
이경석의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 시연을 저희들이 하는 겁니까?”
“그럼 누가 하나?”
외과 의사라면 누구나 욕심을 낼 수밖에 없는 행사이자 기회였다. 이보다 큰 영광은 없었다. 시연을 한 의사는 명성을 업고 탄탄대로를 달릴 것이다.
그런데 전임에게 시연을 맡기다니 교수들의 마음을 헤아리기조차 어려웠다.
당연히 심각할 정도로 큰 부담이었다.
송재덕 교수가 웃으며 부연했다.
“박 교수하고 경석이, 지 교수하고 현수, 이 교수하고 지훈이, 얼마나 환상적이니? 이 과장은 총괄이나 하지. 나도 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재주가 없다. 재주가. 지훈아, 지금이라도 배울까? 가르쳐 줄 거지? 그럴 거지?”
정확한 의미를 파악했다.
모든 교수가 준비해야 할 일이었지만 집도는 전임에게 맡긴다는 말이었다.
번복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학술 임원이 돼서 스승님 일도 도와야 하지만 시연은 차원이 다른 문제야. 선생님들의 기대를 저버릴 수도 없지만, 우리가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 객관적인 평가까지 받을 수 있는 자리다. 놓칠 수 없어.’
욕심을 내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김지훈이 훅! 숨을 내쉬며 말했다.
“결국 학회에서 어떤 발표를 하는지에 달렸다는 말인데, 지금 주제로 가능하겠습니까?”
“3포트 라파로, 암 수술이면 충분하지 않겠나? 물론 전과는 다르다는 마음가짐으로 확실하게 써야 하겠지.”
눈과 귀를 막고 살아도 다른 병원의 수준을 대충 알고 있었다. 충분히 인정받을 수 있겠지만 혼자 발표하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강력한 경쟁자일 사람도 알고 있다.
“혹시 H 병원과 진충기 선생도 물망에 올랐습니까?”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다. 라파로에 한해서 우리 아니면 H 병원 둘 중의 하나가 되지 않겠나? 자존심이 걸린 문제기도 하다.”
자존심이란 말 자체가 거대한 바윗덩어리였다. 개인적인 욕심까지 겹쳐 압박감이 더욱 커졌는데, 난데없이 바위 하나를 더 어깨에 짊어져야 했다.
“반드시 우리 병원이 선정돼야 한다.”
‘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다른 사람도 아닌 스승의 말이었다.
명성이나 명예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더 이상 말이 없었지만 제자들의 앞날이 창창하기를 바라는 마음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돌연 강렬한 투지가 솟구쳤다. 심장이 벌렁거리고 숨결마저 거칠어졌다.
신현수와 이경석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는지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진충기도 한몫했다.
험담의 근원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H 병원에서 시작됐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만일 시연을 뺏기게 된다면 험담과 헛소문이 사실로 변할 수도 있었다.
절대 안 될 일이었다.
‘경석이 형, 현수야, H 병원에 밀리지 말자.’
전임들 모두 목소리를 높였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의외일 정도로 강한 파이팅에 교수들이 흠칫 놀랐다. 지금도 일에 지쳐 헉헉대는 마당인데 더 힘든 일을 맡긴 꼴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래. 하던 대로만 하면 된다. 케이스 수가 굉장히 중요하니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수술에 집중하자. 들리는 말에 진충기가 칼바람을 날린다고 하더라. 너희들도 날려야지? 그치?”
“알아서 잘할 겁니다. 그럼 오늘 환송식도 있는데 일과 빨리 끝내고 저녁에 뵙죠. 손일석, 이따 보자.”
전임들만 남았다. 제각각의 고민으로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던 손일석이 갑자기 크게 웃었다.
“누구 일복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일 덜겠다고 펠로우를 일곱 명이나 뽑아 달라고 했는데, 아직 먼 얘기인 데다 일이 더 생겼잖아. 8월 시연까지 쉴 틈이나 나오겠어? 라파로도 결국 사람 손인데 다른 수술도 등한시할 수 없잖아. 어째 선생님들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것 같다.”
헉! 맞는 말이다.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꼴이다.
이경석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지. 이왕 죽을 거 멋있게 죽자. 다른 병원 선생님들 앞에서 라파로를 한다는 것 자체로 가슴 떨리지 않아?”
“조기 위암 케이스가 더 있어야 하는데.”
손일석이 혀를 내밀었다. 샘이 나는 모양이었다.
“얼씨구! 떡 줄 놈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네. 학회 발표부터 걱정하셔. 누가 보면 이미 결정 난 줄 알겠다.”
전임들의 목이 휙 돌았다.
“당연하지.”
마치 결정이나 난 것처럼 한목소리다.
신현수와 이경석의 눈이 김지훈에게 향해 있었다.
“뭐가 당연해? 어? 설마 그렇게 되나?”
김지훈이 눈만 멀뚱거렸다.
복강경을 이용한 간 절제.
가뜩이나 무시무시한 의미가 담긴 수술인데 이젠 엄청난 효과까지 머금었다.
성공한다면 학술 임원이나 시연 확정은 물론 외과 의사 전체에게 어마어마한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김지훈이 얼굴을 굳혔다.
“우리 해 볼까? H 병원에 시연을 뺏길 수는 없잖아.”
“오케이! 가자. 학술 임원도 우리 중 한 명, 시연은 당연히 우리 병원. 신현수, 오케이?”
이경석이 소리치며 주먹을 내밀었다. 신현수가 힘차게 주먹을 부딪쳤다.
전임 3명이 단 하나의 목적을 위해 달릴 각오를 다졌다. 이미 한마음으로 뭉쳐 있기에 가공할 힘을 낼 것이다.
간 절제 수술을 생각할 때마다 다가온 실패라는 말이 흐릿해졌다.
파이팅!
1차 관문이자 최종 관문인 이준영 교수부터 통과하자!
토요일 저녁, 거한 환송식이 예정됐다.
일주일 후, 손일석이 결혼과 함께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군대로 복귀한다. 그 이후엔 정말 가족이 된다. 친구에서 가족이라니, 이런 인연도 없을 것이다.
3개월을 치열하게 보낸 오만석 역시 자신의 자리인 구미 병원으로 내려간다. 몸만 떨어질 뿐 얼굴 볼 기회는 많을 수밖에 없는데, 아쉬움과 서운함이 교차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함께 부딪치며 밤을 샜기에 쌓인 정이 가볍지 않았다.
서로에게 할 말이 많았고, 다들 마지막 식사 자리에 참석하고자 했다.
세상일 뜻대로 안 된다.
하필이면 다른 사람도 아닌 김지훈이 주말 당직이었다. 대낮부터 오토바이 사고도 모자라 한남대교 교각을 정면으로 들이받는 사고까지 났다.
한가로운 오전을 보낸 응급실이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고통스러운 신음과 통증을 못 이겨 악다구니를 쓰는 환자들로 침대가 부족할 지경이었다.
수술 3개를 연달아 해야 할 상황이 벌어졌다. 당직 전공의는 이미 처치실에 갇힌 지 오래였고, 결국 환송식을 기다리던 오프들마저 가세했다.
모든 수술이 응급이다.
신현수와 이경석까지 가운도 벗지 못하고 수술을 들어갔다.
가장 심각한 환자와 함께 먼저 수술 방으로 올라간 김지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석아, 오만석, 왜 들어와?”
“외상 듀오 아니냐. 빨리 시작하자. 환송식 늦겠다.”
수술이 시작됐다.
일반 외과 모든 구성원이 자신이 맡은 환자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핏물로 흠뻑 젖은 수술 가운, 떡 진 머리, 착 달라붙은 수술복이 그들의 열정과 노력을 웅변했다.
어느새 어둠이 내리고, 시간이 임박해서야 병원을 벗어날 수 있었다.
어쩌면 혈관과 외상에 미친 써전에겐 이것이 바로 진정한 환송식일지도 몰랐다.
손일석과 오만석이 활짝 웃으며 참석한 교수와 후배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이혁민 교수가 전한 미래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지금처럼만 하면 너희들이 원하는 일을 이룰 수 있을 거다. 내 약속하마.”
술기운과 함께 서운함이 진해졌다.
헤어짐이 있기에 만남이 있다.
시끌벅적, 즐거운 자리가 이어졌다.
사이다와 콜라를 놓고 진지한 고민에 잠긴 김지훈이 색다른 웃음을 선사했다. 맥주, 소주를 가리지 않는 놈이 음료수를 가리다니 웃긴 일이다.
당직 때문에 강제 금주하길 잘했다.
토요일 밤, 병원과 집을 오가면서도 상대적으로 개운한 몸과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역시 의사의 든든한 체력은 국력, 아니 수술력이다.
일요일 아침, 습관적으로 눈을 떴다.
이부자리 돌돌 마는 나른한 재미를 즐기다 말고 논문과 혈관종 문제를 떠올렸다. 슬슬 가슴이 벌렁거리더니 긴장이 다가왔다.
‘이럴 때가 아니지.’
벌떡 일어나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아직 9시도 되지 않았다.
설마 아침부터 응급실에 환자가?
전화를 받은 김지훈이 갑자기 차렷 자세를 했다.
“아버님! 웬일이십니까?”
(병원이다. 경아하고 빨리 나와.)
이건 또 무슨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