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나무를 흔드는 바람 Ⅲ (2)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다는 의미였다.
“각자 갈 길을 가면 되는 거 아닌가? 들리는 말마다 신경 쓰고 살 수는 없잖아? 협회 일이나 행정적인 문제는 이 과장이 맡아 줘. 그런 일에 난 소질이 없어서.”
“선생님도 참 한결같습니다. 학술 이사 맡으신 지 이 년이 다 되어 가는데, 곁눈질 정도는 하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항상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언제나 제자리를 맴도는 말이었다.
이혁민 교수가 나직한 한숨을 내뱉었다.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아직도 세상 돌아가는 꼴을 모르시는 건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시는 건지 모르겠네.’
화제를 바꾸는 것이 마음 편한 일이었다.
“다양한 환자를 확보할 수 있는 병원은 두 곳뿐인데, 시연을 우리 병원에서 할 수 있을까요? H 병원을 만만하게 보시면 안 됩니다.”
“최선을 다해야지. 최 교수 말마따나 제자들에게 달린 일이야. 잘해 줬으면 좋겠네. 이번 학회 의미가 상당히 커. 이 과장 어깨가 무겁겠어.”
이준영 교수도 욕심을 내고 있었다.
평소 어떤 사람인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이혁민 교수에게도 의외라 할 수 있었다. 제자들의 장래가 달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에게 국한된 일이었다면 묵묵히 앞만 보고 달려갈 사람이었다.
“김지훈, 신현수, 이경석도 다르지 않을 겁니다.”
“무슨 소리야?”
해석하기 나름이다.
이혁민 교수가 웃기만 했다.
그 시간, 최인호 교수가 학회 사람들을 만났다.
학술 임원 선발과 시연까지 3개월 가까이 남았지만 기간은 무의미했다. 진충기가 학술 임원이 되고, 시연 병원으로 결정되기 위해서는 빠른 물밑 작업이 필요했다.
‘이준영 교수와 이혁민 교수가 선수를 치기 전에 단단하게 다져 놓는 것이 좋겠지.’
이준영 교수와 최인호 교수.
김지훈과 진충기.
탄탄한 입지를 쌓은 두 병원.
호각지세다.
모든 면에서 비슷한 수준이라면 최종 결정은 인맥에 의해 결정 날 가능성이 높았다.
종종 친분 자체가 강한 힘이 되기에 술 한 잔, 밥 한 번 더 대접하면 그만큼 유리할 것이다.
같은 돈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면 적절한 시점 또한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바로 지금이다.
최인호 교수가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약소한 자리지만 오늘은 제가 대접하겠습니다.”
“어이구! 매번 이러시면 우리가 부담스럽습니다.”
“협회 일을 하느라 힘드실 텐데 식사라도 대접해야죠. 말 나온 김에 진 교수 얼굴도 한번 보시죠.”
핵심 고리가 될 진충기가 참석해 친분을 쌓는다면 더 유리해진다. 전화를 받고 허겁지겁 달려온 진충기가 공손히 술을 따랐다.
“진 교수, 최인호 선생님 말 들으니까 준비 많이 했다며? 우리도 기대가 커.”
“열심히 하겠습니다.”
한 잔 두 잔 술이 들어가자 할 말, 안 할 말이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김지훈이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자신 있어?”
진충기가 목소리를 낮췄다.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사실 불안합니다. 김지훈 선생이 워낙 뛰어나지 않습니까? 선생님들께서 많이 도와주십시오.”
“겸손하긴. 학회 발표가 말해 주지 않겠어?”
“당연한 일입니다. 솔직히 이런 말씀 드리기 그렇지만, 어려운 수술을 몇 개나 했는지보다 혼자 힘으로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위에서 도와주면 그건 자기 수술이 아니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잘 판단해 주십시오. 사실 이런 말씀 드릴 처지가 아니긴 합니다. 최인호 선생님께서도 소중한 조언과 도움을 아끼지 않으시고, 부족한 제게 많은 부분을 맡기시거든요. 제자라는 사실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취기가 진해졌다.
항간에 떠도는 김지훈에 관한 소문이 오르내렸다. 특히 조기 대장암 등을 비롯해 새로운 시도를 혼자 할 수 있었는지가 주된 관심사였다.
“그럴 리가 있을까요?”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아닌 굴뚝에 연기 날 리도 없고요.”
진충기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김지훈 선생과 몇 번 접촉이 있었는데, 그럴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소문이 사실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눈빛만큼 말이 묘했다.
“진충기 선생도 최 교수님 닮았네. 라이벌이 될지도 모르는데 편을 들면 어떡해? 하하! 농담이야. 겸손해서 나쁠 일 하나도 없지.”
술기운이 오른 최인호 교수 눈가에 만족스러운 주름이 잡혔다. 진실 여부를 떠나 말이 나왔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득이었다.
‘가끔 소문이 사람을 잡아먹을 때도 있지. 김지훈, 난 아직도 문을 활짝 열고 있어. 진충기와 더불어 내 밑에서 제대로 일만 해 주면 네 인생 꽃피는 거야.’
아무리 탐나고 공을 들였어도 품 안에 있고, 말 잘 들어야만 제 새끼인 사람이 있다.
반면 흠잡을 데 없는 새끼가 어미도 모르게 비난받을 수 있는 짓을 하기도 한다.
서로가 알고도 모른 척, 모르면서도 아는 척.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이 그럴지도 모른다.
***
토요일 오전.
오늘도 뜨거운 주말 집담회를 마쳤다.
진료와 수술은 없지만 할 일이 많이 남은 날이었다. 노곤한 몸을 재빨리 추스르고, 그동안 동기들과 상의했던 문제부터 꺼내야 할 때였다.
제자를 바라보는 스승의 눈이라면 자책하고도 남을 교수들이었다. 단체 행동도 불사하겠다고 했지만 말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처음 말을 꺼내야 하는 사람이 총대를 메야 하는 꼴이었다. 은연중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사전에 상의한 박승준 교수와 지동훈 교수도 애매모호한 표정이었다.
역시 가장 먼저 말한 놈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이 슬그머니 입을 열려는 순간 이혁민 교수가 멍석을 깔았다.
“할 말이 있으니까 회의실에서 보자.”
이미 말이 샜나?
전임들 모두 고개를 저었다.
이혁민 교수의 표정을 미루어 볼 때 상당히 중요한 일로 짐작됐다. 어찌 됐든 좋은 기회였고, 갑갑한 문제를 꺼내야 하는 상황상 적절한 윤활유가 필요했다.
인원에 맞춰 커피 타 들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달콤하고 고소한 향기에 동네 아저씨 웃음이 터졌다. 이준영 교수는 물끄러미 커피 잔만 바라보았다.
“커피 타 왔구나. 커피. 이게 얼마 만이니? 자주 좀 먹자. 자주. 지훈아, 교수야, 혹시 귀찮은 거 아니지? 커피 탄다고 기분 나쁜 거 아니지? 그치?”
웬만한 일로 말투가 변하는 송재덕 교수가 아니었다. 슬쩍 교수들 표정을 살폈지만 별다른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일단 큰일은 없어 보여 안심이었다.
“요새 많이 힘들지. 사람이 없어 힘들다. 힘들어. 그래도 환자 살리는 일이 우리 본분이고, 너희들도 실력을 더 쌓으려면 이 일 저 일 다 해 봐야 하는데 어쩌겠니. 좋은 날이 올 거야. 좋은 날이.”
박승준 교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여러 경험을 쌓아야 나중에 더 큰일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그래. 우리 박 교수 말이 딱 맞네. 딱 맞아. 지훈아, 현수야, 경석아, 박 교수하고 지 교수도 바쁜 와중에 분과 학회 일까지 열심히 하는 거 알지? 젊다고 고생을 사서 할 필요는 없지만 무작정 피하진 말자. 너희들 힘든 거 잘 안다. 암! 잘 알고말고.”
“그래도 인원 문제는 바짝 신경 써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도 맞다. 맞아.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어떻게. 지 교수, 좋은 방법 있니? 지훈아, 교수야, 넌 어때?”
뭔가 분위기가 유리해지는 것 같았다.
기회가 왔을 때 꽉 잡아야 한다.
김지훈이 스윽 의자를 당기자 신현수와 이경석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얼떨결에 참석한 손일석은 계속 좋은 기회라는 눈짓을 해 댔다.
‘알았어, 인마. 보채지 마.’
“안 그래도 선생님들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최근에 중환이 많은 탓도 있지만 후배들이나 저희나 일이 폭주하는 상태입니다. 솔직히 많이 힘듭니다.”
전임들이 눈에 띄게 동조하는 기색을 보였다.
교수들 모두 살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얼굴에 힘들어 죽겠다고 쓰여 있어도 말로 표현한 전임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안쓰러웠고, 당장 해결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더욱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혁민 교수가 헛기침을 했다.
“아이고! 정말 힘든 모양이구나. 과장 자리 차고앉아서 그런 문제 하나 해결해 주지 못한 내가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자 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교수들도 가혹한 시절을 거쳤다. 지금보다 인원이 훨씬 적었기 때문에 도리어 고생이 더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세월은 많은 부분을 변하게 한다. 의사 개개인의 인식부터 광범위하면서도 보다 전문적으로 변한 진료 환경까지, 예전의 방식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명확한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단지 힘들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만석의 말과 이동현 환자의 예를 들어 가며 전임들의 의견을 전했다.
펠로우 인원을 7명 이상 확충하자는 말에 다소 놀라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의외의 반응이었다. 동요하는 기색조차 별달리 보이지 않았다.
김지훈의 눈 골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반응이 격한 것보다 도리어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반드시 관철시켜야 하는 일이기에 과격하다고 생각될 말까지 꺼낼 각오를 했다.
괜한 일이었는지도 몰랐다.
박승준 교수와 지동훈 교수가 씨익 웃었다.
‘김지훈 선생, 편하게 얘기해도 돼.’
여유로운 모습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무슨 말을 할지 안다는 듯 이혁민 교수가 스윽 가로막았다.
이젠 김지훈도 언제 나서야 하는지, 어느 때 물러나야 하는지 정도는 안다.
슬그머니 물러나 귀부터 기울였다.
“잘 들었다. 그런데 이게 과장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건의는 해 보겠지만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좋은 의견이지만 원장 힘으로도 힘든 일이다. 힘든 일. 전임아, 교수야, 한술 밥에 배부를 수 없는 일인데 펠로우 일곱 명은 무리다. 무리야.”
교수들과 상의하는 이유는 확실한 동의였지, 행동으로 보여 달라는 말이 아니었다. 최종 담판은 결국 신동철 이사장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날 것이다.
“선생님들께서 동의하시면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이사장님께 직접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현실적 어려움을 직접적으로 겪어야 하는 후배들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저희도 마찬가지고요.”
의중을 전하자 교수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이준영 교수마저 눈가를 좁혔다.
“우리가 나서서 안 되면 이사장님과 면담을 주선해 달라고? 무슨 말을 할 건데?”
차마 옷 벗을 각오까지 했다는 말을 교수들 앞에서 꺼낼 수 없었다. 어차피 최종 결정은 병원 몫이고, 자신들에게 한껏 기대를 걸고 있는 스승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지금은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이지만 가슴속 단단히 새겨야 할 일이었다. 말만 앞세우는 우를 절대 범하지 말아야 했다. 중도에 물러날 생각이라면 아예 말을 꺼내지 않는 편이 나을 것이다.
“현 상황을 솔직히 말씀드릴 생각입니다. 우리 과를 비롯해 몇몇 과의 지원자가 급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이사장님도 잘 아실 겁니다. 후배들 눈에는 중노동이나 다를 바 없고, 감수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바이탈을 다루는 과, 모든 치료가 환자의 생명과 직결된다는 자부심 하나로 버티는 의사가 바로 일반외과 의사다.
뼈아픈 말이었다.
“이 상태로 가면 사고가 날 수밖에 없고, 결국 개인은 물론 병원 입장에서도 큰 피해를 입지 않겠습니까? 당장 들어가는 돈에 연연하면 일반외과라는 과 자체가 유명무실해질 수도 있습니다.”
통렬한 지적이었다.
사실 전임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의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던 교수들이었다. 십분 동감할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무거운 공기가 흐른다고 여기는 순간 송재덕 교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허허허! 이 과장, 우리가 선수를 뺏겼다. 허구한 날 교수라고 부르면서 아직도 전공의로 봤던 모양이야. 많이 컸다. 많이 컸어. 그래. 환자도 중요하고, 우리 자신도 중요하지. 심신이 편해야 환자도 잘 보는 법이다. 너희들 말이 맞다. 맞아.”
“그래도 한 해에 일곱 명은 좀 과한데요.”
전임들과 가장 가깝고, 침을 튀어 가며 펠로우 확충의 당위성을 주장했던 지동훈 교수마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과장님께서 애초에 말씀하신 대로 매년 펠로우를 한두 명씩 선발하는 일도 쉽지 않을 텐데 가능하겠습니까? 병원 측도 난감해할 겁니다. 아예 판이 깨질 수도 있고요.”
“박 교수, 어떻게 생각해?”
“저도 지 교수 말에 동감합니다.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해야 실현 가능성이 높아질 것 같습니다.”
진지한 대화가 오고 갔다.
전임들은 눈만 껌벅거려야 했다.
간 절제와 더불어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고민했던 문제인데, 이미 말이 나왔다는 사실에 허탈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입가에 미소를 머금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선생님들은 달라.’
‘에휴! 지훈이 저 자식이 말 꺼냈을 때 바로 말씀드렸어도 됐잖아? 괜히 골머리만 썩었네.’
교수들의 의견이 이어졌다.
펠로우 선발 기한인 2년 단위로 봐도 서너 명과 일곱 명의 차이는 단순히 숫자가 아니었다. 동반되는 문제가 많기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할 일이었다.
분위기상 의견을 개진하기 어려웠지만 기분 좋은 진지함이자 무거움이었다. 비슷한 듯, 다른 듯 쉽게 의견이 통일되지 않았다.
강력한 한 방이 필요했다.
무뚝뚝함의 대명사 이준영 교수가 나섰다.
“이 과장, 일곱 명으로 요구하는 것이 좋겠어. 서로 양보하면 서너 명 정도 될 테고, 지속적으로 늘려 갈 수 있는 명분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 전임들이 우리보다 낫다.”
놀랄 정도로 긴말에 때 아닌 칭찬까지.
확실히 위력적이었다.
무게 추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역시 스승님이시다.’
점점 우호적이다 못해 십분 수용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혀 나갔다.
김지훈이 신현수, 이경석과 눈빛을 교환했다. 일반외과 전체를 위한 비전과 건의만 필요한 때가 아니었다.
현재는 곧 과거가 된다. 이때를 놓치면 다시 기회를 잡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