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나무를 흔드는 바람 Ⅲ (1)
이혁원에게만 관심 주면 나중에 혼난다. 가족이라고 지나치지 말고 더 존중해야 한다.
“고 간호사, 이혁원 선생이 수술을 너무 오래 했죠? 죄송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죄송하다고 하면서 입은 쫙 찢어져 있었다.
‘지훈 씨 얼굴이 너무 좋네. 이혁원 선생님이 수술 잘하신 게 저렇게 좋을까? 오늘 또 잠도 안 자고 후배들 수술 얘기로 밤새는 거 아냐? 이런 사람이 어디 있다고 헛소리에 인신공격까지 해? 누군지 걸리기만 해 봐.’
눈가에 힘을 주던 고경아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수술 팀의 배려로 중간중간 앉아서 쉴 수 있었다. 김지훈이 유독 아끼는 후배의 첫 수술이기에 힘든지도 몰랐다.
괜찮다고 말하려는 순간 찌릿한 눈초리가 사방에서 빗발쳤다.
“어머? 준비실까지 와서 수고했다는 말을 하는 선생님은 김지훈 선생님이 처음이지? 고 선생은 좋겠다. 김지훈 선생님, 그러는 거 아니에요.”
직장이기에 남편이 아내 챙기는 모습이 좋게 보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김지훈이 재빨리 윙크를 날리고는 휘리릭 사라졌다.
구내식당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녹색 수술복 위로 소복하게 올라온 고경아의 배가 아른거렸다. 부드럽고 말끔했던 아랫배 여기저기가 마치 억지로 당긴 것처럼, 마치 물결처럼 삐뚤빼뚤 갈라졌다.
Abdominal Striae(임신선)이다.
무럭무럭 자라는 아이가 엄마 피부를 급격하게 늘린 탓이다. 곧 한 아이의 엄마가 된다는 표시기에 미안하고, 안쓰럽고, 고마웠다.
‘조금이라도 편하게 일했으면.’
잠시 후, 수술 방 간호사 앞으로 간식거리가 한 무더기 배달됐다. 수간호사가 음료수 하나를 집으며 고경아에게 호의적인 미소를 보냈다.
“고 선생, 점점 몸이 무거워질 텐데 힘들면 말해. 꼭 이것 때문에 하는 말은 아니야.”
누군가가 지갑을 탈탈 턴 덕이었다.
용돈을 인상하라! 인상하라!
다음 수술을 앞두고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3살 어린아이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는데, 이혁원은 4년 차 치프다. 복강경 수술 하는 모습을 보며 새로운 면을 많이 느꼈다.
‘후배가 아니라 날 위해서라도 수술 많이 줘야겠다. 곧 종진이가 우리 파트로 오지? 너도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죽여 주마.’
함께해야 더 크게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다가왔다. 자신이 달리는 것 이상으로 후배는 더 열심히 달릴 것이다. 모든 면에서 동등한 써전으로 존중하고, 마주해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가대를 한 몸에 받은 이혁원이 차상수와 마주했다. 열띤 목소리와 차분한 목소리가 묘하게 어울렸다.
“상수야, 네가 보기에 어땠어?”
“전 라파로를 아직 잘 모릅니다.”
조용조용하다.
“그런가? 그럼 다음 주까지 시간 되는 대로 라파로 다 들어와. 집도하진 못해도 안목은 길러야지.”
“알겠습니다. 혹시 일이 많으면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무리한 말일 수 있는데도 침착하기만 했다.
이혁원이 입맛을 다셨다.
“너도 참 한결같다.”
“그게 좋은 거 아닌가요?”
하긴 일 년 반이 넘도록 얼굴 벌게지는 모습 한번 보지 못했다. 수술실에서 긴장도 안 했는지 지금도 머리가 뽀송뽀송했다.
모든 수술이 끝난 후, 간 절제를 복강경으로 시도한다는 말에 전공의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지만 한 놈은 표정조차 변하지 않았다.
옆에 벼락이 내리꽂혀도 태연하게 잠을 잘 것 같았다. 얼굴색만 다를 뿐, 침착한 면은 송진우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극과 극인 성격일지 몰랐다.
논의 첫날부터 난관에 부딪쳤다. 논문과 케이스 보고는 경험이라도 있다지만 복강경을 이용한 간 절제는 머리까지 지끈거리게 했다.
‘문제없이 절제하는 게 가능할까?’
왜 이렇게 할 일이 많고, 챙겨야 할 사람은 또 왜 그렇게 많은지 집중과 선택을 해도 정신없었다. 일과 시간을 아무리 쪼개고 아껴도 시간이 부족했다.
매일매일 바짝 엎드린 덕인지 고경아가 한 시간 정도 여유를 허락해 그나마 다행이었다.
“혁원아, 케이스 보고는 이 정도면 됐고, 논문도 마무리 들어가자. 수술 준비 잘하고 있겠지?”
“일석아, 만석아, 이번 주말에 다 같이 식사하기로 했으니까 시간 비워 둬. 온 지 얼마 된 것 같지도 않는데 벌써 송별회네. 또 볼 텐데 괜히 섭섭하다.”
“현수야, 오늘은 간 절제 상의한 후에 펠로우 문제까지 어느 정도 해결하자. 경석이 형, 오늘은 꼭 시간 내야 됩니다. 설마 아직도 애가 아픈 건 아니죠?”
“강병옥, 넌 또 신현수 선생 수술 들어가? 진우야, 아예 네가 혈관 파트까지 맡자. 하석이 신경 좀 써. 종진아, 넌 왜 이렇게 얼굴 보기 힘들어? 너도 준비할 겸 상수에게 라파로 가르쳐.”
스승과 커피 한잔하며 여유롭게 대화를 나눈 날이 언제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반드시 상의해야 할 간 혈관종 문제는 꺼내지도 못했다. 미진한 탓도 있지만 시간 부족이 결정적이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선생님, 39세 남자 환자입니다. 낙상으로 내원했습니다. 3미터 정도 높이랍니다. 현재 바이탈…….)
“알았어. 바로 나갈게.”
당직 날은 밤낮으로 눈코 뜰 새조차 없었다.
오늘도 퇴근하자마자 불려 나갔다. 입에서 단내가 풀풀 풍길 지경이었다.
그 시간, 이준영 교수와 이혁민 교수가 외과 의사 협회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중요한 안건 두 가지가 상정돼 절대 빠질 수 없는 자리였다.
“그동안 많은 공헌을 하셨던 정 교수님께서 개인 사정으로 어쩔 수 없이 학술 파트 임원직을 고사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분을 모셔야 하는데 이왕이면 젊은 사람이 좋겠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이준영 교수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학술 파트를 책임지는 이사는 다름 아닌 이준영 교수였다. 행정이나 이권과는 거리가 먼 성격인 데다 간담도에서 상당한 권위를 인정받고 있기에 딱 알맞은 자리라 할 수 있었다. 물론 학술 이사라고 해서 견제를 피할 수는 없었다.
“동의합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괜찮은 생각이긴 한데 사람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H 병원 최인호 교수가 입을 여는 순간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이준영 교수와 쌍벽을 이루는 간담도 부분의 권위자였다.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이준영 교수를 상당히 견제한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추천하는 사람이라도 있으십니까?”
“젊고 유능한 의사는 많습니다만, 아무래도 학술 파트인 만큼 의사 본연의 능력이 뛰어나야겠지요. 그런 면에서 제 품에 있긴 합니다만 진 교수가 어떨까 합니다.”
“진충기 교수 말씀이시군요. 자격이야 충분할 겁니다. 이준영 교수님도 추천할 사람이 있을 것 같은데요.”
최인호 교수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평소처럼 갑시다. 김지훈이 학회에 얼굴을 보이긴 했지만 유학을 다녀온 것도 아니고, 이젠 새롭게 대두된 수술 역시 우리가 더 많이 할 겁니다. 섣부르게 추천했다 서로 얼굴 붉히지 말고 진충기로 합의 봅시다.’
워낙 말이 적은 사람이다. 평소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자신이나 병원에 큰 이득이 되는 일조차 양보를 아끼지 않았다. 제자와 관련된 문제라면 말이 안 나오도록 더더욱 조심할 것이다.
그런데 이혁민 교수와 눈을 마주친 이준영 교수가 평소와 똑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병원 안에서 안주할 때가 지났어. 기회가 닿는다면 많이 보고 배우길 바란다.’
“저는 김지훈을 추천합니다.”
자신의 제자를 직접 추천하는 모습에 다들 깜짝 놀랐다. 과묵과 말을 못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일이다. 필요하다면 할 말은 반드시 하는 사람이란 걸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김지훈은 외형적 잣대가 되는 경력이 부족할 뿐 진충기 이상의 재원이었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자 최인호 교수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잠시 어색한 시간이 지났다.
“김지훈 선생이요? 학회 발표 때 워낙 깊은 인상을 줘서 진 교수 못지않은 인재라는 생각은 했습니다. 다른 선생을 추천하실 분은 안 계십니까?”
간담도, 혹은 복강경 부분에 한한다면 눈에 딱 뜨이는 의사는 단둘뿐이었다.
다른 파트 역시 쟁쟁할 정도로 젊고 유능한 의사들이 많았다.
여럿 거론되며 점점 후보가 늘어났다.
무리한 추천은 서로의 체면을 고려해 과하지 않은 말로 적절하게 걸러졌다.
이준영 교수와 이혁민 교수의 조용한 지원과 추천 아래 신현수와 이경석까지 후보군에 이름을 올렸다.
역시 이의가 없었다.
9명에서 추천이 멈췄다.
모든 시선이 두 명의 교수에게 집중됐다.
한 병원에서 무려 3명이나 물망에 올랐다. 자격 미달이라면 무시라도 할 수 있겠지만, 그간 발표한 논문만으로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욕심이 과하다는 듯하면서도, 한편으로 부럽다는 눈빛이었다.
“세 명이나 후보에 이름을 올리다니, 이혁민 선생님은 좋으시겠습니다.”
“다들 열심히 하는 걸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후보가 적어도 문제지만 많아도 탈이다.
각 병원 일반 외과를 맡고 있는 과장, 혹은 원로 교수들에겐 자존심과 명예가 걸린 일이기도 했다. 자신의 권위와 제자의 위상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수긍할 결정이 아니면 잡음이 터지고도 남았다. 중구난방 토론을 벌이는 것은 소모전이 될 수밖에 없었다.
투표가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후보가 너무 많았다. 인원을 압축시킬 필요가 있었다.
‘가장 큰 경쟁자는 김지훈이나 신현수가 되겠군. 스카우트에 응했으면 이런 고민도 할 필요가 없었잖아. 진충기에게 가장 유리한 기회가 뭘까?’
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최인호 교수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급한 일은 아니니까 이번 학회 발표를 보고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전번 학회에서 발표한 사람도 있겠지만, 학술 파트 임원인 만큼 아주 왕성하고 열정적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학회에서 논문 발표가 없다면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김지훈 선생이나 신현수 선생도 발표는 하겠죠? 아! 케이스 리포트는 제외합시다.”
논문 작성은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서두르다 부실해지면 도리어 손가락질을 받기 십상이었다.
김지훈이나 진충기나 지난번 학회에서 발표했기에 논문이 또 나올 시점이 아니었다.
믿는 구석이 있었다.
진충기는 전폭적인 지원하에 다들 놀랄 만한 성과를 이뤘고, 이미 논문까지 작성했다. 설령 김지훈과 신현수가 논문을 쓰고 있다고 해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경험 학문인 의학은 압도적인 수술 수에서 도출된 결론을 가장 중시한다.
머릿속 이론으로는 경험을 이기지 못한다. 확실하게 누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김지훈이 수술을 많이 한다고 하지만, 이제 전임에 신현수와 이경석까지 있어서 제한을 받았겠지. 평소 말이 없다고 해도 자기 입으로 추천했는데 표정 정도는 변하겠군.’
이준영 교수와 이혁민 교수의 얼굴을 보던 최인호 교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사람은 여전히 과묵했고, 한 사람은 여느 때처럼 웃고 있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의외로 순순히 동의하는 모습에 도리어 불안감을 느낀 최인호 교수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준영 교수와 함께 간담도 대가라는 소리를 듣고 있지만 최고 실력자로 인정받는 사람은 둘이 될 수 없었다.
‘더 이상 허경발 선생님의 후광은 없어. 이젠 우리가 외과를 주도할 때다.’
한 번 밀리면 계속 밀린다.
학술 파트 임원 선발은 본격적인 경쟁의 시작이자 연장선이었다. 진충기가 이제 전임이 된 김지훈에게 밀리면 자신도 밀리는 것이라 여겼다. 훗날 의사 협회 회장 선출에도 지대한 영향을 받을 수 있었다.
‘진충기, 넌 내 뒤를 이을 인재야. 열심히 하자. 이만큼 밀어줬는데 학술 파트 임원조차 되지 못하면 그만한 창피가 없어.’
“모두 동의하시는 것 같군요. 그럼 학회 이후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중요한 안건이 하나 더 남았다.
바로 8월 말에 예정된 공식 수술 시연이었다.
학술 임원을 뽑는 것과는 비교조차 하기 힘든 사안이었다. 특히 대세로 자리하고 있는 복강경 수술이 주제이기에 결코 물러설 수 없었다. 진충기에게 큰 기대를 걸고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이유이기도 했다.
담낭 절제술, 탈장 복원술, 아뻬부터 조기 대장암 및 조기 위암까지 환자 확보가 가능한 모든 수술을 시연한다. 각 병원의 내로라하는 의사들이 모두 참관하기에 의미가 남다른 행사였다.
3일에 걸친 행사라지만 수술할 환자가 없다면 도리어 망신살이 뻗칠 것이다. 웬만한 병원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시연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주관 병원과 의사의 능력을 판단하는 시금석이었다.
대단한 명예다.
수많은 의사들 앞에서 집도하게 되는 의사 개개인에게는 대단한 영예였고, 총괄하는 의사에게는 막강한 영향력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덩달아 인맥을 구축하기에도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최인호 교수의 눈이 야심으로 반짝였다.
절대 나쁘게 볼 일이 아니었다. 정당한 방법과 수단으로 목적을 이룬다면 하등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의료계의 발전을 이끌 야심이기 때문이었다.
“이번 건 역시 학회와 분리해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발표 내용과 능력을 보고 심사숙고해서 해당 병원을 선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학술 임원 선발도 자연스럽게 해결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동의합니다.”
이준영 교수가 동의하는 이상 이의가 있을 수 없었다. 복강경의 양대 산맥은 이준영 교수와 최인호 교수가 이끄는 수술 팀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둘 중의 한 병원이 선정될 것이기에 도리어 더 큰 자존심이 걸린 일이었다.
토론 내용을 정리하는 것으로 회의가 끝났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이준영 교수와 단둘이 마주 앉은 이혁민 교수가 담담하게 물었다.
“요새 부쩍 우리 병원과 H 병원에 대한 말이 많이 들리는데, 혹시 들으셨습니까?”
“무슨 말?”
“최인호 교수님이 진충기 선생과 함께 라파로에서 굉장한 진전을 이뤘다는 말이 무성합니다. 협회 내에서도 발언권이 점점 강해지는데 좋은 방향으로 갔으면 합니다. 우리 병원에 대한 말도…….”
이혁민 교수가 말꼬리를 흐리자 이준영 교수가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