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838화 (838/1,329)

6화. 나무를 흔드는 바람 Ⅱ (1)

알아야 할 일은 알아야 한다. 더구나 당사자 중 한 명이다.

“지훈아, 나도 최근에 들은 말인데 이상한 소리가 들려. 네가 명성과 명예 때문에 무리한 수술도 마다하지 않고, 교수님들에게 맡겨야 안전할 수술까지 욕심낸다고 말이야. 강 사장님 귀에까지 들어간 걸 보니까 간단히 넘어갈 문제가 아닌 것 같다. 혹시 계약 전 만난 의사들 중에 틀어진 사람은 없었어?”

이건 또 무슨 소릴까?

“그러니까 내가 실력도 없으면서 욕심만 낸다는 말이 돈다는 거야?”

“정리하면 그런 말이 될 수도 있겠지.”

한마디로 어이가 없었다.

단 한 번도 명성이나 명예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100퍼센트 거짓말이다. 다만 의사로서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욕심이었고, 그 연장선에 최고의 써전이 있었다.

어쨌든 진실 여부를 떠나 말이 나왔다. 한 번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마련이다. 특히 거짓에 가까운 소문일수록 더욱 부풀려진다.

“그것뿐이야?”

신현수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새로운 시도라는 게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쉬운 일이 아니잖아. 펠로우나 전임이 혼자 했다고 하면 의심부터 할 거야. 더구나 라파로잖아.”

“의심하디니, 그게 무슨 소리야? 다른 사람이 한 수술을 내가 한 것처럼 발표했다는 거야? 뭐야?”

“그렇게 믿고 싶은 모양이다.”

손일석의 눈이 쭉 찢어졌다.

“이것 봐라? 아주 무에서 유를 창조하네. 우리 중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고 교수님들도 마찬가지인데, 이게 말로만 듣던 음해라는 건가? 누가 마이 베스트 프렌드인 김지훈을 까고 다니는 거지? 흐음! 역시 실력 있는 의사는 어디가 달라도 달라. 벌써 견제가 들어온단 말이네.”

“나 전임이야. 누가 견제를 하겠어?”

김지훈의 목소리가 상당히 신경질적이었다.

“네가 여기저기 알려진 교수가 아니라 이제 전임이라서 더 샘이 날지도 모르지. 이제 막 피는 싹을 밟아야 깔끔하게 죽지, 다 큰 나무 밟는다고 죽냐? 현수야, 출처가 어디야? 물론 의사들에게 들었겠지만 범위를 압축시키면 누구 주둥아리인지 답이 나올 거야.”

신현수가 곤란한 듯 입술을 모았다.

김지훈은 의자에 몸을 기댄 채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실력을 떠나 어느 장소에서도 결코 나댄 적이 없는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경석이 눈가를 좁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원지는 볼 것도 없이 학회네. 가뜩이나 일에 파묻혀 사는 지훈이가 어디 가서 자랑할 리는 없고, 외부에서 실력을 정확하게 알 방법도 없잖아?”

“맞아요. 방송을 자주 탄 것이 눈에 거슬릴 수 있지만, 일회성이니까 결국 학회 발표나 학회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쪽에서 씹는다는 말이네. 간담도와 라파로 분야의 라이벌일까? 아니면 실력도 없으면서 단순히 씹는 맛에 산다? 경석이 형, 어느 쪽일 것 같아요?”

“헛소문이 강 사장님 귀에까지 들릴 정도면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겠지. 간담도나 라파로에서 말발이 서는 의사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누굴까?”

“강 사장님이 그런 말을 들을 정도라면 자주 접촉하는 의사겠죠? 이런 소문을 흘려서 득이 될 사람이라!”

대화가 진행될수록 김지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불현듯 선배였지만 동료라 할 수 없었던 사람들까지 떠올랐다.

또다시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기분이 좋지 않았다.

건전한 경쟁을 넘어선 시샘, 견제, 질시는 결국 자신과 상대 모두를 다치게 할 뿐이었다. 애정을 갖고 태우는 것과 인간적인 문제로 태우는 것이 별 나라만큼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내듯 말이다.

잘못 들었기를 바랐다.

“현수야, 확실하게 들은 거야?”

“대놓고 하는 말은 아니었지만 전체적으로 그런 분위기였어. 특별히 감정 쌓인 사람이 없다면 너무 신경 쓰지 마. 일석이 말대로 누군가 샘을 내나 보지.”

“안 봐도 비디오다. 현수야, 지훈이만은 아닌 것 같은데 혹시 너하고 경석이 형은 입에 오르내리지 않았어? 둘 다 라파로로 별거 다 하잖아. 신현수의 예리한 감각이면 이름이 안 나왔어도 감은 잡을 것 같은데, 어때?”

신현수가 입맛을 다셨다.

의사 사회 역시 여느 사회처럼 서로를 견제하고, 때에 따라서는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동안 겪었던 의사만이 아니라 의사 협회, 병원 협회처럼 여러 병원 의사들이 모이는 자리도 다를 바가 없었다.

특히 예상하지 못했던 의사, 젊은 나이에 치고 올라오는 의사, 자신들은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을 해낸 의사들이 표적이 되기 십상이었다.

김지훈, 신현수, 이경석.

모두 표적이 될 만했다.

당연히 가장 큰 문제는 누군가를 까닭 없이 헐뜯는 사람이다. 만일 결코 뒤처지지도 않았고, 자신의 분야에서 실력을 인정받는데도 앞선 사람을 끌어내리지 못해 안달이 났다면 그것이야말로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도 곱게만 보는 것 같진 않아.”

“소갈딱지하고는. 우리처럼 어느 놈이 앞서면 죽어라고 노력해서 따라잡을 생각을 해야지. 깎아내려서 비슷해질 생각을 어떻게 할 수 있어? 좀생이들 참 많네. 문도들 풀어서 작업 들어갈까?”

“넌 이 와중에도 농담이 나와?”

“못할 거 뭐 있어요? 에휴! 아직 제대도 못했는데 견제까지 받는 놈들을 어떻게 따라잡지?”

이경석이 눈을 부라렸다.

“놈들? 이제 친구 먹자 이거지? 내가 딱 기억해 둔다. 그건 그렇고, 현수 너는 그런 소리를 정확히 어떤 자리에서 들은 거야? 누구야?”

“의사 협회나 병원 협회 회의 있을 때 소속 의사들하고 가끔 만나요. 시야가 넓어져야 한다고 이사장님께서 반드시 참석하라는데, 얻는 것도 많지만 속을 끓이는 일도 꽤 많은 것 같아요. 좋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오! 협회. 마이 프렌드 신현수가 협회 일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 회의 참석까지 하다니 너도 보통 체력이 아니구나.”

“오프는 괜히 있어?”

삼천포로 빠졌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간담도와 라파로에 관해서는 의사들조차 병원 두 곳을 손에 꼽는다. 잘나가고 있는 병원보다 따라잡아야 하는 후발 주자의 입에서 험담이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누구라는 거야? H 병원은 확고한 위치에 올라섰으니까 다른 병원일 것 같은데 맞아?”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던 신현수가 얼굴만 찌푸렸다. 다시 한 번 물었지만 반응은 똑같았다. 추측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문득 뭔가 감이 왔다.

사람은 겉만 보고 알 수 없다.

최고의 써전은 단 한 명이라는 말을 한 의사.

비슷한 연배에서는 복강경 경험이 가장 많은 의사.

자신만만했던 의사.

가장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라면 깨끗이 잊어야 하지만, 맞는다면 반드시 기억에 담아 두어야 할 인물이었다. 사람으로 인한 폐해를 누구보다도 많이 겪은 탓이었다.

“현수야, 설마 H 병원 쪽이야?”

신현수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때론 침묵만큼 강한 긍정도 없다.

“그쪽이란 말이네.”

학회 이후 스카우트 문제로 잠시 연락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후 밀접한 관계라도 있었으면 서로 오해할 소지라도 있었을 테지만,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길 가다 느닷없이 봉변을 당한 꼴이었다.

은근히 화가 났다.

눈에 보일 정도로 얼굴이 벌게진 모양이었다. 손일석이 팔을 툭툭 치며 말했다.

“넌 누구 입인지 짐작하는 것 같은데 무시해. 강호의 도의를 모르는 놈한테는 그게 상책이야. 아님 칼바람을 일으키든지. 그래도 성급하게 판단하면 안 된다. 혹시 잘못 알았을 수도 있잖아.”

맞는 말이다.

누군가를 특정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H 병원 의사가 한두 명이 아닌데 오해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사실 누군지 찾아내 같이 헐뜯으며 맞대응하는 것만큼 치졸한 짓은 없었다.

굳이 손에 똥 묻힐 필요도 없다.

확인하는 방법은 하나다.

‘진충기가 아니더라도 어차피 학회 말고는 얼굴 볼 일이 없는 사람이다. 백 마디 말보다 내가 한 수술을 알리고, 정당하게 평가받는 게 엉뚱한 말을 잠재울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야.’

저절로 해결되겠거니,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겠거니 여기며 가만히 앉아 듣고만 있는 것도 바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기다리다 톡톡히 당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확실하게 보여 주자.’

생각난 김에 단단히 단속해야 할 때였다.

전화기를 들었다.

난데없는 행동에 손일석이 깜짝 놀랐다.

“설마 지금 당장 전화하려는 건 아니지?”

“누군지 알고 전화해? 혁원아, 나다. 우리 논문 작성 철저히 하자. 자존심이 걸린 일이니까 기형종하고 총상 환자 케이스 리포트도 확실하게 챙겨. 내일부터 많이 바빠질 거야.”

(자존심이요?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런 게 있어. 우리 확실하게 하자.”

(예. 열심히 작성하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선생님, 혹시 잊으신 일 없으십니까?)

많이 컸다.

“너 성민이 말하는 거지? 알았어, 인마. 끊어.”

신현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훈아, 논문은 뭐고 자존심은 또 뭐야?”

“경석이 형 말대로 발단은 학회겠지. 누가 무슨 소리를 하든 우린 이렇게 하고 있다고 알려 주면 인정할 사람은 인정하지 않겠어? 참! 이번 학회에 형하고 너도 발표하지?”

일할 시간도 부족한데 논문과 발표라는 말만으로도 머리가 아픈지 이경석이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난 조기 대장암이고, 현수는 비만과 조기 위암. 케이스가 제법 쌓였어.”

김지훈의 눈이 번쩍였다.

“우리 확실하게 하죠. 전임이지만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수술하면서 달려가고 있다는 걸 보여 줍시다. 뚜벅뚜벅 앞만 보고 가 멋진 결과를 내면 누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잖아요? 의사는 입이 아니라 환자 치료 결과와 실력으로 말해야 하지 않겠어요?”

편법이나 같은 방식의 대응은 진흙탕 싸움만 초래한다. 비뚤어진 시선과 시샘으로 가득한 소문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단 하나다.

정면 돌파!

복강경으로 간 혈관종 수술을 해 달라는 환자의 요청은 우연이 아닐지 몰랐다. 누구의 입인지 몰라도 깎아내릴 의도였다면 잘못 건드렸다.

손일석이 무릎을 탁! 쳤다.

“오! 마이 프렌드 정말 멋진데. 맞아. 똥은 똥끼리 놀라고 해. 똥밭에서 주둥아리 나불대야 똥밖에 더 먹겠어? 내가 돌아왔을 때 말끔하게 치워져 있기를 바란다. 으휴! 어쨌든 부럽다.”

“뭐가 부러워?”

“지훈아! 능력이 있고, 실력까지 압도적이니까 씹히는 거야. 너 같으면 쪽팔리게 아무나 막 씹겠어? 미친놈이나 하는 짓이지. 강호의 도리상 그런 놈들은 단칼에 목을 쳐야 하는데. 깔끔하게 그냥! 싹둑!”

목 치는 시늉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좋지 않은 일로 시간을 너무 끌었다.

김지훈이 주먹을 흔들다 말고 허공에 대고 어퍼컷을 몇 방 날렸다. 그러고는 말없이 가운을 벗고 퇴근했다.

주섬주섬 나갈 채비를 하는 신현수와 이경석을 보던 손일석이 입가를 매만졌다.

‘다들 한참 앞에 있네.’

누군가에게는 기분 나쁜 일도, 누군가에게는 부러운 일이 될 수 있는 모양이었다.

문득 열을 내기보다 실력으로 승부를 내자는 김지훈의 말이 떠오른 손일석이 중얼거렸다.

“이게 말로만 듣던 승화야, 아니면 정신 승리야?”

어느 쪽이든 김지훈의 가슴에 불을 지른 것만은 확실했다.

어떤 불이든 초기에 진압하지 못하면 번지기 마련이다. 고경아의 눈에도 불이 붙었다.

“경아 씨, 오늘은 왜 늦었냐 하면…….”

“지금 몇 시예요? 한 시간 정도 늦는다고 했잖아요.”

“그게, 갑자기 엉뚱한 말을 들어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맨날 핑계야, 핑계.”

마님의 분노를 잠재울 뇌물이 필요했다.

이왕이면 지갑이나 손가락을 반짝이게 하는 것, 혹은 빳빳한 현찰이 제일 좋겠지만 능력 밖이고, 이 상황에 어울리지도 않는다.

아쉬운 대로 준비했다.

꽃 한 송이와 겸손한 무릎 꿇기.

어떤 말이든 묵묵히 듣기.

목소리가 온화해질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는 것은 생활의 지혜다.

쭉 찢어진 눈매는 그대로였지만 30분 만에 마님의 분노가 풀렸다.

“엉뚱한 말은 뭐예요?”

신현수에게 들은 말을 전하자 거의 광분을 했다. 우리 남편만 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따위 망발을 하냐며 게거품을 물었다. 자칫 고경아가 할 수 있는 모든 욕까지 나올 기세였다.

“경아 씨, 진정해요. 우리 애가 들어요.”

“아우! 누군지 알기만 해 봐. 얼굴을 그냥 확!”

열 손가락 손톱이 파르라니 빛났다.

무시무시한 모습이었지만 진심으로 고마웠다. 아내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남편이라면 더한 말을 들어도 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고경아는 사랑이자 평안이 분명했다.

늦은 밤, 밥 차려 준다는 고경아를 부드럽게 막고 조용히 스스로 밥 차려 먹었다. 어느 때보다 정성이 실린 설거지로 고마움을 갈음했다.

다음 날, 어쩐지 신현수와 이경석의 얼굴이 상당히 무거워 보였다.

다들 안에서나 밖에서나 인정받는 남편이다. 헛소문에 대한 반응은 고경아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설거지를 안 한 모양이다. 아니면 그 야심한 밤에 혹시 밥 차리라는 망발을?

결과는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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