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나무를 흔드는 바람 (2)
김지훈은 여전히 딴청이다.
“실물은 없나요?”
“이게 우리나라에서는 구하는 병원이 한 곳도 없는 데다 배송까지 지연돼서요. 죄송합니다. 미국 쪽도 간간이 시도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미국 소리에 귀가 활짝 열렸다.
카탈로그를 확인한 김지훈이 이제야 꼭 잡고 있던 외래 차트를 펼치며 복부 CT를 걸었다.
신현수와 이경석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좌측 간에 발생한 종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간암은 아닌 것으로 보였지만 크기가 2센티미터가 넘었다. 수술을 해야 한다면 당연히 간 절제술이 치료법이다.
“지훈아, 간암은 아닌 것 같고 뭐야?”
“혈관종이야. 크기는 수술 적응이 안 되지만 출혈을 한 과거력이 있어. 이번에도 심한 복통이 발생해서 환자가 받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무증상일 경우 지켜보지만, 크기가 크거나 합병증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으면 수술을 해야 한다.
“운 좋게 좌측 간 끝에 바짝 붙어 발생했어. 개복해서 좌측 간 일부만 절제하면 끝이지.”
“그래서?”
“배를 열기 아깝지 않아? 라파로로 자를 수만 있다면 이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잖아?”
간을 라파로로 자른다고?
김지훈이 마치 당장 수술을 앞둔 것처럼 CT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혈관 촬영 검사까지 꺼내 혈관종과 이어진 혈관을 꼼꼼하게 살폈다.
순간 침묵이 흘렀다.
‘하다하다 못해 간까지? 가능한 소리야?’
놀라다 못해 허탈한 웃음소리까지 들렸다.
무모함을 떠나 고민은 해 보고 말하는 것인지조차 의심스러웠다.
한동안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김지훈을 보던 이경석이 입술에 침을 축였다.
“그거야 누구나 알지. 문제는 라파로로 자를 수 있냐는 거 아니겠어? 어떻게 자를 거야? 정말 가능하다고 생각해?”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상당히 어렵겠지만, 결국 출혈이 최대 관건이니까 적절한 기구가 있다면 시도해 볼 수 있지 않겠어요? 그래서 강 사장님께 직접 기구 부탁을 했고, 이렇게 카탈로그를 가져오셨네요. 그래도 간암이 아니라서 다행이죠?”
김지훈의 마지막 말에 다들 더욱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가 차다 못해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
개복을 해도 이만저만 어려운 과정이 아니다. 자른 간은 또 어떻게 처리할지 등등 머릿속을 콱 막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런 반응쯤은 예상했다는 얼굴이었다. 대안이라도 있는 것처럼 담담해 보이는 표정과 달리 속마음은 초조하기 짝이 없었다.
‘반응이 이러면 곤란하잖아. 생각만으로도 무리한 수술인가? 하긴 간을 잘라야 하는데 환자가 부탁한다고 너무 쉽게 생각한지도 모르겠다. 이런 분위기면 확실하게 준비하기 어려워. 자발적으로 몸이 달아서 달려들어야 하는데.’
간 절제 경험 적지 않다.
수술 과정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개복해 손을 쓰는 대신 복강경으로 기구를 사용한다는 차이뿐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최대 난관이었다. 동기들의 적극적인 조언과 동참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시도도 하기 전에 기가 꺾일 이유는 없었다.
“비록 사진이지만 기구부터 살펴보죠.”
팽팽했던 김지훈의 눈빛이 바짝 조여졌다. 눈을 번쩍이며 마치 실제 사용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사진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설마’라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
이내 적용 가능한 질환에 최대한 복강경을 시행하고 있는 신현수와 이경석도 눈을 떼지 못했다. 간 절제라고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기에 어떤 방식으로 진행할지 고민을 병행하고 있었다.
김지훈이 힐끗 강호승을 보았다.
“끝에 달린 보비나 가위는 5밀리미터용인데 모두 10밀리미터 트로카를 사용하네요.”
의료 기구상은 기구의 특징과 사용 방법을 꿰뚫고 있어야 말발이 서고, 판매를 할 수 있다. 그런데 강호승이 나직한 헛기침을 하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송합니다만, 저도 기본적인 사항만 들었습니다. 보비 같은 경우 정상적인 간에 손상을 적게 주기 위해 복잡한 전기 회로까지 필요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실제 사용되는 부분은 작고 정교하지만 기구 굵기는 어쩔 수 없는 모양입니다.”
“확실한 지혈을 위해 전기를 흘려주는 강도가 일반적인 라파로 기구보다 세다는 말이군요. 그러면서도 퍼지는 부분은 적어서 주변 손상을 최소화한다는 거겠죠?”
“그렇게 들었습니다.”
신현수가 기구 하나를 가리켰다.
“이건 세컨이 간을 끌 때 사용하는 기구 같은데, 똑같이 굵은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죄송합니다만, 안전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데 저도 처음 보는 데다 너무 갑작스럽게 연락을 받아서요.”
복강경 수술을 하는 의사도 간 절제라는 말에 깜짝 놀랐는데 강호승은 말할 것도 없었다. 더구나 처음 보는 기구라면 제아무리 유능한 의료상이라도 의사 이상으로 알기는 어려운 법이다.
다들 머리를 맞대고 어떻게 기구를 사용해야 하는지 차근차근 파악했다.
손일석도 상당히 진지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메인 혈관과 연결된 혈관 세 개 잡고, 혈관종에서 1센티미터 정도 여유를 두면 절제할 단면이 그렇게 크지 않을 것 같은데 힘들까요?”
우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역시 무리한 시도일까?
이경석이 좀처럼 얼굴을 펴지 못했다.
“혈관이라도 찢어지면 출혈을 어떻게 감당할 거야? 클립으로는 잡기 힘들 텐데.”
“그런 일이 안 일어나면 좋겠지만 대비는 해야겠죠.”
“절단면 처리는 또 어떻게 할 거야? 수처도 문제지만 일일이 타이를 해야 하는데 한두 곳도 아니고, 그게 가능하겠어?”
“정말 만만치 않네요. 경석이 형, 위험할까요?”
“위험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현수야, 너도 개복하는 게 낫다고 봐?”
신현수가 눈가를 좁혔다.
‘이번 수술은 솔직히 과감한 건지, 무모한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발전해 나가는 거겠지? 아무 이유 없이 엉뚱한 말이 도는 게 아니었어. 지훈아, 넌 주변에 신경 쓰지 말고 네가 갈 길만 갔으면 좋겠다.’
무슨 이유인지 한동안 얼굴을 굳혔던 신현수가 예의 냉정하고 차분한 표정을 되찾았다.
“우리 의견을 떠나 가장 중요한 기준은 환자 결정 아니겠어? 얼마나 위험한지 충분히 알고도 라파로로 시도하는 걸 동의할 것 같아?”
“사실 환자가 먼저 꺼낸 말이야. 순간적으로 욕심을 냈나 봐. 제대로 고민도 하지 않고 일부터 먼저 벌인 내 잘못이다. 결국 환자의 안전이 제일 중요한데 의외로 갑갑하네. 접어야 하나?”
환자가 먼저 요구를 했는데 김지훈이 포기를?
그동안 가능하다 싶으면 먼저 고민하고 타당성을 찾았던 김지훈이었다. 이미 어떻게 수술해야 할지 대략적인 윤곽까지 잡아 놓고 한숨을 푹푹 쉬었다.
해가 동쪽으로 떨어질 일이었다. 애초에 말을 꺼낼 이유조차 없어 보였다.
의외의 모습에 신현수가 살짝 말을 바꾸었다.
‘가뜩이나 생각하기 힘든 수술인데 너무 기가 꺾이는 말만 했나? 평소 네 모습이 아니다.’
“실패하더라도 안전하게 개복으로 전환할 수 있다면 시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 기구도 오늘 처음 봤는데 그렇게까지 말할 일은 아닌 것 같아.”
이경석도 비슷한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지훈아, 네가 의기소침해하니까 기분이 다 이상하다. 내 생각도 그래. 당장 수술하는 것도 아닌데, 전처럼 다 함께 열심히 고민하고 준비하면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겠어?”
“나도 경석이 형과 같은 생각이야. 고민해 보자.”
손일석이 손바닥을 딱딱 마주쳤다.
“그럼 게임 끝났네. 환자가 동의하고, 라파로의 귀재인 전임들이 같이하자는데 뭐가 문제야?”
김지훈이 남몰래 씨익 웃었다.
“현수하고 형 말을 들으니까 힘이 되네요. 특히 ‘전처럼’이란 말이 가슴 깊게 다가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수술도 다 같이 머리 맞대죠. 일석아, 너도 결혼식 일주일 전까지는 괜찮지? 이번 주 한번 달려 보자.”
예전이었으면 바로 오케이를 외쳤을 신현수와 이경석이 묘한 표정을 짓다 말고 입맛을 다셨다.
한두 번 머리 맞댄다고 답이 나올 시도가 아니었다. 실패보다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높으면 신이라도 날 텐데, 그것도 아닌 상황이었다.
결국 수술 전날까지 있는 시간, 없는 시간 다 짜내야 할 판이었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봐도 도저히 시간을 뺄 수 없는 상황도 큰 문제였다.
그러나 이미 내뱉은 말이 있다.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었다.
“하하! 그게 그렇게 되나?”
“경석이 형, 뭔가 개운하지 않네요.”
신현수와 이경석의 멋쩍은 웃음에 김지훈이 회심의 미소로 답했다.
작전대로 됐다. 스스로 발 담글 때, 자발적으로 함께할 때 가장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간 절제술이기에 더욱 자발적인 면이 필요했다. 솔직히 혼자 모든 준비를 할 자신도,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도 없었다.
‘후우! 마음이 조금은 놓이네. 이래야 최고의 수술 팀이지. 난 정말 운이 좋은 것 같다.’
손일석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야! 김지훈이 언제 하오문도가 됐지? 대단해. 방송에서 보인 말발이 사실이었어. 순간적으로 거미줄 딱 치고 전임 둘을 옭아매네. 지훈아, 나도 자발적으로 걸려들게.”
역시 눈치가 백단이다.
잔머리도 때론 칭찬을 받는 모양이다.
허탈하면서도 즐거운 웃음이 터졌다.
분위기가 반전됐다.
실패 우려를 일축하고, 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 논의가 시작됐다. 완전히 몰입한 신현수와 이경석의 의견을 취합한 김지훈이 기구 몇 개를 가리켰다.
“이삼 일 내에 준비할 수 있을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샘플로 들여온 기구가 있습니다. 도착하는 즉시 가져오겠습니다.”
한동안 나직한 대화가 오고 갔다.
모든 말의 종착점은 결국 간 절제 가능 여부였다.
집도를 하고자 하는 김지훈의 결정에 달린 일이었지만 예상되는 난관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했을 때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긴장감이 더욱 진하게 감돌았다.
어느새 어둠이 진해졌다.
시간을 더 끌다가는 이경석 말대로 모두 다 쫓겨날 판이었다. 마나님의 몸이 무거운 김지훈은 특히 몸 사리고 지극정성을 보여야 할 때였다.
‘어후! 오늘은 하는 일마다 시간을 잡아먹네.’
“이 정도면 대충 골격은 잡았으니까 이혼당하기 전에 빨리 갑시다. 모두들 수고하셨습니다.”
난데없는 인사까지 하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강호승이 김지훈과 신현수에게 슬며시 눈짓을 했다. 뭔가 할 말이 있다는 얼굴이었다.
가뜩이나 늦었는데 긴한 이야기라도?
자연스럽게 손일석과 이경석도 주저앉았다.
강호승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두 분께만 드릴 말씀인데.”
“우리끼리 있을 때는 뭐든 다 얘기해도 괜찮습니다. 마음 놓고 얘기하세요.”
“그럼. 저… 다른 병원에서 선생님께서 어떤 기구를 사용하는지, 어떤 수술을 시도하는지 곧바로 알려 달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별일 아닐 수도 있지만, 왠지 제 마음대로 막 알려 드리면 안 될 것 같아서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얼마든지 알려 주세요. 이왕이면 우리도 다른 병원에서 어떤 수술을 하는지 알면 좋죠. 그래야 서로 발전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당연한 말이었다.
어떤 수술을 어떻게 하는지 아는 것은 환자를 위해서 무척 중요한 정보다. 학회를 통해 교류를 지속하는 이유도 일신의 영광이나 영달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설마 그 말을 하시려고 그런 겁니까?”
“그게, 그러니까. 아! 답답하네요.”
슬쩍 던지면 알아서 받아야 한다. 대놓고 말하기 곤란한 일일수록 더욱 그렇다.
무슨 이유인지 강호승이 얼굴을 펴지 못했다.
신현수가 눈가를 찌푸렸다.
순수한 호기심과 다 같이 함께 발전하고자 하는 의도였다면 강호승이 굳이 말을 꺼낼 이유가 없었다. 좋은 의도만 오고 간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속된 말로 찔리는 구석이 있다는 의미였다.
더구나 최근에 들은 말이 있었다.
먼저 말을 꺼냈지만 당사자는 아니다. 외부인이 함께해서 좋을 일도 아니었다.
“강 사장님,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습니다. 우리끼리 해야 할 말이 있으니까 이만 가 보시죠.”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입장 곤란해질 일은 없을 겁니다.”
‘역시 이사장님 아들이네.’
강호승이 다행이라는 듯 가슴을 문지르며 일어섰다.
“여러 문제가 있겠지만 당분간 입 다무는 것이 좋겠죠? 이번 수술은 전 모르는 일로 하겠습니다.”
“그래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 그럼 가 보겠습니다. 김지훈 선생님, 기구는 말씀하신 날까지 확실하게 준비하겠습니다.”
알쏭달쏭, 어리둥절.
강호승이 나가자 신현수의 눈길이 김지훈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표정이 몹시 좋지 못했다.
눈치 빠른 손일석과 이경석도 의아한 얼굴로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지훈아, 한 가지만 물어보자. 혹시 너 다른 병원 의사들 만난 적 있어?”
왜 없겠는가?
새삼 스카우트 조건이 궁금하기라도 한 걸까?
흠칫 놀란 김지훈이 눈치를 보았다.
“다들 어느 정도 알고 있으니까 솔직하게 말해 봐.”
“전임 계약 전에 잠깐 본 적은 있지만, 그 이후에는 만난 적이 없어. 그건 갑자기 왜 물어봐?”
“그때 이외에는 정말 없었지?”
“그럴 시간 있으면 잠을 더 자겠다. 왜 그래? 강 사장님까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책상을 탁탁 두드리며 말이 없었다.
상당히 곤란한 표정이었다.
째깍! 째깍!
귀중한 시간이 흘렀다.
창밖이 어둠으로 물든 지 오래였다.
“현수야, 무슨 일인데 이렇게 뜸을 들여? 빨리 말해. 우리 마님 기다리신다. 굉장히 예만한 시기라는 거 알지?”
‘지금 꺼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김지훈의 재촉에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