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836화 (836/1,329)

5화. 나무를 흔드는 바람 (1)

이사장 아들이기 전에 일반외과 의사이자 동기다. 드러내지 않아도 누구보다 후배와 과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강한 신현수였다. 특수한 입장 때문에 도리어 흉금을 터놓고 상의하는 것이 유리할 수도 있었다.

“저도 고민만 했었는데 이번에 만석이가 엉뚱한 말을 하더라고요.”

“만석이가?”

손일석만 태연한 얼굴이었다.

‘이 자식이 상의 정도만 하라고 했는데 지훈이 얼굴 보니까 아예 터트렸구나. 역시 단순 무식도 필요할 땐 아주 좋은 무기네. 답이 있을까?’

이동현 환자가 극적으로 회복되던 날, 오고 간 말을 빠짐없이 말했다. 가장 현실적으로 고민할 수밖에 없는 신현수가 눈가를 좁혔다.

“외상 파트 아니면 외상 전담 펠로우라도 뽑아 달라고? 우리가 전임인 걸 떠나서 의사 한두 명 뽑는다고 되는 일이 아니잖아. 간호사부터 지원 인력에 시설이나 장비까지 어마어마한 투자가 필요한 일이야.”

“돈이 굉장히 많이 들겠지?”

“당장 투자만이 문제가 아니야. 만들면 뭐 해? 적자는 나지 말아야 유지를 하지? 지금도 다들 정신없이 바쁘지만 간신히 흑자를 낸다고 들었어. 우리 과 보험 수가가 바닥인 이상 병원 힘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문제야.”

이미 짐작한 일이었다.

일반외과가 처한 총체적 어려움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단순히 적자를 면하기 위해 인원을 줄이거나 동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외상 파트를 떠나 기본적으로 더 많은 인원이 절실하게 필요한 상황이었다.

“현수야, 인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지면 분명히 사고 난다. 있는 사람들도 점점 힘들어질 텐데 누가 지원을 하겠어? 온다고 해도 중노동에 가까운 일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어? 악순환이 벌어질 게 빤해.”

손일석이 입을 삐죽거렸다.

“이미 악순환이야. 월급이 많은 것도 아니고, 솔직히 이게 사람 사는 거냐? 환자가 아니라 물건 다루는 직업이었으면 벌써 때려치웠어. 이동현 환자도 좋아졌으니까 망정이지.”

삶의 질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명감, 전문의 면허 취득, 도제식의 관습적 수련 등을 빌미로 밀어붙이는 것은 명백한 한계가 있다.

그렇게 배웠다고 해서 똑같은 이유와 방식으로 가르쳐도 된다는 말은 아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태와 후배들 생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일반외과가 변하는 것이 마땅했다. 게다가 돈 많이 벌게 해 주는 과도 아니었다.

이경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년에 전공의 지원을 몇 명이나 할지 모르지만 올해보다 좋아질 수는 없겠지. 지훈이 말대로 악순환을 막으려면 인원을 보충해야 돼.”

“형, 뾰족한 방법이 없잖아요?”

“현수야, 일석이 말마따나 요즘 우리 생활 좀 봐라. 수술에, 논문에, 진료에 몸이 두 개라도 모자라. 일 하나라도 더 생기면 난 못 버틴다.”

엄살이 아니었다.

손일석이 기대 섞인 눈빛으로 김지훈을 보았다.

“지훈이가 말을 꺼냈을 때는 방법이 있다는 거 아니겠어? 하오문주로서 감이 딱 온다. 지훈아, 생각한 게 뭐야? 방송할 때 보니까 정말 말 잘하던데, 그만큼 좋은 아이디어가 있겠지? 나도 원님 덕에 나팔 한번 불어 보자.”

김지훈이 머뭇거렸다.

고민 끝에 해결 방안이라고 생각해 낸 것이 돈은 더 들 수밖에 없는 방안이었다. 신현수의 말 때문에 잠시 주저했지만 일단 꺼내 볼 일이었다.

“난 돈 문제는 잘 몰라. 어떻게 하면 인원 부족에서 벗어날지만 생각했어.”

“그러니까 그게 뭔데?”

모두들 궁금함에 머리를 모았다.

은근한 부담이 다가왔다.

“전공의로 적정 인원을 채우긴 글렀어. 추가로 확보할 수 있는 인원은 결국 이미 우리 과를 선택한 사람밖에 없어. 내가 생각한 대안은 펠로우 확충이야. 우리는 세 명으로 시작했지만, 다음에 뽑을 때는 적어도 일곱 명 이상 선발해야 돼.”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펠로우를 일곱 명이나 뽑는다고?”

“그 이상이면 더 좋지. 물론 펠로우 모두 교수가 될 수 없겠지만, 환자들도 보다 전문적인 의사를 원하잖아. 개업을 하든, 취직을 하든 이젠 대장 항문처럼 스페셜한 의사가 필요할 거야.”

여러 문제가 예견됐지만 그럴듯한 제안이었다.

손일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훈아, 배치할 수 있는 파트가 있어?”

생각해 보면 그렇다.

기존 파트가 4개니 파트당 펠로우 둘 정도 배치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인원이 풍부하면 여러모로 유리하겠지만, 당장 두 배에 달하는 교수 자원이 필요할 정도로 수술과 환자가 많은 것은 아니었다.

현실적 어려움도 그만큼 커질 것이다.

‘일곱 이상이면 더 좋다고 했잖아? 근거가 뭐지?’

다들 손가락을 꼽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무턱대고 대충 계산해서 나온 인원이 아니었다.

“당장 생각할 수 있는 파트는 간담도, 대장항문, 위장관, 혈관, 브레스트와 갑상선, 외상, 소아외과야. 한 해에 다 선발하기 어렵다면 해마다 뽑는 것도 방법이겠지.”

외상에 소아 외과까지 독립시킨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펠로우 한 명으로 파트를 이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문의라고 하지만 세부 전공은 더욱 강한 전문성을 요하기 때문에 실력 있는 주임 교수가 필요했다.

손일석이 입술을 내밀었다.

“이준영 선생님하고 너, 박승준 선생님하고 경석이 형, 지동훈 선생님과 현수, 신기동 선생님과 이혁민 선생님. 그 파트는 다 짝이 맞는데 외상하고 소아외과는 누가 맡아?”

김지훈은 지금도 혈관과 이혁민 교수의 수술까지 들어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소아과 컨설트도 거의 도맡다시피 받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상당한 무리였다.

신현수와 이경석이 서로를 보았다.

다들 힘들다지만 김지훈과 비교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파트를 맡을 여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해당 파트를 맡을 수 있는 능력은 물론 시간, 업무량, 체력까지 모두 고려해야 할 사항이었다.

“굳이 주임 교수가 필요할까? 자리 잡을 때까지 함께 환자 보면서 책임질 교수만 있으면 될 것 같아. 먼저 우리가 시간을 쪼개야 하고, 외상 부분은 송동화 선생님도 계시잖아. 일석이 너도 혈관 파트만 맡고 싶지는 않지?”

이경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기서 시간을 더 쪼개자고? 우리 다 유부남이다. 그러다 몽땅 한꺼번에 다 쫓겨난다.”

“집에는 열심히 가야죠. 설마 교수님들도 계시고, 펠로우가 일곱 명인데 퇴근할 시간이 없겠어요?”

“그런가? 생각해 보니까 또 그러네.”

잠자코 듣고 있던 신현수가 입맛을 다셨다.

“다 좋은데 이사장님을 통과하지 못하면 아무리 고민해 봐야 헛수고야. 그 문제는 생각해 봤어?”

일제히 신현수를 보았다.

장차 병원을 책임지고 이끌 사람이자 최고의 써전을 꿈꾸는 일반외과 의사다. 이런 일에 한해서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특수한 관계를 이용했으면 하는 눈빛이었다.

‘현수야, 동의한다면 조금이라도 쉽게 가자.’

신현수가 곧바로 손을 저었다.

“아버님이 이사장이라는 사실은 잊어. 그런 식으로 처리하면 모든 과가 요구 사항을 들고 일어날 거야. 절대 안 돼.”

단호한 목소리로 단칼에 잘랐다.

내심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걸었던 김지훈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좋은 방법이 있나 고민했지만 그 머리가 그 머리다. 뾰족한 방법이 나올 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정훈철과 대화를 나누며 든 생각으로 의사들이 상당히 꺼려하는 방법일 수 있었다.

“일단 한 가지만 물을게. 모두 내 생각에 동의하는 거 맞지? 일이 년 내에 최소 펠로우 일곱 명 이상 확보.”

“당연히 되면 좋지.”

“하오문주가 아니라 혈관을 지망하는 전문의로서 한 표 쏩니다. 그럼 신현수 선생님은?”

“나도 동의는 해.”

“그럼 됐어. 일단 우리 의견을 교수님들에게 확실하게 말씀드린 후 결과를 기다리자. 만일 요구 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이사장님과 직접 면담해야지.”

“고작 면담을 하자고? 그게 방법이야?”

면담도 면담 나름이다.

“그럼 면담을 빙자한 단체 행동이라고 하면 될까?”

보수적인 의사 사회의 눈총과 비난을 받을 것이 빤한데 단체 행동을 불사하겠다는 말일까?

빨간 띠 두를 사람도 없고, 의사를 보는 선입견상 호의적일 사람 또한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습관이 돼서 그러려니 하지만, 솔직히 심각한 문제 정도가 아니야. 일하다 죽으나, 죽어라 일하다 사고 내느니 미리 옷 벗는 게 낫지 않겠어? 솔직히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마음도 있어. 난 우리 요구가 절대적으로 합당하다고 생각해. 최악의 경우, 내 자신과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목을 걸고 요구할 거야.”

지금 이 순간 김지훈의 눈빛은 진지하기만 했다.

다들 흠칫 놀랐다. 신현수가 특히 격한 반응을 보였다.

가장 전도유망한 김지훈이 교수직을 걸자는 말까지 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다. 더구나 아버지인 신동철 이사장과 장인인 윤재철이 김지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교수 자리를 걸겠다고? 설마 농담이지?”

“농담으로 해결될 문제면 좋겠다.”

“김 교수, 절친과 후배들을 위해서 자리까지 건다는 말이 감동적이긴 한데 너무 나간 거 아니야? 사람들이 단체 행동을 어떻게 보는지 잘 알잖아? 자칫 병원하고 완전히 틀어질 수도 있어. 미래가 걸린 일이야.”

“일석아, 내 꿈이 뭔지 알지? 우리 모두 최고의 써전이 되려면 이런 식으로는 불가능해. 손 기술은 좋아질지 몰라도 일에 치여서 머리는 텅텅 비게 될 거야. 뭉쳐서 요구할 건 당당히 요구해야 돼. 교수님들도 동의하실 거야. 현수야, 경석이 형, 나하고 함께했으면 좋겠어요.”

생각만으로도 확실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손일석이 돌연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신현수의 애매모호한 입장이 마음에 걸렸지만 김지훈의 말이 더 타당하게 들렸기 때문이었다.

빨간 띠 두르고 이사장실 앞에서 연좌 농성을 하자는 것도, 파업을 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다 같이 모여 확고한 뜻을 전달하고 관철하자는 말이었다. 합리적인 의사 표현과 행동이라면 극히 보수적인 의사라도 환영할 것이다. 더구나 모두 수긍할 수밖에 없는 명분을 가졌다.

신현수와 이경석이 입을 열지 않았다. 속마음이 어떻든 분위기가 상당히 무거워졌다.

하오문주가 필요할 때였다.

“역시 실력 있는 방송인은 달라.”

“방송인?”

“너만큼 TV 많이 탄 의사도 없을 거다. 환자들이 방송 보고 물밀 듯이 밀려오지 않아? 훈철이 형님이 그 많은 병원과 의사 놔두고 왜 우리 병원에서 또 촬영을 했겠어? 인연 때문은 절대 아닌 것 같다. 어쨌든 열악한 환경 개선해 달라고 교수가 빨간 띠 두르면 무조건 뉴스감이네.”

농담 속에 진담이었다.

“됐어. 현수야, 어떻게 생각해?”

이사장 아들이라는 입장과 일반외과 의사라는 위치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할지는 당사자의 판단이었다.

잠시 고민에 잠겼던 신현수가 깔끔하게 정리했다.

‘개인적으로도 유리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병원 입장에서도 지훈이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맞아. 이 상태가 지속되면 큰 문제 생기고, 소송에 휘말릴 수도 있어. 결국 득을 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말이잖아.’

“병원에서는 일반외과 소속이야.”

이경석이 피식 웃었다.

“아버지하고 얼굴 붉히겠다는 놈도 있는데 어쩔 수 없네. 나도 머리 띠 둘러 보자. 잘리면 홍재순 선생에게 써 달라고 부탁하지, 뭐.”

김지훈이 엄지를 흔들며 웃었다.

당장 결정하고 실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간 시간을 내 구체적으로 상의하기로 했다. 박승준 교수, 지동훈 교수와도 반드시 논의해야 할 일이었다.

다소 늦은 시간에 모두들 서둘러 일어서려는 순간 김지훈이 시계를 보며 손을 저었다.

“현수야, 일석아, 잠깐만. 아직 얘기 안 끝났어. 오실 때가 됐는데 왜 안 오시나?”

“누가 오기로 했어? 무슨 일인데?”

“뭐긴 뭐겠어? 수술 때문이지.”

7명의 펠로우에 단체 행동이라는 말이 꽤 당황스러웠던 모양이었다. 책상 위에 놓인 외래 차트와 CT를 빤히 보면서도 의미를 깜박했다.

신현수가 말없이 자리에 앉자 다들 슬그머니 엉덩이를 붙였다. 김지훈이 수술에 관한 말을 꺼내면 항상 어마어마한 질환이 아니면 새로운 시도였던 까닭에 궁금함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무슨 수술인데? 혈관하고 관계된 수술이야?”

“우리 과 수술 중에 혈관 안 잡는 수술이 있어? 사실 혈관하고 직접적인 관련은 없고, 현수하고 경석이 형 의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수술이야.”

“그럼 라파로네. 뭐야? 조기 대장암하고 조기 위암까지 라파로로 하는데, 또 뭐가 남았는지 되게 궁금하다.”

신현수와 이경석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자연스럽게 차트로 눈이 가자 김지훈이 스윽 끌어당겼다. 치솟는 궁금함으로 눈이 반짝거렸다. 눈가에 서렸던 피로가 스르르 자리를 양보했다.

‘일 하나 더 얹는 건데 이왕이면 자발적으로.’

김지훈이 딴청을 부렸다.

“라파로긴 한데, 와야 할 사람이 와야 시도를 할 수 있을지 결정할 수 있어. 그나저나 이 양반은 약속한 시간이 거의 다 됐는데 왜 안 오는 거야?”

조바심이 날 무렵,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안녕하십니까? 강호승입니다. 신현수 선생님은 몇 번 뵀는데, 다른 선생님들은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영업이라고 해도 사장인데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책상 위에 카탈로그 하나를 놓았다.

“김지훈 선생님, 다행히 찾긴 했는데 말씀하신 수술에 적합할지 모르겠습니다.”

강호승이 왔다면 당연히 복강경 기구 때문이다. 적용할 수 있는 질환은 웬만큼 다 적용한 상태였다. 무슨 수술을 또 하려는지 궁금증이 폭발할 지경이었다.

도대체 어떤 질환, 어떤 수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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