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의사도 사람이다 (2)
환자의 평안은 의국의 평안이다.
이동현 환자가 가파른 회복세를 보인 덕에 입국식을 편안한 마음으로 맞이했다.
김지훈의 제안대로 맥주와 음료수만 오갔다.
예년 같았으면 이미 폭탄주가 몇 번이나 돌았을 시간이었다. 술기운 팍 오른 교수들도 나이를 잊고 웃으며 즐겨야 할 시간이었지만 싱거울 정도로 밍숭밍숭했다.
가장 어린 1년 차가 20대 후반을 바라본다.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술기운 없이 노는 일 결코 쉽지 않았다. 나직한 대화와 잔 부딪치는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상당히 어색하네. 그냥 먹고 죽자고 할 걸 그랬나?’
때론 소량의 알코올이 지친 몸과 마음에 활력을 주기도 한다. 적절한 음주가 딱 필요한 만큼의 알코올을 공급했다. 특별하다면 특별한 손님일 손일석의 입담과 오만석의 거구에 실린 힘도 한몫 단단히 했다.
“역사상 1년 차들이 이 시간까지 말짱한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뜬 모양입니다. 과장님, 하늘의 법칙을 지금 즉시 원상태로 돌려놓겠습니다. 만석아! 농사짓자.”
“예, 선생님. 나갑니다. 우리 의국 최초의 여의사 나와.”
바늘 가는 데 실 간다.
입국식을 맞아 단장한 듯 더욱 찰랑이는 단발머리 뒤로 벌건 얼굴이 나타났다.
손일석의 이마에 넥타이가 흔들흔들, 3년 차 두 명의 손에 탬버린이 짤랑짤랑.
1년 차들의 재롱 아닌 재롱으로 분위기가 슬슬 달아올랐다. 예상도 하지 못한 다크호스까지 나타났다. 그동안 고리타분한 노래가 주를 이뤘건만 뭔가 화려하고, 뭔가 세련됐다.
“일석아, 지금 무슨 노래 하는 거야?”
“나쁜 남자?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상수 저 자식이 날 자극해? 본격적으로 몸 좀 풀어 볼까.”
차상수, 네가 춤과 함께 최신 가요를?
절대 예상할 수 없는 놀라운 재주를 가진 후배다.
격렬한 가무가 이어졌다.
“놈놈놈이 잘 노는구나. 잘 놀아.”
송재덕 교수가 올해도 어김없이 마이크를 잡고 경쾌한 뽕짝 한 곡 뽑았다. 남은 교수들 역시 손사래를 치며 끌려 나왔지만 마이크를 잡는 순간 젊은 시절로 돌아갔다.
남은 교수는 단 한 명이다.
전임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실랑이를 벌이듯 거구를 끌고 나왔다. 묵직한 눈빛 날리며 엉덩이조차 떼지 않았을 이준영 교수가 어색한 표정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우아악! 이런 일이?
1년 차를 제치고 일약 오늘의 주인공으로 떠올랐다. 뜨겁고 격렬한 환호성이 사방에서 터졌다.
하이라이트다.
두두두두두두두!
음! 이럴 수가!
분위기가 천장을 뚫었는데, 모두를 한껏 기대하며 박수 치고 몸 흔들 준비까지 마쳤는데, 송재덕 교수 때도 없었던 ‘다 같이 건배!’까지 외쳤는데.
우아악! 정태춘의 촛불이라니!
조용필의 촛불도 있는데 왜?
‘아버지! 여기서 왜 이러세요.’
장작불 같았던 분위기가 촛불처럼 수그러들었다. 김지훈, 이혁원, 나종진의 애타는 몸부림도 나직하고 느린 노래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이 교수, 이게 뭐니? 이게. 그 흔한 뽕짝 하나 모르면 어떡해? 이 분위기 어떻게 할 거야? 어떻게?”
유일하게 핀잔을 날릴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의 본분을 다했다. 눈 하나 꿈쩍할 이준영 교수가 아니었다.
“김지훈, 다음부터는 이런 일 없도록 하자.”
‘예. 내년에는 술만 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승의 의도였을까? 아니면 어색함과 무안함을 감추기 위한 연막일까?
예기치 못한 불상사를 수습하고, 분위기 다시 살리느라 땀 좀 뺐다.
어느덧 예정된 시간이 다 지났다.
약간의 술만으로도 잘 놀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밤이었다. 덕분에 1년 차들이 무사히 생환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술 안 먹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선배들은 술 핑계로 하루 정도 쉬었지만 신임 1년 차들에겐 남은 밤만 허용됐다. 날이 밝자마자 일터로 직행할 것이다.
“영원하라! 백 일 당직!”
이혁원이 씨익 웃으며 힘차게 외쳤다.
얼굴 벌게진 놈 옆에서 단발머리가 휘청거렸다.
집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좋은 날이 틀림없는데 왠지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병원에 돌아온 직후 바로 곯아떨어진 후배들 때문이었다. 입국식의 광란에서 비켜서 있던 당직들의 눈에 걸린 피로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외상 파트만 문제가 아니네. 노는 일도 힘들어하면 이러다 다들 쓰러지겠다.’
알딸딸한 술기운 속에서도 고민이 깊어졌다.
직장 일을 집까지 끌어오면 안 되지만 고경아만은 예외였다. 모든 일을 함께 고민을 나누고 의논할 수 있어 좋았다.
이대로 가다간 언젠가 큰 사달이 터질 판이었다. 성실한 남편이 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해결 방안을 찾아야 했다.
휘몰아치던 흥분이 차츰차츰 가라앉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모든 의료진이 일상으로 돌아갔다.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을 던 전공의들이 극심한 피로에서 아주 조금 벗어났다. 언제 또 같은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지만 말이다.
김지훈만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마음은 편해졌지만 몸은 두 개라도 모자랐다.
간담도 환자는 진료 때마다 몰려왔고, 수술은 일주일에 3일로도 부족할 판이었다. 유방과 갑상선 파트, 혈관 파트에 이어 소아과 컨설트까지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외상 환자들도 끊임없이 응급실 문을 두드렸다.
이유가 있었다.
정훈철 때문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입국식 전, 우연히 통화하며 가슴속 답답함을 마구 쏟아 낸 김지훈의 입방정 때문이었다.
직급이 많이 오른 정훈철이 ‘사각지대에 선 환자들’이란 기획 방송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만들어 내보낸 것이다.
기폭제 노릇을 단단히 했다.
허수진의 기형종, 이동현 환자의 총상을 다루며 의료보호, 장애를 가진 사람들, 죽음으로 내몰리는 중증 외상 치료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당연히 누군가 인터뷰를 해야 했다.
이혁민 교수가 잠깐 촬영에 응했지만 이준영 교수는 끝끝내 사양했다. 결국 김지훈이 수술 후 착 달라붙은 머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인터뷰에 응했다.
경험의 힘은 위대했다. 카메라의 불빛에도 불구하고 청산유수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손일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였다.
곁다리로 간담도 및 복강경 수술까지 방송 내용에 포함됐다. 이름이 또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젊은 의사는 경험 부족하고 미숙할 것이란 선입견 대신 실력, 능력, 열정을 모두 갖췄다는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한마디로 얼굴에 금칠한 것이다.
이번 역시 사람들의 반응은 다르지 않았다.
방송 탄 대가로 하루 종일 뜨거운 시선을 받았다. 스승은 흐뭇한 미소 대신 더욱 엄한 눈빛을 보냈고, 송재덕 교수는 자기 일처럼 좋아했다.
“지훈아, 교수야, 넌 이제 방송인이다. 방송인. 과장보다 말도 잘하고 아주 자연스럽더라. 역시 사람은 경험이 있어야 돼. 경험이. 이참에 병원 홍보대사 하자. 홍보대사.”
방송을 탔으면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야 한다. 친동생처럼 신경 써 주는데 전화 통화는 예의가 아니었다. 간만에 정훈철 부부와 술자리를 가졌다.
초반 분위기는 좋았다. 정훈철은 웃음을 감추지 못했고, 눈가가 까맣긴 했지만 김지훈의 목소리는 자신감으로 넘쳤다.
“김 교수, 전 국민 의료보험 시대에 이렇게 문제가 많을지 몰랐다. 이번 방송을 기회로 대폭 개선됐으면 좋겠어.”
“그래야죠. 정부에서 신경 안 쓰면 언론이라도 나서야 대책을 세울 겁니다.”
“어쨌든 김 교수 같은 의사가 있어서 다행이야. 요새도 일복 여전하지? 의사는 찾아오는 환자가 많아야 대접받잖아.”
좋은 의미이자 당연한 말인데 마냥 웃을 수 없었다.
‘어후! 형님, 다 좋은데 제 몸은 하나고, 우리 과는 인원 부족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그 문제도 짚어 주시지. 이게 다 인터뷰를 혼자 해서 그래. 스승님은 왜 인터뷰를 극구 거절하신 거야?’
“수술이나 진료 많이 하면 추가 수당 받지 않아? 짭짤하겠어. 오늘 김 교수가 사는 건가?”
내친김이라고 농담 한마디 더 한 정훈철이 흠칫 놀랐다. 한수임과 수다를 떨던 고경아의 찌릿한 눈길을 받은 것이다.
“형부, 돈이면 다예요? 환자가 얼마나 늘었는지 아세요? 덕분에 전 남편 얼굴 보기도 힘들어요. 책임져요.”
“응? 처제, 그게 무슨 소리야? 환자 늘어난 게 왜 내 탓이야? 김 교수 실력이 쫙 퍼져서 그렇지.”
“소아과하고 외상 환자 수술이 갑자기 우리 병원에서만 확 늘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환자도 중요하지만 지훈 씨 건강 해칠까 봐 걱정돼 죽겠단 말이에요.”
한수임이 웃었다.
“경아야, 그래서 내가 녹즙 두 배로 사 왔잖아. 김 교수님이랑 사이좋게 나눠 먹어. 피로 회복은 말할 것도 없고, 임산부한테도 안전하고 좋대.”
절대 고경아의 본심이 아니고, 그만큼 허물없는 사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주의해야 했다. 출산일에 가까울수록 예민해지는 사람이 바로 임산부이기 때문이었다.
정훈철이 힐끔힐끔 눈치를 보았다.
김지훈이 녹즙을 잡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야! 형님 덕에 유명 인사 된 것도 황송한데, 형수님이 건강까지 챙겨 주시니까 눈물이 다 나려고 하네요.”
찌릿! 번지수가 틀린 모양이다.
“김 교수님도 바쁘다는 핑계로 경아에게 소홀하면 안 돼요. 얼마나 힘들고 예민해지는 시기인지 누구보다 잘 알죠? 우리 경아 얼굴이 반쪽이 됐네. 김 교수님이 집안일은 도와주고 있는 거야?”
이번엔 김지훈이 눈치를 보았다.
별 보며 퇴근하는 일은 여전히 일상다반사였다.
“당신도 상황 좀 잘 살펴요. 지금도 힘들어 죽겠다는데 돈 얘기 하면서 불까지 지르면 어떻게 해요?”
“아니, 그게 난 농담 식으로 좋은 뜻을 가지고…….”
찌릿! 찌릿!
남편은 아내 못 이긴다.
아내들은 의기투합 경쟁하듯 남편 흉을 보며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었다. 남편들은 구석에 쪼그려 앉아 그동안 소홀했던 죗값을 톡톡히 치렀다. 때론 가정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서 입 꾹 다무는 것이 최선이다.
“형님, 지금 우리 과 인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데 좋은 방법 없을까요? 방송국도 사람이 넘쳐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어떤 식으로 해결하세요?”
“인원 충원은 돈이 걸린 일이라 쉽지 않지.”
나쁜 말도 아닌데 눈치 보며 소곤소곤 나직하게 말을 주고받아야 했다.
사회생활 오래 한 사람이라고 뾰족한 답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몇 가지 조언을 얻었다.
“그런데 손 대위하고 막내 처제는 왜 안 왔어?”
“당직 문제도 있고, 결혼 준비로 바쁘네요.”
“안 바쁜 사람이 없네. 결혼식 날 보자.”
덕분에 유익했고, 남편 흉 보던 고경아와 한수임도 제자리로 돌아와 즐거운 자리가 이어졌다.
아내 손을 꼭 잡고 행복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고경아가 씻는 동안 이부자리 곱게 폈다.
다음 날, 김지훈의 마지막 진료가 의외로 길어졌다. 다소 무표정한 얼굴로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가는 중년의 여자 환자에게 상당한 시간을 쏟았다.
“제 말을 다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능할까요?”
“지금은 확답을 드릴 수 없습니다. 다음 주 진료를 다시 잡고 그때 말씀드리겠습니다. 고민해 보겠지만 어려울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선생님만 믿겠습니다.”
김지훈이 곤란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 수술이 가능할까?’
진료를 마친 후 누군가와 한참 동안 통화를 했다.
전화를 끊은 후에도 고민스럽다 못해 심각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한동안 진료실을 떠나지 못하던 김지훈이 무심코 시계에 눈길을 주었다.
‘으악! 늦었다.’
깜짝 놀라 후다닥 수술 방으로 달려갔다.
바쁜 와중에도 수술실을 일일이 살폈다. 제법 수술이 남아 있었지만 고경아가 보이지 않았다. 가장 고된 업무인 수술 어시스트에서 빠진 것이 분명했다.
‘준비실에 있나?’
얼굴을 못 찾았지만 머뭇거릴 때가 아니었다.
막 환자가 옮겨지기 직전, 간신히 수술실에 들어서자 이혁민 교수의 눈길이 살짝 사나워졌다. 시치미 뚝 떼고 유방 수술과 갑상선 수술을 연달아 들어갔다.
오늘도 제대로 쉴 시간이 없었다. 하마터면 ‘죽어라 죽어라 하네.’라는 말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동시에 스승의 말이 떠올랐다.
‘이유가 있다고 하셨는데 뭘까? 설마 모든 파트를 섭렵하라는 말씀이실까?’
생각만 해도 몸이 떨렸다.
턱을 매만지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을 때, 문득 오더를 내고 있는 강병옥이 눈에 띄었다. 유방 수술은 오하석 혼자, 갑상선 수술은 강병옥만 들어왔다.
‘혁원이에게 라파로도 줘야 하는데, 이렇게 손이 모자라면 주고 싶어도 줄 시간이 없겠다.’
인원 부족이 절실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항상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오만석의 말이 새롭게 다가왔다.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어야 할 시점이었다. 정훈철에게 조언도 받은 마당이었다.
오늘 진료한 환자 문제로 상의할 것도 많았다.
일과를 최대한 일찍 끝내고 동기들과 함께 자리를 가졌다. 얼마 안 있어 결혼과 동시에 군의관으로 복귀하는 손일석도 함께했다. 내년에 펠로우를 지원하기에 전임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신경 쓰고 있을 것이다.
이경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보자고 했어? 뭐가 됐든 요새 힘들어 죽겠으니까 짧고 간결하게 엑기스만 얘기하자. 그 차트는 뭐야? 큰 수술 또 하나 뜬 거야?”
아닌 게 아니라, 김지훈 앞에 외래 차트와 CT 하나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거요? 급한 순서로 따지면 먼저 상의할 문제긴 한데, 그 전에 의논해야 할 일이 하나 있어요.”
“얼마나 중요한 일이기에 환자를 뒤로 밀어?”
“다들 생각했겠지만 인원 문제 때문에 모이자고 했어요. 일석이하고 만석이 근무가 곧 끝나고, 4년 차들도 3개월 후면 손을 놓잖아요. 지금도 손이 모자란 정도가 아닌데, 이러다 누구 한 명 쓰러지겠어요.”
생각만 해도 가슴 답답한 일이었다. 전공의보다 덜 힘들어야 할 전임들 얼굴 역시 누렇게 떠 있었다. 교수들에게 여파가 가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인원 부족 때문에 걱정이었어. 하루 이틀 지속된 일이 아닌데,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확실히 발등에 불이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힘든 하루 일과를 마치고 맥이 풀렸던 동기들의 눈이 반짝였다. 특히 신현수가 큰 관심을 보이며 바짝 귀를 기울였다.
‘아! 현수는 우리하고 입장이 조금 다를 수도 있잖아?’
김지훈이 헛기침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