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830화 (830/1,329)

2화. 한 줄기 빛 (1)

혼수상태 7일째다.

오전 수술을 마치고 허수진을 찾았다.

죽을 먹는 날이다.

병실에 들어서자 열심히 수저를 놀리고 있는 허수진이 눈에 딱 뜨였다. 아버지는 숟가락 위에 반찬을 올려 주고, 어머니는 옆에 꼭 붙어 웃고만 있었다.

여느 가족의 식사와 다르지 않았다.

“수진아, 천천히 먹어.”

“아빠, 이 반찬도.”

“많이 먹어. 우리 수진이가 잘 먹으니까 아빠 배도 부르다. 이것도 먹자.”

아마도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음식일 병원 밥을 맛있게 잘도 먹었다. 지난 수년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야위었던 팔다리에 살이 붙을 날이 멀지 않았다.

밥그릇을 박박 긁으며 마지막 한 톨까지 해치운 허수진이 김지훈을 보자마자 활짝 웃었다. 싱그러운 생명력이 가득한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모습이 놀랍기만 했다.

“한 그릇 다 먹었네. 수진아, 이제 배 안 고파?”

“더 먹을 수 있어요.”

“한 번에 많이 먹으면 안 돼. 배 좀 보자.”

어제 실밥을 모두 풀고 드레인까지 제거했다. 진찰하는 손길을 따라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촉감이 전해졌다. 아무 문제 없이 잘 아물었다는 의미였다.

청진을 했다.

꾸르륵! 꾸르륵!

원활한 장 소리가 힘차게 들렸다. 수술만 아니었다면 마음껏 먹어도 좋았다. 보는 사람마다 깜짝 놀랄 정도로 무사히 회복돼, 보기만 해도 즐거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하나 있다. 냉기를 없앤 주스 하나를 건넸다.

허수진이 깜짝 놀란 눈으로 김지훈을 보았다.

“우리 수진이 운동 열심히 해서 내가 주는 선물이야. 오늘은 이거 하나만 먹자.”

반짝이던 눈이 번쩍였다.

딸깍 소리와 함께 허수진이 눈을 꼭 감고 주스를 마셨다. 꿀꺽꿀꺽 주스 넘어가는 소리가 맛있게 들렸다.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던 김지훈이 슬며시 주스 몇 개를 침대 옆 탁자에 놓았다.

어려운 형편이다.

가족이라고는 단 셋뿐이었다.

의료보호라고 하지만 개인 부담이 없을 수 없었다. 경제 능력이 거의 없는 아버지 입장에서는 병원비가 어마어마할 것이다. 행정 기관, 복지 기관의 도움과 병원의 배려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입원한 환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돈 문제는 언제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비슷한 처지인 은비 가족이 생각났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송재덕 교수가 지금도 서울 병원 원장이라는 사실에 희망이 생겼다.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다들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줄을 대려는지도 몰랐다.

아닌가?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만 생각하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마침 스테이션에서 딱 마주쳤다. 오늘따라 입가에 걸린 미소가 유난히 즐거워 보였다. 아주 좋은 기회였다.

“선생님, 기분 좋은 일 있으세요?”

“병원이라고 즐거운 일 없겠니? 근데 그건 왜 물어봐? 왜? 할 말 있어? 할 말 있구나. 뭐니? 뭐야?”

“다름이 아니라 기형종 수술한 아이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돈 문제는 누구에게나 갑갑한 일이다.

송재덕 교수가 눈가를 찡그렸다.

“지훈아, 교수야, 병원은 땅 파먹고 사니? 이런 환자 저런 환자 사연 다 들어 주다 보면 우리 월급도 못 탄다. 못 타. 어쩐다. 내가 뭘 해야 하니? 뭘 할까?”

“방법이 없을까요?”

“돈은 내가 관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난 이사장님과도 안 친해. 친해 둘 걸 그랬나? 우리 김 교수가 모처럼 부탁하는데 큰일 났다. 큰일 났어. 고민 좀 하자. 고민 좀.”

서울과 구미 병원은 많은 면에서 다르다. 원장 권한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지만, 권한이 곧 돈은 아니다. 도리어 어려운 일일 수도 있었다.

송재덕 교수가 정말 힘든 일이라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등을 돌렸다.

‘서울 병원은 힘든가?’

왠지 불안하고 마음까지 무거웠다.

그러나 혹시? 행여나? 송재덕 교수라면?

슬쩍 고개를 빼던 김지훈이 웃고 말았다. 송재덕 교수가 외래가 아닌 이사장실이 있는 건물로 향하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잰걸음이었다.

서두를 땐 이유가 있는 법이다. 어쩌면 기대 이상의 결과를 얻을지도 몰랐다.

문득 은비의 얼굴이 떠올랐다.

비록 돈이 다가 아니라지만 허수진의 가족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기적처럼 여겨지는 노력과 의지를 보인 허수진은 그런 대우를 받을 자격이 넘치고도 남았다.

오후 수술을 마쳤다.

혈관 수술까지 모두 끝났다.

지난주, 극심한 피로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수술 약속을 지켰다. 그런 노력과 열정과 인내 덕에 김지훈과 손일석의 실력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다.

신기동 교수가 손일석을 제자로 여긴 까닭 중 하나일 것이다. 이젠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손일석이 어두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말 안 해도 뻔했다. 이동현 환자 때문이었다.

“바이탈은 점점 좋아지고, 수술 부위도 잘 아물고 있는데 왜 깨어나지 못할까? 지훈아, 이 상태가 지속되면 기도 절개하고 장기전에 대비해야 할 것 같아.”

“안 그래도 상의할 참이었어. 며칠 지켜본 후에 변화 없으면 결정하자. 만석아, 들었지? 미리 준비해.”

‘내일은 제발 눈이라도 떴으면!’

분명 수술 부위는 회복되고 있었다. 도무지 혼수상태의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유일한 추측인 저산소증으로 인한 뇌손상이 맞는다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한 번 죽은 뇌세포는 절대 기능을 회복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미약한 자발 호흡도 심각한 문제였다. 적어도 전신 상태가 호전된 만큼 강해졌어야 했다.

인공호흡기가 아니면 팔다리에 산소 공급조차 하지 못할 상황이었다. 투여되는 산소 레벨은 단 한 번도 최고 수준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호흡 중추가 손상을 받은 걸까? 그러면 아예 자발 호흡이 없어야 하는데 알 수가 없네.’

앞뒤가 안 맞는, 모든 것이 뒤죽박죽인 것 같은 느낌에 무거운 분위기가 가시지 않았다. 간간이 얼굴을 비친 이준영 교수도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희망을 잃지 말고 지켜보자.”

그 말뿐이었다.

보호자들도 서서히 지쳐 가는 것 같았다.

혼수상태 8일째.

마침내 일주일을 넘어섰다.

아침부터 중환자실이 소란스러웠다.

손일석과 오만석이 심각한 표정으로 흉부 사진을 보고 있었다. 우측 폐에 하얀 음영이 짙어졌다. 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소견이었다.

‘설마 폐렴이?’

김지훈이 깜짝 놀라 다가섰다.

“일석아, 어떻게 된 거야? 오만석, 석션은 어땠어?”

“그동안 깨끗했었는데 새벽부터 노란색이 섞이기 시작했습니다. 기관지염이 발생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올 것이 왔다.

수술 후 발생하는 치명적인 합병증의 첫 징후였다. 그동안 합병증을 예방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건만, 이동현 환자의 한계를 목전에 둔지도 몰랐다.

다른 방법은 없다. 강력한 항생제를 투여하고, 더욱 자주 기관지 내 이물과 가래를 제거하는 것뿐이었다.

수시로 시행하는 석션의 강한 자극에도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오만석, 오늘 수술 들어가지 말고 어떻게든 진행 막아. 폐렴으로 잃을 수는 없잖아.”

“예. 10분 단위로 석션 시행하겠습니다.”

초조한 가운데 진료를 마치고, 중환자실에 들어선 김지훈이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석션을 하는 오만석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흉부 사진은 좋아지지 않았고, 딸려 나오는 가래의 색과 양 역시 변동이 없었다.

불길한 생각이 점점 진해졌다.

기도 절개는 보통 기관 내 삽관을 한 지 2~3주가 지나야 시행한다. 하지만 혼수상태를 감안해야 했다. 의식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구강을 통한 삽관 자체가 여러 문제를 유발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 폐렴으로 급격하게 진행할지 모르는 기관지염도 그중 하나였다.

“일석아, 하는 게 좋겠지? 오만석, 네 생각은 어때?”

“늦기 전에 시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기도 절개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이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니었다. 가슴속에 남았던 한 가닥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지기 직전이었다.

보호자를 만났다.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끝까지 기대를 버리지 않는 사람이 바로 가족이다. 기도 절개를 할 수밖에 없다는 말에 절망적인 얼굴로 변했다.

“목으로 튜브를 넣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그럼 또 수술 상처가 나는데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입을 통해 장시간 튜브를 유지하면 성대가 녹을 수 있고, 무엇보다 구강을 통한 감염이 더 큰 문제입니다. 입 안 내용물이 튜브를 따라 기관지 내로 유입되면 세균성 폐렴이 유발될 수도 있습니다.”

아들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벌써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죽은 것처럼 누워만 계시는데 살아나실 가능성은 있는 겁니까?”

“확신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점점 더 상황이 악화될 것이란 말에 반대할 보호자는 없었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어머니의 손을 단단히 잡은 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친 숨 사이로 울음이 섞여 있었다.

기도 절개 준비가 끝났다.

강병옥과 오만석이 앞에 앉았다. 손일석은 팔짱을 낀 채 한숨만 쉬었다.

목 주변을 소독하고 천을 덮었다.

목젖부터 손가락 두 마디 정도 아래에서 절개한다. 피부 절개 후 수직으로 파헤치면 기관을 쉽게 찾을 수 있고, 출혈도 최소화할 수 있다.

김지훈이 주사기를 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통증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다지만, 혼수상태인 사람에게 마취를 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습관적인 행동일 수 있었다. 무의미할 수도 있었지만 의사들이 기대하는 막연한 효과가 맞길 바랐다.

“리도카인(Lidocain:국소 마취제).”

주삿바늘이 날카롭게 빛났다.

살짝 느껴지던 피부 저항이 사라지며 바늘 끝이 절개할 면을 따라 쑥 사라졌다.

마취제를 주입했다.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제법 고통을 호소할 과정이었다.

이동현 환자는 그럴 이유가 없었다.

절개 면에 메스를 가져갔다. 메스 날이 유난히 예리하게 느껴졌다.

가볍게 힘을 주자 피부가 갈라졌다. 빨간 피가 비치며 미처 흡수되지 못한 투명한 마취제가 함께 흘러나왔다.

마지막 부분에 메스 날이 닿는 순간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마취제가 골고루 주입되지 않았는지 피가 진해졌다. 멀쩡한 사람이었다면 생살을 찢는 고통에 펄쩍 뛰며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어떤 경우든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할 일이었다.

공연히 미안해졌다.

‘이런 자극에 반응할 상태가 아니지.’

절개할 부분을 끝까지 열었다. 살짝 더 열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메스를 떼는 순간 손일석이 덥석 팔을 잡았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았다.

“지훈아, 잠깐만. 손가락을 움직인 것 같아.”

정말 난데없는 소리였다.

“뭐? 정말이야?”

혼수상태에 미약한 자발 호흡도 모자라 폐렴 진행 가능성까지 높아져 기도 절개가 요구되는 상태다. 수술 부위 회복과는 별개로 전신 상태는 나빠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손가락을 움직이다니!

갑작스러운 말에 도리어 어안이 벙벙해졌다.

“분명히 움직였어. 오만석, 강병옥, 못 봤어?”

기도 절개에 집중해야 할 어시스트가 봤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손일석이 대답도 듣지 않고 발가락을 강하게 압박했다.

쇠가 가진 단단함이 주는 자극은 보통이 아니다. 손가락 힘만으로는 자극이 부족할지 몰라 수술 기구 중 하나로 발톱을 짓눌렀다.

모두들 강한 기대에 들떴다.

지금까지 이런 희망은 없었다. 혼수상태에서 벗어난다면, 스스로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인다면 느리기만 하던 회복이 급격하게 빨라질 것이다.

모든 동작을 멈추고 손가락만 바라보았다.

착각이었을까?

아무 반응이 없었다.

손일석이 고개를 강하게 흔들었다.

똑똑하게 보았는지 계속 자극을 주며 동공 반응과 호흡 상태까지 확인했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허탈한 한숨을 터트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분명히 봤는데. 분명히 움직였어.”

김지훈도 덩달아 맥이 탁 풀렸다.

절대 잘못 보았을 리 없을 것이다. 손일석의 말이 맞기를 간절히 바랐다.

끝까지 기대와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했다.

김지훈이 눈가에 바짝 힘을 주었다.

“일석아, 확실하게 봤다면 곧 의식이 돌아온다는 징조잖아. 실망하지 말고 지켜보자.”

째깍! 째깍!

시간이 흘렀다. 이미 피부를 절개한 상태였다. 갑자기 눈을 뜨고 호흡이 강해진다면 봉합하고 끝낼 일이었다. 이깟 상처는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할 것이다.

시간이 흘러도 미동조차 볼 수 없었다. 피부를 연 채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다.

“후우! 분명 잘못 본 건 아니겠지만,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 일단 기도 절개부터 하고 지켜보자.”

모스키토를 가져갔다. 지방조직을 파헤친 후 근육을 벌렸다. 통증에 가까운 자극이 동반되지만 튜브가 들어갈 통로를 확보해야 한다.

모스키토를 최대한 벌렸다. 근육이 찢어질 것처럼 벌어졌다.

순간 누군가 어깨를 강하게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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