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829화 (829/1,329)

1화. 노력 없는 기적은 없다 Ⅲ (2)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다.

5일째 혼수상태다.

인공호흡기조차 뗄 수 없었다.

뒷덜미에 달라붙은 이동현 환자의 얼굴이 하루 종일 떨어지지 않았지만 주어진 일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월요일 예정된 수술을 마치고 병동으로 향했다.

운동 중이던 허수진과 마주쳤다.

어라? 조그만 녀석이 눈을 흘긴다.

김지훈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모르는 모양이다.

한 발 한 발 다가와 또박또박 말했다. 여전히 째려보면서 말이다.

“선생님, 물 먹을 수 있다고 했잖아요.”

완전히 삐친 표정이었다.

수술 후 상태가 너무 좋아 보여 말은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빨랐다.

아침부터 물 먹는 문제 때문에 시달린 이혁원이 창문 밖을 바라보며 눈길을 피했다.

‘주말인데 중환자실 들르셨으면 그냥 퇴근하시지, 왜 애먼 말씀을 하셔서 나까지 곤란하게 만드시나. 수진이 조것도 말을 너무 또박또박 해서 대답하기가 더 어렵네. 지적장애도 잘못 판정한 거 같아. 웬만한 애들보다 더 똑똑해.’

14살 아이가 무섭다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배고파?”

“배고프고 목말라요.”

얼마나 먹고 싶은지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수술 후 5일이 경과됐고, 내일이면 6일째다.

헐렁한 환자복 사이로 보이는 팔다리는 여전히 앙상했지만 형광등 불빛 아래 비친 볼이 발그스름했다.

눈으로 빤히 보면서도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회복에 겁이 날 지경이었다.

거짓말 반복하면 대관령에서 양을 쳐야 할지도 모른다. 이쯤이면 약속을 지켜야 할 때가 되기도 했다. 물론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야 하는 것처럼 환자 상태는 몇 번을 확인해도 과하지 않았다.

진찰부터 꼼꼼하고 착실하게 했다.

“좋아. 수진아, 지금부터 물 먹어도 되는데 한 번에 한 모금씩, 오늘은 네 번만 먹자.”

“네 번이요. 내일은요?”

“물 먹고 배 안 아프면 내일 점심때부터 미음 먹자.”

“미음이요?”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인 모양이었다.

하필이면 장수연이 없었다.

먹어도 된다는 소리에 허수진의 아버지는 아내의 손을 잡은 채 웃고만 있었다. 딸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만 나오지 않으면 항상 볼 수 있는 얼굴이기도 했다.

설명하기 의외로 곤란했다.

“죽인데, 물 같은 음식이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수진아, 내일 먹어 보면 알 거야. 물은 아니야.”

환자복 속에 숨은 배가 홀쭉했다.

들고 나는 숨이 편안해 보였다.

내일이면 실밥 일부를 푼다. 수술 부위에 박혀 있는 드레인까지 제거하게 될 것이다. 젊고 건장한 환자를 수술했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응급으로 수술을 들어갈 때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작은 아이의 몸에 놀라울 정도로 엄청난 힘이 숨겨져 있던 것이다.

물을 재촉하는 눈빛이 따갑게 느껴졌다.

강제로 며칠간 금식해 본 사람만이 한 모금의 물이 얼마나 맛있는지 알 수 있다. 바싹 마른 혀를 적시는 부드러움은 소프트 아이스크림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종이컵에 물을 조금 따라 주었다.

꿀꺽! 꿀꺽!

“천천히 먹어. 그러다 사레 걸려.”

허수진이 헤 웃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따라 웃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늘도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들을 때마다 이상하게 가슴이 시릴 정도로 울컥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세상에 고마운 일이 얼마나 많은지 잊고 사는지도 몰랐다.

살아 있음을.

가족이 곁에 있음을.

건강함 그 자체를.

14살 아이의 해맑은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그 미소 속에 실린 한 아이의 생명력이 생사의 기로에 선 이동현 환자에게 전해지길 바랐다.

‘나한테도.’

월요일부터 이혁민 교수의 유방 수술과 혈관 수술이 차례로 남았다. 주말 동안 덜어 낸 피로가 하루 만에 고스란히 돌아올 판이었다.

조곤조곤, 탁탁탁탁!

일단 도마 위에 올라 잘게 썰린 후 이동현 환자 상태를 상의했지만 이혁민 교수도 갑갑한 표정만 지었다.

화요일 새벽, 6일째 혼수상태다.

30분 일찍 출근해 중환자실에 들렀다.

오만석이 눈가를 꾹꾹 누르며 뭔가를 읽고 있었다. 누구보다 오랜 시간 이동현 환자 곁을 지켰고, 당연히 상태를 가장 잘 파악하고 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봐? 잠은 좀 잤어?”

“신경외과 책인데, 외상 후 뇌손상에 대해 찾아보고 있었습니다. 몇 번을 읽어도 딱히 짚이는 이유가 없습니다.”

외상 치료라면 과를 가리지 않고 파고드는 모습에 오만석의 강한 열의가 느껴졌다. 믿음직하고 고맙지만, 걱정이 앞섰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피로가 덕지덕지 묻다 못해 뚝뚝 떨어질 지경이었다. 거구에서 나오는 기본적인 체력이 아니었다면 벌써 쓰러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마음은 아는데, 너 쓰러지면 이 환자 감당 못한다. 쉬면서 봐. 체력 관리는 네 몫이야.”

오만석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선생님은 전공의 때 더 열심히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솔직히 선생님보다 더 강한 열정을 갖고 있는지 의문입니다만, 이 환자만큼은 반드시 살리고 싶습니다.’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동현 환자는 오늘도 아무런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모든 의료진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간호사의 새벽은 무척 바쁘다.

매시간 환자 상태를 세심하고 꼼꼼하게 기록한다.

바이탈을 체크하고, 마지막 힘을 내 기본적인 조치를 한다. 환자의 오물을 치우고, 욕창이 유발되지 않도록 일일이 자세를 바꿔 주는 일도 간호사의 몫이다.

이동현 환자처럼 혼수상태인 사람은 몇 배 더 힘들다. 어레스트라도 발생하면 거의 모든 인원이 일을 미루고 달려들어야 한다.

주야, 혹은 3교대를 한다지만 과도한 긴장과 심리적 부담, 육체적 피로는 가히 살인적이라 할 수 있었다. 잦은 퇴직과 이직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중환자실 인턴의 시작도 그에 못지않다.

비지에이부터 간단한 드레싱까지 의사가 직접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바이탈이 흔들리는 환자가 생기면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와 확인하고 대처해야 한다. 24시간 맞교대가 끝나면 환자만큼 혈색이 나빠지기 십상이다.

전공의도 다르지 않다.

인턴이나 간호사가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을 맡아야 한다. 특정 환자에 대한 고도의 집중력과 지식이 필요한 까닭이다. 담당 교수가 나올 때까지 권한을 대신하기 때문에 그만큼 부담도 크다.

교수라고 편할까?

상대적으로 몸은 편할지 모른다. 그러나 최종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심적 부담은 대단히 크다. 누군가 할지 모르는 실수까지 안고 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저마다 다른 상황이지만, 결국 목표는 환자를 살리는 것이다. 각자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할 때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이동현 환자를 포함한 모든 환자의 삶은 당연히 의료진의 목표이자 목적이다.

오늘도 묵묵히 일하는 까닭이다.

오전 진료를 마친 김지훈이 중환자실을 찾았다.

지난주 여파가 생각보다 컸다. 이제야 정상 컨디션에 근접했다.

한결 개운한 몸과 맑은 정신으로 이동현 환자의 모든 것을 차근차근 되짚었다. 수술 후 이렇게 오랜 기간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환자는 처음이었다.

문제점과 미진한 부분이 없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했다. 물러나거나 포기할 때가 아니었다. 이동현 환자는 치명적인 총상과 광범위한 수술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숨을 쉬고 있다.

삶의 의지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수술 직전 상태부터 2차 수술까지의 과정.

응급실 차트와 수술 기록지에 세세하게 기록돼 있다. 직접 보지 않은 사람도 초기에 어떻게 대처했고, 수술은 어떤 방식으로 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가장 적절하고 안전하게 진행됐다.

‘최선이었어.’

이후 실시한 검사 결과와 환자 상태.

일주일도 안 돼 몇 개월 입원한 환자만큼 두툼해진 중환자실 차트를 펼쳤다.

이혁원, 나종진, 송진우, 강병옥, 오만석, 오하석까지 연차를 가리지 않고 환자 기록을 작성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오만석의 기록이 가장 많았다.

‘자식, 정말 열심히 하네.’

한 장 한 장 차례차례 읽었다.

미세한 변화만 발생해도 곧바로 대처했다. 필요한 조치는 빠짐없이 시행됐다. 전공의 모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결코 방임하지 않았다.

‘다들 열심히 봤네.’

낯설면서도 아주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2년 차 차상수.

유독 눈에 안 띄는 연차나 후배가 있다.

이상하게도 2년 차가 그런 경우였다. 대체로 모두 조용했고, 주로 병동 일을 맡는 데다 전공의 때보다 더 바빴던 펠로우 시기와 겹친 탓일지도 몰랐다.

그중에서도 차상수는 무척 조용한 성격이었다. 게다가 파트 전공의도 아니어서 가끔 마주치면 인사만 받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얌전한 글씨가 꽤 많이 보였다.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 의외였다.

‘상수가 언제 이렇게 킵을 했지?’

대단히 미안한 일이었다. 한편으로 누구 한명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는 후배가 있다는 사실에 가슴 뿌듯해졌다.

앞으로 신경 바짝 써야 할 것이다.

브레인(Brain:뇌) CT와 복부 CT 소견.

혼수상태 때문에 가장 자세하게 살펴야 할 검사였다. 뇌 CT상 특별한 이상을 찾을 수 없었다.

수술 부위도 느리지만 잘 아물고 있었다. 배 속에 고인 피도 없었다.

신경외과 교수 소견이 눈에 밟혔다.

Hypoxic Brain Damage.

(저산소증으로 인한 뇌 손상).

절대 배제할 수 없는 문제였다.

‘저혈량성 쇼크가 오래 지속돼 저산소증이 유발됐을 텐데, 그때 손상을 받았나?’

눈에 보이지 않는 기능적 손상이 가장 큰 걱정이었다. 뇌부종과 호흡 기능 저하가 유발되지 않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현 상태까지.

‘바이탈은 분명 나아졌고, 드레인으로 나오는 피도 많이 줄었다. 패혈증과 혈액 응고 장애도 이 정도면 이겨 낼 수 있는 수준인데, 왜 깨어나지 못할까? 우리가 놓친 것이 무엇일까?’

고민이 깊어졌다.

정신적 영역은 의사의 한계가 극명하게 나타나는 분야다. 외상으로 초래된 문제기 때문에 신경외과와 유기적인 협조를 구할 뿐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이제 하루가 더 지나면 일주일째다.

지금까지 이토록 오래 혼수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환자는 경험하지 못했다.

회복의 기로에만 터닝 포인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반대 경우도 가능하다.

앞으로 모든 것이 변할 것이다.

기도 손상 및 구강 내 세균으로 인한 문제 등 갖가지 문제로 기관 내 삽관을 장시간 유지할 수 없다.

결국 목에서 기도를 열어 새로운 호흡 통로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은 모든 기능을 저하시킨다. 특히 패혈증 증세와 겹친 폐렴 등의 호흡기 감염은 주요 사망 원인이 된다. 다발성 장기 부전이라도 유발되면 어떤 치료도 소용이 없다.

욕창 등 육체적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상처를 살폈다.

절개창은 몇 바늘 꿰매지도 못했다. 이제는 단단하게 아물기 시작해야 하건만 약하게 붙은 상태였다. 그나마 하부에 위치한 인공 항문의 색과 기능이 유지돼 다행이었다.

8개의 드레인을 통해 나오는 삼출물은 항상 핏물을 머금은 채였다. 시간이 갈수록 옅어지고 있지만 총알이 박혔던 후복막, 가루처럼 부서진 간, 수를 세기도 어려운 혈관 손상까지 어디선가 조금씩 꾸준히 피가 흘러나오는 양상이었다.

십이지장과 연결된 소변 줄과 담관에 삽입된 T-tube는 원했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빈 수액 통에 연결된 라인을 따라 맑은 소화액과 갈색 담즙이 배출됐다.

느리지만 분명한 진전을 보였다. 그간의 경과를 볼 때 많이 좋아졌다고 해도 무방했다. 의식만 돌아온다면 회복할 것이란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혼수상태 6일째다.

수술 중에만 시간이 생명인 것은 아니다. 지금도 시간은 생명이었다. 희망과 절망이 교차되는 상황이었지만 희망의 끈은 너무도 가늘고 약했다.

유일한 희망은 하루라도 빨리 눈을 뜨고, 한시라도 빨리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이는 것이다. 스스로 숨 쉬고, 스스로 움직이는 것만이 회복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화요일 저녁, 어둠도 깊어졌다.

오늘도 힘든 킵이 이어졌다.

이미 지탱하지 못할 피곤을 안고 있는 전공의들에게 가랑비에 옷 젖듯 새로운 피로가 누적되고 있었다.

“만석아, 내일이 일주일째지?”

“이러다 기도 절개까지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앞으로 삼사 일이 고비야. 김지훈 선생과 상의해서 결정하자. 아무래도 장기전이 될 것 같다. 체력 조절 잘해.”

“상수가 많이 도와줘서 아직은 버틸 수 있습니다.”

“차상수? 너무 얌전하고 조용해서 탈이야. 써전은 너나 나처럼 좀 시끌벅적해야 유리한데 말이야. 그게 써전의 기본자세 아니겠어?”

손일석이 머리 하나 정도 큰 오만석의 어깨를 두드리려다 말고 입맛을 쩝쩝 다셨다.

“만석아, 어깨 좀 살짝 내려 볼까? 형이 영 불편하다. 환자 치료할 때 살살 해. 이놈의 손은 스쳐도 사망일 것 같네.”

형이라는 말에 오만석이 얼굴을 붉혔다.

힘든 와중의 가벼운 농담은 활력이다.

진지함과 가벼움 속에 킵이 이어졌다.

밤마다 손일석과 오만석의 얼굴에 물이 마를 때가 없었다. 졸음을 쫓기 위해 시도 때도 없이 찬물에 머리를 담고 정신을 일깨워야 했다.

‘후우! 총상 환자는 운이 좋아야만 살릴 수 있는 걸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일까? 만석이 정성이 통해야 할 텐데.’

그렇게 혼수상태 6일째 밤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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