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827화 (827/1,329)

10화. 노력 없는 기적은 없다 Ⅱ (2)

만세라도 부를 것 같았다.

‘성민이처럼 논문을 핑계로 나도 라파로를? 좋았어.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준 기회야.’

급기야 미친놈처럼 입을 쫙 찢었다.

‘이 자식이 왜 이렇게 좋아하지?’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생각에 힐끗 이혁원을 쳐다보던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 할 일을 빨리 마치고 피곤부터 풀어야 했다.

‘총상은 처음인데 며칠은 우리도 킵을 해야 하겠지. 틈틈이 자긴 하겠지만 일석이 혼자 버틸 상황이 아니다. 새벽에 교대하자.’

바쁜 일상을 끝냈다.

화요일 늦은 밤부터 시작해 금요일 저녁까지 잠도 거의 못 자고 숨 가쁘게 달렸다. 의료진의 극심한 피로는 환자에게 치명적인 일이다.

7시 땡 치자마자 퇴근해 밥 먹고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꿈결처럼 들린 고경아의 목소리에 몇 마디 답을 한 것 같기는 했다.

따르르르릉! 따르르르릉!

요란한 자명종 소리에 눈을 떴다.

새벽 3시다.

일어나기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7시간 정도의 수면으로는 피곤을 풀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물에 단비 같은 휴식이었다.

뒤척이는 고경아가 깰까 봐 숨소리까지 죽여 가며 조심조심 씻고 옷을 입었다.

여전히 무거운 몸을 이끌고 병원으로 향했다. 새벽 찬바람이 스산하게 불었다.

이동현 환자는 여전히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다.

오만석이 두 눈을 부릅뜨고 곁을 지켰다.

김지훈이 손일석과 교대하는 그 순간까지 외상 치료에 대해 의견을 나누며 환자에게 모든 신경을 쏟아부었다.

체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선생님, 아침까지 제가 있겠습니다. 진우하고 병옥이 형도 같이 서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들어가 쉬시죠.”

“지금이 제일 힘들 때야. 난 충분히 자고 왔으니까 너도 잠깐 쉬고 와.”

몇 번이나 눈치를 주었지만 오만석이 엉덩이를 떼지 않았다.

얼마 후, 송진우와 강병옥이 눈을 비비며 중환자실 문을 열다 말고 후다닥 달려왔다.

“선생님, 이 시간에 웬일이십니까? 만석아, 환자 변동 있었어? 우리한테 먼저 연락했어야지.”

핀잔에 가까웠다. 김지훈 때문일 것이다.

교수가 지나치게 개입하면 전공의에겐 부담일 수 있었다. 자칫 믿지 못한다는 인상을 줄 우려가 있었지만 상황을 오해할 후배들이 아니었다. 3년 차 3명이 이렇게 신경을 쓰다니 고맙고 믿음직스러웠다.

“손일석 선생 재우러 왔어. 한 사람만 교대하면 되는데 왜 둘이 와? 잠 안 자?”

강병옥이 머리를 긁적였다.

“요새 저희들도 일이 너무 많습니다. 단 몇 시간 킵을 하더라도 교대로 해야 안전할 것 같습니다.”

연차를 가리지 않고 일이 폭주하고 있었다.

인력 부족이 심각하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모두들 있는 힘, 없는 힘을 다 짜내 환자를 보고 있었다.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큰일 났네. 일석이하고 만석이는 5월까지 일하고, 9월에 4년 차까지 손 놓으면 난리 나겠다. 이대로는 누구도 버티지 못할 텐데 돌파구가 없을까?’

딱히 답이 없어 답답한 일이었다. 두고두고, 아니 지금부터 고민해야 할 일임은 분명했다.

어쨌든 후배들 덕에 연구실에서 등을 기댈 수 있었다.

‘흐음! 지금 집에 갔다 아침에 오기엔 시간이 애매모호하네. 그냥 집에서 잘 걸 그랬나?’

잠시 스쳐 간 생각에 불과했다.

손일석은 꿈나라로 직행했고, 깜빡 눈 한 번 감고 떴는데 아침이었다. 조금 더 피곤이 풀려 평소처럼 일과를 시작할 수 있었다.

중환자실부터 들렀다.

혼수상태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다.

8개의 드레인, 십이지장에 연결된 소변 줄, 담즙을 빼내기 위한 T-tube, 수혈 라인, 바이탈을 체크하기 위한 줄까지 보는 것만으로도 심난하다 못해 험악했다.

하나하나 점검했다.

다행이라면 2차 수술 후에도 더 이상 나빠지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문제가 됐던 인공 항문도 발그스름한 색을 유지하고 있긴 했다.

회진과 오전 일과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는 시간이 많아질 것이다. 간호사에게 단단히 당부하고 보호자를 만났다.

어떤 희망도 주지 못했다. 아내와 아들의 눈에 절망이 감돌았다.

병동으로 올라가는 내내 눈가만 찌푸렸다.

‘깨어날 수 있을까?’

갑갑한 마음에 한숨을 쉬며 뜻 모를 혀 소리를 내던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복도 끝에서 작은 아이가 보였다. 아무리 어둡고, 멀리 있어도 못 알아볼 수 없다.

허수진이다.

키에 비해 턱없이 큰 보행기에 의지해 걷고 있었다. 만세를 부르듯 두 팔을 올려 손잡이 부분을 잡고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꽤 아프고 힘든지 울상이었다.

절룩거리며 곁을 지키는 아버지는 딸이 걷는 것만으로도 좋은지 웃기만 했다. 장수연은 조마조마한 눈길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두 눈으로 빤히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올라온 지 하루밖에 안 됐는데 벌써 걸어?’

너무 빨랐다.

수술 부위가 안정되려면 한참은 더 있어야 했다. 성급하고 무리한 활동은 도리어 문제를 만들 수 있었다. 수술 부위에 사소한 충격이라도 가해지면 어떤 문제를 유발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걱정이 앞섰다.

부리나케 달려가며 물었다.

“혁원아, 네가 운동하라고 했어?”

“아니요. 그런 적 없는데요.”

이혁원도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당황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수진아, 너 왜 나왔어? 누가 운동하라고 했어?”

“선생님이요.”

울상이던 허수진이 김지훈을 보며 헤 웃었다. 마지 ‘나 잘했죠?’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정말 내가 그랬어?”

‘무슨 말이지? 내가 언제 그랬지? 너무 피곤하고 졸려서 헛소리를 했나?’

장수연이 콧등을 찡그렸다.

“어제 회진 도실 때 운동하라고 하면서 빨리 운동해야 밥 먹을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수진이가 운동 소리만 기억하는 모양이에요.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네요.”

아! 그런 말을 하긴 했다.

다른 환자 같으면 두 팔 들고 환영할 일이지만 허수진은 경우가 달랐다. 이대로 두고 보면 밑도 끝도 없이 운동만 할 것 같았다.

안정도 운동 못지않게 중요하다.

불행히도 아버지는 통제하지 못할 테고, 장수연도 자신의 일을 봐야 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빨라도 너무 빨라.’

입맛을 다시던 김지훈이 허수진을 살살 달래 드레인부터 살폈다. 일어나 움직인 탓에 삼출물 양은 많았지만 깨끗했다. 일단 안심이 됐다.

“배에서 무슨 소리 나는지 볼까?”

청진을 했다.

살짝 배를 누르자 절개창이 아픈지 얼굴을 찡그리며 몸을 비틀었다. 명치부터 아랫배 끝까지 난 상처 때문에 일어나 앉는 것도 힘들 텐데 걷다니 새삼 놀라웠다.

꼬르륵! 꼬르륵!

더 놀랍다. 장을 건드리지 않았다지만 수술 후 3일 만에 장 소리가 제법 또렷하게 들렸다. 병실에 올리면서도 기대하지 못한 회복 속도였다.

“가만히 있으면 안 아프니?”

“아파요? 근데 배고…….”

뽀옹! 뽀오오옹!

익숙한 소리와 함께 가족과 의료진에게 향기로운 냄새가 퍼졌다. 장수연에게도 반갑고 즐거운 소리일 것이다.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빨라도 너무 빨랐다.

흠칫 놀란 김지훈과 이혁원이 허수진의 볼이 빨갛게 물드는 것을 보며 웃고 말았다.

“수진이가 낸 소리 맞지?”

“아니에요. 나 아닌데.”

창피한 모양이다.

“방귀 뀌어야 물 먹을 수 있는데.”

“정말요?”

“그럼 정말이지. 거짓말인지 아닌지 이 방에 계신 분들한테 물어봐.”

몇몇 환자와 보호자가 웃으며 응원했다.

“선생님 말씀이 맞아. 어이구! 어린것이 참 용하네. 그렇게 큰 수술을 받고 웃는 것 좀 봐.”

허수진의 눈이 반짝였다.

“선생님, 내가 뀌었어요. 물 먹어도 돼요?”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이었지만 14살 아이가 그런 상황을 알 리 만무했다.

신중한 눈으로 허수진을 보며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진아, 내일도 안 아프면 물 먹게 해 줄 테니까 하루만 더 참자. 그럴 수 있지?”

“정말이죠?”

너무 좋아했다.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활짝 웃었다.

수술 전후로 금식 기간만 일주일 가까운 데다 제대로 식사를 해 본 기억조차 없을 허수진이었다. 식사 시간마다 풍기는 음식 냄새를 참는 것이 더 큰 고통일지도 몰랐다.

머리를 쓰다듬던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허수진의 회복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순조롭게 회복되는 환자들이 아니었다면 엄청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허수진은 도리어 어깨에 힘을 실어 주었다.

어른도 보이지 못할 작은 아이의 놀라운 의지와 의료진의 노력이 빚어 낸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동현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였다.

살고자 하는 의지!

‘지금까지 배 속을 수없이 보았지만 알 수 없는 구석이 너무 많네. 이동현 환자도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을 넘어섰으면 좋겠다.’

절실한 바람이 현실이 되길 간절히 바랐다.

생각도 잠시.

허겁지겁 허수진을 말려야 했다.

“수진아, 한 시간 있다가 걷자. 무리하면 안 돼.”

수술 부위가 떠오르며 덜컥 겁까지 났다. 환자에게 운동하지 말라고 극구 만류해야 하다니, 의사가 된 이후 처음 겪는 일이었다.

정말 강인한 의지와 생명력이었다. 힘들고 모진 시간을 견뎌 낸 이유일 것이다.

써전에게 요구되는 것은 손만이 아니다. 이론과 실전을 겸비해야 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주말 집담회가 열렸다.

기형종은 수술 전에 이미 철저히 대비했지만 총상 환자 치료에 대해서는 손도 대지 못했다. 굳이 참석하지 않아도 될 손일석이 스윽 옆에 앉았다.

“총상 환자 때문에 들어왔어? 잘못하면 너 나하고 같이 타 죽을 수도 있어.”

“반드시 들어오라는 이혁민 선생님 오더가 떨어졌다. 어째 뒤통수가 서늘한 게 느낌이 안 좋아. 누굴 조심해야 하지? 이런 면에서는 동물적 감각을 자랑했는데, 하도 오래간만에 들어왔더니 감까지 떨어졌네.”

한가하게 농담이나 할 자리가 아니었다.

드물다 못해 평생 못 볼 수도 있는 외상이 총상이다. 교수들 중 누가 어떤 질문을 할지 예측조차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손일석에게 총상 치료에 대해 듣는 자리를 만들 생각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죽는 소리 할 사람은 따로 있었다.

“사실 내가 문제지. 벌써 땀이 난다.”

“정말 그럴까?”

“어느 선생님이 총상에 대해 너만큼 아시겠어? 도움이 되라고 널 불렀을 거야. 내 생각이 틀림없으니까 넌 마음 푹 놔.”

“하긴 신기동 선생님도 안 계신데 기형종도 별다른 말씀 없으시겠지. 혈관은 우리잖아.”

다소 마음이 놓이는지 제법 목소리가 컸다. 감이 떨어지긴 떨어진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슬며시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 교수님들을 공격할 수는 없지. 일석아, 미안하다. 나도 살자.’

주말 집담회가 시작됐다.

예측대로 기형종과 총상 수술이 바로 거론됐다.

타이밍이 중요하다. 이혁민 교수가 멍석까지 깔아 줬다.

“손일석 선생, 다들 궁금한 점이 많을 거야. 총상에 대해서 가장 잘 알 테니까 충실하게 답해라. 질문할 거 있으면 시작하세요.”

첫 번째 포문이 열리는 순간 손일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김지훈이 태연한 표정으로 먼저 질문을 한 것이다.

아군일까? 적군일까?

“손상 부위를 보니까 의외로 심각하던데, 그 이유가 뭡니까? 관통상하고 차이가 있습니까?”

이 정도 질문은 껌값이었다. 교수들의 칼날을 같이 피하자는 의미일 수 있었다.

‘어차피 나왔을 질문이지.’

“흔히 총알 회전 때문에 손상이 크다고 알고 있지만 절반만 맞는 말입니다. 가장 주요한 원인은 총알이 조직을 뚫고 들어갈 때 뒷부분에 진공상태가 유발되기 때문입니다. 외부 공기가 갑자기 유입되면서 압력이 급격하게 증가됩니다. 그 때문에 마치 폭발하는 것처럼 조직을 터트리는 거죠.”

손일석의 열강이 시작됐다.

“실제 수술 시 손상을 보면 회전력에 찢어진 것만이 아니라 파열된 양상이 상당히 많이 관찰됩니다. 관통상일 경우에는 보다 복합적인 형태의 손상을 보게 됩니다.”

질문하지 않았던 내용까지 줄줄 흘러나왔다. 눈은 시뻘겋고 얼굴은 피곤해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 어디서 이런 열의와 힘이 나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듣기 힘든 내용이었다.

교수들은 물론 구석에서 졸기 바쁘던 1년 차들까지 관심을 보였다.

완전히 몰두해 침을 튀기는 손일석을 보던 김지훈이 눈을 반짝였다.

하늘이 준 기회였다. 여기서 고삐를 풀면 불길이 어디로 향할지 빤한 일이었다. 직접 타며 배우나, 태우고 타는 것을 보며 배우나 결과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피곤한 놈들끼리 치고받으면 덜 피곤한 놈이 이기기 마련이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란 말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순간이었다.

김지훈의 눈에서 시뻘건 빛이 번쩍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