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823화 (823/1,329)

8화. 동료가 있기에 Ⅲ (2)

어느 틈엔가 오만석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매일 밤 응급실에서 살다시피 한 탓인지 피곤이 눈에 보였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연 이틀 밤 동안 벌어진 수술에 한 번도 들어오지 않은 후배가 있다.

“만석아, 병옥이는?”

“과장님 수술 들어갔습니다.”

“그래? 힘들겠지만 환자 잘 봐. 수진이는 많이 좋아졌지만 방심하면 안 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힘찬 목소리를 믿을 수 있었다.

너무 피곤한 탓인지 머리만 띵할 뿐 졸음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둑 무너진 것처럼 잠이 몰려올 것이다.

똑같은 처지인 손일석은 오늘 밤에도 근무해야 한다. 체력이 받쳐 주지 못하면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2차 수술을 언제 할지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챙겨야 했다.

“일석아, 여긴 우리한테 맡기고 빨리 가서 자.”

“이 환자 눈 뜨는 거 봐야지. 반드시 2차 수술 받을 수 있게 회복시키고 싶다.”

“오늘 밤에도 근무해야 되잖아.”

“넌 낮밤으로 일하잖아. 킵은 만석이하고 내가 맡아서 조절하고, 알아서 쉴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틈틈이 쉬어.”

“네가 킵을 한다고?”

“후배들 꼴 좀 봐. 진우는 아예 벌겋지 않은 데가 하나도 안 보이더라. 후배 죽였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다. 아니지. 이참에 펠로우 경쟁할지도 모르는 놈 하나 보내 버려?”

오만석이 흠칫 놀라며 움찔거렸다.

“넌 걱정하지 마, 인마. 떡대만으로도 내가 졌다. 아니지. 얼굴 보니까 마음이 달라지네. 자식이 어떻게 전임 교수보다 얼굴이 좋을 수 있지? 세상 거꾸로 굴러가네. 애들 풀어서 이 자식까지 확 보내 버릴까?”

이 와중에도 농담이다. 누구보다도 긍정적인 성격 덕분이었다.

“연 이틀이야. 힘들지 않겠어?”

손일석이 눈가를 비비며 중얼거렸다.

“내 욕심 차리자고 혈관하고 중증 외상 환자 수술 배우는 것만은 아니다. 살리고 싶어서야. 솔직히 어제오늘처럼 의사로서 해야 할 일을 할 수만 있어도 마음 편할 것 같아. 수술실조차 못 들어가면 어쩔 수 없다고 아무리 변명을 해 봐야 며칠 동안 제대로 못 자거든.”

가슴속에 숨은 뜨거운 열정과 고민이 느껴졌다.

어느 곳에 있든 배우고 느끼는 것이 있는 법이다. 의무이기 때문에 간 군대에서 손일석은 좌절과 희망을 동시에 본 모양이었다.

환자가 위중하기 때문인지 무거운 분위기가 도리어 달갑지 않았다. 손일석도 그런 듯 김지훈을 째려보며 손가락질을 했다.

“에이! 군대 구경도 못한 놈이 알 리가 없지.”

“나도 육방 갔다 왔어. 솔직히 군의관이 군대 간 거냐?”

“그래서 네가 하오문도 못 되는 거야, 인마. 강호의 위계질서가 얼마나 엄한데 어디서 쫄다구 출신이 장교한테 덤벼? 졸은 빨리 사라져.”

마음에 없었던 농담 덕에 이동현 환자가 주는 스트레스를 잠시 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의사는 환자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더 큰 부담이 남았다.

“일석아, 보호자 같이 만나자.”

손일석이 인상을 박박 쓰며 일어났다. 마음이 편치 못한 모양이었다. 심적 부담에 육체적 피로까지 겹쳐 팔다리를 움직이는 일마저 힘들게 했다.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던 보호자가 달려왔다.

“선생님, 아버님 어떠십니까? 면회는 안 됩니까?”

수술을 마쳤다는 사실만으로 희망을 본 모양이었다. 사실대로 말하면 애써 품은 희망이 산산이 사라질 것이다.

의사로서 무척 힘든 때였다. 마음이 급격하게 무거워졌다.

“손상된 간과 쓸개를 제거했고, 십이지장까지 손상돼 위와 소장을 연결해 새로운 길을 만들었습니다. 소장 말단부와 대장 두 곳도 파열돼 인공 항문을 두 개 빼야 했습니다.”

눈만 껌벅거렸다.

자세하게 다시 한 번 설명을 하자 아내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털썩 주저앉았다. 성한 곳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 심각한 말을 해야 했다. 입을 열기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환자분 상태가 너무 나빠 손상 부위를 모두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현재 의식도 없는 상태지만 상황이 나아지는 대로 2차 수술을 해야 합니다.”

“2차 수술이라니요?”

“상행결장을 제거했어야 했는데 하지 못했습니다. 인공 항문도 다시 만들어야 하고요. 수술 중 심정지가 발생하기 직전까지 몰려 수술한 부위도 안전하게 처리했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2차 수술로 해결하지 못하면 회복되시기 어렵습니다.”

아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럼 언제 2차 수술을 합니까?”

“먼저 환자 상태가 좋아져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마취를 할 수 없는 상태가 지속되면 2차 수술은 불가능합니다. 총상은 일반 외상과 완전히 다릅니다.”

아들이 눈 둘 곳을 찾지 못했다. 환자의 아내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내가 뭐랬어? 절대 안 된다고 했잖아? 안 된다고! 이놈아! 이놈아!”

불과 하룻밤 전, 사냥을 화제 삼아 웃고 떠들며 함께 저녁을 먹었다. 살기 위한 일이 아니라면 산짐승 잡는 것 아니라며,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어머니의 못마땅한 눈치와 반대도 무시했다.

며칠 후 함께 사냥을 떠나기로 한 지인이 총을 만져 볼 때까지만 해도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지인이 무심코 방아쇠를 당기는 그 순간까지 말이다.

탕! 탕!

귀를 찢는 소리에 현실 감각이 사라졌다.

왜 총알이 들어 있을까?

도대체 누가 넣었을까?

아버지였다.

들뜨고 설렌 마음에 총알을 장전했다는 사실마저 잊고, 알려 주지도 않았다. 초보가 범하는 가장 큰 실수라고 분명히 들었지만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은 것이다.

자책에 사로잡힌 아들이 통곡을 했다.

조금만 주의했다면, 손에 들린 것이 총이라는 사실만 기억했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들이 김지훈의 손을 잡으며 무릎을 꿇었다.

“선생님, 제발 아버지를 살려 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내가 사냥 가자는 소리만 안 했어도, 내가 총만 일찍 가져오지 않았어도……. 크흐흑! 다 제 잘못입니다. 제발!”

애절하고 슬픔에 몸조차 가누지 못했지만 때늦은 후회였다. 허술한 총기 관리, 자신과 가족의 목숨이 달린 안전을 도외시한 결과였다.

의사의 영역이 아니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저 상투적인 말만 할 수 있었다.

허수진이 준 기쁨과 희망이 이동현 환자가 준 불안과 절망에 묻혔다. 부디 누구 한 사람이라도 희망을 버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조각 잠을 잤다. 반드시 봐야 할 외래 환자 진료를 빼먹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식욕이 완전히 사라져 점심도 건너뛰었다. 공복이 가져온 가벼운 자극 덕에 간신히 오후 일과까지 끝낼 수 있었다.

“지훈 씨, 오늘은 어떻게 할 거예요?”

“수진이는 정말 빠르게 좋아지는데, 총상 환자 상태가 너무 안 좋네요.”

“전공의 선생님들 믿고 집에서 쉬어요. 이젠 지훈 씨가 옆에 지키고 서 있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을 때예요.”

맞는 말이었다. 허구한 날 잔소리하는 시어머니 꼴일 것이다.

퇴근하기 전 중환자실을 들렀다.

“선생님, 아프고 무서워요.”

“오늘 밤만 참아. 내일은 병실로 올라가자.”

절개창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보통 아닐 텐데 방긋 웃었다. 웃는 것만으로도 배가 아플 때였다. 금방 울상이 돼 눈물을 뚝뚝 흘렸지만 도리어 좋은 징후였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이동현 환자를 찾았다.

여전히 죽은 듯 눈을 감고 있었다.

혼수상태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버텨 주는 심장과 폐 기능, 간헐적으로 떨어지는 한 방울의 소변에 한 가닥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강병옥이 킵을 하고 있었다.

“만석이하고 손일석 선생은?”

“만석이는 하루 종일 킵해서 쉬라고 했고, 손일석 선생님은 한두 시간마다 들르십니다.”

“그래? 힘들더라도 오늘 밤 잘 봐. 사소하다고 지나치지 말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 수고해.”

더 이상 몸을 가누기도 힘들었다. 막 일어서려는 순간 손일석과 오만석이 들어왔다.

“지훈아, 너는 자도 제대로 못 잤을 텐데 여기 왜 있어? 빨리 들어가. 이러다 쓰러진다.”

“틈틈이 잤어. 걱정하지 마.”

“네 얼굴이나 보고 그런 말 해. 후우! 변동이 거의 없네. 병옥아, 아직도 부정맥 기운이 보이지?”

손일석이 강병옥의 노티에 귀를 기울이며 환자 상태를 살폈다. 오만석은 소변량을 체크한 후 드레싱을 통해 이상 유무를 확인했다.

어딘지 모르게 동작이 굼떴다. 누적된 피로가 한눈에 보였다. 모든 힘과 열정을 짜내고 있었다.

‘정성만으로 깨어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때 박동 소리가 미세하게 변했다.

띠띠띠띠띠띠띠띠띠!

미세하게 남아 있던 불규칙성이 확실하게 사라졌다. 90퍼센트 밑을 맴돌던 산소 포화도가 서서히 증가했다. 한 방울의 소변에 이어 또 한 방울이 똑똑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급기야 심장박동 수까지 떨어지기 시작했다.

140-130-120-110.

빠르다고 해도 의미심장한 변화였다.

퇴근할 때가 아니었다.

모두들 달라붙어 이동현 환자의 상태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숨 막히는 시간이 흘렀다. 더 이상 좋아지지 않았지만 나빠지지도 않았다. 마침내 낭떠러지 끝에서 물러선 것이다.

딱 한 발일지라도 분명한 희망이었다. 결코 안심할 수 없지만 최악의 고비는 넘겼다.

모두들 입을 열지 못했다.

기적적으로 회복되는 것일까?

기적이 아니다. 삶을 구하는 것은 본능이자 의지였다. 쉽게 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삶의 끈이다.

아슬아슬하게 절벽 끝까지 밀렸던 환자의 심장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최선을 다하는 의료진이 흘린 땀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오만석이 고함을 질렀다.

“환자분, 눈 떠 보세요! 내 말 들립니까?”

손가락과 발가락에 강한 자극까지 주었다. 반복해 소리 지르고 자극을 주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일부분이나마 몸은 돌아왔지만 정신은 여전히 어둠 속에 갇혀 있었다.

성급한 기대였다.

김지훈이 또 다른 불안에 눈가를 찌푸렸다.

절대 2차 수술을 피할 수 없다.

빠르면 빠를수록 유리하지만 웬만한 회복으로는 시도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재수술을 할 수 있을까?’

손일석도 이를 악물고 있었다.

시간이 가도 더 이상의 변화는 없었다.

내일을 위해, 언제 흔들려도 이상할 것이 없는 이동현 환자를 위해서라도 쉬어야 했다.

듬직하게 자리를 지키는 후배들을 보며 퇴근했다.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밥 한술 뜨자 몸을 가누기도 힘든 피곤이 다가왔다. 그대로 뻗었다.

얼마나 잤는지 모르지만 누군가 거칠게 흔드는 통에 눈을 떠야 했다.

“지훈 씨, 전화받아요.”

고경아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손일석, 이혁원, 송진우, 오만석, 오하석.

이동현 환자를 뺑 둘러싼 채 복부 절개 창을 보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듬성듬성 한 봉합이 문제가 아니라 절개 창 사이로 빼낸 인공 항문 때문이었다.

불과 10여 분 만에 다급하게 처리한 부분이다. 발갛거나 수술 중 조작으로 피멍이 관찰되는 것이 정상적인 소견이다. 환자 상태를 고려하면 창백한 정도까지 용인할 수 있다.

그런데 상행결장은 물론 소장의 인공 항문까지 모두 까맣게 변한 상태였다.

‘이게 무슨 일이지? 혈관이 눌렸나?’

포셉으로 인공 항문을 다소 강하게 쳤다.

강한 자극은 연동 운동을 유발해야 한다.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색깔과 운동성으로 볼 때 죽어 가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한마디로 장이 썩고 있는 것이다.

생각할 수 있는 원인은 다양했다.

불량한 환자 상태가 장 괴사를 유발했을 수도 있다. 패혈증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또는 절개창 사이에 끼인 인공 항문에 과도한 압력이 가해져 혈류가 차단됐거나, 애초에 혈관을 지나치게 제거했다면 장 조직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

절개 창과 인공 항문 사이로 포셉을 밀어 넣었다. 약간의 저항만 느껴질 정도로 공간 여유가 있었다. 상당히 고통스러운 자극에도 환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과도한 압력 때문은 아니네. 일석아, 확실히 혈관 문제겠지? 이쪽으로 들어오는 혈관까지 제거한 걸까?”

배를 열어 보지 않아도 원인을 유추할 수 있었다.

광범위한 손상으로 대장과 소장 혈관 다수를 묶었다. 회복되지 않은 환자의 혈압과 불량한 전신 상태는 그나마 남아 있던 혈류를 더욱 감소시켰을 것이다.

모든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우려했던 문제가 너무 빠르게 터졌다. 가슴속이 꽉 막혀 왔다.

이혁원이 검사 결과를 보며 말했다.

“패혈증 증상이 확실하게 보입니다. 혈류가 회복될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지금 당장 수술하자고?”

“그게 최선으로 판단됩니다.”

위험부담이 높은 정도가 아니었다.

“의식 상태는 변화 없었어?”

“수술 후 계속 혼수상태입니다.”

“바이탈은?”

“부정맥은 좋아졌지만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소변은 얼마나 나왔어?”

“시간당 15cc 정도 유지됐습니다.”

정상적으로 나와야 할 소변량의 절반이었다.

신장 기능이 간신히 유지될 정도였다.

모든 지표가 수술은 차치하고 마취조차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 두고 보면 장이 썩으며 온갖 문제를 유발할 것이다. 패혈증을 악화시키고, 혈압까지 떨어트려 화복될 가능성은 완전히 사라진다.

빠르게 수술하지 않으면 환자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만 지켜보게 될 것이다.

불과 하루도 안 돼 희망이 보이지 않는 치명적인 선택의 기로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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