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권한과 부담 Ⅰ (1)
이럴 수가!
“김지훈, 유방 종물 수술 있다. 하석이 불러서 준비해.”
“예? 저도 들어갑니까?”
“그럼 오하석이 퍼스트 서나? 병옥이는 내가 따로 시킨 일이 있으니까 부르지 마라. 사이즈 크다. 준비 잘해라.”
손일석의 말이 며칠 만에 현실로 변했다.
후배, 동기 태우면서 너무 좋아했다.
사실 이혁민 교수와 송재덕 교수의 결정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해답을 줄 스승과 얘기할 시간도 없어 일부러 더 즐거운 척한 면이 있었다. 어쨌든 변명일 뿐, 응당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유방 수술 들어간 지 상당히 오래됐다. 곧바로 수술이 이어져 준비할 틈조차 없었다. 암도 아니고 단순 종물이라면 큰 문제 없을 것이라 여겼다.
‘전공의도 아니고 이제 전임인데 설마?’
기억을 살려 오하석과 함께 수술 준비를 했다. 일주일도 안 돼 눈가가 까매질 정도로 초췌해진 오하석이 안쓰러웠지만 이겨 내야 할 일이었다.
“이제 밥은 빨리 먹지? 저번처럼 느릿느릿 먹으면 힘들어서 일 못한다.”
“헤헤! 아직 습관이 안 됐습니다.”
걱정 대신 엉뚱한 말을 꺼냈지만 특유의 웃음을 유지하고 있는 오하석이 꽤 대견했다. 생각해 보면 처지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우스운 일이지만 집에서 잠자고 출퇴근한다는 정도의 차이만 날 수도 있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래도 내가 백배 편하지. 100일 당직 또 서라고 하면 난 도망간다.’
음성, 구미에서 연달아 100일 당직을 섰다는 기억이 떠오르자 절로 몸이 떨렸다. 그때 무슨 생각이었는지, 어떻게 버텼는지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옛 생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마이너 수술이라도 몇 년 만에 들어가는 수술이다. 원칙과 기본은 같지만 부위마다 특별함이 있기 마련이다.
오하석에게 눈치까지 줘 가며 최선을 다했다. 수술이 거의 끝날 무렵 김지훈이 입을 오물거렸다.
감히 판단할 수 없지만 수술에 임하는 이혁민 교수의 태도나 눈빛이 한결같았다. 위암 수술할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유방이나 갑상선에 어떤 의미를 두고 있는지 몰라도 과정 하나하나에 모든 열정을 쏟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폭탄 발언 이후 누구도 변하지 않았다.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다. 순간 긴장 풀어졌나 보다.
혹시 사이즈가 크기 때문일까?
다 떠나 잡생각이다.
전임 됐다고 이혁민 교수의 눈에 들 리 없었다. 설혹 마음에 들어도 결코 미진한 면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스윽 다가오는 눈빛에 나름 한 소리 들을 각오를 하며 마음의 도마를 깔았다.
“니 이래 가지고 제대로 교육시킬 수 있겠나? 여자에게 의미가 큰 부분이다. 예전에 분명히 미용에도 신경 쓰라고 얘기했을 텐데, 손이 이게 뭐야? 오하석, 내 말이 틀렸나?”
“아닙니다. 중요합니다.”
눈치 없는 놈!
다닥! 다닥! 다다다닥!
잘근잘근 다지기 시작이다.
유방암도 아니고 단순 종물에, 집도도 아니고 퍼스트를 섰다. 그것도 전임인데 ‘설마’가 사람 잡은 것은 물론 체면까지 말이 아니었다.
“니는 결혼도 했고, 1년 차도 아는 사실을 어떻게 모를 수 있지? 혹시 환자 차별하나? 다음 주에 갑상선암하고 유방암 수술 줄줄이 있다. 그때 보자.”
우아악!
어쩌다 있는 일이 아니었다.
1년 차 앞에서 조곤조곤 다져진 것도 화끈거릴 일인데 아예 폭탄까지 선사받았다.
한숨이 절로 터져 나오는 순간 입가에 미소는 왜 걸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선생님, 지금처럼 평생 가르쳐 주십시오.’
타고도 좋아하다니 큰일 났다.
돌연 어디선가 환청이 들렸다.
‘넌 전임이 아니라 전공의 7년 차야.’
어째 손일석 목소리 같았다.
전임들의 운명일까?
“올해 안으로 끝낼 수 있겠어?”
신현수 역시 재가 돼 수술실을 배회했다. 온 얼굴에 이준영 교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복강경 기구를 보는 눈가가 부르르 떨렸다.
“경석아, 똑바로 하자. 똑바로. 너도 주임 돼야 하잖아? 주임. 나 그만두기 전에 볼 수 있겠니? 너 이러다 평생 전임만 하는 거 아니야? 걱정된다. 걱정돼.”
대장암 수술을 끝낸 이경석이 땀을 뻘뻘 흘렸다. 송재덕 교수가 평소와 달리 졸졸 뒤를 따르며 사정없이 망치를 휘두르고 있었다. 주임 교수 자리는 왜 넘겨주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눈치도 없이 하마터면 소리 내 웃을 뻔했다.
‘스승님, 선생님, 항상 우리 곁에 있어 주십시오.’
이 모든 일이 끈적끈적 달라붙었던 지난 고민을 씻어 주는 일이었다. 교수들의 힘을 느끼고 더 배울 수 있다면 평생 활활 타도 좋았다.
바쁘다, 바빠!
간담도, 혈관, 갑상선, 유방, 응급 수술, 외조.
새벽바람 맞고 출근해 저녁 별 보며 퇴근해야 했다. 주중에 단 하루 당직이라는 사실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 덕에 체력을 조금이나마 유지했고, 고경아의 눈 화살도 제법 피할 수 있었다.
타고 배우고, 태우고 가르치며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건강하게 회복된 환자가 주는 보람은 항상 가슴 벅찼기에 절대, 절대 힘든 나날이 아니었다.
누가 보아도 그럴 수가 없다.
‘난 안 힘들다. 하나도 안 힘들다. 우리 아이와 경아 씨를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한다. 열심히 살자.’
솔직히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니 혈관 수술까지 도맡아 하면서 내 수술에서는 왜 이러나? 유방암 때 임파선 적절하게 제거하지 못하면 재발이고, 과도하면 환자 팔 보통 아픈 게 아니란 걸 모르나? 갑상선도 큰일 났네. 퍼스트를 바꿔야 하나?”
도마 위에서 다져질 때는 더욱 강한 자기 최면이 필요했다. 단발머리를 찰랑이는 오하석이 옆에 있어 더욱 그래야 했다.
똑같은 놈 한 놈 더 있었다. 혈관 수술 퍼스트를 절반 이상 선 결과는 달고도 썼다. 연구실에서 가부좌까지 틀고 앉아 도를 닦았다.
‘친구가 아니다. 지훈이는 주임 교수다. 지훈이는 주임 교수다. 빌어먹을 놈이라고 욕하지 말자. 송진우와 강병옥의 눈빛에 침착하게 대처하자. 피스(Peace)!’
어쨌든 환자는 피곤도 잊을 기쁨을 준다.
“지훈아, 고도 비만 환자 내일 퇴원시킨다.”
세련되고 말쑥했던 신현수의 얼굴이 꺼멓게 죽어 가고 있었지만, 냉정함이 섞인 매력적인 미소는 여전했다. 이 또한 환자에서 비롯된 일이 틀림없었다.
“들었어. 혈압하고 혈당 많이 좋아졌더라.”
“수술 때문에 금식을 오래 하긴 했지만, 15킬로그램 정도 빠졌어. 숨 쉬기 한결 편해 보여서 다행이야. 아 참! 조기 위암 두 케이스 있는데 라파로로 하기로 했다.”
“그래? 누구랑 할 건데?”
한 건도 아니고 두 건에, 복강경 하면 김지훈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일이다. 기대 만발이었지만 삽시간에 시무룩해질 수밖에 없었다.
“지동훈 선생님하고. 그동안 이준영 선생님한테 배우느라 우리 고생 많이 했다. 경석이 형도 조기 대장암 하나 있는데 박승준 선생님하고 할 것 같아.”
연타를 제대로 맞았다.
순간 가슴속에 불이 붙었다.
주임 교수가 바뀐 이후 신현수와 이경석의 메이저 수술이 눈에 띄게 늘었다. 그 와중에 복강경 수술까지 치고 나오다니 서늘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보통 불타는 투지에 몸부터 떨어야 하는데 이상스럽게 머릿속까지 복잡해졌다.
‘집중과 선택이 모토였는데, 요샌 너무 많은 부분에 신경 써야 하네. 솔직히 유방과 갑상선은 관심도 별로 안 가는데 꼭 들어가야 하나?’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도 있지만, 일이 너무 많아 도리어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스승이나 이혁민 교수의 의중을 몰라 답답하기까지 했다.
갑갑함을 씻어 주기라도 하듯 기쁜 일이 이어졌다.
드디어 석사 논문이 통과됐다.
7년 만에 학사에서 벗어나 전임이 갖춰야 할 조건을 모두 갖춘 것이다. 박사 과정은 더욱 힘들겠지만 차근차근 준비해야 할 일이었다.
‘의학 석사 김지훈! 우하하하!’
“나하고 현수는 지난달에 통과했는데 뭘 그렇게 좋아해? 석사 누구나 다 따는 거야. 병원에 남았으면 그 정도는 기본이지. 일석아, 너도 열심히 해라.”
이경석의 목소리가 왜 조곤조곤하게 들릴까?
등짝이 은근히 축축해졌지만 아끼는 후배들이 있다. 이혁원과 나종진이 점점 익숙하게 기구를 다뤘다. 각자 목표를 갖고 힘차게 자신의 길을 달려가는 후배는 즐거움이자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마음의 거울이었다.
혼자만 즐거우면 친구 아니다.
마침내 전임 3명의 의견이 통일됐다.
손일석이 고대하고 또 고대하던 혈관 집도를 했다. 첫 집도라고 동기 모두 퇴근까지 미루고 수술에 참여했다. 집도를 축하하기 위해 돌아가면서 침착하게 불길을 날렸다. 순식간에 숯 검댕이 됐지만 천하의 하오문주 손일석이다.
“아자! 아자! 아자!”
어퍼컷을 날리며 웃고 있는 얼굴이 유난히 반갑게 다가왔고, 기대했던 실력을 고스란히 볼 수 있어 안도할 수 있었다.
동기 4명이 모두 모인다면 어떤 수술도 함께할 수 있다는 확신이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어느덧 3월 말이 성큼 다가왔다.
조기 위암과 대장암을 복강경으로 수술하는 모습을 지켜만 보아야 했다. 떡하니 뒤에 서서 참관하는 이준영 교수를 보며 한숨만 내쉬었다. 함께 수술한 지 정말 오래됐다.
‘이러다 스승님과 라파로까지 다 뺏기는 거 아냐? 신현수, 나 없이 너 혼자 잘하나 보자. 치사한 자식! 경석이 형, 조기 대장암 쉽지 않습니다. 도와달라고만 해 봐.’
마음과는 달리 틈만 나면 얼굴을 들이밀었고, 결국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지독한 트레이닝과 수술 후 휴게실을 홀라당 태워 버린 화염방사기가 확실한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신현수, 너무 잘한다. 경석이 형 손도 날아다니네.’
어느 틈엔가 동기 모두 반드시 넘어야 할 단단한 벽이자 높은 계단으로 변해 있었다.
단순히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전공의 때보다 더욱 강한 투지로 온몸을 불태워야 했다.
매분 매초가 바쁘면 결국 사람 하나 죽는다. 하늘도 어여삐 보았는지 어색한 일이 벌어졌다. 결코 믿고 싶지 않았지만 분명 어색했다. 하지만 즐거웠다.
‘도대체 이게 얼마 만이야?’
그동안 두 발 뻗고 쉰 기억이 없었다. 한두 시간에 불과할 테지만 진료와 수술이 싹 사라졌다.
정말 오래간만에 한가해진 김지훈이 따스한 봄날 온기에 잠시 몸을 맡겼다. 시뻘게진 눈도 쉴 겸 가끔은 아무 생각 없이 멍 때리는 시간도 필요한 법이다.
‘아! 좋다. 경아 씨하고 놀러 가고 싶다.’
머리 꼭대기까지 쌓인 피로에 슬슬 눈이 감겼다.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빛이 눈꺼풀을 더욱 무겁게 했다. 온몸이 나른해지며 깜빡 잠이 들었다.
얼마나 졸았을까?
따르르릉! 따르르릉!
깜짝 놀라 눈을 뜬 김지훈이 선잠을 깼을 때 다가오는 기분 나쁜 느낌에 팔다리를 비틀었다. 눈가를 잔뜩 찌푸린 채 간신히 전화를 받았다.
소아과 교수였다.
전공의가 있는데 직접 전화를 하다니 무슨 일일까?
교수가 직접 연락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상당히 급한 환자거나, 전임이 된 덕일 수도 있었다. 자주 보는 교수가 아니었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중요한 환자일 것이다.
(김지훈 선생, 환자 한 명 있는데 오늘 봐줄 수 있을까?)
김지훈이 늘어졌던 몸을 서둘러 추슬렀다.
“급한 환잔가요?”
(응급은 아니지만 수술 여부 때문에 빨리 봐줬으면 좋겠어. 아이 상태가 많이 안 좋아.)
절로 눈가가 찡그려졌다. 불현듯 은비 가족까지 생각났다. 아이의 아픔과 아픈 자식을 지켜봐야 하는 부모의 가슴이 얼마나 찢어질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했다.
곧바로 송진우와 컨설트를 보러 갔다.
소아과 병동에 들어서자 어린아이 울음소리와 애타는 엄마 얼굴부터 보였다. 자주 들르는 병동이 아닌 탓인지 좀처럼 담담해지기 힘든 분위기였다.
‘아이들만이라도 안 아팠으면 좋겠다.’
14세 여아 환자, 허수진.
차트와 복부 CT부터 확인했다.
절로 갑갑한 한숨이 터졌다.
마치 배 속을 채운 것 같은 거대한 종양이 자리 잡고 있었다. 소장, 대장, 방광, 제대로 성숙되지 못한 자궁까지 모조리 눌린 상태였다. 먹는 것은 물론 용변을 해결하는 일조차 어려워 보였다.
테라토마(Teratoma, 기형종)다.
배엽 세포에서 유래돼 장관 조직, 기관지 조직, 뼈, 연골 등이 복잡하게 뒤섞인 종양이다. 주로 난소 등 생식기관에서 발생하고, 사춘기 이전에는 대개 양성이지만 크기가 거대하다는 특징이 있다.
문득 몇 가지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기형종이면 거의 대부분 산부인과에서 수술하는데, 왜 우리 과에 연락하셨지? 동반 질환이 있나? 선생님들이 아니고 왜 나지? 소아외과가 없어서 그런가?’
찬찬히 복부 CT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허수진의 경우는 달랐다.
난소와 후복막에 걸쳐 발생했다. 일부 조직은 악성이 의심된다는 방사선과 소견이 첨부돼 있었다. 항암 치료까지 해야 한다면 아이 몸이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통상 시행하지 않는 혈관 촬영까지 했다.
‘후복막 부분에 혈관으로 의심되는 조직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시행했나?’
혈관 사진을 거는 순간 말을 잃었다.
종양과 후복막 일부분이 혈관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양성이든 악성이든 완전 적출이 원칙인데 가능할지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수술이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김지훈의 눈가가 심하게 일그러졌다.
난소와 후복막에서 동시에 발생한 데다 거대한 크기 때문에 통증이 심할 수밖에 없다. 종양 무게에 한 걸음 떼는 것조차 고통스러울 정도로 불편했을 것이다.
일상생활이 가능했을지 의문이었다.
그동안 어떻게 참았을까?
어린아이 티를 벗고도 남을 나이였지만 호소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거나 무관심이 초래한 일일 수도 있었다.
또 다른 문제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