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전임 역시 새로운 시작이다 (1)
전문의이자 선배로서 체면이 있다.
“천하의 하오문주 체면이 말이 아니네. 김지훈, 두고 보자. 언젠가 내가 널 불태워 주마.’
과연 복수할 기회가 있을까?
3개월 짧다면 짧고, 길면 긴 시간이다. 가능성은 바닥에 수렴해도 하기 나름일 것이다.
그렇게 손일석이 녹슬었던 손에 기름칠하며 후배들과 피 튀기는 경쟁을 이어 갔다.
손일석은 예외적인 경우다. 교육은 당연히 전공의 위주로 돌아가야 한다. 기회가 없어도, 기회를 잡아도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하루하루 바쁜 일상이 흘렀다.
김지훈에게서 시작된 불이 들불처럼 퍼져 나갔다. 신현수와 이경석은 물론 지동훈 교수까지 가세한 것이다.
“나종진, 오만석, 강병옥, 따라와.”
신현수는 이혁민 교수보다 더 냉정하고 차가운 말투로 후배들을 잘근잘근 다졌다. 손일석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석아, 잠깐 나 좀 보자.”
“형, 설마 형마저?”
“나도 교육 책임이 있고, 곧 전임이다.”
이경석이 묵직한 힘으로 꾹 눌러 버렸다. 손일석이 혀를 빼물었다. 전문의가 이 지경이 됐으니, 전공의들이 어떨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일복 없는 박승준 교수 당직 때가 유일한 평안이었다.
픽스턴들에게도 각별한 애정이 쏟아졌다.
“오하석, 타이해 봐.”
‘픽스턴 기간인데 열심히 연습한 티가 팍팍 나네. 잘하고 있어. 하지만 아뻬 퍼스트 서려면 더 잘해야 돼.’
제법이지만 김지훈의 눈에 들 리가 없었다.
1, 2년 차 교육도 치프에게 맡길 군번인데 픽스턴은 당연히 전공의 몫이다. 슬쩍 서늘한 눈길 한 번 주자 이혁원의 눈에서 불길이 일었다.
“오하석, 너 곧 일반외과 1년 차야. 수처와 타이에 죽고 살아야 한단 말이야. 송진우, 강병옥 선생님하고 책임지고 가르쳐. 1년 차 시작하면 한 달 안에 아뻬 퍼스트 서야 하는데 가능하겠어?”
강병옥은 상당히 냉정했다. 송진우도 얼굴 벌게진 채 사심을 배제하고, 최선을 다해 교육에 매진했다.
찔끔 눈물이 맺혔던 오하석이 단발머리를 찰랑거렸다.
얼마 후, 복도에서 마주친 김지훈이 툭툭 팔을 두드린 것이다. 마치 잘하고 있다는 것 같았다. 두 눈에 슬며시 스쳐 간 눈빛을 제대로 보았다면 잘못된 생각은 아니었다.
소리 없는 칭찬과 뜨거운 불길은 곧 실력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특히 손일석의 변화가 두드러졌다. 정확하면서도 빠른 손 어디 가지 않았다.
동기들에게 치열하게 타며 예전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했다. 밤낮이 바뀐 피로와 부담도 잊고 눈이 시뻘게지도록 노력한 결과였다. 좀처럼 수술을 줄 기회가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열정과 노력에는 결실이 따르기 마련이다.
동기 4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현수야, 이제는 일석이가 혈관 수술 퍼스트 서도 될 것 같은데 어때? 경석이 형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손일석이 침을 꿀꺽 삼켰다.
‘더 태워도 좋으니까 퍼스트 섭시다.’
“난 동의.”
“나도 동의.”
“현수야, 낄 자리 없다는 거 생각하고 말한 거지?”
웃음만 돌아왔다.
동기라는 친분에 연연해서는 안 되는 문제였다. 냉철한 눈으로 정확하게 판단했을 것이다.
손일석이 찢어지는 입을 감추며 김지훈을 보았다. 최종 결정은 형식적이라고 해도 주임 교수가 해야 한다.
“오케이! 그럼 다음 주부터 같이 혈관 수술하자. 경석이 형, 현수하고 형은 당분간 라파로에 더 집중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요즘 이준영 선생님 눈치가 좋지 않아요.”
손일석이 자기도 모르게 만세를 불렀다.
복강경에 문제가 생겼다면 기회가 많아진 정도가 아니었다. 때에 따라 친구의 불행이 행복이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환호성 반대편에 축하한다는 말 대신 심각한 표정이 자리했다. 이준영 교수의 기분이 안 좋다는 말에 반색하던 손일석이 더 이상 티를 내지 못했다. 평생을 가도 탈 때 느끼는 살벌함은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신현수와 이경석이 동시에 눈가를 찡그렸다.
배움의 길은 끝이 없었다. 한 계단 올라섰다 싶으면 더 높은 계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고의 라이벌인 김지훈이 쉬지 않고 달려 여유를 부릴 틈조차 없었다.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었어. 담도에 T-tube 넣고 수처하는 과정 쉽지 않더라. 수술 끝나고 죽는 줄 알았다.”
“난 탈장하다가 신나게 탔다. 이제 곧 전임인데 언제 벗어날지 모르겠네. 지훈아, 혹시 좋은 방법 없어?”
김지훈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늘이 무너진 것도 아닌데 당연히 있죠.”
“뭔데?”
손일석까지 목소리를 높였다.
“나처럼 이준영 선생님 수술 아예 안 들어가면 돼요.”
농담도 때가 있다. 혀 잘못 놀린 죗값 톡톡히 치렀다. 굽신굽신 커피 세 잔 타고, 군것질거리까지 공손히 바친 후에야 용서받았다.
이제 복강경은 파트를 가리지 않고 대두된 화두였다. 그 때문에 전공의, 특히 이혁원과 나종진은 펠로우들의 공통 관심사이기도 했다. 수준은 완전히 다르지만 같이 배우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큰 관심을 보였다.
“참! 라파로 교육 시작했다며? 잘 가르쳐라.”
“자식들이 욕심만 많아서 쉽지 않네요.”
“초반에 바짝 조여. 나처럼 겉멋 들면 고치기 힘들다. 일석아, 너도 퍼스트 선다고 방방 뜨지만 말고 확실하게 배워. 지훈아,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이경석이 혹시 있을지 모를 방심과 자만을 단속했다. 한동안 교육에 관한 말이 심도 있게 오고 간 후에야 자리를 끝낼 수 있었다.
손일석에겐 숨통이 트인 날이었다.
“경석이 형, 오늘 박승준 선생님 당직에 나도 한 등급 올라섰는데 기념주 한 잔 어때요?”
“너 낮에는 자느라 바쁠 텐데, 데이트 안 해? 날짜 잡았다고 마음 푹 놓는 거 아냐?”
“형, 내가 누굽니까? 그런 문제는 걱정 붙들어 매셔도 됩니다. 사나이가 사나이답게 살아야죠. 이런 날은 전화 한 통 딱 던지면 만사 오케이 아닙니까?”
일제히 손일석을 보았다. 진실을 원하는 눈빛이 너무 강렬했던지, 거만을 떨다 말고 이내 꼬리를 내렸다.
“경희는 친구랑 약속 있대요.”
“그럼 그렇지. 인생이 다를 리가 있어?”
간만에 의기투합해 식사와 음주를 즐겼다.
아직 태도 안 나지만 어여쁜 아기를 가진 고경아 마님을 위해 음주 선을 확실하게 지켰다. 먹고 싶다는 것도 절대 잊지 않았다. 사실 다들 몸이 힘들어 더 먹으라고 해도 사양해야 할 판이었다.
‘퍼스트를 서면 곧 혈관 수술을 줘야 한다는 말인데, 내가 판단해도 될 문제일까? 신기동 선생님이 특별한 말씀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래도 된다는 말이겠지?’
‘어휴! 지훈이 저 자식이 퍼스트 설 때 얼마나 태울까? 지금은 참지만 만약 파견 끝날 때까지 수술 안 주면 너 죽고 나 죽는 거야. 나 하오문주다. 잊지 마라.’
술기운 속에서도 내일 일이 떠나지 않았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손일석에게 더 많은 신경이 갔지만, 전공의 교육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복강경 수술 때 박리 한 번 해 봤다고, 서울에 와 처음 응급 수술을 했다고 입이 찢어진 모습에 도리어 걱정이 앞섰다.
‘혁원이하고 종진이는 본격적으로 라파로 교육을 시켜야 하고, 만석이도 신경 써야 하는데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
그 시간.
따르륵! 따가각! 끼이익! 삭삭!
“기본도 손이 안 따르면 안 돼.”
“혁원아, 이놈의 기구는 왜 배 속에만 들어가면 말을 안 듣지? 김지훈 선생님을 보면 너무 쉬워 보이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야?”
“종진아, 비교할 사람하고 비교해라.”
2년 차들은 다른 문제로 눈에 불을 켰다.
“오만석, 송진우, 오늘은 내가 수술 당직이라는 사실 잊지 마. 너희들은 응급실까지야.”
“병옥이 형, 같이 살아야죠. 저 조금 있으면 내려갑니다.”
‘오만석, 파이팅! 네 말대로 같이 살자.’
전공의들도 티격태격 전의를 불사르고 있었다.
***
시간 참 빠르게 흘렀다. 2월 마지막 주도 드디어 끝을 보였다.
주말 집담회를 화려하게 불태우고 의국에 모두 모였다.
곧 4년 차 총치프가 되는 나종진의 각오와 총치프를 내려놓았다는 아쉬움은커녕 온통 복강경에 정신 팔린 이혁원이 묘한 대비를 이뤘다.
3년 차가 되는 송진우, 강병옥, 오만석의 눈에는 더 많은 기회를 잡을 것이란 기대가 가득했다.
다들 똑같은 몰골로 피곤에 절어 있었지만 눈빛은 살아 있었다.
2년 차가 되는 1년 차들은 살판났다는 얼굴이었다.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1년 차보다 더 힘든 전공의는 단 한 명도 없기 마련이었다.
오하석이 누구보다도 시간의 흐름을 잘 보여 주었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 거의 감긴 눈, 툭하면 떡이 되는 단발머리, 어깨에 덕지덕지 묻은 피로까지 픽스턴 열심히 돌았다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고생했다. 다음 주부터 1년 차 시작하니까, 이번 주말 푹 쉬고 말끔한 얼굴로 보자.”
픽스턴의 유일한 기쁨, 100일 당직 전 주어지는 1박 2일간의 오프에 오하석이 웃음을 터트렸다. 죽기 전 떠먹여 주는 달콤한 꿀 한 숟갈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말이다.
“헤헤! 감사합니다.”
실로 오래간만에 듣는 소리였다.
“월요일에는 새로운 시작이란 생각으로 만나자.”
자연스럽게 전공의와 인턴들을 단속하고 격려한 김지훈이 펠로우들과 연구실에 모였다. 주말인 관계로 손일석이 대낮부터 눌러앉아 있었다.
어떤 사람보다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펠로우들이었다. 지난 2년 동안 생각지도 못할 정도로 발전했다. 감개무량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시점이었다.
“다들 입이 찢어질 것 같네. 부럽다.”
손일석이 졸린 눈으로 입맛만 쩝쩝 다셨다.
낮밤이 바뀌었다. 상당히 무리가 따르는 생활이었지만 자청했고, 3개월 한시적 근무이기에 결코 태만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한 가지 목표가 더 생겼다.
혈관 수술 퍼스트를 설 때마다 김지훈은 친구가 아니라 주임 교수였다. 친구에게 타는 일이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전에 기필코 집도까지 해야 했다.
나른한 몸을 이겨 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손일석의 모습은 전임이 되기 직전인 펠로우들이 마음을 다잡는 계기였다.
“현수야, 응급실 보고는 돌아가면서 하는 거지?”
“사흘마다 한 번이니까 날짜 혼동하면 안 돼.”
“달력에 표시해 놔야지. 올해는 안 뽑으니까 내년에 펠로우 뽑아야 꼴찌에서 벗어나네. 일석아, 그때 막내는 누굴까?”
손일석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니들은 벌써 전임 돼서 좋겠다. 인생 모르는 거야. 마지막에 웃는 놈이 진짜 웃는 거다. 김지훈, 자넨 혈관 수술이나 주고 놀리는 것이 어떨까? 강호의 도의상 친구를 이 정도 고생시켰으면 만족스럽지 않아?”
신현수와 이경석이 씨익 웃었다.
“우리까지 동의해야 가능한 일이다.”
“에휴! 내 그럴 줄 알았어. 수술 앞에선 친구고 선배고 다 필요 없다더니, 옛말 하나도 안 틀리네. 피바람을 뿌릴 수도 없고, 이렇게 된 거 각자도생?”
“천하의 손일석이 퍼스트로 만족하는구나. 형이 널 잘못 본 모양이다. 원하는 대로 해 줄게. 현수야, 오케이?”
“당연히 형 말을 따라야죠.”
으스스한 눈빛을 보내던 손일석이 홱 표정을 바꾸었다.
“하하하! 형님들! 왜 이러십니까?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제 마음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임은 정식 교수인데,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강호 동도에게 은혜를 베푸셔야죠.”
웃음이 터졌다.
함께 웃던 김지훈이 힐끗 손일석을 보았다.
‘없던 파견을 만들어서 낮밤까지 잊고 사는데, 3년이란 시간이 널 막지는 못하지. 혈관 파트 잘 유지할 테니까 신기동 선생님 오시면 파이팅해. 누가 뭐라고 해도 혈관은 네 파트잖아.’
문득 수술 스케줄을 채우는 다양한 수술이 생각났다. 파트를 구분하지 않고 수술해야 하는 응급 수술과 외상 치료도 함께 떠올랐다.
복강경 수술이 새로이 떠올라 대세로 자리 잡은 것처럼 일반외과도 점점 세분화되고, 더욱 전문화될 것이다. 반드시 따라잡아야 할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것이 세상이기도 했다.
김지훈이 고개를 흔들었다.
‘에휴! 할 일은 태산인데 고민거리를 또 만들고 있네.’
당장은 현실을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할 시간이었다. 한동안 많은 생각이 오고 갔다. 일하는 환경이 같기에 모두들 비슷한 고민을 비치긴 했다.
그렇게 2월 마지막 주가 지나고, 3월 첫날이 밝았다.
드디어 전임 강사 첫 근무 날이 시작됐다.
인턴 시작한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7년이 지나 햇수로 8년이나 됐다.
병동은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였지만 이제 어엿한 교수로 스테이션 앞에 섰다.
더 이상 애송이 의사가 아니었다.
교수들도 감회가 새로운 모양이었다.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신현수조차 스스로의 노력과 실력으로 이 자리까지 왔기 때문일 것이다.
송재덕 교수도 흐뭇한 표정으로 이경석에게 눈길을 주었다.
김지훈이 눈가를 굳혔다.
즐거움은 어제까지 충분히 누렸다. 이젠 간담도와 혈관 파트, 복강경 수술에 전념해야 할 때였다.
일종의 특권까지 얻었다. 교수 1인당 담당 전공의를 한두 명만 배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무려 세 명과 함께 환자를 본다.
간담도-송진우, 혈관-손일석, 강병옥.
여기에 깍두기지만 간담도와 혈관을 도는 1년 차 오하석까지 하면 네 명일 수도 있었다.
이혁원, 오하석 달랑 둘만 데리고 차트를 보고 있는 이준영 교수를 보니 민망할 지경이었다.
전임 회진 첫발을 내디뎠다. 벅찬 가슴이 내내 가라앉질 않았다.
일상은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지만, 이런 날 실수가 나오고 사고 나기 마련이다. 조심조심 긴장을 유지해 무사히 첫 하루 일과를 끝냈다.
퇴근을 앞두었을 때 이혁민 교수가 교수 전체와 자리를 가졌다. 손일석은 게스트였다.
과장으로서 으레 해야 할 말을 마친 후 뜻밖의 말을 했다. 전임부터 박승준 교수까지 모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김지훈은 들고 있던 커피까지 쏟을 뻔했고, 신현수는 어리둥절 입도 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