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805화 (805/1,329)

9화. 불타오르자 Ⅱ (2)

신기동 교수가 보이지 않았다. 혈관 파트 유일한 전공의, 송진우는 차트를 앞에 두고 이제나저제나 고개만 뺐다.

이혁민 교수가 힐끗 김지훈을 보며 손짓을 했다.

“신 교수 기다리지 마라. 오늘부터 김지훈 선생이 혈관 파트까지 회진 돌면 된다.”

아직 연수 떠난 것도 아닌데 이런 일이!

보통 당황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뭐 하나? 네 환자는 안 봐도 되나?”

머뭇거리던 김지훈이 재빨리 스테이션 앞에 섰다.

박승준 교수와 지동훈 교수도 뒤에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교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당혹, 쑥스러움, 내 자리가 아닌 것 같은 느낌까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송재덕 교수가 빠질 리 없었다.

“야! 지훈이가 우리랑 같이 회진 도는 거야? 너무 빠른 거 아니니? 뒷방 늙은이 될까 봐 무섭다. 무서워. 지훈아, 현수야, 경석아, 나 쭉 일해도 되지?”

소리 없는 웃음만 터졌다.

‘상당히 곤란하네.’

눈치를 보던 김지훈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이 또한 새로운 시작이다.

간담도와 혈관 파트를 따로따로 돌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강병옥이 눈치껏 옆에 섰다. 본의 아니게 3년 차를 눈앞에 둔 라이벌, 송진우와 강병옥이 정면으로 맞붙게 됐다.

김지훈에겐 고마운 상황이었다.

좌청룡 송진우-우백호 강병옥.

두툼하게 쌓인 차트가 하나하나 넘어갔다. 환자를 볼 때마다 마치 내가 환자 파악을 더 확실하게 했다는 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눈에 불을 켰다.

건전한 경쟁은 무조건 좋은 일이다.

졸지에 담당 환자가 제일 많아져 회진 시간도 가장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뛰어난 후배들 덕에 환자에 대해 특별히 물을 일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한 일이었다.

평소보다 훨씬 길어진 회진이 끝났다.

이미 외래로 내려갔어야 할 송재덕 교수가 홀로 남아 너털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기분 나쁘지 않은 손가락질을 하며 말이다.

오하석을 보며 좋아 죽었다.

“하석아, 네가 하석이 맞지? 오늘 회진 돌 때 보니까 내 맘에 쏙 든다. 쏙 들어. 픽스턴 힘들지만 기운 내서 잘 돌자. 알았지? 내 말 알아들었지?”

“예, 선생님.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좋다. 대장 하자, 대장. 그리고 너 놈놈놈.”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순간 병동 공기가 냉랭해지며 가공할 힘이 느껴졌다. 덩치가 산만 한 놈이 화들짝 놀랐다.

김지훈도 전에 없는 모습에 침을 꿀꺽 삼켰다.

“이리 와.”

오만석이 어깨에도 안 차는 송재덕 교수 앞에서 죽을죄라도 진 것처럼 쩔쩔맸다. 같은 성에 돌림까지 같은데, 대우가 극과 극이었다.

“덩치 믿고 또 나가는 거 아니지? 하석이 잘 챙겨라. 나가면 네 책임이다.”

“선생님,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허리를 90도로 접었지만 목소리는 여전이 우렁찼다. 송재덕 교수는 물론 김지훈도 피식 웃고 말았다.

“근데 왜 불안하니? 왜? 원래 뭐든 한 번 해 본 놈이 더 잘해서 그렇지? 너 나가는 거 잘할 것 같다. 아주 잘할 것 같아. 만석아, 놈놈놈아, 내 말 명심해라. 명심해. 어이구! 우리 하석이가 물들면 안 되는데 큰일이다, 큰일.”

송재덕 교수, 결코 죽지 않았다. 웃음과 말투만으로도 분위기를 좌지우지했다.

냉랭했던 공기가 순식간에 따스해지자 오만석의 얼굴이 송진우만큼 벌게졌다.

송재덕 교수의 말속에는 항상 숨은 뜻이 있다. 그걸 알기에는 오만석의 경험이 너무 적었다.

수술실로 향하던 김지훈이 웃으며 한마디 던졌다.

“오만석, 만석아, 놈놈놈아, 그걸로 끝난 거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찍힌 겁니까?”

“리피트(Repeat)의 힘이다.”

의미를 알면 안심할 것이다.

남은 2년 차들은 안심할 처지가 아니었다.

수술실에 들어서던 강병옥이 눈가에 힘을 주었다. 송진우가 기회를 잡았다는 듯 수술실에 들어와 있었다. 혈관 파트나 간담도나 이젠 같은 파트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오만석까지 수술실 앞을 휙 지나치며 손을 흔들었다. 묘한 긴장감이 수술실을 휩쓸고 지나갔다.

2년 차들만 눈을 번쩍이는 것이 아니었다.

정규 수술이 모두 끝났다.

혈관 수술 세 개가 남았다.

일찍 수술이 끝난 신현수가 퍼스트를 서기로 했다. 손일석이 말끔한 얼굴로 나타나 김지훈에게 뜨거운 눈빛을 날렸다. 세컨이라도 서야 한다는 강렬한 의지였다. 느지막 얼굴을 보인 신기동 교수는 아무 말도 없었다.

세컨을 서도 할 일이 거의 없지만 참관은 오직 눈만 사용한다. 송진우까지 있어 더욱 고민스러웠다.

갈등에 휩싸이는 순간 신기동 교수가 스윽 세컨 자리에 앉았다.

일단 고민 면했다.

수술이 시작됐다.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사실을 내내 잊지 않았다. 의외로 느려진 손을 본 신현수가 눈가를 굳히며 도리어 집중을 잃지 않았다.

‘확실한 기본기가 주임 교수를 갈랐단 말이지?’

고도 비만 수술 덕인지 예전보다 훨씬 호흡이 잘 맞았다. 차근차근 확실하게 수술을 진행했다.

결과는 말끔하게 연결된 혈관이었고, 신기동 교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음 수술이 이어졌다.

손일석은 잠시도 손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김지훈이 수처를 하면 수처를 따라 하고, 신현수가 타이하면 타이를 따라 했다.

세 번째 혈관 수술을 보며 2년 동안 얼마나 뒤처졌는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병원에 첫발을 디디며 가졌던, 나도 김지훈만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와르르 무너졌다.

의아할 정도로 느려진 손은 관심사가 아니었다.

‘지훈이가 주임 교수를 맡게 된 이유가 있었어. 현수도 정말 몰라보게 발전했네. 라파로에 혈관까지 너무 앞서 있어.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전공의보다 수술 못하겠다.’

물러설 손일석이 아니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끝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누구 못지않게 뜨거운 열정을 가진 송진우마저 놀랄 지경이었다. 신기동 교수는 남몰래 조용히 웃고만 있었다.

모든 수술이 끝났다.

“김지훈, 신현수, 다음 번 수술도 이런 식으로 진행해. 이경석과도 손 잘 맞출 수 있지?”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현수하고 경석이는 스타일이 완전히 다른데, 누구와 수술하든 호흡이 잘 맞는다? 희한한 일이야. 몇 년을 봤는데 아직도 모르는 구석이 있네. 어쨌든 일석이를 위해서는 바람직한 일이야.’

비수는 꺼내지도 않았다.

“손일석, 이 정도 하지 못할 거면 꿈도 꾸지 마. 김지훈, 동기라고 마음 약해지면 안 돼. 환자가 우선이야.”

한 마디 한 마디가 손일석에겐 비수이자 아픔이었다.

친구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 될 수 없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확신이 든 것이다.

내심 안도하며 뿌듯해하던 김지훈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신현수도 당황스러운 얼굴로 주춤거렸다.

한 마리 맹수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불끈 쥔 두 주먹에서 가공할 힘이 느껴졌다. 손일석의 온몸이 투지로 불타고 있었다.

‘기본이란 말이지?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야. 어떻게든 손부터 풀어야 돼. 김지훈, 신현수, 나 아직 살아 있다. 우리 서로 확실하게 하자.’

또 한 명의 강력한 라이벌이 확실하게 귀환했다.

응급실이 매일매일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환자가 아니라 의사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서울 전공의만으로도 경쟁이 심했는데, 바이탈에 미친 오만석이 가세했다. 픽스턴들의 열정은 자칫 타성에 젖기 쉬운 의사들에게 신선한 자극이었다. 여기에 전공의가 아닌 전문의 손일석까지 스스로 불타오르자 여유를 부릴 틈이 조금도 남지 않은 것이다.

오만석이 경쟁 없는 구미와 달리 단 1분이라도 늦으면 수술실 구경도 못할 위기에 빠졌다. 송재덕 교수의 구박도 멈추질 않았다.

“만석아, 놈놈놈아, 이 교수하고 있을 때는 내 옆에 오지 마라. 숨 좀 쉬자. 숨 좀. 콩나물에 고기반찬만 먹었나? 왜 이렇게 덩치가 커? 이유가 뭐야? 응? 뭐야?”

씨와 밭이 다른 걸 뭐라고 할까?

쿵쿵쿵! 쿵쿵쿵!

갈수록 발소리만 크게 들렸다.

손일석은 힘들게 구한 따뜻하고 아늑한 방을 버리고 펠로우 연구실에서 살았다. 연락받고 조금이라도 미적거리면 환자 처치에 합류할 틈조차 없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 놈이 문제였다.

“만석아, 너 왜 이래? 병동에 일 없어? 응급실에서 살다가 병동 올라가지 말고, 일하다가 노티 오면 그때 내려와. 콜을 거꾸로 받으면 어떻게 해?”

“선생님, 골든아워(Golden Hour)를 지키고 싶습니다.”

“골든타임을 지키고 싶다고?”

“예. 외상 후 수술까지 얼마나 빨리 진행되는지에 따라 예후가 달라지는데, 일분일초라도 줄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렁찬 목소리로 말도 잘했다.

‘오만석! 김지훈과 신현수가 보통 벅찬 놈들이 아닌데 너까지 왜 이러니? 내가 너하고도 경쟁해야 되냐?’

벙어리 냉가슴만 앓았다.

덜컥! 후다닥!

결국 전공의처럼 계단을 달렸다.

혈관 수술은 여전히 눈물이었다. 손일석의 아픔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찰랑찰랑!

전공의들의 열정은 곧 픽스턴의 죽음이다. 조금이라도 늦게 나타나면 가뜩이나 호되게 혼날 시기에 들어섰다.

오하석은 여자라는 사실만으로 몇몇에게 의구심을 받았다. 하지만 단발머리가 땀에 젖도록 달려 시각을 바꾸어 놓았다.

노련한 송진우와의 완벽한 연락망도 분명 한몫했다. 물론 얼굴 벌게진 놈의 눈에는 점점 초췌해져 가는 오하석이 안타깝기만 했다.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 탓에 펠로우들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덕분에 환자는 의사들에게 둘러싸였고, 당직 교수는 누굴 퍼스트로 세워야 할지 즐거운 고민에 빠져들었다.

“어제 수술은 누구누구와 했어?”

이준영 교수도 궁금해할 정도였다.

송재덕 교수는 오씨 남매에게 푹 빠졌다.

“놈놈놈이 퍼스트 섰구나. 지훈아, 교수야, 저놈 수술 잘하니? 잘해? 현수야, 넌 어떻게 생각하니? 신경 써라. 신경 써. 나간 건 기분 나쁘지만 이유가 있잖아, 이유가.”

“하석아, 네가 하석이지? 어젯밤에도 열심히 일했구나. 좋다. 좋아. 오빠하고는 친하게 지내지 마라. 놈놈놈 조심해야 한다.”

오만석이 눈앞에 보이면 예외긴 했다.

“놈놈놈, 너 똑바로 해라. 똑바로.”

생각보다 변화의 여파가 컸다. 활력이라는 말이 더 정확할지도 몰랐다.

당연히 정규 수술에서도 수술 욕심을 버리지 못했다. 특히 이혁원과 나종진은 기본에 대해 들은 말이 있어 새로운 각오까지 다졌다.

바라 마지않던 선순환이다.

무너질 것 같은 몸만 빼면 말이다.

열정이 넘친다고 모든 일이 다 잘 굴러가고 좋을 수는 없는 일이다. 혈관 수술이 벌어질 때마다 김지훈이 난감함을 감추지 못했다.

손일석의 강렬한 눈빛!

신현수와 이경석은 퍼스트를 설 때마다 뒤통수가 따가울 지경이라는 말까지 했다.

“일석이는 퍼스트 세워도 되지 않아? 이번에 응급 수술 같이했는데 예전 손 그대로더라.”

“현수야, 네 생각은 어때?”

“다시 시작하는 셈인데 시기상조 아닐까?”

“그렇지? 개복하고 라파로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혈관도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손을 확실하게 풀어 준 후에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

극도로 신중한 결정이었다. 손일석이 들었으면 배신자라며 땅을 쳤겠지만 펠로우들의 의견이 통일됐다. 신기동 교수를 대신해 혈관 파트를 책임진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말을 내뱉었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

김지훈의 당직 날이 돌아왔다.

무슨 이유인지 첫 수술부터 손일석을 퍼스트로 세웠다. 상황에 맞게 수술을 끝낸 김지훈이 휴게실에서 손일석과 단둘이 마주 앉았다.

두 번째 수술이 떴다.

역시 단둘만의 휴게실행이었다.

일복 제대로 터졌다.

세 번째 수술이 떴고, 결론은 마찬가지였다.

은근히 불만 섞인 표정을 짓던 전공의들이 휴게실 근처에 얼쩡거리지도 못했다. 내색조차 하지 못하며 한숨을 돌렸다. 점점 찌그러지는 손일석의 얼굴에 식은땀까지 잔뜩 맺혔기 때문이었다.

‘내가 지훈이한테 탈 줄이야!’

탈의실 소파에 몸을 던진 손일석이 일어날 줄을 몰랐다. 이혁원은 힐끗힐끗 눈길을 주며 온몸을 불태우고 있었다. 퍼스트조차 서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손일석의 손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전문의는 확실히 달랐다.

그런데 전공의 이상으로 탔다.

‘김지훈 선생님 눈에는 도대체 뭐가 부족해 보이는 걸까?’

친구는 엉엉 울고, 후배는 자신의 손을 보며 서늘함을 느끼고 있었다.

성큼 주말이 다가왔다.

드디어 신기동 교수가 아쉬움 속에 연수를 떠났다.

수술할 때마다 몸이 떨릴 정도로 비수를 맞았는데,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 같았다.

손일석은 오죽할까?

공항까지 배웅을 다녀오고는 하루 종일 우울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다시 못 볼 상황도 아니고 이 정도 일은 담담하게 맞이할 나이도 됐지만, 스승과 제자란 그런 관계일지도 몰랐다.

“얼굴 펴, 인마. 다신 안 오시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래?”

“너도 이준영 선생님이 안 계시면 내 기분 알 거다. 에휴! 신기동 선생님만 믿고 왔는데 혈관은 구경도 못하고, 퍼스트 서면 난리도 아니고 완전히 끈 떨어졌네.”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난감하던 차에 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응급실이다.

“일석아, 환자 있단다. 가자.”

벌떡 일어날 줄 알았는데 반응이 없었다.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던 손일석이 일어나 옷매무새를 고쳤다. 팔을 휘휘 휘두르며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씨익 웃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후배 놈들이 너무 강하게 나오니까 발 비빌 틈도 없네. 김 교수, 퇴근해. 난 응급실 간다. 만석이 그 자식은 이름대로 농사나 짓지, 환자만 오면 눈이 벌게져서 내가 먼저 죽겠어.”

“이번 주말은 내가 당직이다. 가자.”

허전한 마음도 잠시, 아수라장으로 변한 응급실이 손일석의 텅 빈 가슴을 꽉 채웠다.

응급 수술이 끝난 후, 전공의들이 차례차례 활활 불타오르며 한 줌 재로 변했다.

‘내가 저 꼴이란 말이지?’

손일석이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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