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불타오르자 Ⅱ (1)
잠시 후, 신기동 교수가 들어왔다. 앉자마자 손일석에게 눈길을 주었다.
“손일석, 파견 끝날 때까지 주말 집담회 꼭 참석해.”
“예,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손일석이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 머릿속이 환히 보이시나? 그럼 내 마음은 더 잘 아실 텐데, 연수를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스승님! 누굴 정하시든 확실하게 단속해 주셔야 합니다.’
할 말이 더 있을 법도 한데 그것으로 끝이었다.
펠로우들에게 차례차례 눈길을 주며 눈가를 좁혔다. 평소에도 가뜩이나 어려운 교수인데 눈매까지 날카로워 절로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최종 결정을 내리실 모양이네.’
펠로우들의 긴장이 고조됐다.
“다음 주 금요일까지 근무하고 연수 간다. 6개월에서 1년 예정이니까 너희들 어깨가 무거워.”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1년일 수도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부족하면 기간을 연장해야 되는데, 너희들 실력을 생각하면 그럴 수 있지 모르겠다. 어쨌든 이제 와 취소할 수 없는 일이고, 그동안 혈관 파트를 확실하게 맡을 사람이 필요해.”
‘다들 자격이 충분하지만 장단점이 있어. 지훈이는 간담도와 라파로 때문에 정신없을 것 같고, 현수나 경석이도 시간 내기 빠듯하겠지. 1년 후면 일석이가 오는데, 미룰 걸 그랬나?’
여러모로 아쉬움과 불안 요소가 있지만, 주임 교수를 결정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이처럼 중요한 일은 없었다. 최종 결정을 더 이상 미룰 수도 없었다. 그나마 일주일이라도 지켜봐야 주임 교수로서 부족한 점을 보완할 시간이 있을 것이다.
신현수와 이경석이 꿀꺽 침을 삼켰다.
“지금 결정하실 겁니까?”
“다음 주에 결정한다고 그동안 손이 변하겠어?”
서늘한 말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제각각 다른 생각에 잠겼고, 촉각을 곤두세우던 손일석은 의외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술 욕심 하면 김지훈인데 포기한 것 같은 얼굴은 뭐야? 라파로에만 집중하고 싶다는 말인가?’
김지훈이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본을 잊었는데 주임 교수는 어림도 없지. 현수하고 경석이 형 중 누굴 택하실까? 혹시 나도 가능성이 있을까?’
“김지훈, 누가 좋을 것 같아? 동기고, 면전이라고 해서 예의 차릴 일 아니다. 네 판단을 말해 봐.”
혹시나 했지만 역시 아닌가 보다.
실력으로는 신현수가 낫다. 반면 주임 교수에게 요구되는 대인 관계 등은 이경석에게 강점이 있었다.
판단이 맞는다고 해도 할 말, 못할 말이 있다.
사실 미세한 차이에 불과하고, 장단점을 말할 위치나 자격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둘을 합치면 딱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들긴 했다.
“전 둘 다 자격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3개월 동안 일석이도 가르쳐야 하는데 문제없겠어?”
모두 동기라는 사실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실력의 고하는 분명한 사실이었고, 손일석의 파견은 외상 치료에만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자존심 따위는 따지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지?”
신기동 교수의 시선이 신현수와 이경석에게 향했다. 점점 멀어져 가는 주임 교수 자리에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왜 빨리 깨닫지 못했을까?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심 마음을 비웠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아쉽고, 상당히 부러웠다.
“신현수, 이경석, 어떤 결정이 나도 불만 없지?”
“예, 없습니다.”
긴장과 기대 속에 또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연수 가 있는 동안 지금 한 대답을 믿고, 내 일에 전념할 수 있을 것 같다. 김지훈, 어제 무슨 생각으로 수술했어?”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지만 마음을 비운 탓인지 느낀 그대로 편안하게 말할 수 있었다.
“수술 욕심내는 후배 교육을 생각하다가 가장 중요한 점을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술하는 동안 기본을 지키려 애썼습니다. 그동안 수술 욕심, 주임 교수가 되고 싶다는 욕심만 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런 욕심은 얼마든지 내도 좋아. 동기라고 해서 똑같이 가야 한다는 법은 어디에도 없어. 신현수, 이경석, 너희들도 마찬가지지?”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무리 건전한 경쟁이라고 해도 경쟁의 본질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단, 지금 한발 뒤처진 것을 개인적인 감정이 아닌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각자 원하는 바를 이루고도 남을 것이다.
“저도 욕심을 냈습니다만, 누가 되어도 감정을 갖진 않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신현수의 말에 신기동 교수의 눈이 반짝였다.
“그 점이 바로 내가 원했던 바야. 너희들 실력은 사실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해. 자격도 어느 정도 갖췄다고 본다. 하지만 자리는 하나고, 납득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겠지?”
무엇이 기준일까?
모두들 신기동 교수의 입에 주목했다.
“기본을 얼마나 중시하는지가 내 기준이다. 주임 교수가 아니라 어떤 자리에 올라가도 환자를 보는 한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조건이야.”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칼 같은 성격답게 미적미적 시간을 끌지 않았다.
“주임 교수는 김지훈이 맡아. 신현수, 이경석, 실망할 일 아니다. 너희들이 함께하지 않으면 김지훈 혼자 혈관 파트 유지하기 힘들어.”
미련을 다 털어 내지 못했지만 솔직히 기대하지 못한 말이었다. 욕심내지 않은 탓인지 도리어 당황스러웠고, 동기들 눈치까지 보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예, 알겠습니다.”
이경석이 힘차게 대답하며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깨끗이 털어 낸 모양이었다.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신현수도 입술을 모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번에도 내가 한발 뒤처졌어. 김지훈, 어디 가지 마라.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종이 한 장 차이라고 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큰 차이인지 잘 알고 있었다.
미련은 가슴만 쓰리게 할 뿐이었다. 깨끗이 승복하고 다음에 올 기회를 잡는 발판으로 삼을 일이었다.
“선생님 말씀 잊지 않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신기동 교수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내 결정을 순순히 따라 줘서 고맙다. 마음 놓고 갔다 오마. 그나저나 일석이 이놈이 문제네.’
“손일석, 수술 욕심 내지 마. 동기들이 거친 2년이란 세월 결코 짧지 않아. 배울 수 있는 건 다 배우고, 집도 여부는 지훈이 판단에 맡겨.”
몇 달 동안 고민하고 신경 쓰였던 문제가 단 몇 분 만에 결정됐다. 누군가는 후련해했고, 누군가는 강한 책임감과 부담을 느꼈다.
“김지훈, 다음 주부터 직접 컨설트 받고 스케줄 잡아. 난 연수 준비로 바쁠 것 같다.”
냉랭한 말투로 할 말 다 한 신기동 교수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래로 향했다.
얼떨떨하고 어색한 상황에 김지훈이 웃지도 못했다. 분위기가 묘해지려는 순간 신현수가 손을 내밀었다.
“김지훈, 축하한다. 다음에는 어림도 없어.”
“고맙다. 열심히 할 테니까 많이 도와줘.”
이경석이 당연한 일이라는 듯 환하게 웃었다.
“이번에도 한발 늦었네. 축하해, 인마.”
“주임 교수님, 잘 부탁드립니다.”
“형, 고마워요. 일석아, 잘해 보자.”
모두 한 팀이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다. 서로의 부족한 점을 서로가 채워 주면 혈관 파트를 단단히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축하의 마음은 딱 여기까지였다. 신현수와 이경석의 온몸이 불타올랐다. 손일석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양손에 라이터를 들고 강렬한 라이벌 의식에 휘발유를 드럼째로 들이붓고 있었다.
삐끗하면 순식간에 처지가 바뀔 것이다.
홀로 연구실을 찾은 김지훈이 가쁜 숨을 진정시켰다.
처음 시도하는 수술에 전임 계약까지 정신없이 지난 한 주였다. 마지막 날인 오늘 실로 과분한 일까지 벌어졌다.
‘잡음 생기지 않도록 똑바로 처신해야 돼.’
나름 각오를 다지다 말고 히죽 웃었다.
노력도 없이 운 좋게 이뤄진 일이 아니기에 이 순간을 즐길 자격이 있었다. 몸까지 바르르 떨며 어퍼컷 세 방 연속으로 날렸다.
‘으샤! 해냈어!’
이런 일 역시 가족과 스승에게 가장 먼저 알려야 한다.
소식을 전해 들은 고경아의 반응은 딱 두 가지였다. 임시라도 주임 교수가 된 남편이 자랑스럽다는 마음과 앞으로 얼굴 보기 더 힘들지도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그래도 기분은 좋네요. 우리 남편 최고!”
붕 떠오르는 기분을 미처 수습하기도 전에, 스승에게 이 기쁜 소식을 알리기도 전에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이혁민 교수였다. 구미 근무 중 건의했던 사항 하나를 지켜 주었다.
(오만석이 다음 주 월요일부터 내 파트에서 순환 근무 시작한다. 픽스턴도 오니까 단단히 챙겨라. 혈관 파트 문제 생기지 않도록 서로 협조 잘해야 한다.)
과장으로서 내리는 지시와 당부를 꼼꼼히 머릿속에 새기던 김지훈이 갑자기 눈가를 찡그렸다.
조성민이 아니라 오만석이 온다.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지만 손일석이 뇌리를 휙 스쳤다.
‘설마 전공의하고?’
생각도 잠시, 어느새 1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후다닥 병동으로 향했다.
회진을 올라온 이준영 교수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이미 다 알고 있겠지만 입이 근질근질해진 김지훈이 말할 틈만 노렸다.
토요일 일과가 끝나기 직전이라 병동이 복닥복닥했다. 좀처럼 기회를 잡을 수 없었다.
회진을 마친 이준영 교수가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무슨 일이시지? 환자 때문인가?’
절대 주임 교수 건으로 먼저 부를 스승이 아니었다. 의아한 표정을 짓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솥뚜껑만 한 손이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왠지 격려의 마음이 스며든 손길 같았다.
스승에게 이런 면이?
‘잘했다. 말 안 해도 잘 알겠지만, 현수나 경석이가 서운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한다.’
“권리보다 책임이 큰 자리야.”
물론 부드러운 눈길은 잠깐이었다. 무뚝뚝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그것만으로도 허리가 접혔다.
본격적으로 실감 나기 시작했다.
‘스승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어느 틈엔가 주변이 다시 어수선해졌다.
“지훈아, 교수야, 주임아! 아이고! 숨차다. 오늘은 이름만 부르자, 이름만. 지훈아, 좋다. 좋아. 현수야, 경석아, 너희들 아니었으면 신 교수 연수 못 간다. 잘했다. 잘했어.”
마지막으로 신현수가 확실하게 느낌을 전해 주었다. 휘발유 다 태웠는지 냉정함을 되찾은 얼굴이었다.
“주임 교수 수당이 추가로 나올 거야. 일석이도 오고 했으니까, 날 잡아서 술 한잔 사.”
신현수가 사라면 언제든 환영이었다.
뒤로 미룰 필요 있을까?
주말 당직은 박승준 교수다. 손일석도 정식 근무 전이다.
핑계도 좋다.
전임 강사, 주임 교수 축하 및 손일석 환영!
토요일 밤, 펠로우들이 가족과 함께 자리를 가졌다. 손일석은 고경희를 대동했고, 뜻밖에도 박승준 교수와 지동훈 교수까지 보였다.
당직만 빼고 어지럽게 술이 오갔다. 이미 혀가 꼬인 손일석이 엉뚱한 말을 했다.
“박승준 선생님, 이런 자리에서 보니까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일복 없으시죠?”
“일복? 전에 있던 병원에서는 나도 응급 수술 많이 했는데, 이상하게 내가 당직만 서면 환자가 없네.”
“홍재순 선생님 과도 한 분 정도 계셔야죠. 쉬는 날 결정! 앞으로 선생님 당직 날 쉬겠습니다. 혹시 얼굴 안 보인다고 저 찾으시면 안 됩니다. 제가 인기가 좀 있어서 할 일이 많거든요. 지긋지긋한 총각 생활도 벗어나야 되고요.”
즐거운 자리였고, 나이 한 살 더 먹었다.
먹었다 하면 꼭지가 돌도록 마시던 예전과 달리 딱 눈 밑까지 술이 찰랑거려 좋았다.
동기들 모두 서로를 축하했고, 고경아가 무려 맥주 두 잔을 소화해 내 더 좋았다.
주말 내내 마음 편히 잘 쉬었다.
월요일이다.
언제나 똑같은 일상이었지만 많은 것이 변했다. 새로운 얼굴인 오만석과 오하석만으로도 분위기가 바뀌었다. 또 다른 활력이 될 것이다.
“선생님, 잘 지내셨습니까?”
화통을 삶아 먹은 우렁찬 목소리는 여전했다.
“성민이부터 올 줄 알았는데, 어떻게 네가 왔어?”
“선생님 계실 때보다 줄긴 했지만 수술이 여전히 많습니다. 최철한 선생님이 조성민 선생님 없으면 수술하기 힘들다고 못 보내신답니다.”
구미 병원 상당히 잘 굴러가는 모양이었다.
‘다행이네.’
“오만석, 너 위장관 파트야. 서울까지 와서 농땡이 부리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잘 알지? 열심히 해. 현수야, 얘가 그 유명한 놈놈놈, 오만석이야.”
“놈놈놈이 너였어? 환자 파악은 했겠지?”
신현수가 냉정한 목소리로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오만석이 순식간에 옆에 섰다. 구미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상당히 긴장한 기색이었다.
하긴 많이 좋아졌다지만 여전히 농담도 잘 안 통하는 신현수니 그럴 만도 했다.
“오하석, 너는 간담도하고 혈관 파트 픽스턴 돌면 돼.”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오하석이 입술을 꼭 다물었다.
이준영 교수, 김지훈, 이혁원, 강병옥, 송진우.
신기동 교수가 곧 떠나지만 앞으로 한 달 동안 쟁쟁한 의사들 밑에서 고생 꽤나 할 것이다. 전공의 4년을 위한 맛보기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교수들이 올라왔다. 어수선했던 분위기가 싹 사라졌다. 치프들이 재빨리 각자 자신의 파트 교수 옆에 서며 차트를 펼쳤다. 펠로우 회진은 당연히 교수 다음이다.
차트 확인이 끝나길 기다리던 김지훈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허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