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불타오르자 Ⅰ (2)
군대에 있어야 할 놈, 다음 주에 봐야 할 놈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떡하니 덧 가운이 아닌 수술복까지 입고 있었다. 드디어 절친한 친구이자 또 한 명의 강력한 라이벌이 나타난 것이다.
“여어! 마이 프렌드, 잘 지내셨나? 수술 남았는지 알고 오자마자 옷까지 갈아입었는데, 다 끝났다며?”
“너 이 시간에 웬일이야?”
“뭘 그렇게 놀라? 올해 휴가까지 반납하고 사흘 일찍 왔어. 손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참! 처형은 특별한 일 없지?”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마이 베스트 프렌드가 학회에서 스타 되셨다며? 내가 없는 틈을 타서 훨훨 나네. 그걸 두 눈 뜨고 보기만 해야 하다니, 손 빨고 있어야 할 군대가 웬수다, 웬수.”
넉살은 여전했다.
“스타는 무슨! 이제 3개월 동안 너랑 부딪쳐야 되는구나. 사방이 적이네. 만만하게 볼 놈이 없다.”
“그걸 이제 아셨어? 외상하고 혈관은 3개월 동안 내가 접수할 테니까 얼씬도 하지 마. 그게 강호의 도의다.”
마음속으로 깨끗이 포기한 주임 교수 자리를 빌미로 협박할 날도 며칠 남지 않았다.
“신기동 선생님 연수 가신다.”
“헉! 마이 미스테이크! 군대가 은근히 머리 굳게 만들어요. 단순하게 살아야 피곤하지 않거든. 지훈아, 근데 너 표정이 왜 그래? 말하고 얼굴이 밸런스가 안 맞는다.”
사소한 변화도 놓칠 손일석이 아니었다. 농담이 오고 가면 웃어야 하는데, 김지훈의 눈가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별일 아니야. 늦었어. 회진 끝나고 얘기하자.”
상당히 반가웠지만 조용해야 할 수술 방에서 호들갑 떨면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 급히 병동으로 향하는 김지훈을 뒤따르던 손일석이 씨익 웃었다.
“신기동 선생님 비수가 여전히 아픈 모양이구나. 다음 주 일주일 동안은 내가 대신 맞아 줄게. 고맙지? 혈관 수술할 때 절대 얼쩡거리지 마.”
“그래.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손일석이 후배들과 인사해야 한다며 졸래졸래 뒤를 따랐다. 오자마자 수술실부터 들렀다고 했다. 일의 선후가 바뀌었다.
“너 선생님들께 인사드렸어?”
“김지훈 교수님, 시간을 보세요. 응급실 근무 준비하라는 말씀만 남기시고 신기동 선생님까지 모두 퇴근하셨습니다.”
“그럼 인사는 이따 하고 응급실부터 가. 신기동 선생님이 너 오길 꽤 기다리신 눈치야. 언제 나타나실지 모른다.”
“별 걱정을 다 한다. 너희들이 모르는 신기동 선생님과 나만의 끈끈함이 있어. 강호를 가슴으로 이해하시는 분이지. 그래서 무기로 칼을 쓰시잖아.”
시답잖은 소리 듣다 보니 어느새 병동이다.
난리 났다.
회진 준비하던 전공의들과 간호사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손일석을 격하게 환영했다. 가장 넉살 좋고, 일 잘했고, 웬만해선 싫은 소리 하지 않는 성격 덕이었다.
“이놈의 인기는 식지를 않네. 에휴! 아깝다. 인기 순으로 정하면 혈관 파트 주임 교수는 무조건 난데 말이야. 어이쿠! 벌써 9시가 다 돼 가네. 지훈아, 응급실에 있을게.”
손을 흔들며 휙 사라졌다.
피식 웃으며 입맛을 다시던 김지훈이 하루 일과를 마무리했다. 회진을 돌며 혈관 수술에서 가졌던 마음가짐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응급실이다.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김지훈이 당직이었다.
저녁 식사는 자연스럽게 건너뛰었다.
여느 때처럼 바쁘게 돌아갔고, 한때나마 아수라장이 연출됐다.
이제는 그냥 지나가면 서운할 정도로 당연하게 응급 수술이 떴다.
복합 손상 환자였다.
비장 파열로 바이탈이 흔들렸고, 동반된 장 파열로 심한 복막염 증세까지 보였다. 수술 전후로 상당한 주의와 지속적인 관찰이 필요한 환자다.
전공의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녔고, 김지훈은 매서운 눈매를 유지한 채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환자 상태가 궁금해 엉덩이를 들썩이는 손일석을 꾹꾹 눌렀다.
“후배들이 알아서 할 거야. 우리가 필요하면 바로 말할 놈들이니까 기다려.”
“야! 수준 차이 느껴지네. 전임 된다 이거지?”
“너도 전공의는 아니잖아?”
수술에 필요한 검사 결과가 모두 나왔다. 묵묵히 기다리던 김지훈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어느 순간 수술실에서 마취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종진과 송진우가 당직이었다.
정식 파견이라지만 전공의 자리를 무턱대고 뺏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애매모호한 입장에 처한 손일석이 김지훈에게 구원 요청을 했다.
가급적 퍼스트를 서고 싶다는 눈빛이었다.
친분을 떠나 안 될 일이었다.
“분위기에 적응될 때까지 써드 서.”
“역시 그래야겠지?”
수술이 시작됐다.
김지훈의 손이 무섭도록 빠르게 움직였다. 나종진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
수술실 바닥에 피로 물든 탭이 쌓이기가 무섭게 비장 절제가 시행됐다. 소장이 아니라 대장이 파열됐다.
한 바늘 한 바늘이 환자의 목숨과 직결된 과정이었다. 결코 빠른 진행과 정교함이 관건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환자가 병실로 옮겨진 후에야 눈빛조차 주지 않던 김지훈이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전 기억이 떠오르며 다소 들떴던 손일석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예전의 지훈이가 아니네.’
수술 내내 보인 과감한 손, 응급실에서 전공의에게 강한 신뢰를 보내며 중심 잡는 모습까지 그간 알고 있던 김지훈이 아니었다.
2년에 걸친 펠로우 생활과 대비되는 군 생활 탓을 할 때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따라붙어야 아직 1년이나 남은 군 생활의 불리함을 최대한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바짝 각오를 다진 손일석이 김지훈의 말 한마디와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았다. 경력이 쌓였다는 느낌이 점점 강해지며 때 아닌 긴장까지 다가왔다.
밤하늘의 별 보며 퇴근하는 모습만은 여전했다.
온몸에 피로를 뒤집어쓴 김지훈이 어깨와 목을 돌릴 때마다 우두둑 뼈마디 엇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눈가에 다크서클까지 까맣게 내려앉았다.
“지훈이 너도 나이 먹었구나. 온 동네를 헤집고 다니던 예전의 김지훈이 아니야.”
“나이가 왜 나와? 오늘만 수술 8개 했어, 인마.”
깜짝 놀란 손일석이 딸꾹질을 했다.
‘8개? 어쩐지 손이 달라졌다고 했다. 어후! 이 자식이 날아다니는 정도가 아니었네.’
“3개월인데, 지낼 곳은 구했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입을 열지 않던 손일석이 뜻밖의 말을 했다.
“지훈아, 내가 그동안 공사가 다망해서 미처 말을 못했는데 5월 달로 날 잡았다. 군 생활 일주일 줄였지.”
김지훈의 눈이 쫙 찢어졌다.
“뭐? 그걸 왜 이제 말해?”
“결정한 지 며칠 안 됐어. 그래서 말인데, 굳이 이 상황에서 꼭 방을 구해야 할까?”
“뭐? 지금 우리랑 같이 살겠다는 거야?”
“그럼 안 될까? 나만큼 강호의 도의와 예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없는데, 사고 날 일이 없잖아. 설마 날 못 믿는 거야? 나 베스트 프렌드 손일석이야.”
“그래서 더 못 믿어, 인마. 어쩐지 경희, 아니 처제 얼굴이 굉장히 좋다 했어. 축하해. 아무리 얼굴 볼 시간이 없어도 그렇지, 이런 일은 나한테 먼저 얘기해야지. 너나 처제나 똑같네.”
고경희까지 쌍으로 마음에 안 드는지 손일석을 째려보던 김지훈이 갑자기 화들짝 놀랐다.
이건 남자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경아 씨한데 말했어? 경희, 아니 처제 통해서 허락받은 거야?”
“이 문제는 집안의 가장이신 마이 프렌드가 먼저 결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어휴!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여자 마음 잘 안다고 잘난 척은 혼자 하더니 결국 사고를 치네. 난 몰라, 인마.”
기혼과 미혼의 차이였다.
서로가 너무 친한 탓이지만, 집 안에 사람 들이는 문제는 살림을 책임지는 아내가 결정할 일이었다.
가뜩이나 당직 때면 도와주지 못해 더욱 걱정이 앞선 김지훈이 끙끙 앓았다.
“그럼 없던 일로 하면 되잖아.”
김지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전공의 숙소에서 잘 수도 없고, 방이 뭐 뚝딱하면 구해져? 에휴! 일단 내가 말은 해 볼 테니까, 넌 잔말 말고 가만히 있어. 괜히 나섰다간…….”
“어여쁜 아기 가지신 우리 처형 화내신다고? 지훈아, 나 아직 감 살아 있다. 한번 떠봤더니 친구라고 날 챙기긴 하네. 이미 방 구했어. 걱정하지 마.”
오늘도 예전처럼 감쪽같이 당했다. 얼굴 본 지 14년이나 됐는데 이놈의 장난기를 눈치 못 채다니 절로 이가 갈렸다. 그래도 밉지 않았다.
잠시 손일석을 째려보던 김지훈이 피식 웃었다. 목소리 높인 것이 괜히 미안하기도 했다.
“일석아, 오늘 같은 날 술 한잔해야 되는데 당직이라 미안하다. 넌 언제 쉬어?”
“상부에 보고도 할 겸 일주일에 한두 번 알아서 쉬기로 했어. 현수하고 경석이 형까지 모두 오프인 날 먹자. 들리는 소문에 쩐 좀 받았다고 하던데, 니가 술 살 거지?”
“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처형께서 경희한테 자랑하셨단다. 그게 아니더라도 내 눈과 귀를 피할 수는 없지. 지금도 날 따르는 하오문도가 한둘이 아니다. 아까 병동에서 봤잖아?”
신변잡기를 이렇게 많이 나누는 친구도 없었다. 마냥 즐겁고 편안했다.
집에 도착하자 이미 연락을 주고받았는지 고경아가 환하게 웃었다.
“처형! 오늘 하루만 신세 지겠습니다.”
“곧 한 식구 되는데, 걱정 말고 지훈 씨와 주무세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결혼 축하하다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고경희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손일석도 이런 일에는 평소 태도를 유지하지 못했다.
“처형, 고맙습니다.”
말끝마다 ‘다나까’를 붙였다.
고경아가 손윗사람이라 그럴까?
그럼 김지훈은?
모두가 잠든 밤, 손일석의 눈이 말똥말똥했다. 병원에서 보았던 김지훈의 모습이 떠나질 않았다.
‘오늘은 수술 더 안 뜨나? 에이! 2년밖에 안 됐는데, 이 자식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걸 언제 따라잡지?’
투지가 과했다.
드르렁 코를 골고 있던 김지훈이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손일석은 곤히 자고 있는데, 왜 옆구리가 아픈지 모를 일이었다.
토요일 아침, 손일석이 김지훈과 함께 출근했다. 교수들이 반갑고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일석이 왔구나. 외상 환자 보려면 힘들겠다. 그래도 네게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열심히 하자. 열심히. 일석아, 군인아, 1년 금방 간다. 금방. 저놈들 전임 됐다고 너무 초조해하지 마라.”
“열심히 해.”
“김지훈, 신현수, 공들여 만든 시간이고, 공백 때문에 일하기 힘들 수도 있으니까 신경 많이 써야 한다. 손일석, 애로 사항 있으면 언제든 말해라.”
신기동 교수가 이준영 교수로 변했다.
“회진 돌고 따로 보자.”
예리함의 자리를 무뚝뚝함이 대신했다.
정식으로 인사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송재덕 교수, 이준영 교수, 이혁민 교수, 신기동 교수, 박승준 교수, 지동훈 교수에 어제 보지 못한 신현수와 이경석까지 무려 8명이다.
인사를 마친 손일석이 목을 돌리며 손가락을 꼽았다.
“3월이면 교수만 9명이네. 자리가 생길까? 지훈아, 올해는 펠로우 안 뽑지?”
“그렇게 알고 있는데, 왜?”
“펠로우로 끝내기 아깝잖아. 신기동 선생님 나이도 있으신데, 3년 후에 혈관 파트 교수 한 명 더 충원하겠지?”
펠로우 제도가 정착되면 인원이 점점 많아질 것이다. 결국 펠로우를 마쳐도 교수 자리를 두고 상당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는 의미였다. 지금부터 준비하고 대비하지 않으면 3년 후 웃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간의 불리함이었다.
“별걸 다 걱정하고 있네. 너 말고 혈관 할 사람이 누가 있어? 방금 전에 신기동 선생님 눈빛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걱정 붙들어 매.”
“그치? 역시 마이 베스트 프렌드야.”
즐거운 시간은 여기까지다.
회진 직후 곧바로 주말 집담회가 이어졌다.
1기 대장암과 고도 비만 수술을 했다.
교수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김지훈과 신현수에게 집중 포화가 쏟아졌다.
펠로우 중 가장 냉정하고 침착한 신현수가 고도 비만과 함께 장렬히 산화했다. 굳이 다른 교수들이 나설 이유가 없었다. 이혁민 교수가 조곤조곤 잘게 다진 후, 툭 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질문이 끝나자마자 가운을 벗었다. 와이셔츠가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집담회를 하며 신현수가 이토록 구석에 몰린 적은 없었다.
다음 차례는?
학회 발표로 충분히 대비됐을 줄 알았던 김지훈이 1기 대장암에 걸려 넘어지며 숯가마에 던져졌다. 새까맣게 그을린 후 비수 한 방 맞고, 송재덕 교수의 웃음 속에 숨겨진 망치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움찔움찔 눈치를 보던 이경석은 덤이었다. 아니, 덤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다. 어느새 김지훈과 함께 잿더미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전공의들도 인정사정없이 흠씬 두들겨 맞았다. 가공할 화력, 서늘한 비수, 논리의 바다, 동네 아저씨의 망치도 모자라 박승준 교수와 지동훈 교수까지 구석구석 치고 들어왔다.
결국 전의를 상실하고 백기를 들었다. 교수들 빼고는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손일석이 땀을 닦았다.
‘청춘도 아니고 다들 나이가 드셨는데 어떻게 점점 더 세지시지? 어후! 발가락 살짝 담갔다가 나도 타는 거 아냐? 어차피 파견인데 집담회는 모른 척할까? 아니지. 가장 생생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자린데 빠지기 그렇잖아?’
2년 만에 참석하는 자리였지만 너무 험한 꼴을 본 탓인지 갈등의 갈등을 거듭했다. 누군가 어깨를 툭 치지 않았으면 고민이 끝나질 않았을 것이다.
“일석아, 신기동 선생님이 부르신다.”
손일석과 아직도 집담회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펠로우 3명이 조용히 신기동 교수를 기다렸다. 따로 자리를 만들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말을 한다는 의미였다.
연수 떠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혈관 파트 문제가 분명했다.
모두들 짐작했는지 입을 열지 않았다.
집담회 때 느껴지는 긴장과는 확연히 다른 성격의 긴장감이 회의실을 감돌았다.
김지훈, 신현수, 이경석의 눈빛도 제각각이었다.
‘경석이 형이 제일 만만한데 누구한테 잘 보여야 하나? 김지훈, 저 자식이 될 가능성이 제일 높겠지? 친분과 가족이라는 점을 강조해야 하나?’
손일석은 팔짱을 낀 채 한숨만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