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불타오르자 Ⅰ (1)
짧은 시간 강하게 몰아친 긴장에 김지훈이 어깨를 들썩였다. 나직한 탄성이 터졌다. 수술 팀에게는 의외일 정도로 쉽게 진행된 것처럼 보인 것이다.
신현수가 자신도 모르게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기구를 다루는 실력만의 차이가 아니었다. 정확하고 과감한 판단과 결정은 마치 교수들을 보는 것 같았다.
“현수야, 어때?”
“확실하게 연결된 것 같다.”
이제 위 겉면을 수처해 2중으로 강화하면 된다.
수술 중 자꾸 자리를 바꾸는 일은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김지훈의 애초 역할은 퍼스트였다.
남은 과정은 경험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신현수가 해야 했다. 그만한 실력이 있었고, 이젠 환자에게 미칠 악영향도 없었다.
“이제 내 역할은 끝. 퍼스트 자리로 갑니다.”
신현수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가볍게 농담조로 말을 하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교수 3명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칭찬하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수술이 이어졌다.
신현수는 역시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다. 마치 여러 번 경험이 있는 것처럼 위 겉면 수처를 안정적으로 끝냈다.
위 특유의 모양이 사라지며, 길고 다소 폭이 넓은 파이프 양상의 위만 남았다.
절제된 위를 빼내느라 쩔쩔맸지만 결국 고도 비만 수술을 해냈다. 수술 팀 전체의 실력이자, 김지훈과 신현수의 완벽에 가까운 호흡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지훈아, 현수야, 지 교수, 다들 대단하다. 대단해. 이렇게 뚱뚱한 사람을 어떻게 수술했니? 난 생각도 못한다, 생각도. 덕분에 이 환자가 살았어. 배 열었으면 운 좋아야 소송이다. 잘했다, 잘했어. 지훈아, 위장 쪽은 그만하고 라파로 대장 하자. 라파로 대장.”
“수고했다.”
“김지훈, 신현수, 잘했다. 지동훈 교수, 옆에서 실수하지 않도록 봐줘서 고맙다. 다들 수고했다.”
교수들의 격려를 뒤로하고 회복실로 향했다. 한동안 바이탈이 흔들려 최양희 교수까지 달려왔다.
위 절제는 이제 치료의 시작일 뿐이었다. 부디 비만이 해결돼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만은 면하길 바랐다.
곧 바이탈이 안정되자 초조한 얼굴로 환자 곁을 떠나지 못하던 신현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성을 기울이는 한 별일 없을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오늘 수술의 주인공은 바로 신현수다. 성공적인 수술이 주는 성취감과 뿌듯함을 온전히 즐기길 바랐다.
‘현수야, 오늘 수술 멋졌다. 함께 수술할 기회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집도의가 아니어도 같은 감정을 느끼기에 충분한 수술이었다.
탈의실로 들어가 수술복을 벗던 김지훈이 한참 동안 낑낑댔다. 옷 속에 얼굴을 숨긴 채 만세를 부르고 있었다.
“지동훈 선생님, 도와주세요.”
등짝에 착 달라붙은 수술복을 벗겨 주던 지동훈 교수가 피식 웃고 말았다. 손에 땀이 축축하게 묻었다. 보기와는 달리 수술 내내 상당히 긴장했던 모양이었다.
“무슨 땀을 이렇게 흘렸어?”
“그러게 말입니다. 수술복 찢어지는 줄 알았네요.”
샤워를 하고 말끔해진 모습으로 수술 방을 나가던 김지훈이 흠칫 놀랐다.
뜻밖의 얼굴이 보였다.
강호승이 문 앞에 서서 웃고 있었다.
“김지훈 선생님, 성공하신 거죠?”
“예. 덕분에 잘 끝냈습니다.”
“역시 실력 있는 분들은 다르네요. 신현수 선생님은 안 나오십니까?”
“과장님하고 할 수술이 하나 더 있습니다. 두 시간 정도 있어야 나올 겁니다.”
강호승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저녁이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힘들겠네요. 저희 회사도 정식으로 기구 공급을 맡게 됐습니다. 이렇게 빨리 결정될 줄은 몰랐는데, 일반외과 선생님들 힘이 대단하시네요. 덕분에 일이 잘돼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선생님만이라도 식사 같이하시면 어떻겠습니까?”
한 일이라고는 소개시켜 준 것밖에 없다.
“축하드립니다. 죄송하지만 저도 아직 일이 남았습니다. 앞으로도 필요한 기구 있으면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언제든 전화 주십시오.”
병동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강호승을 보며 역시 사람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업을 위한 일이겠지만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위해 이 늦은 시간까지 기다렸다. 그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정성이었다.
‘사람 만나면서 조심해야 할 일은 잊지 말아야겠지만, 은근히 기분 좋게 만드는 분이네.’
섣부른 생각일 수도 있지만 수술 팀의 일원에 강호승도 슬쩍 올려놓았다. 복강경 수술과 관련돼 큰 힘이 되어 줄 사람이었다.
정말 많은 이들의 노력과 열정이 모여야 한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
1기 대장암과 고도 비만 환자의 복강경 수술을 연이어 성공한 것은 대단한 성과이자 큰 의미였다. 병원 차원의 공식 홍보까지 강화돼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잠시 어깨를 우쭐거렸던 김지훈은 즐거움을 누릴 시간이 없었다. 이준영 교수의 엄한 눈빛과 신기동 교수의 날카로운 비수는 눈곱만치의 방심이나 자만을 허락하지 않았다.
“환자처럼 수술도 크든 작든 다르지 않아.”
“쯧! 라파로만큼은 바라지도 않는다. 똑바로 하자. 다음 주 초에 손 넘겨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불과 열흘 후면 연수를 떠난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주임 교수에 대한 욕심만이 아니었다. 누가 그 역할을 대신하든 혈관 수술을 온전히 책임지고 해야 한다. 구미 3개월의 경험이 도리어 더욱 강한 책임감을 불러왔다.
가공할 라이벌인 신현수와 이경석은 지금도 강렬한 눈빛을 번쩍이고 있었다.
발전의 원동력인 경쟁을 회피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래서 더욱 큰 고민이 다가왔다.
‘단순히 방심하지 말라는 말씀만은 아닌 것 같은데, 뭐가 문제지? 신기동 선생님 눈에 보이는 문제가 무엇일까?’
신기동 교수의 비수가 전에 없이 예리해졌다.
수술 때마다 다들 살벌한 말에 얼어붙었다. 실력, 열정, 노력 무엇 하나 부족하게 보이지 않았기에 상당히 당황스러운 시간이었다.
순조롭게 회복되는 1기 대장암 환자, 바이탈이 흔들리긴 하지만 회복 의지를 잃지 않고 있는 고도 비만 환자를 수술하며 얻은 자신감마저 흔들거렸다.
애꿎은 머리카락만 쥐어뜯었다.
어느새 금요일 아침이 밝았다.
부득이 연기된 수술 때문에 오늘만 5건을 해야 했다. 오늘도 오후 늦게까지 수술 방에서 살아야 한다. 하지만 담낭 절제술과 개복을 요하는 탈장이기에 큰 무리는 따르지 않을 것이다.
첫 수술이 시작됐다.
이혁원과 강병옥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일부분이라도 해 보고 싶다는 열망과 지금 똑똑히 봐야 3년 차 때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일념이었다.
수술이 이어질수록 점점 강렬해졌다.
문득 이제는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수술을 끝내고 결정을 내리려던 김지훈이 입을 삐죽거렸다.
구미에서는 한시적 근무와 논문까지 겹쳐 조성민에게 부분이나마 경험하게 했다.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이혁원과 나종진을 인정하고도 남지만 무턱대고 주다가는 교육 일정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할 수 있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다음 후배들이 떠안을 수밖에 없다.
곧 전임 강사가 된다. 펠로우 때보다 더욱 깊게 고민한 후 체계적으로 복강경을 가르쳐야 했다.
무엇을 기준 삼아야 할까?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김지훈이 턱을 매만졌다.
그동안 새로운 시도, 혹은 첫 수술이라는 의미 때문에 복강경에만 집중했다. 먼저 개복 수술에 필요한 기술과 능력을 갖춰야 복강경 수술을 할 수 있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잊고 있었다.
심각한 오류를 범했다. 어쩌면 교육의 선후나 원칙을 방기했는지도 몰랐다.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올바른 길을 갈 수 있을 것이다.
마침 탈장 환자는 개복한다. 기본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었다.
수술 전 보호자를 만나고 환자 상태까지 신중하게 살폈다. 이혁원도 꽤 많은 경험을 쌓은 수술이지만 원칙에 입각해 집도하기를 바랐다.
“이혁원, 집도해.”
항상 준비돼 있는 이혁원이다. 갑작스러운 말에도 당황하는 기색조차 없이 수술을 시작했다.
퍼스트를 서며 꼼꼼하게 손놀림 하나하나를 확인하고, 수술 부위 처리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4년 차를 눈앞에 둔 이혁원은 그 이상의 수준을 보였다. 깔끔하고 확실하게 탈장을 해결했다. 엄청난 노력 덕일 것이다.
그런데 무엇인가 눈에 걸렸다. 바로 어떤 수술에서도 견지해야 할 기본이었다. 이제는 신경 쓰지 않아도 잘할 것이라 여긴 과정에서 의외의 빈틈이 보였다.
자신감, 혹은 익숙함이 불러온 결과였다.
‘기본! 어느새 나도 잊고 있었네.’
아직 수술이 남았다.
복강경이 이어지는 동안 내내 기본을 생각했다. 숱하게 해 온 박리 과정마저 마치 처음 하는 것처럼 새롭게 보이는 기분이었다.
이혁원의 눈빛에서 욕심과 조급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당연히 부릴 수밖에 없는 욕심은 언제든 환영할 일이었지만 조급함이 문제였다.
모든 수술이 끝난 후 자리를 가졌다.
“병옥이도 불러.”
탈장 수술을 떠올리며 무슨 말이 나올까 기다리던 이혁원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래 연차가 있는 자리에서는 절대 위 연차를 태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들어온 강병옥도 꽤 긴장한 눈치였다.
“이혁원, 강병옥, 라파로 하고 싶어?”
불길이 아니라 담담한 목소리가 나오자 무척 당황스러운 모양이었다.
이혁원이 자세를 가다듬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예. 해 보고 싶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얼까?”
꿀 먹은 벙어리다. 받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사람이 알 문제였다.
“개복 수술을 못하면 라파로는 절대 할 수 없어. 개복 수술이 기본이라는 말이야. 모든 수술에서 지켜야 할 기본을 지키지 못한다면 라파로 할 때 훨씬 더 많은 실수를 하게 될 거야. 사소한 과정까지 신경 썼으면 좋겠다.”
지난 시절 수없이 강조해 왔던 일이었다.
스스로도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충분히 고민할 후배들이기에 길게 말할 문제도 아니었다.
툭툭 이혁원의 어깨를 두드리며 일어나려는 순간 송진우가 들어왔다.
“선생님, 오늘 저녁에 예정됐던 혈관 수술을 앞당겨 하신답니다. 환자 곧 내려옵니다.”
어차피 들어갈 수술인데 시간이 당겨지다니, 도리어 잘된 일이었다.
휴게실을 나가던 김지훈이 상당히 심각한 이혁원을 보며 한마디 던졌다.
“너희들이 수술 못한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이혁원이 얼굴을 펴지 못했다.
곰곰이 생각에 잠긴 채 수술실로 향하던 김지훈이 반성이라도 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너무 욕심 부렸다.
주임 교수라는 말이 유발한 욕심, 수술을 잘하고 싶다는 욕심,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 그 모든 것이 기본을 잊게 했다. 환자나 스스로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욕심이었다. 어쩌면 그간의 성과로 자만했는지도 몰랐다.
‘신기동 선생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몰라도, 나 역시 기본을 잊고 있었던 건 확실하네. 자만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무엇이 됐든 훌훌 털었다.
환자가 내려왔다.
김지훈이 눈가를 좁혔다. 이혁원에게 한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짧게나마 반성하는 시간을 가진 때문인지 신기동 교수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느껴졌다.
“시작해.”
집도하라는 말에 새삼 등짝이 서늘해졌다. 나직한 숨을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완전히 다른 마음가짐으로 수술을 시작했다.
‘기본을 잊지 말자. 난 지금도 배워야 한다.’
피부를 절개한 후 동맥과 정맥을 잇고, 피부를 봉합할 때까지 처음 한다는 생각으로 임했다. 으레 그렇듯 수술 중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드레싱을 마친 김지훈이 조용히 처분을 기다렸다.
‘이번에는 어떻게 했을까? 시간까지 많이 걸렸네.’
송진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지훈 선생님 손이 왜 이렇게 느려졌지?’
신기동 교수의 눈빛이 묘했다.
‘정신을 차린 거야, 아니면 우연히 운 때가 맞은 거야? 다음 수술도 이렇게 하는지 보자.’
“송진우, 멀뚱멀뚱 서 있지 말고 다음 환자 내려.”
비수를 날리기는커녕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단언컨대 이런 적은 없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송진우가 멍한 표정으로 김지훈을 보았다.
다음 수술이 시작됐다.
김지훈의 손은 여전히 느렸다. 말없이 어시스트를 서는 신기동 교수의 속도 알 길이 없었다.
조용한 가운데 혈관이 이어지고, 어느새 피부 봉합이 끝났다.
이번에는 무슨 말을 할까?
“쯧!”
여느 때 같았으면 바로 비수가 날고, 김지훈은 쥐구멍에라도 숨을 소리였다. 장갑을 벗으며 한 번 더 같은 소리만 날리고 수술실을 나갔다.
진작 이렇게 했으면 문제없었을 것이란 눈빛일까?
더욱 매섭게 빛나는 눈이 어림없는 소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김지훈은 그렇게 느꼈다.
하지만 분명 소득이 있었다. 자신만의 바람일 뿐일지라도 다시 중심을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말끔하게 연결된 혈관이 떠올랐다. 불과 이틀 전 같은 수술을 했는데 어딘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신현수와 이경석의 혈관 수술이 떠올랐다. 세 달 동안 어마어마하게 실력이 늘었다. 확실하게 다져진 기본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빤히 봤으면서도 왜 몰랐을까?
‘다 잊고 배운 대로 충실하게 수술하자. 아니구나. 누가 주임 교수가 되어도 함부로 수술을 줄 수 없겠지. 에휴! 그럼 다음 주가 거의 마지막 수술이네.’
혈관은 이렇게 보내야 하는 모양이었다.
도무지 펴지지 않는 얼굴에 송진우가 눈치만 보다 회진을 위해 먼저 올라갔다.
시간이 꽤 지났다. 개인적인 문제 때문에 후배들 일과까지 엉키게 할 수는 없다.
서둘러 일어서던 김지훈이 갑자기 눈만 멀뚱거렸다.
어? 어? 이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