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궁합 잘 맞는 라이벌 (1)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제 한 달 남짓이면 전임 강사다.
응급실에 첫발을 내미는 순간 마치 인턴 첫날인 것처럼 설렘과 함께 의욕이 넘쳤다.
가장 먼저 스승을 찾았다.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이었다.
‘이런 날은 웃으시면 안 될까요?’
살짝 서운함이 다가오는 순간 귀를 확인해야 했다.
“지훈아, 커피 한잔하자.”
우아악! 감동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교수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경사는 김지훈만의 일이 아니었다. 펠로우들까지 함께 자리했고, 교수들은 무난한 전임 임명에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지훈아, 현수야, 경석아, 잘했다. 잘했어. 우리 커피는 어디 있니? 설마 전임 된다고 안 주는 거니?”
“바로 타겠습니다.”
속마음이 잘 드러나는 송재덕 교수가 이준영 교수를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며칠간의 일이 떠오르며 뭔가 감이 왔다.
“지훈아, 교수야, 어제 우리 이 교수하고 얘기 많이 했지? 뭐라고 했어? 궁금하다, 궁금해.”
이준영 교수가 어색한 콧소리를 냈다. 평소 쉽게 보기 힘든 반응을 보니 확실했다. 커피를 타던 김지훈의 입가가 슬쩍 말렸다.
남으라는 한마디면 충분한 일을 두고 심각한 고민을 안겨 준 스승에게 복수할 절호의 기회였다. 이런 기회는 인생 최초이자 마지막이 될 수 있었다.
스카우트 건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고, 도장까지 찍었는데 모른 척하고 냅다 던져도 될 것이다. 사실 없는 말 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른 병원으로 가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준영 교수가 사레 걸린 것처럼 헛기침을 했다.
“뭐? 정말이야? 준영아, 너 얘기 잘하라고 했더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야? 야야, 야. 너…….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거야? 이 과장, 신 교수, 그치? 내 말이 맞지? 에이! 커피 흘렸다.”
예상외로 너무 격한 반응이었다.
이준영 교수가 딴청을 피우며 쓰윽 김지훈에게 무심한 눈길을 던졌다.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끊어졌기에 망정이지, ‘야’ 소리 이어졌으면 복수가 아니라 처절한 응징에 울부짖을 뻔했다.
의도와는 달리 스승과 제자가 동시에 곤란과 난감의 늪에 빠졌다. 이번에도 스승이 제자를 살렸다.
“오늘 고도 비만 수술 있잖아? 뭐 해? 빨리 올라가서 준비해. 쉽지 않은 수술이야. 신현수, 이경석, 너희들도 올라가.”
말까지 길어졌다.
후다닥!
마무리가 깔끔하지 못했지만 왠지 마음이 편안해졌다.
스승은 위기에서 벗어났을까? 외래에서 한바탕 큰 웃음이 터졌다는 것은 알 도리가 없었다.
매일 보는 후배들과 병상에 누운 환자들마저 새롭게 보였다. 이혁원과 나종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때가 기회라는 듯 빈틈을 노렸다.
“혁원아, 뭔가 좋은 일이 있으신 모양인데 밀어붙여 봐. 네가 먼저 뚫어야 나도 받을 수 있지 않겠어?”
“오늘 고도 비만 수술 있잖아. 일단 그 수술부터 끝나야 들이밀 수 있을 것 같아. 대장암 수술이 잘 끝난 지금이 절호의 찬스인 것 같은데 아깝다.”
절호의 기회 잘못 찾으면 사달 난다.
김지훈이 후배 두 놈의 날카로운 눈빛을 뒤로하고 수술 방으로 향했다.
예정된 첫 번째 수술을 끝낸 후 부리나케 곽준웅 환자를 찾았다. 집도의는 아니지만 툭하면 흔들리는 바이탈 때문이라도 수술 전에 볼 필요가 있었다.
신현수가 이미 환자를 만나고 있었다.
이젠 빈틈을 찾기 어려웠다. 긴장과 고혈압이 겹쳐 얼굴까지 벌게진 환자를 안심시키며 차분함을 유지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잠시 후, 수술 방에서 연락이 왔다.
오전 10시 30분, 고도 비만 환자가 수술실로 옮겨졌다.
불현듯 생각이 많아지는 순간이었다. 신현수도 그런 모양인지 입을 꾹 다문 채 눈빛만 굳혔다.
“현수야, 이 환자 꼭 성공해라.”
“갑자기 무슨 소리야?”
“비만은 병도 아니고, 환자 탓이라고 생각했던 게 미안하네. 앞으로 비만 수술이 많아질 거란 예감도 들어.”
신현수가 콧등을 찡그렸다.
“나도 최양희 교수님하고 얘기하다 생각 많이 했어. 꼭 고도 비만이 아니더라도 내과 치료로 효과가 없다면 메스를 대야 하는 경우가 제법 있을 것 같아. 손이 더 익숙해져야 하는데 걱정이다.”
또 하나의 분야가 펠로우들의 뇌리를 스쳤다.
수술실로 들어가자 준비가 한창이었다.
환자를 보는 신현수의 눈가에 강한 긴장이 서렸다. 김지훈과 지동훈 교수 역시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수술대가 좁을 정도의 비만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김진호 교수와 윤서연이 마취를 맡았다. 혈당과 혈압을 조절하느라 애를 먹었다.
“환자분, 긴장하지 마세요. 혈압 올라갑니다.”
띠띠띠띠띠!
후욱! 후욱!
급박한 박동과 거친 호흡이 조절되지 않았다. 마치 쇼크에 빠진 환자처럼 불안정해 초긴장 상태에서 마취가 진행됐다. 혈당과 바이탈을 안정시키는 각종 약제와 함께 마취제가 투여됐다.
마취가 끝났지만 수술을 시작할 수 없었다. 칼을 대기도 전에 심각한 상황이 이어졌다. 복강경 실패의 대가가 어떨지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김지훈, 신현수, 지동훈, 이혁원.
구성할 수 있는 최고의 수술 팀을 꾸렸지만 누구도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은근한 불안함에 이준영 교수도 참여하기를 바랐지만 이미 믿고 맡겼다.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김지훈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복강경의 중요도와 수술의 위험도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고도의 집중력과 침착함이 필요했다. 과도한 긴장은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15분 정도 지나서야 바이탈이 안정됐다.
신현수가 김지훈과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마취과, 수술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예, 시작하십시오.”
“시작하겠습니다. 메스!”
메스를 건네는 고경아의 손이 침착했다.
처컥! 처컥!
공기가 주입되며 서서히 배가 부풀어 올랐다. 팽창된 복부가 수술 팀의 몸에 닿을 정도였다. 예정대로 진행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배꼽 안을 절개하고 기존 기구와는 달리 확연하게 긴 에어 팁을 꽂았다. 숙달된 써전에겐 무척 간단한 과정조차 쉽지 않았다. 깊숙이 밀어 넣어도 배가 뚫리는 감각이 느껴지질 않는지 신현수의 눈가에 주름이 생겼다.
“설마 이미 뚫린 건 아니겠지.”
“CT로 판단해 보면 더 들어가야 될 것 같아.”
이미 계산했을 신현수였다.
툭!
배꼽 안인데 에어 팁이 거의 7~8센티미터 이상 들어간 후에야 복막을 통과했다. 기존보다 훨씬 긴 트로카로 간신히 통로를 확보했다.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넣었다. 배 속이 나타나는 순간 모두들 말을 잃었다.
온통 노란색이다.
장기에 지방이 두텁게 붙은 것이 아니라 지방에 장기가 묻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동안 수술했던 환자 중 가장 뚱뚱했던 대사 부인과 비교할 수도 없었다.
신현수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지훈아, 이대로 진행해도 될까?”
다른 방법도, 선택의 여지도 없다. 긴장을 풀기 위해 물었을 것이다.
이내 10밀리미터 트로카를 삽입했다.
내장 비만이 너무 심해 지방에 묻힌 장기와 복막과의 간격을 확보하기 상당히 어려웠다. 자칫 날카로운 끝이 어딘가를 찌를 것 같았다.
김지훈이 화면을 보며 말했다.
“간호사, 복부 압력 최대 허용치까지 올려 주세요.”
처컥! 처컥!
배가 딱딱하게 느껴질 정도로 공기가 주입됐다. 이제야 시야가 어느 정도 확보돼 나머지 두 곳을 더 뚫을 수 있었다. 카메라까지 도합 4개의 기구가 삽입됐다.
아주 간단하게 여겼던 과정마저 땀을 흐르게 했다. 앞으로 얼마나 험난할지 모를 일이었다. 신현수의 라파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수 있는 첫 기회이기도 했다.
본격적인 수술이 시작됐다. 위 하부를 덮고 있는 평행결장을 끄집어 내렸다. 아주 살짝 잡은 것 같았는데 이내 피멍이 들었다. 지방조직이 너무 과도하게 많은 탓이었다.
‘아차하면 출혈이 만만치 않겠어.’
보통 혈관과 약간의 지방이 붙어 있는 조직인 대망조차 기름 덩어리였다.
신중하게 대망을 제치고 위를 노출시켰다. 위마저 지방에 가려 본래의 조직은 일부만 보였다.
답답한 한숨이 절로 터졌다.
이론적으로 수술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좌측 위의 3분의 1이나 절반 정도를 수직 절제하면 된다. 즉, 비장에 면한 부분을 잘라 위 자체의 크기를 줄여 주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식사량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문제는 비장과 연결된 조직이 그냥 지방 덩어리라고 해도 무방하다는 점이었다. 그 속에 위동맥만이 아니라 자잘한 혈관까지 위험 구조물이 수없이 숨어 있다.
하나라도 놓치면 가장 성기고 약한 조직인 지방을 따라 피가 번진다. 두께가 얇다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지만 지금은 기구가 가진 한계를 넘어선 상태였다.
“지훈아, 가능할까?”
“이 배를 열 수는 없잖아? 잘못 열었다간 칼 댄 자리는 하나도 안 아물겠다. 현수야, 자신감을 갖고 진행하자.”
절대 서둘러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까?”
김지훈이 카메라를 잡고 수술 부위를 찬찬히 살폈다.
예정했던 절제 선은 무의미했다. 가장 손상을 적게 입힐 수 있는 부위를 따라 절제하는 것이 안전할 수밖에 없다. 눈에 보이는 구조와 경험을 총동원했다.
상대적으로 지방이 적은 부분을 찾아 가상의 박리 선을 그려 보았다. 전적으로 신현수의 손에 달렸지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수야, 이 부분을 따라 비장 연결 조직부터 자르고 위아래에서 스테이플을 사용하면 될 것 같은데, 어때? 지동훈 선생님, 어떻게 생각하세요?”
최선의 방법이었다.
신현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선뜻 기구를 잡지 못했다. 결코 말처럼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담낭 절제 중에도 난관에 부딪친 기억 때문이었다.
1기 대장암과 고도 비만.
어떻게 보면 비교도 되지 않는 질환이었다.
당연히 대장암 수술이 더 어렵고 위험해야 했다. 그런데 막상 배 속을 확인하고 나니 엄청나게 달랐다. 수술 방법은 간단하다지만 이면에 숨은 위험성은 대장암 수술을 넘고도 남았다. 환자에겐 안타깝고, 수술 팀에게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실력과 경험이 절실하게 필요한 수술이었다.
조기 위암 때 작은 부분이나마 위를 잘라 본 경험, 대사 부인처럼 비만이 심한 환자의 수술 경험, 장기와 장간막을 모두 잘라 본 경험, 이 모든 수술을 다 해 본 사람은 김지훈뿐이었다.
절대 자존심을 세울 상황이 아니었다.
‘응급실에서 내게 환자를 넘겼을 때 느낀 지훈이 마음으로 충분해. 내 실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 경석이 형과 다를 바가 없는데 너무 무리한 욕심을 냈어.’
“지훈아, 내가 집도할 수 있을까?”
본격적으로 진행하기도 전에 집도의가 자신감을 잃다니 깜짝 놀랄 일이었다. 어쩌면 자신의 실력을 가장 객관적으로 판단한 결과일 수도 있었다.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사실 신현수만이 느끼는 어려움이 아니었다. 화면만으로도 똑같은 겁을 집어먹을 수밖에 없었다. 반면 분명히 할 수 있다는 마음도 있기에 더욱 냉정해야 했다.
가장 수술을 무난하게 진행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굴까?
고민할 여지가 없었다.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실력을 가진 스승이다.
“간호사, 이준영 선생님께 연락…….”
그때 수술실 문이 열리며 이준영 교수가 들어왔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김지훈을 힐끗 보고서는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 전체가 노랄 정도로 어마어마한 지방조직을 보며 한숨 속에 담긴 의미를 단박에 알아차렸다.
“선생님, 이번 수술 들어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준영 교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신현수는 자신감의 일부분을 잃었다. 김지훈은 불안이 아니라 집도의의 입장을 고려하는 눈치였다.
이 시점에서 집도의를 바꾼다는 것은 여러 문제를 유발할 수 있었다.
냉철하게 판단해야 했다.
‘현수 실력으로 가능할까? 아슬아슬하지만 여기서 겁을 먹으면 다음번엔 수술도 하기 전에 두려움부터 느끼겠지. 비만 수술은 위장관 파트 수술이다. 지훈이 생각대로 현수 네가 맡아야 해.’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신현수, 자신감을 갖고 진행해. 네가 꾸린 수술 팀이야. 김지훈, 퍼스트가 해야 할 일을 알잖아? 너만큼 경험 있는 써전은 없어.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
신현수에게 더없이 강한 신뢰를 보냈다. 퍼스트인 김지훈이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이준영 교수가 수술 팀에게 눈길 한 번 주고는 그대로 수술실을 나갔다. 애초에 참관을 위해 들어왔을 것이다. 자신은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진행하라는 의미였다.
눈가를 굳힌 채 이를 꽉 문 신현수와 함께 각오를 다지던 김지훈의 얼굴이 돌연 벌게졌다.
마지막 말이 귀에 확 들어왔다.
제자의 자만을 가장 경계하는 스승이기에 항상 엄한 자세를 유지했다. 좋은 소리든 나쁜 소리든 결코 의미 없는 말 역시 하지 않았다.
분명 자신만큼 경험 많은 써전은 없다고 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수술 팀과 복강경에만 국한된 말일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었다.
분명한 사실은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제자가 스승을 넘어선 부분이 있다는 첫 번째 말일 수도 있었다.
너무 벅찬 탓인지 기쁨도, 흥분도 느껴지지 않았다.
과대 해석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스승을 만난 지 햇수로 7년째 되는 2월 어느 날을 절대 잊지 못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