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99화 (799/1,329)

6화.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은 하나다 Ⅳ (2)

1년과 2년, 과감과 소정의 미묘함, 추천권.

분명 객관적으로는 큰 차이가 난다. 그러나 개인에 따라, 관점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른 판단을 내릴 수도 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조건도 냉철하게 봐야 하겠지만, 비교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어.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간판만 없을 뿐 복강경 센터는 이미 스승, 동료와 함께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욕심을 부리자면 한이 없겠지만 충분한 보수를 받고 있다. 펠로우 추천도 언제든 의견을 십분 받아들일 스승과 교수들이었다.

이미 많은 것을 누리고 있고, 누릴 것이다.

본의 아니게 뜸을 들였다.

신동철 이사장은 물론 윤재철도 정확한 조건은 모르지만 스카우트 제의를 알고 있었다. 일반외과 교수들에게 부탁까지 했는데 말이 없자 은근히 다급해졌다.

“신현수 선생이나 이경석 선생보다 좋은 조건이라는 것은 말할 수 있지만, 김지훈 선생 입장에서는 만족스러운 조건이 아닐 수도 있을 겁니다. 혹시 생각했던 조건이 더 있습니까?”

‘조건이 더 있냐고 하신 건가?’

생각도 못한 말에 김지훈이 입술을 모았다.

연이어 뜸을 들이며 입을 열지 않자 윤재철이 눈가를 좁혔다. 전공의를 막 마친 김지훈과 지금의 김지훈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일 수가 없었다. 지난 2년의 공로는 물론 앞으로도 지대한 공헌을 할 능력까지 갖췄다.

‘역시 이 조건으로 잡기 힘든 건가? 인센티브 액수까지 구체적으로 밝혀야 할까? 아니지. 김지훈 선생은 돈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도리어 역효과를 낼 수도 있어.’

윤재철이 시선을 주자 신동철 이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견이 좀 있는 것 같군요. 당장 대답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일주일 정도 시간을 갖고 결정해 주세요.”

이미 1차 면담을 했고, 최종 결정을 내린 후 도장 찍는 자리다. 병원 내부만이 아니라 행정 기관에도 통보해야 하는데 일주일이나 시간을 주다니 의아한 일이다.

“시간을 더 주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김지훈의 물음에 윤재철이 내심을 감추며 평소와 다름없이 웃었다.

사업가다운 면모를 잃지 않았다.

“병원 사회 의외로 좁습니다. 누구나 능력 있는 사람을 잡으려 하고, 소문은 빨리 퍼지는 법이죠. 어쨌든 그건 우리 사정이고 지금은 김지훈 선생이 주도권을 갖고 있네요.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내리길 바랍니다. 그래야 오래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무뚝뚝한 스승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담긴 의미를 간과했다. 결국 관계를 맺은 사람은 모두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어쩌면 신현수까지 말이다.

그렇다면 병원이 제시할 수 있는 최선의 조건이 분명했다. 더 이상 고민할 문제가 아니었다. 마지막 관문만 통과하면 미련 없이 도장을 찍어도 될 것이다.

마음을 굳힌 김지훈이 입을 열려다 말고 또 생각에 잠겼다. 공연한 반응이 아니었다. 스승의 말에도 불구하고 막판까지 저울질한 꼴이었다.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올 때마다, 혹은 재계약 시 또 고민하고 흔들릴 수는 없었다. 결코 후회하지 않기 위해 확고한 기준이 필요했다.

선택의 핵심이 될 가장 중요한 것.

신동철 이사장과 윤재철이 앞에 있는 자리였다. 최대한 빠르게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돈, 명예, 직함, 근무 여건까지 많은 조건이 떠올랐다. 여기까지면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똑같은 대우를 요구하든지, 병원을 옮기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면 된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지난 세월, 한결처럼 생각해 온 그 무엇.

바로 사람이다.

스승과 교수, 동기, 선후배들이다.

어떤 선택을 하든 축하해 주고, 밝은 앞날을 빌어 줄 사람들이다. 병원을 옮기는 순간 그들과 함께 이루었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물질적인 조건도 중요하지만 함께 일할 동료보다 더 중요한 조건은 없어. 래윤이가 그만둔 이유를 생각하자.’

7년이란 세월 동안 쌓은 신뢰와 믿음.

애써 그 시간을 기억할 이유마저 없었다.

당장 이번 주만 해도 얼마나 즐겁고 가슴 떨리도록 행복하게 일했는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누가 대장암을 양보하고, 누가 고도 비만을 함께 수술할 수 있을까?

집도하고자 욕심내지 않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일이었다. 명예나 명성을 차지하기 위해 볼썽사납게 싸울 수도 있지만, 큰 소리 한번 나지 않았다.

바로 그 속에 꿈이 있었다.

최고의 수술 팀은 실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최고의 써전을 바라볼 수 있었다. 돈은 당장의 손해에 불과했지만 사람을 잃으면 평생 후회할 것이다.

꿈도 함께 날아간다.

‘그래.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사람이야.’

어느 때보다 머릿속이 맑아졌다. 온몸이 개운할 정도였다.

이제 계약서에 도장만 찍으면 된다. 단, 그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눈빛을 굳힌 김지훈이 엉뚱한 말을 했다.

“이사장님, 죄송합니다만 전화 한 통만 하고 와도 될까요? 5분 정도 실례하겠습니다.”

신동철 이사장의 눈가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계약하는 자리에서 전화라니, 다른 병원과 연락하려는 것이 틀림없다는 표정이었다. 내심 낙담하며 불안과 걱정을 애써 감췄다.

“허허! 그래요. 빨리하고 와요.”

김지훈이 자리를 비우자 신동철 이사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윤재철도 씁쓸한 얼굴이었다.

“사돈어른, 예감이 좋지 않습니다. 무리하더라도 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해야 했을까요?”

“이사장님, 저도 정말 안타깝지만 그건 아닙니다. 당장 김지훈 선생을 붙잡을지 몰라도 한 명에게 지나친 특혜를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신경 써야 할 사람은 김지훈 선생만이 아닙니다. 다수의 불만을 사면 결과는 최악일 겁니다.”

“그렇겠죠. 동의는 하는데 무척 아쉽네요.”

고개를 끄덕이던 윤재철이 봉투 하나를 집었다.

“계약이 안 되더라도 실적에 따른 추가 인센티브는 지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병원을 옮긴다고 해도 훗날을 위한 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사업적 마인드였다.

어느 누구도 직장 내에서 트러블이 없을 수 없다. 김지훈처럼 눈에 띄는 인재는 질시와 견제의 대상이기도 했다. 더구나 굴러 들어온 돌이 나이까지 어리다면 버티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불미스러운 일만 아니라면 떠난 사람도 웃으며 반길 수 있는 것이 세상이기도 했다.

신동철 이사장이 피식 웃었다.

“금경태, 하성원 원장과 싸워 이긴 사람인데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세상일은 누구도 모르는 법입니다. 때론 과감한 투자가 필요한 법이지요.”

노크 소리가 들렸다. 김지훈이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들어왔다.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윤재철의 눈짓을 받은 신동철 이사장이 봉투를 내밀었다.

“이사장님, 이게 뭡니까?”

“계약 시 지급하기로 했던 추가 인센티브입니다. 결정과 관계없이 김지훈 선생에게 지급하려던 돈이니까 받아 두세요. 신경 쓰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럼 결정을 들어 볼까요?”

김지훈이 봉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돈을 앞세우려 했다면 액수부터 밝혔을 것이다. 이미 인센티브를 일정 정도 받아 왔기 때문에 성의 표시 정도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마음이 담긴 것만은 틀림없었다.

‘정말 제대로 결정한 것 같다.’

“계약하겠습니다.”

잠시 말이 없었다.

“정말 현 조건으로 계약할 겁니까?”

“예. 혹시 제가 알아야 할 조건이 더 있습니까?”

신동철 이사장이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허허허! 좋습니다. 도장 찍죠.”

시간은 약일 수도, 독일 수도 있었다.

꽝! 꽝! 꽝! 꽝!

일말의 주저도 없었다.

두 부를 작성해 한 부씩 나눠 가졌다.

이것으로 전임 강사 임명이 확정됐다.

김지훈이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흐뭇한 기색으로 계약서를 보던 윤재철이 물었다.

“의외로 쉽게 결정돼서 기분 좋군요. 그런데 방금 전에 누구에게 전화한 겁니까? 혹시 다른 병원과?”

김지훈이 다소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집안일을 말할 때는 누구나 다 그렇다.

“아닙니다. 와이프에게 했습니다. 최소한 말은 하고 최종 결정을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신동철 이사장이 물끄러미 김지훈을 보았다. 애먼 걱정을 했다는 생각에 스스로 어이없다는 얼굴이었다.

“안사람 허락이 있긴 해야죠. 허허허! 우리 김 교수, 애처가인 줄 알았는데 공처가였네요? 이사장님, 안 그렇습니까?”

그 와중에 호칭이 바뀌었다.

“이사장님, 그러다 계약 파기됩니다. 애처가가 맞지요. 김 교수, 한 가지만 더 물어봅시다. 사실 다른 병원에서 제시한 조건에 크게 못 미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왜 우리 병원에 남는 겁니까?”

김지훈이 자세를 바로 했다.

“이준영 선생님께서 제게 가장 중요한 것만 생각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음 편하게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김 교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요?”

“사람입니다. 병원 규모가 아무리 크고 시설이 아무리 좋아도, 절 믿어 주고 함께할 사람이 없다면 제 꿈을 이룰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신동철 이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 동안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성숙한 생각이었다. 그런 면을 스스로 깨닫게 해 준 이준영 교수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꿈이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최고의 수술 팀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래야 제 꿈이자 목표인 최고의 써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신현수 선생과 많은 도움을 받아야 할 윤서연 선생은 다른 병원에 없지 않습니까?”

아들과 딸이다.

이것이야말로 멋진 아부였다.

신동철 이사장과 윤재철이 서로를 보며 웃었다. 말속에 담긴 의미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김지훈이 자신의 꿈을 간직하는 한 일반외과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그것이 병원의 미래이기도 했다. 어쩌면 김지훈 덕에 신동철 이사장과 윤재철이 꿈꾸는 병원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함께 일할 수 있게 돼서 정말 기쁩니다. 오늘 같은 날은 가족과 함께해야겠죠? 봉투 조심해서 갖고 가세요. 일부러 통장에 안 넣었습니다.”

봉투 단속 잘하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지만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꾸벅 인사를 하고 나온 김지훈이 전화기부터 꺼냈다.

“경아 씨, 도장 찍었어요.”

(교수님, 축하드려요.)

즐겁고 상기된 목소리가 오고 갔다.

이제 보고를 드려야 한다.

“스승님, 방금 전에 계약했습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게 가장 중요한 것을 선택했고, 절대 후회할 일 없습니다.”

한동안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깊은숨이 살짝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알았다. 내일 보자.)

그 한마디로 끝이었지만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스승의 흥분과 기쁨을 말이다.

서로가 서로를 절대 잃을 수 없는 사람이기에 도리어 특별한 말은 필요 없었다.

“예, 스승님. 안녕히 주무십시오.”

(지금 10시도 안 됐다.)

하! 하! 하!

한결 가볍고 후련한 마음으로 집에 도착했다.

마주 앉은 고경아에게 계약 체결에 대해 말하며 봉투를 내밀었다. 주부답게, 경제권을 가진 아내답게 재빨리 액수부터 확인했다.

“추가 수당이라 얼마 안 될 거예요.”

동시에 입이 쩍 벌어졌다.

생각해 보면 돈 역시 중요했다. 기본적인 생존권만이 아니라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필수적인 요소다. 사람과 함께 돈, 명예, 명성에도 적당한 욕심을 부린다면 그 또한 발전의 원동력일 것이다.

무조건 좋은 일이었다.

고경아가 마구 김지훈의 팔을 때렸다.

“어머! 어머! 어떡해! 지훈 씨, 이거 정말 확실하게 받은 거죠? 다시 빼앗아 가는 거 아니죠?”

“이건 계약하고 상관없는 돈이에요.”

얼굴까지 빨개진 고경아가 색색 숨소리를 내다 말고 호들갑을 떨었다.

“지훈 씨, 우리 이사 가요. 아이 방도 필요하잖아요? 이 집 보증금에 그동안 모은 돈하고 합치면? 아휴! 근처 아파트는 못 사도 훨씬 넓은 집에서 살 수 있겠네.”

아내의 권한이다. 결정하면 따르고, 함께 즐거워하면 된다.

불현듯 정말 결정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보면 의식하지 못했을 뿐 언제나 사람을 먼저 생각해 왔다. 환자와 가족, 동료와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한 결과가 바로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었다.

실력은 결코 혼자 얻을 수 없다.

동료 덕에 놀라운 성과를 냈다.

학회를 기회로 조그만 명성까지 얻었다.

경제적 이득은 저절로 따라왔다.

누구도 탄탄대로만 걷지 못한다. 어떤 이유로든 때론 좌절하고, 때론 암울한 날이 올 것이다. 그때 함께 울어 주고, 고민해 줄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일어날 수 있다.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사람이 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장 소중한 재산을 이미 갖고 있었다. 덩그러니 홀로 남겨졌을 때는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이 눈물 나게 고마웠다.

김지훈이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밤하늘에 빛나는 두 개의 별.

어디선가 불을 밝히고 있을 소중한 사람들.

두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내일은 어느 날보다 힘차게 시작할 수 있었다. 지금의 마음과 자세를 잃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만큼 후회할 삶은 줄어들 것이다.

‘스승님, 감사합니다. 경아 씨, 고마워요.’

돌아보아야 할, 감사해야 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한 명 한 명 그들과의 관계를 돌이켜 보는 사이, 지난 2주 동안의 고민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H 병원 과장에게 전화를 해 결정을 알렸다. 무척 서운해하며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진충기에게도 연락하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바쁜 일이 있는지 끝내 연결되지 않았다.

‘이번 일로 감정 상할 일은 없다고 봅니다. 학회 때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볼지 모르는데, 좋은 관계 유지했으면 합니다.’

내부에 신현수가 있다면 외부에는 진충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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