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은 하나다 Ⅳ (1)
대장을 잡던 김지훈이 힐끗 시계를 보았다.
이미 2시가 훌쩍 넘었다. 생각보다 빨리 진행됐지만 아무리 빨리 끝나도 3시 반은 넘을 것이다.
갑자기 고개를 흔들며 콧등을 찡그렸다.
‘예정대로 끝나긴 하지만 다음 수술은 언제 하지?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오늘 해 달라는지 모르겠네. 하긴 하나라도 빨리해야 나도 편하고, 환자도 편하겠지.’
많은 난관과 어려움이 예상된 수술이기에 가급적 다른 수술을 잡지 않으려 했지만, 환자의 사정과 밀린 수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날은 의사나 환자나 다 힘들다.
코 줄을 낀 채 물도 먹지 못하고, 하루 종일 초조함 속에 자신의 차례를 기다릴 것이다. 별 탈 없이 4시에만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랐다.
지금은 잡생각에 불과했다. 곧바로 수술을 진행했다.
하행결장을 자르고 연결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지만 워낙 힘들게 수술한 탓인지 어려움이 느껴지질 않았다.
아니다. 이경석과 박승준 교수가 함께하기 때문이었다.
빠르게 진행된 수술이 막바지에 다다랐다. 대장을 넣고 수술 부위를 정리한 후 복부를 닫았다. 때 맞춰 이준영 교수와 송재덕 교수가 슬쩍 얼굴을 비쳤다. 무사히 마쳤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듯 편안한 표정이었다.
“컷!”
마지막 실을 자르는 순간, 똑똑하게 전해지는 감촉과 환자의 소리 없는 몸부림에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분이 느껴졌다.
“끄으으응!”
기관에 삽입된 튜브를 빼자 거친 호흡을 토해 내며 눈을 떴다. 긴 수술과 마취를 견뎌 내고 잘 깨어났다.
드디어 하행결장에 발생한 1기 대장암 수술이 끝났다. 6시간 넘게 이어진 긴장이 서서히 물러났다.
최선의 수술 팀이 최고의 결과를 이끌어 냈다.
또 하나의 이정표다.
결코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다. 동료들이 없었다면 해낼 수 없는 수술이었다. 다른 어떤 날보다 강한 성취감과 진한 감동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이경석의 눈가에도 강한 자부심이 스쳤다. 김지훈이 자신도 모르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 모든 일이 스승과 교수, 동료의 관심과 응원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가슴 깊이 느꼈다. 함께한다면 어떤 수술도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10분도 제대로 못 쉬었다.
4시 정각에 다음 수술을 이어 갔다.
수술 내내 경험할 기회를 달라는 이혁원의 강렬한 눈빛이 뒤통수에 팍팍 꽂혔다. 집도의가 힘들든 말든 개의치 않는 놈들 때문에 도리어 웃음도 나고, 힘이 됐다.
어쨌든 오늘은 아니었다.
“기구 연습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욕심이 너무 앞서면 실수하기 마련이다.”
점잖게 다음을 기약하는 순간 송진우가 헐레벌떡 휴게실로 들어왔다.
혈관 수술 두 개가 떴다. 다른 교수도 아니고 신기동 교수라니, 죽어라죽어라 하는 날이었다.
“몇 시에 하신대?”
“6시에 시작하신답니다.”
“50분에 깨워 줘.”
단 10분이라도 잘 수 있다면 피로를 덜 것이다. 힐끗 시계를 본 김지훈이 그대로 눈을 감았다. 대장암 수술이 준 긴장이 상당했는지 나직하게 코까지 골았다.
‘대장암 수술이 정말 힘드셨나 보네. 하긴 퍼스트를 선 이경석 선생님도 맥을 못 추시던데, 수술을 연이어 하셨으니 이럴 만도 하시지.’
송진우가 옆에 앉아 조용히 시계만 보았다.
잠깐 눈 감았는데 누군가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선생님, 55분입니다.”
깜짝 놀란 김지훈이 허둥지둥 찬물에 머리까지 감았다. 괜히 잤다. 머릿속이 바위라도 든 것처럼 무거웠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잠시 잊었던 투지를 최대한 끌어 올린 후 신기동 교수와 머리를 맞댔다.
오늘은 다를까?
“쯧쯧! 수술 시간도 못 지키니 제대로 돌아가겠어?”
농담이 아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일반외과 의사에게 예외는 없다. 생사를 오가는 환자가 오면 무슨 일이 있어도 시간 안에 수술해야 하는 특성 때문이었다.
혀 차는 소리만으로도 등골이 시렸다.
두 번째 혈관 수술을 집도하고 나서는 동태가 됐다. 아침 한 끼 먹고 하루 종일 수술실에서 살았는데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오늘 같은 날은 미리 말하고 수술 하나 정도 빠져도 돼. 단, 들어오기로 했으면 시간 철저하게 지켜. 환자는 의사를 기다려 주지 않아.”
첫마디는 신기동 교수의 말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였다. 절로 웃음이 나왔지만 두 번째 말에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써전이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 중의 원칙이기 때문이었다.
신기동 교수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김지훈,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만, 단 하나만 스스로 깨닫자. 너희들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아. 그걸 먼저 보여 주는 놈이 올해 혈관을 맡게 될 거야.’
이젠 교수들 모두 놀라움을 넘어 더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더구나 선배가 아닌 주임 교수로서 누군가를 가르쳐야 하기에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었다.
너무 뛰어나기에, 하루하루가 달라지는 펠로우들이기에 도리어 희미해졌을지도 모르는 그 무엇을 말이다.
‘도대체 어디까지 발전할까?’
불현듯 떠오른 손일석의 얼굴에 신기동 교수가 진한 아쉬움을 보였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피하지 못할 군대지만 3년이란 세월이 아깝다는 생각을 피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늦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김지훈이나 손일석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이경석이 단적인 예였다.
8시가 훌쩍 넘었다. 거의 13시간째 강제 금식이었다. 주린 배를 부여잡고 당장 식사부터 하고 싶었지만 오늘도 제때 밥 먹을 팔자는 아닌 모양이었다.
수요일로 예정된 고도 비만 수술에 대비해 신현수, 지동훈 교수와 함께 최종 점검까지 해야 했다. 그나마 우유와 빵이 있어 허기는 달랠 수 있었다.
신현수의 의욕이 넘쳐났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됐는데 끝낼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는 소리가 혀끝까지 밀려 나왔지만 수술 팀의 열정에 입 꾹 다물어야 했다.
결국 날짜가 바뀌고서야 퇴근했다.
‘큰일이네. 첫 수술이라 다행이지만, 수요일에도 내 수술은 하나밖에 못하네. 밀린 수술을 언제 다 하지?’
월요일, 수요일, 단 이틀 밀릴 뿐이었지만 수술 예약이 이어져 당분간은 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에는 생각도 못한 변화였지만 쫓기듯 수술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다.
스승과 동료의 협조가 절실했다.
‘고민은 내일 하고, 빨리 자자.’
김지훈이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무척 힘들고 피곤한 날이었다. 곤히 잠든 고경아의 얼굴에서 평온을 찾았다.
다음 날, 아니 퇴근한 날 집에 도장만 찍고 바로 출근해 회진 준비를 했다. 1기 대장암 수술을 무사히 마쳤다는 사실이 화제에 올랐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겸손이 필요한 법이다. 자랑할 일이라고 해도 드러내 놓고 내세울 일은 아니었다. 환자가 무사히 회복된 것만으로 충분했다.
묵묵히 진료 준비하고, 막 첫 환자를 보기 직전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이사장실이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후회 없는 결정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과분한 조건으로 펠로우를 시작했지만 전임 계약은 또 다른 문제였다.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후 이준영 교수의 말과 교수들의 침묵에 많은 생각이 오고 갔다.
‘다른 병원에서 제시한 조건을 말해 볼까?’
사람이면 누구나 욕심이 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보다 좋은 조건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은 다 같을 것이다.
손가락을 꼽으며 조건을 떠올린 김지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은근히 싱숭생숭했다.
이경석도 연락을 받았는지 초조한 기색을 보였고, 걱정 없을 신현수마저 신경 쓰는 눈치였다.
“경석이 형, 무슨 걱정을 그렇게 해요? 형하고 계약 안 하면 누가 전임이 될 수 있겠어요? 현수야, 넌 또 왜 그래?”
장래가 걸린 일인 데다 나이 많다는 불리함을 감수해야 하는 이경석이 웃음만 보였다. 교수들이 아무 말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도리어 긍정적이었지만, 세상 일 누구도 모르는 법이다.
‘에휴! 펠로우 계약 때도 꽤 떨렸는데 지금도 마찬가지네.’
어떤 계약이든 책임이 따르는 약속이기에 다르지 않을 것이다.
머릿속이 복잡한 가운데 평소와 다름없는 일과를 끝내고 이사장실로 향했다.
터벅터벅 복도를 걷던 김지훈이 반색을 했다.
정장 차림을 한 박래윤이 편안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맞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기대한 대로 포기하지 않았고, 무난하게 전임이 된 것 같았다.
‘너도 면담했구나. 그럼 그렇지. 네가 그딴 이유로 포기할 리가 없지.’
“래윤아, 얼굴 좋다. 정리됐어?”
“응, 정리했다. 이사장님 만나고 오는 길이야.”
“잘됐다. 전임이야 당연히 됐을 거고, 뭐 특별한 말씀은 없었어?”
편안한 미소에 씁쓸한 기운이 서렸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사표 내고 오는 길이야. 고민이 많았는데, 어제 또 애먼 말이 나와서 들이받았거든. 한바탕 하고 깨끗하게 정리하니까 마음은 편하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얼굴 펴, 인마. 내가 괜찮은데 네가 왜 그래? 이사장님이 극구 만류해 주셔서 고맙더라. 지난 2년이 허송세월은 아니었나 봐. 지훈아, 고생해라. 난 마음 편한 곳으로 간다.”
박래윤이 손을 휘휘 흔들며 사라졌다. 뒷모습이 쓸쓸하면서도 개운해 보였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병원을 그만둔 상황인데 개운해 보이다니, 마음고생이 생각 이상으로 심했던 모양이었다.
김지훈이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일 년에 몇 번 보지 못했지만 예전 경험 때문인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전도유망한 젊은 의사의 앞이 이렇게 꺾이다니 화가 날 지경이었다.
많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후우!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
능력이 있어도 원하는 대로 굴러가지 않는 것이 현실이었다. 스승의 말이 다시 생각났다. 장래를 위해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곰곰이 되씹었다.
돈, 명성, 명예, 안정.
길가에 널린 돌멩이 아니다.
솔직히 내버려도 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잠시 후, 먼저 들어갔던 신현수가 나왔다.
“지훈아, 나 전임 됐다.”
특유의 냉정함이 슬쩍 사라졌다. 마음 졸일 일이 없을 텐데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재단 이사장 아들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의사로서의 자신의 능력을 정정당당하게 인정받고 싶어 했고, 결국 원하는 바를 이뤘기 때문이었다.
“축하해. 현수야, 혹시 래윤이 봤어?”
“봤어. 마음 같아서는 확 뒤집어엎고 싶은데 내가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사장님께도 쉬운 일이 아닌가 봐. 우리는 그러지 말자. 교수님들처럼 후배들에게 떳떳한 선배 되자.”
멋진 말이다.
그렇게 많은 문제를 겪고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이해가 엇갈리기 때문일 것이다. 시스템이나 제도만으로 부족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사람으로 인한 문제 사람이 푸는 수밖에 없을지도 몰랐다.
‘너 정말 많이 변했다.’
뒤이어 이경석이 나왔다. 힘차게 주먹을 휘두르며 눈가에 힘을 주었다.
열심히 노력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뤘기에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자격이 있었다.
이경석도 박래윤을 알고 있지만 차이가 꽤 나는 데다 다른 과 후배다.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형, 축하해요.”
“고맙다. 1차 면담을 했는데도 도장 찍을 때 손이 떨리네. 너희들 앞에서 이런 모습 보이면 안 되는데 말이야.”
“그러게요. 떨 사람이 떨어야죠.”
밝게 웃으며 미소를 보인 김지훈이 넥타이를 고쳐 맸다. 이경석이 걱정할 이유가 없다는 듯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은근히 싱숭생숭해진 속도 모르고 말이다.
“김지훈 선생님, 들어오세요.”
가볍게 헛기침을 하며 긴장을 푼 김지훈이 신동철 이사장과 마주 앉았다. 윤재철이 수북하게 쌓인 서류 중 하나를 빼며 힐끗 시선을 주었다.
김지훈에 대한 평가 자료였다.
잠시 기본적인 검토가 이뤄졌다. 이미 교수들과 논의하고 여러 차례 확인한 사안이었다.
그러나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논란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일이 인사 문제였다. 아무리 철저해도 결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신동철 이사장이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예상보다 훨씬 성과가 좋아서 문제라니, 이거 참 곤란하네. 학회 건으로 전국적인 관심을 집중시켰고 스카우트 제의까지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가 제시하는 선에 만족할지 모르겠군.’
여기까지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1기 대장암을 복강경으로 성공했고, 고도 비만도 현수와 첫 시도를 한다고 했나? 조건이 너무 빈약해 보이네.’
펠로우가 절대 우위를 점할 수 없는 자리인데, 김지훈에게만은 그럴 입장이 아니었다. 도리어 곤란함이 더욱 가중됐을 뿐이었다.
그러나 버스 떠난 지 오래였다. 새로운 조건을 다시 제시한다면 애초의 조건이 부족했다는 꼴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김지훈 선생, 그동안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열심히 해 줘서 고마워요. 성과가 적지 않아 김 교수도 생각이 많을 겁니다. 우리가 제시한 조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김지훈이 머릿속에 담아 두었던 조건 두 개를 끄집어냈다.
<신설되는 외과 센터 내 복강경 부분 책임자.
복강경 파트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
전임 강사 1년 근무 후 조교수 보장.
조교수 임용 후 2년간 미국 연수 보장.
실적에 따른 과감한 인센티브.
함께 근무할 펠로우 1인 추천권까지.>
다시 생각해도 어마어마한 조건이었다.
<전임 강사 2년 후 조교수 보장.
외국 연수 1년 보장 및 비용 전액 지원.
수술마다 소정의 인센티브 책정.
지난 2년간 실적에 따른 소정의 추가 인센티브.>
누구나 환영할 만한 조건이었지만 스카우트 조건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뭐가 다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