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97화 (797/1,329)

5화.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은 하나다 Ⅲ (2)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지만 사람의 몸이다. 수술 후 환자가 느껴야 할 실망과 괴로움은 회복 경과마저 위태롭게 만들 것이다.

신중하게 보비로 경계를 지졌다.

켈리로 대장과 후복막 사이를 벌렸다. 미처 주변을 확인하기도 전에 새빨간 피가 흘렀다.

“보비!”

곧바로 지혈이 됐지만 무혈관선을 찾을 수 없는 상황이 초래됐다. 너무 좁은 선이라 주변을 살짝 물들인 것만으로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개복했다면 충분한 시야 속에 그대로 진행해 가며 무혈관선을 찾았겠지만, 손으로 수술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 이미 대비했음에도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되면 첫 박리가 아주 정확하게 들어가야 한다는 말인데, 어떻게 접근해야 하지?’

처음 박리했던 부분보다 조금 더 윗부분에서 다시 시도했다. 기구의 방향과 깊이에 변화를 주었지만 또다시 출혈이 발생했다.

답답한 한숨이 터졌다.

‘여기도 아니면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문제였다.

대장 수술 경험이 많지 않다지만 해부학적 문제일 뿐이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조차 감이 안 잡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개복해야 하는 걸까?

그때 이경석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통상적인 경우 김지훈의 접근은 정확했다. 분명 다른 문제가 있다는 말이었다.

“김 교수, 잠깐만. 박승준 선생님, 저번에 본 케이스 같지 않습니까?”

“나도 그 생각 했어. 김 교수, 우리도 무혈관선을 못 찾아서 굉장히 고생한 적이 있는데, 나중에 보니까 상당히 바깥쪽에 있었어. 접근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 어떨까?”

워낙 좁은 선이다. 불과 몇 밀리미터만 벗어나도 경험 많은 써전조차 헤매기 십상이었다. 매우 드물지만 대장 절제 시 깔끔하게 진행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귀중한 조언이었다.

“그런 경우가 있었군요. 알겠습니다.”

무작정 뒤질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무혈관선이 예상 위치에서 밖으로 벗어나 있다면 하행결장을 따라 세로로 박리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조심스럽게 가로로 겉면을 지졌다. 살짝살짝 벌려 조직을 노출시켰다.

육안으로 구분하기 힘든 선이다. 이경석이 카메라를 바짝 접근시켰다.

하행결장과 후복막 사이 조직이 크게 확대됐다. 수술 팀의 시선이 일제히 화면에 집중됐다. 박승준 교수와 눈빛을 교환한 이경석이 신중하게 한 부분을 가리켰다.

미세하게 색이 다른 부분.

얇은 비닐이 불빛에 반짝이는 것 같은 부분.

확신할 수 없지만 가장 가능성이 높은 부위였다.

김지훈이 신중하게 켈리를 접근시켰다.

무혈관선을 찾지 못하면 복강경으로는 불가능한 수술이다. 기필코 찾아내야 한다.

기구 끝이 조직을 파고들어 가는 내내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사악! 사악!

기구 끝이 사라졌다. 피가 비친다면 끝이다.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초조해지는 순간 거짓말처럼 조직이 쫙 벌어졌다. 그때 투명하고 얇은 막이 무영등 불빛에 반짝 빛났다.

무혈관선이다.

후우!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

가슴을 졸이던 송재덕 교수도 이제야 웃음을 보였다.

‘그래. 박 교수, 경석아, 잘했다. 지훈아, 너도 수술 팀의 의견을 충분히 따라 줘서 고맙다. 한 팀이면 당연히 이래야지. 그래서 매일 피를 보면서도 즐거운 모양이다.’

지금까지 팔짱을 풀지 못하던 이준영 교수가 이제야 팔을 풀며 수술실을 나갔다.

진료할 환자가 있기도 했지만, 김지훈과 수술 팀의 호흡과 능력을 엿보았다. 성공할 것이란 확신이 다가왔다.

입가에 미소가 걸려 있었다.

김지훈의 손이 자연스러우면서도 과감해졌다.

무혈관선만 놓치지 않는다면 출혈은 거의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중간에 놓친다고 해도 정확한 위치를 알고 있기에 충분히 대처할 수 있었다.

켈리와 보비가 끊임없이 움직였다.

슬쩍 비친 피는 쉽게 지혈됐고, 뜻하지 않게 많은 출혈을 보이면 수처로 해결했다. 하행결장이 서서히 후복막에서 떨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수술 부위가 점점 깊숙해지며, 떨어져 나온 하행결장이 시야를 가렸다. 그때마다 이경석이 적절하게 기구를 조작해 충분한 시야를 확보했다.

손이 척척 맞았다.

에스결장과 연결된 부분이 떨어져 나왔다. 반대 방향으로 박리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평행결장까지 접근했다. 불과 몇 센티미터를 남겼을 때 김지훈이 손을 멈췄다.

아무도 의아해하지 않았다. 도리어 잠잠해졌던 긴장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단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구조물이 있기 때문이었다.

평행결장이 하행결장으로 바뀌는 부위는 90도 꺾여 있다. 구조적으로 박리가 더 힘들기도 했지만, 바로 그 부분에서 비장과 단단히 연결돼 있다. 함부로 당기거나 무리하게 조작하면 비장이 찢어질 수밖에 없다.

“카메라!”

이경석이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접근시켰다. 마치 근육에 붙은 인대처럼 강한 조직이 붉은색 비장과 함께 나타났다.

좁은 구역이다. 기구끼리 충돌할 수도 있었다. 다른 손에 잡고 있던 기구는 계획한 대로 아예 배 밖으로 뺐다.

김지훈이 인대처럼 보이는 조직을 잡았다. 살짝 당기자 딱 그만큼 비장이 딸려 왔다.

섬뜩했다.

조작 부위가 너무 좁아 이 과정은 이경석의 도움을 받을 수 없다. 한 손으로 툭툭 불거지는 하행결장을 눌러 시야를 확보하고, 남은 한 손만을 이용해 단단한 연결 조직을 잘라야 한다.

기술적으로 결코 쉽지 않았다. 그간의 경험에서 얻은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야 할 때였다.

김지훈의 눈매가 전에 없이 매서워졌다.

“켈리! 보비!”

켈리 끝을 최대한 벌려 눌렀지만 하행결장이 옆으로 삐져나오며 시야를 가렸다. 개복 시에도 손으로 넓게 눌러야 하는 부위기에 기구로는 역부족이었다.

‘확실히 쉽지 않네.’

한참 동안 씨름한 끝에 간신히 연결 조직 일부를 보비로 잘랐다. 다시 기구를 접근시키려던 김지훈이 흠칫 놀라며 급히 기구를 뺐다.

비장에 고정됐던 하행결장 일부가 풀리며 기구 옆으로 불쑥 뛰쳐나왔다. 하마터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연결 조직을 당길 뻔했다.

불안했다.

“이경석 선생님, 비장 확인합시다.”

다행히 별문제 없었지만 시야가 더 나빠졌다. 이 상태로 진행하면 비장 손상을 피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시야를 확보하든지, 아니면 다른 방안이 필요했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갖가지 문제에 이경석과 박승준 교수가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눈가를 좁히던 김지훈이 고경아를 보았다.

“거즈 세 장만 주세요.”

거즈를 반으로 접어 차곡차곡 하행결장 위에 쌓았다. 기구로 거즈를 누르자 나종진이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거즈로 대장이 눌러지나?’

당연히 기구로 누르는 만큼만 눌린다.

김지훈이 의도한 것은 시야 확보가 아니라 구분이었다. 검붉은 대장이 하얀 거즈로 가려지자 비장과의 연결 구조물이 보다 확연하게 보였다.

‘됐어. 이 정도만 보이면 된다.’

“보비!”

삐이이익! 삐이이익!

날카로운 소리가 이어졌다.

확실하게 구분된다고 수술이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시야 확보와 절제를 혼자 해야 하는 김지훈이 숨소리까지 죽였다. 극도의 긴장 속에 비장이 서서히 아래로 처지기 시작했다.

째깍! 째깍!

시계 소리를 따라 땀이 맺혀 갔다.

어느 순간 비장 전체가 밑으로 살짝 떨어졌다. 마침내 하행결장과의 단단한 연결 조직이 제거된 것이다.

그러나 조금도 안심할 단계가 아니었다. 제거된 연결 조직 밑으로 비장과 이어진 지방조직이 더 남아 있다. 모든 조직을 박리해 내야 하행결장을 자를 수 있다. 수술 부위는 더욱 깊어지고, 기구에 잡힌 지방조직은 언제 찢어질지 몰랐다.

살얼음판을 걸었다. 심각한 출혈이라도 발생하면 대처할 수단이 없다는 생각에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목덜미에 맺혔던 땀이 등줄기를 따라 주루룩 흘렀다.

삐이이익! 삐이이익!

보비 소리가 서늘하기만 했다.

이경석이 이를 악물었다.

감탄을 터트릴 때가 아니었다. 오직 김지훈의 능력에 달린 과정이었지만 언젠가 자신이 해야 할 수술이었다. 복강경을 배우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김지훈처럼 할 수 있을지 도저히 자신할 수 없었다.

‘기구를 어떻게 다루는지, 모든 과정을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 단 하나도 놓치면 안 돼.’

복강경에 관한 한 수준 차이를 절감했다.

‘그동안 김지훈 선생이 어떤 써전인지 모르고 있었네.’

박승준 교수도 심각하기만 했다.

그 순간 보비 소리가 사라졌다. 끊임없이 움직이던 기구도 멈췄다.

마침내 비장이 툭 떨어졌다.

이로써 하행결장을 후복막에서 완전히 들어냈다.

“이경석 선생님, 출혈 부위 있는지 확인하세요.”

비장 쪽으로 카메라를 접근시키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퍼스트의 도움도 없이 비장 주변을 박리해 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의미 있는 출혈도 보이지 않았다.

이경석이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감탄이 아니라 아예 충격이었다.

‘이렇게 차이가 났었나? 담낭절제술 몇 번 해 본 건 시작에 불과했는데 자만하다니, 웃음도 안 나오네.’

“없는 것 같죠? 마취과, 5분만 쉬겠습니다.”

체력 하면 김지훈인데 수술대를 잡고 꼼짝도 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쉬운 과정은 단 하나도 없었다. 얼마나 긴장된 상태에서 수술을 진행했는지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다.

잠깐의 휴식과 차가운 우유로 기운을 차린 김지훈이 어깨를 벌렸다. 우두둑 뼈마디 부딪치는 소리가 똑똑하게 들렸다.

다시 시작이다.

남은 부분은 장간막과 붙은 후복막 박리다. 동시에 수많은 혈관을 찾아 묶어야 한다. 무혈관선도 없다. 어쩌면 진짜 힘든 과정은 지금부터일지도 몰랐다.

온몸에 맺히는 땀이 멈추질 않았다.

입안은 바싹 말라 왔다.

출혈 부위를 수처할 때마다 후복막 깊숙한 부위를 찌를까 봐 섬뜩하기만 했다. 타이를 하고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해도 서늘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삐이익! 삐이익!

“수처! 보비!”

쉬지 않고 진행했지만 아직도 장간막을 박리한 만큼 박리해야 할 부분이 남아 있었다.

힘들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정말 힘들어진다. 오직 수술 부위에만 집중해야 했다.

김지훈은 어느새 노련한 써전이 되어 가고 있었다. 단 한시도 적절한 긴장과 고도의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몸에 밴 것처럼 자연스럽게 체력까지 배분했다.

어려움과 난관을 하나하나 헤쳐 나갔다. 드디어 동맥을 묶은 부위 근처에 도달했다. 언제 어느 부분에서 혈관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끝까지 긴장과 집중을 유지할 뿐이다!

조금씩 마지막 부분을 향해 나아갔다. 툭툭 떨리며 동맥 끝을 단단히 물고 있는 클립이 기구와 맞닿았다. 날카로운 보비 소리가 이어졌다.

마침내 장간막이 완전히 떨어져 나왔다.

평행결장, 하행결장, 에스결장이 한 줄기로 이어진 채 자유롭게 움직였다.

대장을 꺼내 자르고 이으면 후복막 일부를 덮어 더 이상 볼 수 없다.

꼼꼼하고 세심하게 수술 부위를 확인했다.

“이경석 선생님, 개복해도 되겠죠?”

“문제없을 것 같아.”

상복부 일부를 절개한 후 조심스럽게 대장을 배 밖으로 꺼냈다. 암 발생 부위를 중심으로 절제 위치를 잡고 잘랐다. 에스결장과 평행결장만 남았다.

조기 대장암이 아니기에 암세포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송진우 선생이나 강병옥 선생 들어왔나요?”

강병옥이 한발 앞서 얼굴을 내밀었다.

“들어와 있습니다.”

“조직 검사 빨리 확인해서 연락해.”

대장과 장간막 절제면 곳곳에서 조직 일부를 떼어 냈다. 1기 대장암이라고 해도 육안으로는 결코 안심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검체를 받아 든 강병옥이 재빨리 임상병리과로 달렸다. 무슨 이유인지 얼굴이 벌게진 송진우가 뒤를 따르고 있었다. 수술실에서 기다려도 누구 한명 타박할 사람이 없는데 말이다.

결과가 나올 때까지 수술 중지다.

이제야 김지훈이 목을 휘휘 돌리며 뻐근한 몸을 풀었다. 수술 팀도 각자 피로를 풀었고, 고경아는 동글뱅이 의자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프리(Free) 나오겠죠?”

“1긴데 당연하지. 임파선 비대도 안 보였잖아.”

의외의 상황은 절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 믿었지만 예외는 항상 존재한다. 막상 복강경으로 해야 하는 모든 과정이 끝나자 도리어 걱정이 앞섰다.

띠! 띠! 띠! 띠! 띠!

나직한 박동 소리만 들렸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말은 안 했지만 김지훈만큼 조직 검사 결과가 불안한 모양이었다.

은근히 초조한 시간이 지났다.

‘결과가 나올 시간이 됐는데.’

그때 수술실 전화벨이 울렸다. 마음을 졸이던 수술 팀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마취과 간호사가 급히 전화를 받았다. 짧은 순간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선생님, 프리래요.”

마지막 걱정이자 불안이 사라졌다.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수술 내내 유지했던 긴장과 집중을 잃지 않는다면 환자의 웃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진행합시다.”

김지훈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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