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96화 (796/1,329)

5화.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은 하나다 Ⅲ (1)

영원한 안식처는 고경아다.

과일 한 접시 앞에 놓고 두런두런 속에 있는 말을 꺼내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포근해졌다.

앞으로 태어날 아이, 스승의 말, 진로 문제부터 고경아의 근무까지 서로 나누어야 할 말이 태산이었다.

“스승님께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지훈 씨도 이럴 때 보면 참 어린 것 같아요. 요즘 흔히 볼 수 없는 스승님이시고 제자잖아요. 아빠가 딸 생각하는 거하고 똑같지 않겠어요?”

“그럼 조건 좋은 데로 가라는 말씀이란 말이에요?”

“나중에 딸 시집보낼 때 돈만 많으면 무조건 좋다고 할 거예요? 우리 아빠가 그랬으면 지훈 씨 나하고 결혼도 못했어요. 선 자리가 다 부잣집…….”

고경아가 슬쩍 김지훈 눈치를 보았다.

부부 사이에 선 봤다는 말 나오면 십중팔구 싸움 난다. 시치미를 뚝 떼며 때론 무겁고 진지하게, 때론 가볍게 분위기를 이어 갔다.

‘스승님께서 날 자식같이 대하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지. 무엇을 보라고 하신 걸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김지훈이 갑자기 고경아의 손을 꼭 잡았다.

“경아 씨 없었으면 나 어떻게 살았을까요?”

“살긴 어떻게 살아요? 복인 줄 알아요.”

문득 결혼한 지 2년도 넘었다는 사실이 다가왔다.

결혼 초에는 각자 일에 바빠, 혹은 부부 사이에 나눠야 할 말이 무엇인지 제대로 몰랐었던 것 같았다. 어쩌면 감정에만 충실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도 부족한 것투성이겠지만 점점 변해 가는 관계가 부부 사이인 모양이다.

결혼하고도 처녀 총각 부르짖다 보면 분란 피할 수 없다. 한 여자와 한 남자에서 아내와 남편, 그리고 엄마와 아빠가 되며 하나씩 하나씩 바뀌어야 할 것이다.

“경아 씨, 병원 근무 힘들면 언제든 편하게 결정해요. 난 언제나 경아 씨 편이에요.”

“나도 지훈 씨 결정에 따를게요. 우리 서로 믿고 의지하면서 항상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김지훈이 활짝 웃었다.

“어떤 결정을 해도요?”

“그럼요. 우리 남편 똑똑하잖아요.”

“내 귀도 똑똑하니까 다신 그런 소리 말아요.”

“무슨 소리예요?”

“세상에 부잣집이 많긴 하죠.”

“지훈 씨 만나느라 나갈 시간도 없었고, 생각도 없었어요.”

고경아가 배시시 웃으며 쪽! 입술을 맞췄다.

은근히 서운했던 마음이 싹 사라졌다.

세상사 모든 일을 딱 부러지게 잘할 수는 없다. 스스로 중심을 잡되, 남의 말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특히 아내 말, 즉 고경아 말 잘 들으면 최소한 후회할 일은 없을 것이다.

“지훈 씨에게 제일 중요한 게 무얼까요?”

고경아도 고민스러운 모양이었다.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거겠죠.”

마음속의 말을 사랑하는 사람과 나눴다. 딸을 생각하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스승이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아마도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답일 것이다. 설혹 답을 찾지 못해도 책망하지 않을 스승이었다.

‘편하게 생각하자.’

남은 시간, 수술 준비에 모든 힘을 기울일 수 있었다.

한결 개운한 마음으로 월요일 근무를 시작했다.

드디어 1기 대장암 수술을 눈앞에 두었다.

성공하면 한발 또 전진하는 것이다. 실패한다고 해도 시도 자체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조기 대장암보다 더 큰 의미와 더불어 예상되는 수많은 난관에 상당한 긴장이 느껴졌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수술실로 들어갔다. 송재덕 교수까지 들어와 수술실이 비좁을 지경이었다.

같은 병원 식구이기 전에 일반외과 의사에게는 뜨거운 관심이 수술일 수밖에 없었다.

“경석아, 박 교수, 준비 많이 했지? 잘했다. 잘했어. 우리 떨지 말고 잘하자. 지훈아, 교수야, 우리끼리 잘할 수 있는데 넌 왜 들어왔니? 왜?”

“예? 제가 집도합니다.”

“그렇구나. 라파로 대장 하기로 결정했구나. 좋다, 좋아. 에스결장이나 하행결장이나 그게 그거지, 뭐. 음! 후복막하고 동맥이 문제다, 문제. 그래도 라파로 대장한테는 쉽지? 그래. 쉽다, 쉬워. 천천히 하자, 천천히.”

어려운 수술을 앞둘 때마다 특유의 농담으로 긴장을 풀어 주는 송재덕 교수였다. 수술 팀의 긴장도 완화되는 것 같아 절로 웃음이 나왔다.

흔치 않은 하행결장암이고 복강경으로 시도하기에 에스결장암 수술보다 훨씬 어렵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서 어려움을 안겨 준 후복막 박리는 일종의 도전이 될 것이다.

수술 준비에 여념이 없는 고경아와 잠시 기구를 살폈다. 단 한 번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순서에 맞게 필요한 대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일 참 똑 부러지게 잘했다. 이제는 경력이 쌓인 노련한 간호사였다.

이경석이 긴장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고 간호사, 잘 부탁해요.”

“저도 열심히 어시스트할게요.”

박승준 교수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수술 과정을 그렸고, 나종진은 잔뜩 기대 섞인 얼굴로 수술이 시작되기만 기다렸다.

그 짧은 사이에도 의문 나는 점이나 불안한 구석이 있으면 김지훈에게 묻기 바빴다.

잠시 후, 김진호가 마스크를 잡았다.

김지훈이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시작하기 전에 얼굴은 보이실 줄 알았는데, 결국 안 들어오시네. 정말 내게 모든 것을 맡기시는 건가?’

어려운 수술은 스승과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과 이제는 홀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진행해야 한다는 생각이 충돌했다. 뿌듯하면서도 뭔가 속이 텅 빈 것처럼 아쉬웠다.

“마취 시작합니다.”

다소 어수선하던 수술실이 조용해졌다.

김지훈도 눈가를 굳히며 가볍게 손을 풀었다.

‘이런 팀을 꾸리고도 실패하는 건 말이 안 돼. 내 능력이 부족하면 언제든 달려오실 스승님까지 계신데 떨 거 없어.’

최고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 이상의 수술 팀을 꾸릴 수는 없었다. 서로를 믿고 손을 맞추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 낼 수 있을 것이다.

환자의 몸이 축 늘어졌다.

“마취과, 수술 시작해도 됩니까?”

“예, 시작하세요.”

“메스!”

수술 때마다 주고받는 말과 함께 수술이 시작됐다.

에어가 주입되며 서서히 환자 복부가 부풀어 올랐다. 배꼽 안쪽을 절개해 카메라를 넣은 후 침착하게 배 속을 확인했다. 이준영 교수에게 혹독한 교육을 받은 이경석이 착착 손을 맞췄다.

임파선은 물론 가장 흔하게 원격 전이가 발생하는 간까지 깨끗했다. 암이 발생한 하행결장 주변도 별다른 이상이 보이지 않았다.

“마취과, 예정대로 진행합니다.”

개복보다 시간이 꽤 걸릴 것이란 의미에 김진호가 조용히 마취 상태를 확인했다. 바이탈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한 시간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6시간에서 7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지? 김 교수, 다른 걱정 하지 말고 수술에만 집중해.’

10밀리미터 트로카 3개를 적절한 자리에 삽입했다. 하행결장과 연결된 장간막을 활짝 펴 주변 구조를 확인했다.

기구가 전하는 촉감과 조작감이 좋은 덕인지 한결 수월하게 느껴졌다.

이제 하행결장 동맥을 찾고 묶는 것으로 시작하면 된다. 어떤 수술이든 첫 과정이 가장 중요하지만 복강경이 가진 난이도를 생각하면 필적할 수술이 없었다.

김지훈이 눈가에 바짝 힘을 주었다.

‘경석이 형, 담낭 동맥을 잡을 때와 원칙은 다르지 않습니다. 침착하게 도와주면 됩니다.’

노란 장간막 아래쪽 깊숙한 곳에 동맥이 있을 것이다. 신중하게 해부학적 구조를 살핀 김지훈이 동맥이 있는 부분을 찾아냈다. 대장 수술 경험이 쌓일 대로 쌓인 써전답게 이경석이 확신에 찬 눈빛을 보냈다.

슬쩍 기구를 대자 강한 박동을 따라 기구가 규칙적으로 흔들렸다. 화면을 보던 이경석이 김지훈에게 힐끗 눈길을 주었다.

김지훈의 수술이 담긴 테이프를 수없이 돌려 봤다. 도움이 될까 싶어 학회 발표 리포트가 너덜너덜해지도록 읽었다. 이준영 교수에게 수술을 받으며 모든 신경을 집중해 왔다.

자신감? 어느 정도 생겼다.

복강경 수술 경험? 마찬가지다.

수술 실력? 송재덕 교수가 인정한 손이다. 이준영 교수가 복강경 집도 기회를 주었다는 것은 함께 훌륭히 해낼 수 있다는 무언의 긍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맥 박동을 보는 순간 엄습하는 긴장감을 감출 수 없었다. 이번 수술을 기점으로 다음부터는 직접 집도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비롯된 긴장일 수도 있었다.

‘경석이 형, 너무 긴장하면 수술 진행 못합니다.’

“동맥부터 확보하겠습니다.”

수술 팀에게 가해지는 압력을 해소시킬 필요가 있었다. 최대한 담담한 말투로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이경석은 물론 박승준 교수와 나종진에게도 자신에 찬 눈빛을 보냈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수술은 매번 처음처럼 임해야 한다.

두 번째 수술이라는 사실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알량한 경험을 믿고 방심하면 언제 실패해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대장 파트에게는 복강경 수술을 위한 첫걸음이기도 했다.

더욱 강한 책임감이 느껴졌다.

김지훈이 훅! 긴 숨을 내뱉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새 기구가 손에 착착 감겼다. 자신감과 긴장이 동시에 다가왔다. 가볍게 어깨를 흔들며 동맥이 있는 부위에 집중했다.

“시작합니다. 보비! 켈리!”

삐이익! 삐이익!

하얀 연기와 함께 장간막 일부가 익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을 따라 조직이 박리됐다.

벌떡벌떡 뛰는 동맥이 드러났다.

김지훈의 손이 급격하게 느려졌다. 빨간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모스키토, 보비.”

수없이 보아 온 출혈이었다. 익숙하게 지혈한 후 전면부를 확실하게 확보했다.

조심스럽게 동맥을 젖혔다. 강한 박동에 측면부 박리도 쉽지 않았다.

순간 동맥 후면부를 박리하며 했던 실수가 또렷하게 떠올랐다. 시야를 확실하게 확보하고, 문제가 될 만한 구조물을 피하기 위해 모든 신경을 집중시켰다.

머뭇거리거나 주저하는 것 역시 실수를 유발한다.

툭! 툭!

천천히 전진시키는 기구에 신중함과 과감함이 섞여 있었다. 동맥 밑으로 모스키토가 깊숙하게 들어가자 수술 팀의 긴장이 치솟았다.

김지훈은 오직 화면에만 집중했다. 침착함 속에 자신의 손을 따라 정확하게 움직이는 기구를 믿었다.

어느 순간 후면부를 통과한 모스키토 끝이 은빛으로 반짝였다.

말끔하게 박리된 동맥이 벌떡벌떡 뛰었다.

이제 클립으로 잡으면 된다.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이대로 진행해도 되지만 경석이 형에겐 경험이 필요해.’

미진한 면이 없는지 확인한 김지훈이 조용히 말했다.

“동맥은 확실하게 박리해야 예기치 못한 출혈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이경석 선생님, 클립으로 잡아 보시죠.”

케이스만 적합하다면 차후 집도를 맡아야 할 이경석이다. 집도의에게 손의 감각은 무척 중요하다. 기구를 통해 전해지는 동맥의 느낌을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긴장 속에 박리 과정을 지켜보던 이경석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냥 지나쳐도 아무 말 하지 않을 텐데, 손을 넘긴 김지훈의 마음이 깊게 다가왔다.

기구 하나를 넘겨받아 동맥을 확인하고, 어떤 식으로 박리했는지 철저하게 살폈다. 화면으로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이런 식으로 해야 한단 말이지?’

“클립!”

끼이익! 끼이익! 끼이익!

클립 3개가 동맥을 물었다.

“가위!”

동맥 절단부가 확연하게 보였다. 깔끔하게 박리된 덕에 결코 클립이 빠질 일은 없을 것이다.

수술 팀의 눈에 경이롭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행결장이 서서히 변색되기 시작했다. 이제 다음 과정으로 넘어가야 한다.

에스결장암과는 완전히 다른 식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하행결장과 연결된 장간막의 하부 역시 후복막에 묻혀 있다. 따라서 먼저 하행결장을 후복막에서 들어낸 후 장간막을 절제해야 한다.

김지훈이 신중하게 절제할 대장 부위를 확인했다.

에스결장 상부와 평행결장 마지막 부분을 연결해야 한다. 하행결장만 20센티미터가 넘는다. 연결된 장간막까지 하면 상당히 넓은 부위를 박리해야 한다.

동맥 확보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과정이 될 것이다. 마취 시간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10시를 막 넘어가는 시계와 함께 이준영 교수가 눈에 딱 들어왔다. 팔짱을 낀 채 화면만 보고 있었다.

‘언제 들어오셨지?’

의문도 잠시, 심리적 안정이 다가오며 여러 부담으로 경직됐던 어깨가 풀렸다. 스승이 옆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자신감이 솟구쳤다.

교수들의 시선이 따라붙는 것 같았다.

‘손은 정말 타고났다, 타고났어.’

‘직접 봐도 나무랄 데가 없구나. 기술적인 면은 더 이상 가르칠 게 없겠어. 클립을 넘긴 일도 잘했다.’

스승의 변함없는 모습은 응원이자 힘이었다.

검붉은 색으로 변한 하행결장과 본래의 색을 유지하고 있는 후복막 사이의 경계가 뚜렷하게 보였다.

김지훈이 박리할 첫 부위에 기구를 가져갔다.

“후복막 박리 들어갑니다. 카메라 접근시키고, 박리 부분 확실하게 잡아 주세요.”

이경석의 눈에 강한 긴장이 실렸다.

한 손으로 카메라를 조작하고, 남은 한 손으로 하행결장을 밀어 시야를 확보해 주어야 한다. 과도한 힘을 가하거나 손이 맞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손상을 유발시킬 것이다.

집도의와 퍼스트의 실력과 호흡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김지훈 역시 긴장을 풀지 못했다.

후복막은 언제 보아도 두려운 부위다. 동맥 박리와 다를 게 없는 과정이고, 위험성 또한 똑같이 존재한다.

매 순간 동맥을 박리한다는 생각으로 신중하게 접근하고, 주의해야 했다.

이런 위험을 최대한 피해 하행결장을 분리해 내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바로 혈관이 분포하지 않는 얇디얇은 선의 존재다.

Avascular Line(무혈관선).

마치 두 장의 비닐이 딱 달라붙은 것과 다름없는 부분을 박리해야 한다.

개복해도 쉽게 진행할 수 있는 과정이 아니었다. 만일 그 부분을 벗어난다면 수술 내내 출혈과 싸워야 한다.

결과는 개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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