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은 하나다 Ⅱ (2)
답답하고 초조한 교수들의 마음을 모를 수 없었다. 김지훈이 지금까지 말이 없는 이유 역시 분명했다. 병원을 옮기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이준영 교수 자신도 철석처럼 믿고 있지만 단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제자의 앞길을 막는다면 더 이상 스승이라 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교수들의 의중을 전하는 것은 답이 아니었다. 자칫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만에 하나 고려하지 말아야 할 요인에 결정이 좌우된다면 김지훈에게 후회를 안겨 주는 꼴이 될지도 몰랐다.
‘내게 말하지 않은 것은 옮길 생각이 없다는 말이지만, 교수들 말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어. 절대 안 될 일이야.’
지금도 모두 눈가를 찌푸린 채 은연중 자신들의 생각을 전하고 있었다. 김지훈을 아끼는 마음에서 비롯된 초조함이 분명했다.
결정은 오로지 김지훈의 몫이어야 했다.
“송재덕 선생님, 기다려야 합니다. 이 과장, 신 교수, 기다리자. 어떤 결정을 하든 우리는 격려하고 축하해 주면 되는 거야. 더 좋은 시설에서 지원까지 아끼지 않으면 어디까지 뻗어 나갈지 모르는 놈이 바로 김지훈이잖아.”
말이 무척 길었다. 감정의 기복이 생기면 보이는 모습이었다.
모두들 인정해야 하기에, 김지훈에게 스승이라고 불리는 사람의 말이기에 반박하지 못했다.
답답함을 못 이긴 송재덕 교수가 또 가슴을 쳤다.
“호사다마라더니, 학회가 우리 발목을 잡네. 조건만 따질 놈이 아닌데, 왜 이렇게 불안한지 모르겠다. 준영아, 어떻게 좀 해 보자.”
다른 방법이 있을까?
있다면 남아 달라는 말밖에 할 것이 없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닌 건 아닙니다. 지훈이가 스스로 결정하기 전에 우리가 나설 수는 없습니다.’
이준영 교수의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교수들의 우려와 재촉에 도리어 걱정이 앞섰다.
우직하면서도 누구보다 정이 많은 김지훈이기에 결코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누군가 한마디라도 던지면 고민도 없이 따를 김지훈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존재조차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
스승이기에 절대 용인할 수 없었다.
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김지훈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이밀었다. 양손에 무언가 잔뜩 든 채 주춤거렸다.
“말씀 중이셨네요.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야? 괜찮으니까 들어와.”
“의료기 회사에서 비만 환자 수술 테이프를 구해 왔습니다. 관심 있으실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자기 때문에 심각한 대화가 오가는지도 모르고 수술 테이프라니,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입맛을 다시던 송재덕 교수가 고개를 쭉 뺐다.
“지훈아, 근데 너 손에 든 게 뭐니?”
“예? 아! 이게 그러니까…….”
따뜻하게 데워진 캔 커피 두 개였다.
“하나는 이 교수 것일 테고, 나머지 하나는 누구 거니? 내 거니? 아니야?”
“함께 계신 줄도 모르고 죄송합니다. 그냥 두 개 놓고 가겠습니다. 더 갖고 올까요?”
“아니다. 됐어.”
이준영 교수의 말에 꾸벅 허리를 굽힌 김지훈이 후다닥 사라졌다. 지금도 교수들이 어려운 모양이었다.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는 모습에 이혁민 교수가 웃고 말았다. 커피에 담긴 의미도 짐작할 수 있었다.
“저노마 하는 걸 보면 괜한 걱정 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용히 지켜볼까요?”
“커피 두 개에 무슨? 계약서에 사인할 때까지 마음 놓으면 안 돼. 끝까지 방법을 찾고 최선을 다하자. 최선을.”
마치 김지훈을 잡는 것처럼 캔 커피를 꽉 쥐고 있었다.
그 손에 담긴 마음 때문인지 이준영 교수가 기대하지 못한 말을 했다.
“제가 따로 만나 보겠습니다.”
교수들 모두 반색했다. 김지훈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이준영 교수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속마음을 알았다면 극구 만류했을 것이다.
막 퇴근 준비를 하던 김지훈이 이준영 교수가 찾는다는 연락을 받았다. 서울에 올라온 이후 커피 한 잔 제대로 하지 못했고, 간만에 들고 간 캔 커피도 본의 아니게 뺏겼다.
‘스승님만 생각하면 커피가 꼭 생각나네. 음성에서 스승님과 마셨던 커피 맛이 잊히질 않아서 그런가?’
따뜻한 믹스 커피를 들고 진료실로 향했다.
잠시 고소한 향기 속에 담긴 제자의 마음을 즐기던 이준영 교수가 눈가를 굳혔다.
신동철 이사장이 제시한 조건보다 스카우트 조건이 훨씬 좋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인간적으로 고민이 많을 것이라 여겼다. 내심 먼저 말해 주기를 기다렸지만, 마치 스카우트 제의조차 없었다는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고 앉아 있었다.
끝까지 입을 열 것 같지 않았다.
‘고맙지만 널 위해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구나.’
“김지훈, 요즘 전화 많이 오지?”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숨길 것 없어. 네 인생이 달린 문제야. 후회하지 않도록 고민하고, 또 고민해.”
김지훈이 흠칫 놀라며 꿀꺽 침을 삼켰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구체적인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것을 모를 스승이 아니었다.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이유는 제자를 굳게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스승이 앞에 있는데 지금까지 질질 끌어왔다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답은 이미 가슴속에 있었다.
“마음 정했습니다. 고민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심 기뻐할 줄 알았던, 평소처럼 무덤덤할 줄 알았던 이준영 교수가 고개를 저었다.
누가 봐도 알 정도로.
이준영 교수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스승이란 어떤 존재일까?
스승의 역할은 무엇일까?
김지훈과의 관계는 단순히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맺게 되는 사제지간이 아니었다.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만났고, 가장 힘들었던 시간을 함께 헤쳐 나왔다.
김지훈은 스승처럼 세대를 넘어 존경받는 의사가 될 자질과 품성을 갖췄다. 지금까지 흔들리지 않고 달려왔고, 그 시작점에 막 도달했다.
그런 제자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결코 간단하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세상 무엇보다 더 깊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스승님은 내가 힘들고 어려웠을 때 어떻게 하셨지?’
애정 담긴 조언과 함께 십 년이란 세월을 믿고 기다려 주었다는 사실이 가슴에 와닿았다. 스스로 이겨 내고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을 받았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렇다. 믿음이다.
자신의 곁에 남을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올바른 선택을 할 것이란 믿음이었다.
김지훈은 결코 품 안의 자식이 아니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스스로 결정해야 가진 재능과 노력의 결실을 볼 것이다. 스승으로서, 조언자로서, 후원자로서 지켜보며 응원할 뿐 제자의 인생을 대신 살 수는 없다.
스승이 제자를 보았다.
그리고 결정했다.
“고민할 이유가 왜 없어? 널 위해 반드시 해야 돼.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만 생각해. 네가 선택할 곳은 그걸 충족시켜 주는 병원이야.”
김지훈의 가슴이 턱 막혔다. 생각조차 하지 못한 말이었다.
“설마 다른 병원으로 가도 좋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선택이면 난 얼마든지 환영한다. 나나 교수들 눈치 따위는 절대 보지 마.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사람은 바로 네 자신이고, 네 가족이야.”
김지훈이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함께하자는 말도 필요 없었다. 평소처럼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지켜보며 지나갔으면 이렇게 가슴이 시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입 꾹 다문 채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김지훈을 보던 이준영 교수가 일어났다. 당연한 말이지만 김지훈에게는 냉정한 말이 이어졌다.
“네 인생이다. 우리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어. 어떤 선택을 하든 절대 후회하지 않기를 바란다. 조건이 가장 중요하다면 따라도 좋아. 널 비난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차갑게 식은 커피를 비운 이준영 교수가 터벅터벅 불 꺼진 복도를 따라 퇴근을 했다.
‘이놈의 커피는 식어도 맛있네. 지훈아, 서운해하지 마라. 내 역할은 스승님께서 내게 그러신 것처럼 네 날개를 활짝 펴게 만드는 거야.’
비 온 뒤에 땅이 굳는다고 했다.
스카우트 제의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이어질 수 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치열한 고민 속에 나온 답만이 김지훈을 단단히 붙잡아 줄 것이다.
조용히 스승의 온기가 남아 있는 자리를 보던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리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갑자기 왜 이러시지? 말씀 안 드린 게 서운하셨나? 그러실 스승님이 아닌데, 도대체 뭐지?’
불안한 마음에 눈 둘 곳을 찾지 못하던 김지훈이 진료실을 떠나지 못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괴로워하다 말고 돌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단 한 방울도 남지 않은 커피 잔이 눈에 들어왔다. 남은 한 잔은 손도 대지 못했는데 말이다.
엉뚱하고 비약일지 몰라도, 그 순간 스승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오직 제자에 대한 애정으로 앞날을 걱정할 뿐이었다.
“후회하지 말라고 하셨나?”
가슴이 먹먹해지며 죄송한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먼 훗날, 자격이 생겼을 때 애지중지하며 제자라고 말할 수 있는 후배가 생길 것이다.
사람이기에 다소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어도 참기를 바라며, 평생 자신의 품 안에 있기를 원할 것이다.
그때 스승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과연 제자를 위해 욕심 부리지 않을 수 있을까?
그날 밤, 김지훈이 밤새 뒤척였다.
H 병원에서 던진 바윗돌보다 더 크고 무거운 돌에 제대로 얻어맞았다. 스승이 던진 말이기에 답을 찾을 때까지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했다.
이런 일은 얼마든지 또 벌어질 수 있었다.
그때마다 고민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왜 나는 이 자리에 남으려고 하는 걸까?’
스승은 분명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가장 중요한 것.
그것이 바로 판단 기준의 핵심이었다.
주말 당직이다.
병원과 사람이 바뀌었어도 후배들의 눈빛은 똑같았다. 번쩍번쩍 열망에 차 호시탐탐 집도 기회를 노리는 이혁원과 강병옥에게 시달렸다. 메스를 건넬 때마다 최선을 다해 집중하는 모습에 답답함마저 잊었다.
‘고민은 고민이고, 일은 일이지.’
전공의들이 치러야 할 대가는 불바다였다. 상당히 단련된 이혁원이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어후! 구미에서 수술만 하신 게 아니었네. 강병옥 선생님, 점점 이준영 선생님하고 똑같아지시는 것 같지 않아요? 이젠 눈빛으로도 죽이시네요.”
강병옥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한숨만 푹푹 쉬었다. 며칠 전 송진우의 수술을 보며 받은 충격까지 더해져 말을 잃을 정도였다.
“더 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예? 미쳤어요? 여기서 어떻게 더 타요?”
“진우 수술 못 보셨죠? 구미 가기 전에는 솔직히 제가 더 잘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이제는 그 생각 싹 접었습니다. 어후! 그때 무조건 구미를 갔어야 했는데.”
나종진에게 말은 들었다. 꽤 놀란 표정이었지만 호들갑일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자존심 강한 강병옥의 말에 송진우의 실력이 궁금하면서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하나의 수술이 이어졌고, 무사히 끝났다.
김지훈이 이혁원과 강병옥을 째려보았다. 심혈을 기울여 불길을 날렸는데 오히려 더 달려들었다. 마치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는 얼굴이었다. 단 한 번이라도 경험을 더 쌓을 수 있다면 뭐든지 감수할 수 있다는 눈초리였다.
‘이 자식들이 뭘 잘못 먹었나?’
후배들 점점 무서워진다.
후배 교육 점점 더 어려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더 좋고, 마음 편했다.
일요일 오후, 겸사겸사 회진 돌고 의국에 앉아 잠시 숨을 돌리고 있을 때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얼굴 벌건 놈 옆에서 단발머리가 찰랑거렸다.
‘둘이 항상 붙어 다니네. 뭔가 있어! 자식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전공의 발표 나서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2월부터 픽스턴 돌게 됐습니다.”
“그래? 축하한다. 평일에 와야지, 일요일인데 쉬지 않고 인사는 왜 왔어?”
“헤헤! 선생님 계신다고 해서요.”
“진우야, 병옥아, 커피 마시자.”
커피는 항상 가장 아랫사람 몫이다.
“선생님, 제가 탈게요.”
오하석이 재빨리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모두 둘러앉아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다.
고소한 커피 향기가 흐르는 가운데, 오하석이 예외적인 관심과 함께 으스스한 눈길을 동시에 받았다. 이혁원과 강병옥은 생각이 많아 보였고, 송진우는 점점 얼굴이 벌게졌다.
일반외과 최초의 여의사!
그것만으로도 특별한 일이었다.
대개 신임 1년 차가 있는 자리는 엄하고 딱딱하기 마련인데, 이내 다들 유달리 웃고 떠들었다. 찰랑이는 단발머리와 특유의 웃음을 터트리는 홍일점의 위력이었다.
그뿐일까? 남녀를 떠나 선후배 간의 끈끈한 유대 관계 때문일 것이다.
이런 날, 후배들을 위해 못할 일이 없었다. 고경아에게 전화해 저녁 식사 허락을 받았다.
김치찌개에 계란 프라이지만 항상 배고픈 전공의에겐 진수성찬이다. 외과 전공의답게 숟갈 몇 번에 밥 한 그릇이 뚝딱 사라졌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언제나 그렇듯 이럴 때 환자가 온다. 우르르 일어나는 사이에 송진우도 있었다. 밥 먹은 값을 해야 한다는 얼굴이었다. 오하석은 아직 완벽하게 적응되지 않았다. 반도 더 남은 밥그릇을 안타깝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강병옥이 집도했다. 송진우의 눈이 번쩍이고, 오하석은 눈을 크게 뜬 채 과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퍼스트를 서는 김지훈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오프인 놈들이! 저런 열정은 항상 즐거워.’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힘찼다.
신동철 이사장이 제안한 조건을 떠올린 김지훈이 씨익 웃었다. 스승의 말속에 숨은 의미가 무엇인지 확실한 가닥이 잡혀 가는 느낌이었다.
따스해지는 가슴에 매서운 겨울 막바지 바람이 한발 비켜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