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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 써전-794화 (794/1,329)

4화.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은 하나다 Ⅱ (1)

기구만 만지작거리며 여전히 말이 없었다. 마음에 든다는 것인지, 안 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확실히 탐이 나는 건 사실인데…….’

더욱 애가 탄 강호승이 표정 관리를 하면서도 냉수 한 컵을 단번에 마셨다.

미안한 일이지만 기회였다. 김지훈의 눈이 살짝 빛났다.

“괜찮긴 한데 문제가 있네. 현수야, 공식 경로를 거쳐야 하면 수술하기 전에 기구를 들여올 수가 없잖아? 우리만이 아니라 간호사들도 기구를 정확하게 알아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낯설면 수술만이 아니라 어시스트도 힘들지 않겠어?”

김지훈도 나이 먹었고, 사회 경험까지 어느 정도 쌓였다. 구미 과장 시절에 실력만 쌓은 것이 아니었다. 말은 신현수에게 하면서 눈길은 강호승에게 향해 있었다.

무엇인가 바라는 눈치였다.

왠지 능글맞았다.

신현수와 지동훈 교수마저 시치미를 뚝 떼고 있었다. 비만은 아직 수술 팀조차 구성하지 못했는데,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었다.

‘젊은 사람들인데 만만치 않네.’

강호승이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이런 일에 관한 한 강호승은 껌값일 정도로 경험이 풍부했고, 영업이 어떤 것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때론 손해를 보더라도 투자가 필요한 때가 있고, 그것이 더 큰 이익으로 다가오는 법이었다.

숨도 쉬지 않고 바로 답을 했다.

“어이쿠!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오늘 가져온 기구 바로 사용하시면 됩니다. 선생님들과 환자를 위한 일이라면 이 정도 출혈은 제가 당연히 감수해야죠.”

“출혈은 우리가 상당히 무서워하는 건데, 그래도 될까요?”

“당연한 일입니다. 대신…….”

세상에 공짜는 없다. 받은 게 있으면 반드시 주어야 할 것이 있다.

김지훈이 이제야 신현수를 보았다.

“현수야, 아무래도 네가 말하기 가장 편하겠지? 이준영 선생님께는 내가 말씀드릴 테니까 넌 병원 쪽에 힘 좀 써 줘. 강 사장님, 일이 잘되면 기구 공급이나 수리까지 확실하게 책임지셔야 합니다.”

어디서 배웠는지 수완이 제법이다.

신현수가 호의적인 웃음을 보이자, 이미 이사장 아들이라는 인적 사항까지 모두 파악한 강호승이 호언했다.

“그런 문제는 절대 걱정하지 마십시오. 병원에 손해 끼치지 않도록 제가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

“저도 병원 관계자 분들에게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자! 아주 원만한 방법으로 기구 걱정은 덜었다.

문제는 수술 팀의 능력이었다.

강호승이 자리를 뜨자마자 머리를 맞댔다.

고도 비만 수술에 필요한 기구를 확보했다는 사실 때문인지 신현수의 목소리가 들떴다.

강한 흥분과 의욕이 느껴졌다. 모두들 기구가 손에 익도록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김지훈에게는 따끔한 자극이었다.

‘이럴 때 도리어 기분 좋아지면서 가슴까지 팍팍 뛰네. 그나저나 현수 저 자식 가슴에 불이 붙은 것 같은데, 이러다 라파로 다 빼앗기는 거 아냐?’

누군가 바짝 뒤를 쫓으면 불안하기 마련인데,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희한한 일이었다.

지동훈 교수만이 아니라 박승준 교수까지 선배면서 동료라는 생각이 강하게 다가왔다.

1기 대장암과 고도 비만.

결코 쉽지 않은 수술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하나의 수술 팀으로 뭉쳤다.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면 실패보다는 성공 확률이 훨씬 높아질 것이다.

고도 비만까지 복강경 수술로 결정되자 모든 교수들이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신현수가 집도한다는 사실에 은근히 놀라면서도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신기동 교수마저 김지훈을 보는 눈빛에 애정을 싣고 있었다.

마치 잘 결정했다는 듯.

이것이 바로 함께 가야 할 동료라는 듯.

이준영 교수는?

옆에 벼락이 떨어져도 항상 똑같을 스승이었다.

“준비 잘되고 있어?”

“예.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대장암 말고 고도 비만.”

“비만 환자요? 저도 참여……. 어?”

앗! 그러고 보니 신현수가 수술 팀을 짠다.

세컨이나 써드를 서겠다는 말은 했지만 확실한 답은 못 들었다. 순간 대장암 수술 팀에 신현수가 빠졌다는 사실까지 마음에 걸렸다.

‘설마 날 빼놓지는 않겠지? 일부러 뺀 거 아니다.’

졸지에 나종진과 똑같은 처지가 됐다. 말하다 말고 갑자기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전전긍긍하는 모습에 이준영 교수의 입가가 슬쩍 말렸다.

‘아직 수술 팀 결정이 안 된 거야? 그런 욕심은 얼마든지 부려도 좋아. 현수도 함께 수술하기를 원할 거다.’

“사소한 실수도 큰 문제를 만들 수 있는 수술이야. 수술 스케줄 잘 조정해서 고도 비만 꼭 들어가.”

스승의 무뚝뚝한 격려이자 응원이었다.

“날짜 정해지면 스케줄 조정하겠습니다. 그전에 수술 팀이 결정돼야 하는데. 현수야, 정했어?”

김지훈이 슬쩍 신현수에게 눈길을 주며 이준영 교수 곁에 바짝 붙었다. 마치 강력한 후원자가 있다는 것처럼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신현수의 눈이 냉정했다.

‘김지훈, 너도 속 좀 끓여 봐.’

“아직 못 정했어. 다들 라파로에 관심이 많은데 진지하게 고민해야지. 우리 파트 환자니까 지동훈 선생님하고 상의해서 결정할게.”

절로 고개가 푹 떨어졌다.

사실 대장암 수술 팀을 짤 때 애써 신현수의 간절한 눈빛을 피했다. 절대 고의는 아니었지만 언급도 하지 않아 서운했을 것이다.

입장이 완전히 역전됐다. 김지훈은 곁눈질하며 눈치를 보고, 신현수는 표정조차 변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참여할 구실을 마련해야 했다.

“선생님, 새로 들어온 기구는 보셨습니까? 제가 보기엔 기존 기구보다 촉감이나 조작감이 다 괜찮습니다. 다만 익숙하지 않으면 도리어 방해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경험도 많이 필요할 것 같고요.”

익숙함과 경험이라는 단어에 힘 팍팍 주었다.

“기구가 수술하는 건 아니지.”

역시 스승이다. 제자에게 확실한 힘을 실어 주었는데, 돌연 송재덕 교수의 목소리가 훅 치고 들어왔다.

“지훈아, 교수야, 아까 수술 방에서 기구만 만진 사람이다. 이왕이면 이 교수도 초청해. 이 교수, 이제는 속닥속닥하면서 지들끼리 수술해서 서운하지? 그치? 에휴! 사실 경석이도 날 따돌려. 박 교수하고만 놀아요. 나쁜 놈. 힘들게 키워 놨더니 은혜를 몰라, 은혜를. 지훈아, 교수야, 나 힘들다. 그러니까 라파로 대장 하자. 라파로 대장.”

이경석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원장님, 제가 언제 따돌렸다고 그러세요.”

“이것 봐, 이거. 경석이 너 요새 내가 마음에 안 들면 꼭 원장님이라고 부르더라. 내가 뭘 믿고 전임시켜? 곧 1차 면담 있을 텐데, 나 아직 안 죽었다. 안 죽었어.”

“선생님, 왜 이러세요?”

“선생님? 원장님이 아니고? 나 원장 맞다. 나 원장이야.”

손을 휘휘 저으며 한 발 옆으로 비켜섰다.

“어떻게 제가 선생님 은혜를 모를 리가 있습니까?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선생님!”

이경석이 아양을 떨며 바짝 붙었다.

“왜 이래? 왜? 징그럽다, 징그러워. 전임이 무섭긴 무섭구나. 하긴 펠로우 2년이 아깝지. 경석이 넌 나이도 많은데 어떻게 하니. 아깝다. 큰일 났다, 큰일.”

이준영 교수마저 웃음기를 보였다.

문제는 대화가 산으로 갔다는 것이었다.

“현수야, 누구랑 할지 어느 정도 생각은 하고 있지?”

슬쩍 의향을 떠봤지만 돌아온 것은 도무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였다. 조바심이 난 김지훈이 자리가 끝날 때까지 비위를 맞추려 애썼다.

다들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기에 농담만으로도 즐거운 시간이었다.

신기동 교수에게 살벌하게 타고, 별 보며 퇴근하는 일마저 행복했다.

“대장암 라파로로 한다고 혈관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을 생각이야? 연수는 내가 아니라 네가 가야겠다. 대장암 연수.”

이런 소리 듣고도 행복할까?

비수가 날 때마다 바짝 엎드려 울긴 했다.

신현수 눈치 보는 일도 별로 행복하진 않다.

그사이에도 잊을 만하면 다른 병원 과장들에게 전화가 왔다. 마음 확실히 정했고, 거절할 수 있는 곳은 다 거절했다. 문제는 H 병원이었다. 과장만이 아니라 진충기까지 수시로 연락했다.

(김 교수님, 다른 거 다 떠나서 젊은 사람끼리 술 한잔합시다.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인간적으로 가까워진다면야 거절할 이유가 없었지만 목적은 분명했다. 미안하고 곤란한 마음에 질질 끌면 오해만 부를 것이다.

“진충기 선생님, 죄송하지만 과장님께 마음만 감사히 받겠다고…….”

(아! 서운하게 왜 이러십니까?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김 교수님과 함께하고 싶은지 아시리라 믿습니다. 다시 전화하겠습니다.)

예의를 차려 말한다는 것이 빌미를 준 모양이었다. 걸쩍지근하게 끝난 통화에 머릿속이 복잡해지긴 했다.

‘정말 신경 쓰이네. 내가 이러고 있는 걸 스승님이 아시면 환자 볼 시간도 부족한데 어디에 신경 파냐고 타 죽겠지? 휴우! 일단 말씀은 드려 볼까?’

솔직히 마음 한구석에 미련 비슷한 감정이 느껴지긴 했지만 이 정도 일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할 나이가 아니었다.

한동안 고민에 잠겼던 김지훈이 불끈 주먹을 쥐었다.

‘다음번에는 확실하게 말하자.’

거의 99퍼센트 털어 냈다. 남은 것은 의례적 예의일 뿐이었다. 이런 전화를 받을 때마다 은근히 신동철 이사장이 어떤 조건을 제시할지 궁금해졌다.

곧 1차 면담이 있다는 말도 들은 참이었다.

생각보다 날이 빨리 잡혔다.

다음 날, 신동철 이사장과의 면담이 시작됐다. 윤재철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이미 새로 구성된 인사 위원회에서 전임 임명에 대한 1차 결정이 난 상태였다. 구체적인 계약 조건을 제시하거나, 동의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펠로우들에게 짧은 자리였지만 김지훈의 경우는 그럴 수 없었다.

한동안 많은 말이 오고 갔다.

윤재철이 병원 사정과 모든 과 펠로우 전체가 전임이 될 수 없다는 현실적 문제를 거론했다. 정이나 감성에 호소하며 무조건 남아 달라는 말은 일절 꺼내지 않았다.

‘이런 얘기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

조건이 더 궁금해졌다.

신동철 이사장이 마무리를 지었다.

“펠로우 계약할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2년이 흘렀군요. 마음에 들지 모르지만 이번 역시 우리 병원 입장에서 최선을 다한 조건을 마련했습니다. 곧 최종 계약 날짜가 정해질 겁니다. 좋은 결론이 났으면 합니다.”

한 장의 서류가 담긴 봉투를 받았다.

누구나 가장 좋은 조건을 원할 것이다.

내심 기대를 갖고 조건을 확인하던 김지훈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나름 기대한 바가 모두 담겨 있었지만 어마어마한 조건을 제시받은 탓인지 생각이 많아졌다.

‘더 큰 욕심이 나긴 하지만 애초에 생각했던 조건은 다 있네. 전임으로 남지 못하는 펠로우도 있는데 이 정도면 됐어. 조건만 보고 움직였다가는 경아 씨 말처럼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몰라.’

생각과는 달리 아쉬움이 남은 모양이었다.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김지훈의 얼굴이 담담했다.

신동철 이사장과 윤재철이 묘한 콧소리를 냈다.

“어떨 것 같습니까?”

“글쎄요. 공을 넘겼으니 기다려야죠.”

병동으로 돌아온 김지훈이 어깨를 마구 흔들며 눈빛을 굳혔다. 이경석과 함께 대장암 환자를 보는 순간 원하는 바를 이미 얻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수술 아무하고나 못한다.

애를 태우던 신현수도 거들었다.

“지동훈 선생님하고 상의했는데 네가 퍼스트를 서 줬으면 좋겠어. 수요일 잊지 마.”

두말하면 잔소리다.

더 이상 이직 문제로 고민할 때가 아니었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돈과 자리만 보면 당장은 달콤할지 모르지만, 고경아 말대로 언젠가 독이 돼 돌아올 수도 있었다.

‘고민 끝. 이제 지우자.’

결심과는 달리 남은 1퍼센트가 껌딱지처럼 끈적끈적 손끝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김지훈도 욕심을 가진 평범한 사람이기에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미세하게 남은 아쉬움을 본 것일까?

퇴근을 앞둔 교수들이 이준영 교수의 진료실에 모였다. 무슨 일인지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신기동 교수는 초조한 기색까지 보였다.

“이 과장, 어떻게 됐어?”

“이경석은 무난한 조건으로 전임 채용이 결정됐는데, 김지훈이 문제야. 이사장님도 전에 없이 적극적이긴 하시지만 형평성을 따지지 않을 수 없잖아.”

“너무 잘나도 골치 아프네. 다른 병원에서 물밑 작업 들어갔다는 소문 이사장님도 들으셨을 텐데, 과감하게 예외를 두셔야 하는 거 아닌가?”

이혁민 과장이 혀만 찼다.

“병원마다 형편이 다르니까 제시할 수 있는 조건이 다를 수밖에 없잖아.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건 분명한데,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대처를 하지.”

송재덕 교수가 가슴을 쳤다.

“이 과장 말대로 조건을 알아야 할 텐데 문제다, 문제. 쯧! 이 교수, 지훈이는 별말 없어? 하긴 제의 들어왔다고 당장 달려와 말할 놈도 아니지. 준영아, 조건만 보고 병원 옮길 놈이 아니지만 그래도 얘기 좀 해 봐. 불안하지도 않아? 이러다 훌쩍 가 버리면 어떻게 하니? 어째 요즘 지훈이 얼굴색도 어두워진 것 같아.”

얼마나 답답한지 이름까지 불렀다.

스카우트 제의는 조기 대장암이 학회 발표에 들어가는 순간 예견된 일이었다. 대단한 성과인 만큼 결코 호락호락한 조건이 아닐 것이다.

정에 기대 호소할 일이 아니었다. 김지훈에게 의외의 압박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신동철 이사장이 결정한 조건도 다른 병원 제의에 못 미칠 것이 확실해 발등에 불이 되고 말았다.

“이준영 선생님, 그렇게라도 해 보시죠. 대우 차이가 예상 밖으로 상당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욕심일 수 있지만, 지훈이를 어떻게 다른 병원으로 보냅니까? 신동철 이사장님과 윤재철 이사님도 잘 말해 달라고 몇 번이나 강조하셨습니다.”

“이 과장 말이 맞다. 우리 과를 크게 키울 놈이야. 현수, 경석이, 일석이까지 모이면 우리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을 거야. 박 교수도 마음잡았고, 지 교수까지 탄탄하게 허리를 받쳐 주는데 여기서 문제 생기면 안 된다. 이 교수, 기다리는 게 능사가 아니야.”

이준영 교수가 입을 열지 않았다.

결코 무뚝뚝함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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