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레이트 써전-793화 (793/1,329)

3화.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은 하나다 Ⅰ (2)

내과 최양희 교수였다.

목소리가 조금은 다급하게 들렸다.

(김지훈 선생, 미안한데 환자 한 명 봐줘.)

교수가 직접 전화하다니 의아한 일이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응급실에서 본 고도 비만 환자 배가 이상해. 복막염인지, 아닌지 감별 좀 해 줘.)

복막염 초기에는 복부 진찰 소견이 매우 중요하다. 경우에 따라 경험 많은 써전도 놓치는 일이 있는데, 내과 의사에게는 무리일 수도 있었다.

고도 비만이 초래한 또 하나의 문제였다.

급히 병원으로 향하던 김지훈이 눈가를 찌푸렸다.

‘정말 복막염이면 어떻게 하지? 그래서 바이탈이 흔들렸나? 개복은 절대 안 되는데.’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개복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걸음이 급해졌다.

병원에 들어서자 최양희 교수가 직접 앞장섰다. 걱정이 가득했다.

25세 남자 환자, 곽준웅.

1인실에 입원해 있었다.

띠띠띠띠띠!

경제적 형편이 어떤지 모르지만, 입원 중에 바이탈을 체크하는 기구가 필요하다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몹시 괴로운 얼굴을 한 채 간신히 모로 누워 있었다. 통증이 무척 심한 모양이었다.

“환자분, 일반외과 김지훈입니다. 배가 많이 아프세요?”

고개만 끄덕였다. 똑바로 눕는 일조차 통증으로 힘들어했다.

신중하게 복부 진찰을 했다.

복막염에서 나타나는 복부 경직을 느낄 수 없었지만 과도한 뱃살 때문일 수 있었다. 쇠약한 환자일 경우에도 왕왕 보는 일이었다.

장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압통은 상당히 심했지만 반사통이 명확하지 않았다.

의심 소견이 뒤섞여 상당히 애매모호했다.

“김지훈 선생, 어때?”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프리 에어가 떴을지도 모르니까 흉부 촬영하고, CT까지 찍어 보는 게 좋겠습니다.”

환자를 간이침대에 옮기는 것도 힘들어 간호사, 보호자에 김지훈과 최양희 교수까지 힘을 보탰다.

검사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김지훈이 나직한 목소리로 최양희 교수에게 물었다.

“교수님, 저렇게 될 때까지 뭐 했을까요?”

“왜? 환자 탓인 것 같아?”

김지훈이 머리만 긁적였다.

“김지훈 선생, 비만을 초래하는 원인이 뭐야?”

“갑상선 기능 저하증, 뭐 그런 거 아닙니까?”

최양희 교수가 웃었다.

“내과 공부 열심히 안 했구나? 비만의 95퍼센트는 개인적인 문제가 맞지만, 나머지 5퍼센트는 2차 비만이야. 이 환자는 남성 호르몬 결핍에 심각한 우울증이 있어. 갑상선 기능까지 많이 떨어져서 결국 병적 비만이 유발된 거야. 그동안 뭐 했냐고 탓하기 정말 어렵다는 말이지.”

비만을 초래할 수 있는 질환들이 겹치면서 복합적으로 작용한 모양이었다.

“물론 대부분 관리 못한 개인 책임이 커. 하지만 우리는 의사니까 근본 원인과 이유부터 찾는 것이 올바른 접근 방식 아닐까? 심리적인 면까지 무시하면 안 돼. 하여튼 우리나라도 서구화되면서 문제가 되는 비만 환자가 상당히 늘 거야. 라파로 수술도 그만큼 늘지 않겠어?”

나태라는 말로 치부한 것이 미안했다.

“그런 면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잖아. 대부분의 의사도 마찬가지고 뚱뚱한 의사도 별생각 없을걸? 어쨌든 고도 비만은 분명히 질환이야. 그 점을 잊지 말고 난 내과 의사로서, 김지훈 선생은 외과 의사로서 치료에 최선을 다하면 되지 않겠어?”

가슴에 와 닿는 말이었다.

별생각 없었거나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부분이라고 해도, 인간의 질환과 건강을 일부분만 보고 평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문득 복강경에 대한 언급이 떠올랐다.

‘고도 비만도 라파로 적응증이 될 수밖에 없겠네.’

의사가 발전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였다. 과거에 질환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들이 현재, 혹은 미래에는 주요한 질환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교훈이었다.

최양희 교수가 갑자기 몸서리를 쳤다.

“나도 살 좀 빼야 되는데, 이놈의 뱃살 지긋지긋하게 안 빠지네. 운동을 해도 소용이 없어.”

동시에 피식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웃지 마. 방심하면 김지훈 선생도 배불뚝이 된다. 그리고 여자는 남자하고 달라. 가임기 여성은 아랫배에 살이 붙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 몰라? 모르는구나? 공부 좀 해. 외과 의사라도 호르몬 기능 정도는 알아야 할 거 아냐?”

때 아닌 핀잔에 숙제 하나가 떨어졌다.

곤란하던 참에 마침 검사 결과가 나왔다. 프리 에어는 보이지 않았고, 복부 CT도 깨끗했다.

환자를 다시 찾아 복부 진찰을 한 번 더 했다. 방금 전과는 분명히 다른 마음가짐이었다. 그 덕인지 장 경련일 가능성이 높다는 확신이 다가왔다.

“일단 복막염 가능성은 상당히 떨어집니다. 혹시 몰라 내일 아침에 다시 확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증상이 완화된 환자와 걱정 가득했던 보호자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최양희 교수도 마치 가족처럼 좋아했다.

그 모습에 미안하고 답답한 한숨이 터졌다. 환자를 보며 지켜야 할 의사의 관점과 시각을 단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환자분, 죄송합니다.’

복막염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병동을 나서던 김지훈이 급히 주머니를 뒤졌다. 휴대폰이 열심히 몸을 떨고 있었다.

스카우트를 제의한 H 병원 과장이었다.

(김지훈 선생, 쉬는데 방해한 건 아니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다행이네. 다름이 아니고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전화했어. 좋은 소식 주면 더 좋고. 우리 병원도 그렇고, 나나 진충기 선생도 인재를 아끼는 사람이야.)

한동안 통화가 이어졌다.

아직 신동철 이사장과 면담도 하지 못했지만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질질 끌지 말고 확실하게 거절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자 도리였다.

“죄송합니다만, 병원을 옮길 생각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로 치고 들어왔다.

(그럼! 병원 옮기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 급할 것 없어. 천천히 생각해. 이렇게 통화하게 된 것도 인연인데, 오늘 술이나 한잔할까?)

부드러운 말속에 담긴 대선배의 적극적인 공세가 무척 당혹스러웠다. 딱 잘라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오늘은 제가 당직입니다. 죄송합니다. 다음 주 토요일에 전화드리겠습니다.”

(더 빨리 줘도 돼. 교수님들도 이런 조건으로 병원 옮긴다면 환영하실 거야. 그게 스승이잖아. 하하하!)

결국 명확한 답을 하지 못했다. 선배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거부하기 힘든 제의에 미련을 갖고 있는지도 몰랐다.

우유부단한 걸까?

통화를 마친 김지훈이 콧등을 찡그렸다.

‘잊을 만하면 전화를 하시네. 고민 중이라는 표시 정도는 하는 게 예의겠지.’

나름 핑계를 대며 물끄러미 전화를 보던 김지훈이 깜짝 놀랐다. 부재중 전화가 한두 통이 아니었다. 허겁지겁 버튼을 눌렀다.

응급실이 아수라장이었다. 단체 교통사고에, 크고 작은 질병을 가진 환자까지 몰려 침대가 부족할 지경이었다. 인턴, 간호사에 외과 의사들까지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혁원과 강병옥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빤뻬리 의심되는 환자 한 명 있습니다.”

“다른 환자들은 우리 과 문제 없고?”

“예. 현재는 없습니다.”

다행이었다. 피곤하고 힘든 일을 면했기 때문이 아니라, 간이나 비장이 터지는 것보다는 팔다리가 부러지는 편이 훨씬 낫기 때문이었다.

빠르게 한 건의 수술을 마쳤다.

‘역시 언제 봐도 김지훈 선생님 수술은 최고야. 그나저나 라파로는 언제 해 볼 수 있을까?’

‘진우는 칼바람 날렸다는데, 수술 안 주시나?’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이혁원의 눈빛과 수술하고 싶어 죽겠다는 강병옥의 얼굴을 뒤로하고 응급실로 내려갔다. 그사이 많이 해결됐다.

한결 한가해진 분위기에 마음을 놓던 김지훈이 피식 웃고 말았다. 제법 친했던 정형외과 펠로우 박래윤이 피곤에 절은 얼굴로 털썩 몸을 던진 것이다.

어느 과에나 일복 있는 사람 있다. 응급실에서 가장 많은 환자를 보는 과에 열정까지 있다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표정이 뭔가 이상했다.

여전히 몽둥이가 날아다니는 정형외과에서 김대성과 함께 무척 점잖다는 평을 듣는 박래윤이었다. 응급실에서는 물론 가장 예민해지는 수술실에서도 짜증 한번 내지 않아 간호사들에게 상당히 인기 있는 펠로우였다. 당연히 전공의들에게도 상당한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었다.

“오늘 환자 많았어? 꽤 힘들어 보인다.”

“환자? 제기랄! 많이 보면 뭐해?”

평소 안 하던 욕까지 내뱉으며 눈가를 찌푸렸다.

“지훈아, 나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뜬금없는 말에 김지훈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박래윤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후우! 병원 그만둬야 할 것 같다.”

“그만두다니? 두 달만 지나면 전임이야. 너 평생 대학 병원에서 수술하며 살고 싶다고 했잖아. 개업은 체질에 안 맞는다며?”

“그게 내 마음처럼 안 된다. 씨펄! 우리 과 이 교수님하고 최 교수님 둘이 앙숙인 거 알지? 이젠 아예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너희 과가 정말 부럽다.”

언뜻 들은 말이 있었고, 어쩌다 마주치면 그런 느낌을 받긴 했다.

하지만 알력 싸움은 어디에나 있다. 목표를 이루고 싶다면 스스로 헤쳐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금경태, 하성원, 하윤호를 이겨 낸 것처럼.

“얼마나 심한지 모르지만, 네가 그만둔다고 해결돼? 사이가 그렇게 안 좋으면 누군가 한 명은 나가지 않겠어?”

“언제 나갈까? 서로 나한테 줄 잘 서란다. 그래야 전임 달 수 있대. 나 참!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오네. 열심히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별별 더러운 게 다 발목을 잡는다.”

상당히 심각한 상황인 모양이었다.

“과장님도 아셔? 김대성 선생님은?”

“과장님은 나이도 있으시고, 올해로 임기 끝이잖아. 둘 중 한 명이 과장을 맡아야 하는데, 시궁창 싸움을 벌이느라 정신이 없다. 그놈의 줄이 뭔지, 시도 때도 없이 불려 가서 시달려. 대성이 형도 중간에 껴서 어떻게 하질 못해.”

그렇게 경계했던 일이지만, 사실 라인 없는 사람 없다.

과장의 힘이 강하기 위해서는 넓은 인맥이 있어야 한다. 원만한 대인 관계가 필요하다는 말이지만, 개인적인 욕심만 앞세우면 역효과가 날 수밖에 없다.

스승과의 관계, 송재덕 교수의 대장 소리도 라인일 수 있었다. 다만 파벌을 만들거나, 네 편 내 편을 나누는 기준이 되는 순간 반드시 없어져야 할 인맥이 되고 만다.

지탄받아야 마땅한 일이다.

박래윤처럼 일종의 피해자가 발생한다면 더욱더 근절해야 한다.

그러나 펠로우, 혹은 윗사람 눈치를 봐야 하는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김지훈의 경우는 예외라고 해도 무방했고, 현실의 벽은 생각보다 훨씬 높기 때문이었다.

‘편안한 곳이 없네. 두 분 다 실력 인정받고, 때가 되면 과장이 될 텐데 뭐가 또 부족할까? 순서가 문젠가?’

한숨만 나왔다.

동감한다고 침울해하면 기만 꺾일 것이다.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어깨 활짝 폈다.

“더러워도 참아. 전임돼서 안정되면 눈치 덜 봐도 되잖아. 네가 과장 빨리 돼서 파벌이라는 거 싹 없애 버려. 박래윤이 그 정도 능력은 갖고 있잖아. 파이팅!”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박래윤이 잠시 김지훈을 보았다. 금경태, 하윤호, 하성원과의 일을 알고 있었다. 꿋꿋하게 물러서지 않고 싸워 이겨 냈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후우! 너처럼 행동할 수 있는 용기가 내게도 있었으면 좋겠다. 정말 힘들다.’

“자식! 말이라도 고맙다.”

박래윤의 어깨가 축 처졌다.

불끈 쥔 주먹을 힘차게 흔들던 김지훈이 입맛을 다셨다. 생각하면 할수록 입이 썼다. 열정을 갖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젊은 의사가 해야 할 고민이 아니었다.

‘래윤아, 잘 헤쳐 나가길 바란다.’

중도에 이런 일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행동할 박래윤이었다.

문득 동기들이 생각났다.

‘경석이 형이 무조건 1순위네. 현수나 일석이하고도 과장 자리 때문에 싸움이 날까? 분란이 날 것 같으면 신기동 선생님처럼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

먼 훗날 일이지만 지금처럼 서로를 이해하고 신뢰한다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건강한 욕심까지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피 터지게 경쟁해 누군가 먼저 과장 자리를 차지하면 축하의 박수를 보내는 것이 마땅했다.

박래윤의 일로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었다.

다음 날 오전,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스카우트 전화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순간 신경이 곤두섰다. 숨 한 번 돌리고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강호승입니다. 오늘 오후에 시간 되면 병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다행이었다.

“신현수 선생한테 말씀 들으셨죠? 기구는 구하셨나요?”

(예. 신현수 선생님이 대장암 기구를 말씀하셔서 비만에 필요한 기구까지 모두 구했습니다.)

이렇게 좋은 소식이 있을까?

신현수가 신경 썼다는 사실에 기분이 붕 떴다.

‘자식! 별짓을 다 하네.’

고도 비만 환자 수술을 시도하기로 결정한 신현수와 지동훈 교수는 물론, 이경석과 박승준 교수까지 모두 모여 강호승을 만났다.

다소 긴장된 분위기였다.

강호승의 눈가에 살짝 잔주름이 생겼다.

‘두 수술 다 라파로로 확실하게 결정이 난 건가? 웬만한 실력이 아니면 엄두도 내지 못할 수술일 텐데, 이 양반들 모두 그만큼 실력이 있다는 거야? 혹시 구경만 하고 끝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슬쩍 눈치를 본 강호승이 포장도 뜯지 않은 기구들을 내보였다.

5명의 교수가 일제히 뜨거운 관심을 보이자 이내 불안을 털어 내고 신바람을 냈다.

영업의 기본이다.

“비만 환자 위 절제할 기구들을 확보하느라 애먹었습니다. 대장암에 사용하는 기구도 기존에 사용하신 것보다 훨씬 편하실 겁니다.”

기구의 적합성이나 편리성은 수술을 많이 해 본 사람이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다.

모두들 김지훈을 보았다.

고도 비만 환자 위 절제는 김지훈도 경험이 없었지만, 신현수 역시 판단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김지훈이 수술 과정을 그리며 기구를 하나하나 적용시켜 보았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자 강호승이 애를 태웠다. 결코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어느 병원보다 복강경 수술을 많이 하는 데다 대장암과 위 절제까지 하는 마당이었다. 한 번 거래가 시작되고 신뢰가 쌓이면 대형 고객을 잡는 것이다.

“김 교수님, 어떠십니까?”

무슨 이유인지 김지훈이 뜸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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